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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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립배경
3. 대학의 설립과정
3.1. 대학의 연혁
3.2. 설립과정의 진통
3.3. 역사적인 개교
4. 대학의 역사인식


1. 개요[편집]


부산대학교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2. 설립배경[편집]


파일:윤인구5.jpg

"이 비참한 현실의 인생에서
또 이 절망적인 암흑속에서 참된 인물을 살려 내려면
하늘을 열어 광명을 저들의 가슴 속으로 던져야 할 것이며,
그리고 장벽을 열어 신선한 공기 속에서 저들을 호흡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윤인구 부산대학교 초대총장의 취임사 중에서 【출처】윤인구 초대총장 프로필

[ youtube 영상] 윤인구 초대총장 다큐멘터리 - 부산대 설립 과정의 '생생한' 역사 (출처 : 부산대 전자공학과 김재호 교수 제작)
윤인구 총장의 취임사중 위 구절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6.25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도의심이 추락되고 미풍양속이 퇴폐함에 따라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암흑 속에서 참된 인물을 살려내려면 빛과 신선한 공기로 장벽을 열어 그들로 하여금 호흡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본래의 덕성'을 되찾아 주는 것이요. ‘교육자에게 부과된 가장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라고 하면서 도의교육에서의 교육자의 사명과 임무에 대해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출처】 윤인구 초대총장 취임사 전문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지 대학교육은 조선의 독립정신 고취가 두려워, 고등교육을 막고 기초적인 교육만을 실시하는 등 철저한 우민화 교육을 시켰다. 또한 우리민족이 세우려는 민립대학 설립을 철저하게 방해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위한 친일지식인을 양성하려는 목적 하에서 1개의 대학(경성제국대학)만을 대학으로 설립허가하고, 조선인들이 반발이 심해지자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를 인가해주는 수준에 그쳤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속에서 조선의 백성들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고,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학교(적산건물)를 재정비하고 신사(神社), 신단(神檀) 등도 철거하였지만 한국인의 몸에 밴 일본식 교육이념은 쉽사리 바꾸기 어려웠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도 전국의 대학설립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그러한 기운 속에서 경상남도는 5~6개의 대학설립기성회를 합쳐서 일본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민족을 위한 조선교육을 재건하기 위해 대학다운 대학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조선미군정청 문교부에 국립대학 설립을 건의하여 경상남도가 주도적으로 국립대학 설립기금 1,000만원을 납입하는 조건으로 문교부로부터 1946년 5월 15일 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1)국립 부산대학교 설립 신청서

조선미군정청 문교부장 좌하

부산의 대학설립에 관한 건

(1) 부산수산전문학교 구내에 하기(下記) 대학의 학과를 병설하여 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주심을 요망하며,

(2) 上記 대학의 설치를 위한 임시적 경비로써 우선, 壹千萬원을 본도(本道)에서 부담하겠사옵고,

(3) 신설을 요망하는 학과는 아래와 같사옵니다.

(ㄱ) 명칭 釜山大學

(ㄴ) 학과 : (a) 인문학부 (사범과, 사회과, 경제과), (b) 수산학부 (전문학교 때와 같은 학과)

(4) 대학 교사(校舍) 및 시설에 관해여는 현 수산전문학교 교사(校舍)를 인문학부가 겸용하기 불가능할 경우에 대처하고자 부산부(釜山府)내에서 대학설치에 적당한 건물(구 부산고등여학교 校舍)을 준비하여 두었나이다.

1946.5.10.

조선미군정청 경상남도 지사 김병규

조선미군정청 경상남도 장관 F. E. Gillette

【해설】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미군이 남한땅에 1945년 9월 4일 진주하고 9월 11일 부터 공식으로 군정을 열고, 그로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2년 11개월 동안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947년 5월 17일 군정법령 제141호에 의하여 미군정청의 명칭을 조선과도정부로 변경하였으므로 조선미군정의 성격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까지의 과도정부의 성격을 지닌다. 반면, 일본천황의 칙령(勅令) 제354호(1910년 9월 30일 제정) 「조선총독부관제」 제4조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일본 지방 정부조직도 개편되었고 조선교육령(칙령 제229호)과 조선총독부령(제29호)에 의거하여 조선반도내 각종 학교와 병원 등이 세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해방이전의 학교는 일본 정부에 속하는 교육기관이고, 해방 이후의 학교는 비록 미군정 하였었지만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과도정부였으므로 우리 민족의 얼과 후진 양성의 뜻이 담긴 주권국가의 교육기관이였다. [1]


