선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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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3대 대왕
선종 | 宣宗

출생
1049년 10월 9일
고려 개경 개성부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즉위
1083년 12월 6일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선정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1094년 6월 17일 (향년 44세)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연영전 내침[1]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능묘
인릉(仁陵)
재위기간
고려 국원후
1056년 3월 20일 ~ 1083년 12월 6일 (27년)
제13대 대왕
1083년 12월 6일 ~ 1094년 6월 17일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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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증(蒸) / 기(祈) → 운(運)
부모
부왕 문종
모후 인예왕후
형제자매
13남 7녀 중 2남
배우자
정신현비, 사숙왕후
자녀
4남 3녀
종교
불교

계천(繼天)
묘호
선종(宣宗)
시호
관인현순사효대왕
(寬仁顯順思孝大王)[1]
작위
국원후(國原侯)
국원공(國原公)
절일
천원절(天元節)

1. 개요
2. 생애
2.1. 황금기의 지속
2.2. 유교불교의 발전
2.3. 동아시아 강국으로의 성장
2.3.1. 대요 관계
2.3.2. 대송 관계
2.3.3. 대일본 관계
2.4. 붕어
3. 가족관계
4. 태묘 악장
5. 기타



1. 개요[편집]


고려의 제13대 대왕.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고려사》 <선종 세가> -총서- 기준으로는 안성사효대왕(安成思孝大王), <선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으로는 현순관인사효대왕(顯順寬仁思孝大王). 휘는 운(運), 자는 계천(繼天).

고려 문종(제11대)의 차남이다. 아버지가 붕어한 이후 형 순종까지 요절해 버린 어지러운 상황에서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왕 문종의 재주를 닮아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별 탈 없이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북송요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도 시종일관 당당함을 견지하고 동아시아를 주도하는 3대 축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했으며 불교유교의 조화를 도모해서 정치 이념의 균형을 이루었다.

2. 생애[편집]



2.1. 황금기의 지속[편집]


선종의 등극 이전 관작
작위
국원후(國原侯)
봉지인 국원은 옛 고구려의 국원성이었고, 지금은 충청도 충주이다.
국원공(國原公)
후작에서 공작으로 진작
직위
상서령(尙書令)
명예직, 명목상 상서성의 최고위직[2]
중서령(中書令)[3]
상서령에서 승진. 명예직으로 명목상 중서문하성의 최고위직[4]
수직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관직을 받으면 수직을 붙힌다.
관저
공부(公府)
《고려사》<지>에 따르면 고려는 왕자에게 제왕부를,
고려도경》에 따르면 궁을 세워줬다고 한다.[5]
공비
국원공비(國原公妃) 이씨

공빈(公賓) 이씨


幼而聰慧, 及長, 孝敬恭儉, 識量弘遠. 博覽經史, 尤工製述.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장성해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지식과 도량이 넓고 깊었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읽었고 특히 글을 잘 지었다.

고려사》 <선종 세가> -총서- 중에서

형 순종이 1083년에 왕위에 오른지 3개월 만에 붕어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했다. 부왕 문종이 붕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위 기간 내내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며 조부 현종(제 8대)부터 부왕 문종(제 11대)에까지 이어진 고려의 황금기를 이어나갔다. 다만 재위 초반 가뭄, 중간에 한파와 같은 기상 이변이 문제시되었는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것말고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역사서에 기상 이변이 많이 보이는 때가 정변이나 반란 등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나 전쟁 등이 없었을 때와 겹쳐서 기록이 많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2. 유교불교의 발전[편집]


즉위 이듬해인 1084년 정월에 보제사의 승려 정쌍 등이 선종에게 승과에 관하여

"중들을 진사 규정에 준하여 3년에 1차씩 승직에 선발해달라"

고 청했는데 이는 곧 승려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선종은 이들의 청을 수락하여 3년에 1번씩 승과를 치를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사실 승과는 선종 즉위 후가 아니라 제4대 광종 때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진사과와 명경과가 창설될 때 승과 역시 이미 마련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승과는 비정규적이었지만 선종 대에 이르러 드디어 승과가 3년에 1차례씩 시행하는 식년제로 격상되었다.