(2)국립 부산대학교 설립 인가서

경상남도지사 전(殿)

서기 1946년 5월 10일부의 귀 제안에 의한 釜山의 大學設置에 관하여는 그 후 5월 15일에 貴道 한인 및 미인 양 학무과장과 본 문교부 관계관이 합석하에 하기(下記)와 같이 결정하였음을 이에 회시(回示)함.

(1) 부산에 釜山大學設立하고, 同 大學인문학부, 수산학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현 수산전문학교는 이를 同 大學의 수산학부로 개편하기로 함.(부산수산전문학교 개편의 건)

(2) 同 大學 인문학부에 설치하게 되는 학과의 종류는 대학설립 관계당국자와 도학무당국자와의 협의에 의하여 이를 결정하되 문교부의 승인을 얻어 실시하기로 함.

(3) 釜山大學 設立基金(천만원)의 조달에 관하여는 道당국이 조속히 이를 이행하기로 함. (이하 생략)

단기 4279년 5월 20일 (서기 1946년 5월 20일)

조선미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

조선미군정청 문교부장 Aubrey O. Pittenger

【출처】 부산대학교 50년사 p24 참조

【주석】 이렇게 해서 부산에 신설되는 국립종합대학교의 정식명칭은 "부산대학"으로 확정되고, "인문학부"와 "수산학부"의 두 학부가 개설되었다. 이때의 "학부"라는 것은 오늘날의 한 단과대학(Faculty)으로써 그것은 일본 학제의 한 명칭이었다. 1946년 3월 7일에 공포된 대학령 제2조 후단에는 인문계 학부와 자연계 학부가 병설될 때는 두 개 이상의 학부로써 종합대학교를 구성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대학명칭과 학부칭호는 1946년 6월 19일에 '국립 서울대학교안'이 발표되고, 1946년 8월 22일에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이 공포된 이후부터는 그에 준하여 '국립 부산대학 인문학부'는 '국립부산대학교 인문과대학'으로, '국립 부산대학 수산학부'는 '국립 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으로 개칭되었다. 미군정기의 문교부장은 지금의 교육부장관을 말하며, 이 당시는 조선인 문교부장 1명(유억겸)과 미국인 문교부장 1명(Pittenger) 등 양인(兩人)이 있었다.


대학설립 이전부터 경상남도 학무과장으로 부산대 설립을 주도했고, 학장서리, 학장과 총장에 이르기까지 14년간을 재임했던 윤인구 초대총장(1903~1986)[2]의 행적은 부산대학교의 설립초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부산대학교 설립에는 윤인구 초대 총장의 기여와 헌신에 힘입은 바 컸다. 그는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폭압을 몸으로 경험했고, 자신의 집안은 영남 최고의 가문[3]출처 링크 중 하나로 백산상회 안희제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고,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역할을 담당하여 일제에 감시와 탄압받으면서도 저항했던 집안 환경과 서구대학(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4]과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유학했던 자신의 경험은 부산대학교를 국립대학으로 설립하는 데 일제 식민지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대학을 설립해야 된다는 사고의 바탕이 되었다.

대학설립의 실무를 진두지휘했던 윤인구 초대총장의 교육철학이 대단한 것은 자신이 영국유학을 하면서 "교육과 의료만큼은 시장에 맡기는 것보다는 국가가 책임지는 게 훨씬 낫다"는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받아 부산대학교를 미션스쿨로 만들거나 학교내 신학과목을 개설하여 종교적 색채를 띄게 하지 않았고, 대학교육은 국가가 책임지고 맡아서 운영해야 한다는 교육자로써의 사명감[5]에 의해 해방되자마자 곧바로 설립된 과도정부인 미군정청 문교당국의 국가예산지원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초창기 국립대학 설립재원을 부산시민을 비롯한 지역유지, 각종 종교단체의 기부금으로 모금하여 국가예산으로 헌납한 후 대한민국 문교부에 의해 국립대학으로 설립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해방 후 미군정기에 대학설립이 난립하여 4~5년이 지나도 대학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부산대학이야말로 독자적으로 세운 첫 대학이었다.

"이 대학(부산대학교)은 국제적인 대도시 부산에 있어서 고등교육기관이 부족한 실정에 비추어 해방 후 문교부가 창설한 유일한 국립대학이다. 물론, 그 설립의 동기는 경상남도 관민의 일치협력에 의하여 1,000만원에 상당한 재원을 문교부에 헌납하고 그 설립을 열망한 데에 기인한다. 문교부는 그 설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출처 : 1948년 8월 미군정청이 신정부에 이관한 '사무인계서'(부산대학교 20년사, 1966.5.15.발행, 태화인쇄소, p49 참조)중에서

부산대학교가 문교부로부터 국립대학교로 인가를 받은 것은 1946년 5월 15일이다. 이는 같은 해(1946년) 인가를 받아 개교를 한 대학들 중 국립대학교로서는 최초이다. [6] 따라서, 부산대학교8.15 광복 이후 문교부로부터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은 최초의 국립종합대이다.[7] 출처 링크 출처 링크 출처 링크 【출처】 미군정기 대학승격 및 대학설립 현황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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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인 것입니다."

리차드 위트컴(Richards. Whitcomb) 미의회 청문회에서

【해설】 리차드 위트컴(Richards. Whitcomb) 부산 미군 군수기지사령관은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물자를 풀어 집을 잃은 이재민 30,000명에게 군수물자를 나눠줘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그는 미의회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박수와 함께 많은 구호금까지 받고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파일:위트컴과윤인구.jpg
리차드 위트컴 장군(Richards. Whitcomb, 1894∼1982)[9]은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 부산대가 50만평 부지를 무상 제공받게 도와줬다.

리차드 위트컴 장군을 빼면 현재의 부산대를 상상할 수 없다. 당시 부산 미군 군수기지사령관(준장)으로서 미 군정 주요 인사 중 하나인 위트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과 경상남도 도지사를 설득해 장전캠퍼스 165만㎡(50만 평)를 무상으로 제공토록 해 이 대학이 도약하는 터전을 닦았다. 1946년 9월 부산 남구 대연동에서 국립대학교로 개교한 부산대는 부산수산대와 결별 이후 충무동 등을 전전하다 정착한 부산 서대신동 산자락 판잣집 교사에 인문학부가, 대연동에 수산학부와 대학 예과가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기타 대학과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에 편제되었고, 휴전 이후 1953년 9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종합대학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윤인구 부산대 초대 총장은 1954년 6월 8일 부산대를 찾은 위트컴 장군에게 부산대의 비전을 담은 그림을 보여주며 "부산대의 미래에 투자하라"고 말했다. 위트컴 장군은 흔쾌히 "캠퍼스 조성에 필요한 25만 달러 상당의 건축 자재를 AFAK(대한미군원조처)를 통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산대 김재호 교수는 "지방국립대 총장과 미군 장군의 아름답고 통 큰 '빅딜' " 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10] 【출처】 국제신문 2012.6.18. 기사 참조

그외 당시 전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의 종점이었던 온천장(현재 부산은행 온천동지점 자리)에서 부산대 무지개 문(구정문)까지 도로가 없어 학생들이 통학에 불편을 겪었다. 위트컴 장군의 지시로 미군 제434공병부대가 온천장~부산대 길이1.6㎞의 진입도로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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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54년 장전동 효원캠퍼스 기공식에 첫삽을 뜨는 위트컴 장군


3. 대학의 설립과정[편집]



3.1. 대학의 연혁[편집]


* 1945.12월 경상남도, 문교부와 부산지역 국립대학 설립 논의(설립기금 납부조건으로 문교부장 유억겸으로부터 국립대학 설립 확약[11]

을 받음)

* 1946.4.12. 경상남도, 부산지역 국립종합대학 설립 구상안을 문교부 건의

(학무과장 윤인구와 고문관 에디(Edie) 중위 공동명의로 "부산국립종합대학교 설립안"을 문교부에 건의)