선종 시대의 특이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문종의 4남이자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본격적인 활약을 보이면서 불교가 크게 흥했다는 점이다. 이미 국가 시스템은 선왕 때인 제11대 문종 시기에 거의 완성된터라 대각국사 의천을 중심으로 불교의 계파인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종교 통합 사업인 천태종 사업을 전면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이는 제도가 완비된 조선 성종 시대 전국 곳곳에 유교 장려 정책을 펼친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 제도를 갖췄으니 사상 통일을 시도한 것으로 실패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왕실이 화엄종과 천태종을 지원한 것과 달리 지방 세력들과 다른 승려들은 귀족 중심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 법상종을 밀어줬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배 계층인 귀족과 불교가 상당 부분 유착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 무신정권기 때 승려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원인도 자신들과 유착 관계에 있던 문벌귀족들이 한순간에 무신 세력에 의해 몰락하면서 자신들의 이권 역시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천태종은 백성들에게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데다 이후 조계종이 떨어져 나가기까지 하는데 결정적으로 의천이 세상을 떠나자 천태종은 쇠락해서 망했다.

是月 王憂勞萬機 頗覺不豫 移御文德殿 命內醫進養性方藥。忽有感 作古風長篇 其末云 藥效得否何敢慮 浮生有始豈無終 唯應愿切修諸善 淨域超昇禮梵雄。王春秋鼎盛 而有此作 見者驚恠。

○ 이 달에 왕이 정무로 인한 과로로 몸의 이상을 느끼고 문덕전으로 처소를 옮긴 다음 내의를 시켜 양성방약(養性方藥)을 바치게 했다. 이때 왕 자신의 소회를 장편 고시로 읊었는데 그 뒷 연은 이러했다.

“약효야 있든 없든 무엇을 걱정하리(藥效得否何敢慮)

뜬 구름 같은 삶, 태어남이 있으니 어찌 죽음이 없으리.(浮生有始豈無終)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많은 선근 쌓아서(唯應愿切修諸善)

서방 정토로 올라가 부처님 뵈오리.(淨域超昇禮梵雄)”

왕의 나이가 한창인데도 이런 시를 지으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고려사》선종 9년 3월 병진일 기사


선종 또한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본인이 아픈 와중에 부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를 쓰기도 했으며, 사탑을 대규모로 건립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켰다. 사탑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한 탓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도 이 부분을 흠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선종이 무조건적으로 불교만 장려한 것은 아니었다. 선종은 국학에 공자의 제자 안회(안자)를 비롯한 72현의 상을 그린 벽화를 그리게 했으며, 72현에 대하여 제사를 올렸다. 절차는 북송의 국자감의 예를 본받고, 복장은 '중국 10철'을 본받았는데 이는 고려 유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이었다. 이로서 유학은 하나의 통치 철학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적 반열로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치세에는 고려가 불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통치 이념인 유교와 조화를 이루며 서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2.3. 동아시아 강국으로의 성장[편집]



2.3.1. 대요 관계[편집]


문화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인 거란, 북송, 여진족, 일본 등 외국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국가의 재정도 탄탄해졌다. 그만큼 국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해 명목상 상국인 거란에 대해서도 밀리지 않고, 시종일관 당당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 증거라 할 만한 사례로 선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가 생일날에 도착하지 못하고 늦게 온 거란 사신을 대놓고 놀렸던 예가 있다. #.

10일. 왕이 친히 순종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요나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 이가급(李可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는데,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 가히 이를 만함)인데 어찌하여 불급(不及. 이르지 못함)이 되었는가?"라고 조롱했다.

고려사》 선종 2년(1085년) 9월 10일 기사


9월 요가 사신을 보내와 생일을 하례하였다.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왔으나 기일에 닿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인데 어찌 불급(不及)했는가?" 하였다.

《동사강목》선종 2년


한편 거란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려 하자 서희 때의 담판을 근거로 무산시키고, 사과의 답례품을 받아내기도 했다.


2.3.2. 대송 관계[편집]


문종대에 북송과 재수교했는데 당시 북송의 황제는 신법을 시행한 신종이었다. 고려의 국력이 급격하게 상승해서 북송과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다.

원우(元祐)[6]

5년 2월 17일에 왕백호(王伯虎) 병(炳)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 예방(禮房) 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7]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하였다.

《동란섭필》(銅蘭涉筆)


송나라가 보내준 선물이 의심스러워서 송나라 사신 앞에서 금•은알을 모조리 다 깨버리는 짓을 저질렀는데 송나라에선 "고려 놈들이 거란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며 끙끙 앓기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우(元祐) 7년(1092년)에 (고려가)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적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 소식이 "맥적(貊狄)[8]

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송나라에)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첫째 돈이 너무 많이 들며, 둘째 백성이 힘들며, 셋째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 넘기고, 넷째 고려가 예의는 고사하고 실리만 챙겨가는데다 송나라의 허점을 탐구하며, 다섯째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아뢰니, 조칙을 내려 금박만을 사서 (고려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나 끝내 《책부원귀》(冊府元龜)[9]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송서》 <외국 열전> -고려-

위의 얘기를 풀어보면, 고려의 사신이 북송에 가서 "책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살께요"라고 했다. 그러자 북송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고려를 굉장히 싫어하던 소동파가 "고려 저 오랑캐 놈들이랑 교역하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저 무식한 놈들이 우리 것을 사가서 똑똑해지면 우리에게 얻는 이익이 뭡니까? 저 새퀴들 달라는 거 절대 주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로 엄청나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북송은 요나라의 성장으로 압박이 심했고, 그 때문에 요나라가 (군사적인 압박이든 정치적인 압박이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려와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송은 고려의 요구를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상황이었고, 위의 사건 때 제대로 대처 못한 것 뿐 아니라 후에 의천대사가 불교를 배우기 위해 북송을 방문했을 때 고려를 싫어했던 소동파는 고려의 왕족이자 스님인 의천대사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 했다.


2.3.3. 대일본 관계[편집]


일본과의 교역은 1084년 이후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1084년 - 일본 축전주(치쿠젠슈, 현 규슈 후쿠오카현 북부) 상인 노부미치가 내항했다.
  • 1087년 - 일본 상인 시게모토와 치카무네가 내항했다. 대마도의 모토히라가 내항했다.


2.4. 붕어[편집]


五月 壬寅 王薨于延英殿內寢 卽日遷殯于宣德殿。壽四十六 在位十一年。 謚曰思孝 廟號宣宗 葬于城東 陵曰仁陵 仁宗十八年 加謚寬仁 高宗四十年 加顯順。

5월 임인일. 왕이 연영전[10]

의 침소에서 훙하자 그 날로 시신을 선덕전(宣德殿)으로 옮겼다. 향년 46세로 11년 동안 재위했다. 시호를 사효(思孝)라 하고, 묘호를 선종(宣宗)이라 했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인릉(仁陵)이라고 했다. 인종 18년에는 관인(寬仁)을, 고종 40년에는 현순(顯順)이라는 시호를 덧붙였다.

번영한 나라를 큰 사변 없이 무난히 이끌어 나가다가 1094년 5월에 붕어.[11] 향년 46세였다.

다만 그가 붕어한 뒤 고려 왕실에는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게 된다. 헌종, 숙종 문서 참조. 선종 본인 역시 책임을 피할 순 없는 것이,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상당한 능력과 재주를 지닌 동생 계림공 왕희가 아닌 자신의 장남이었지만 몸이 병약해 병석 생활이 잦았던 헌종에게 보위를 넘겼고, 그 탓에 후비인 원신궁주 이씨의 오빠 이자의(사숙태후이자겸의 사촌)가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 왕윤을 밀면서 숙종(당시는 수태보 왕희)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3. 가족관계[편집]


선종은 아내왕후 한 명, 비(妃) 한 명, 궁주 한 명, 첩 한 명이 있었다. 슬하에 자식으로 아들 넷, 셋을 두었다. 왕자 한 명은 이름은 물론 모후조차 실전되어 누구의 후손인지 조차 알 수 없다.

  • 제1비: 정신현비 이씨 - 이예의 딸
    • 연화공주(延和公主) → 경화왕후 이씨[12]
  • 제2비: 사숙왕후 이씨 - 이석(李碩)[13]의 딸
    • 헌종
    • 수안택주(遂安宅主)
    • 조졸한 공주
  • 후궁: 원신궁주 이씨 - 이정의 3녀
이름은 실전되었고, 숙종 즉위년인 1095년 10월 8일 어머니인 원신궁주와 형인 한산후와 같이 경원군(慶源郡)으로 유배를 갔다.
  • 미상
    • 왕자
이름은 물론 모후조차 실전되어 누구의 후손인지 조차 알 수 없다.
  • 첩: 만춘(萬春)
《고려사》 제신열전 위계정 편에 따르면 첩으로 만춘(萬春)이 있었으며, 만춘은 선종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저택을 아주 크게 지어 비난받았다고 한다.


4. 태묘 악장[편집]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제16대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선종 왕운의 찬가 제목은 <청녕>(淸寧)이다. 네 글자 운구이다.

당신은 의 인덕과 의 효성, 그 도를 쫓으셨습니다.

한 시대동안 임조(臨朝)하셨으나, 빈천(賓天)하신지 몇년이나 됐는지요.

당신이 남기신 많은 강렬한 유풍(遺風)은 천고(千古)를 채우고 풍부하게 해줍니다.

당신의 가마를 바라보니 여전히 모습이 보이는듯 합니다.

궁정에 악(樂)이 있으니, 그 음(音)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방가(邦家)의 영광은 실로 신(神)[14]

덕분입니다.

궐사(厥祀)를 고쳐 종묘에 고합니다.

영원히 생각하는 제 마음을 보아 흠향하러 오셔서 효도를 받아 주십시오.


예종의 부왕인 숙종은 형 선종의 아들로서 보위를 계승한 헌종을 퇴위시키고, 보위를 차지했다. 고려시대엔 형제 상속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만큼 숙종은 명분상 꿀릴게 없다지만... 영 미묘해 보이는건 어쩔 수 없는 듯. 더군다나 예종은 헌종의 태묘 악장을 만들지 않고 건너뛰었다.


5. 기타[편집]


찬이슬에 가을 바람 불어오니 / 露冷風高秋

이 맑은 밤 달은 밝구나. / 夜淸月華明

피향전은 이제 삼경이 되려는데 / 披香殿裏欲三更

노래 소리 아직도 요란쿠나. / 沸歌聲擾擾

인생은 모두가 허깨비 같으니 / 人生都似幻

부귀영화 탐내지 마라. / 莫貪榮

좋은 술 금잔에 가득부어 / 好將美醁滿金觥

기쁨을 나누는 게 좋으리. / 暢懽情

<하성조사>(賀聖朝詞)

  • 시를 쓰기 좋아했다. 위에 아픈 와중에도 부처님 찾은 시뿐 아니라 선종 6년인 1089년 9월 정축일에 요나라 사신을 맞이한 잔치에서 지은 <하성조사>(賀聖朝詞)가 있다.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에선 '요황'(瑤皇), '만승'(萬乘)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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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07:40:44에 나무위키 선종(고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내침'은 임금이 숙식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고려사》 원문은 '연영전내침'이라 했는데, 연영전이 내침이라는 뜻인지, 연영전 안 혹 근처의 내침이란 뜻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덕종 역시 연영전에서 훙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일정한 숙식공간이 딸려있던 것임은 분명하다.[2] 실직적인 최고위직은 좌우복야[3] 수태사 겸 중서령[4] 실질적인 최고위직은 문하시중[5] 이후 흥성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아들 헌종이 이곳에서 붕어했다[6] 북송 철종의 연호로 철종이 어린 까닭에 원우 연간동안 신종의 어머니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가 수렴청정을 했다.[7] 송 철종 [8] 고려를 비하하는 말.[9] 《책부원귀》라는 책은 《책부원구》라고도 하는데 북송(北宋)의 왕흠약(王欽若), 양억(楊億) 등이 진종의 명을 받들어 1005년에 편집에 착수, 1013년에 완성한 책. 총 1,00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에 편찬되는 《삼국사기》에도 인용되는 서적이다.[10] 만월대 내 전각으로 학문 공부 및 연구를 담당했다. 후 집현전으로 바뀌는 곳이다.[11] 《고려사》는 제후의 예를 따라 선종의 붕어를 '훙'(薨)이라 기술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태묘에 바치는 악장에 '빈천'(賓天)이란 표현을 써 천자의 예를 따랐다.[12] 예종의 제1비[13] 이자연의 삼남[14] 선종을 신격화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