* 1946.4.15. 조선미군정청 유억겸 문교부장, 경상남도의 건의문에 대한 회신 통보

* 1946.4.15. 조선미군정청 문교부 고등교육국 명의로 "경상남도의 건의문"에 대한 지지찬성 의견 공문으로 통보

(문교부 고등교육국 대학교육과 고문관 로커드(Lockard) 소령과 고문관 롤리슨(Rollison) 중위 공동명의 서면)

* 1946.4.30. 부산국립종합대학교 설립안에 대한 문교부 현장조사(문교부 고등교육국 대학교육과 고문관 롤리슨(Rollison)중위 현장조사)

* 1946.5.10. 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인가 신청 (김병규 경남도지사와 미군정청 도장관 질렛트(Gillette)대령 명의로 문교부장 유억겸에게 제출)

* 1946.5.15. 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인가(조선미군정청 韓美 2명의 문교부장(한국인 유억겸, 미국인 피텐저(Pittenger)의 최종결재)

* 1946.5.20. 문교부, 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인가 통보(미군정청 문교부는 대학설립 확정내용을 1946.5.20.자 공문으로 경상남도에 통보)

* 1946. 8월 문교부, 베커(Arthur Lynn Becker) 박사(미시간대학교 물리학)를 '국립부산대학교 총장'[12]

으로 임명

* 1946. 8월 국립부산대학교 인문학부 및 수산학부를 '국립부산대학교 인문과대학'과 '국립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으로 개칭(서울대 설치령에 준함)

* 1946. 9월 국립부산대학교 인문과대학 및 수산과대학 예과 입학식

* 1947. 7월 국립부산대학교 베커 총장 사임 후 본국(미국)으로 돌아감 (종합대학체제로써의 국립부산대학교 사실상 와해)

* 1948. 5월 국립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의 관할이 문교부로부터 과도정부 농사개량원으로 이관됨.

* 1948. 7월 종합대학(국립 부산대학교)의 와해 및 문교부 교명변경 승인 (국립 부산대학국립 부산수산대학의 법적 분리)

('국립부산대학교 인문과대학'은 '국립부산대학', '국립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은 '국립부산수산대학'[13]

으로 변경)

* 1948. 9월 국립부산대학 문리학부, 법학부, 상학부 등 3개 학부 개설 종합대학 와해 후 4년제 대학으로 재출발

* 1949. 1월 제2차 종합대학안 마련(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 부산수산대학을 다시 수산과대학으로 하고, 부산대학을 문리과대학과 상과대학으로 개편하여 모두 3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국립부산대학교 설립안" 마련)

* 1949. 2월 이범석 국무총리, 국무회의에 제의하여 문리과대학,상과대학,수산과대학으로 구성되는 “국립부산대학교 설립안”을 의결

* 1949. 2월 제2차 종합대학안 무산(안호상 문교부장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산수산대학측의 결사적인 반대와 진정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 보류로 종합대 재건안 무산)

* 1949.10월 제3차 종합대학안 무산(안호상 문교부장관, 부산대학을 우선 문리학부,법학부,상학부를 문리대,법대,상대로 승격하여 3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재구성하는 계획안 수립하였으나 교사미확보로 무산)

* 1952. 3.31. 국립부산대학 제1회 졸업식(졸업식에 참석한 백낙준 문교부장관의 종합대 재승격 추진약속)

* 1953. 4. 1. 국립부산대학교(종합대학) 설립안 국무회의 통과

* 1953. 4. 3. 국립부산대학교(종합대학) 설립안 대통령 재가

* 1953. 9.15. 종합대학(부산대학교)으로 다시 승격(국립학교설치령 공포, 문리대·법대·상대·의대·약대·공대 6개 단과대학 및 1개 대학원)

* 1953.11.26.부산대학교 초대총장으로 윤인구 박사 취임



3.2. 설립과정의 진통[편집]


1946년 5월 15일 문교부는 부산수산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종합대학의 1개 단과대학으로 편입시키고, 그와 별도로 인문계대학을 신설하여 인문계 1개 단과대학과 자연계 1개 단과대학 체제의 국립 부산대학교(종합대학) 설립를 인가하자 '부산수산전문학교측'이 수산교육의 전문성과 능률성의 이유를 들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아래는 당시 부산수산전문학교에서 국립 부산대학교(종합대학) 설립안에 대해 반대하는 신문기사들이다.

이에 대해 조선미군정 문교부 당국은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안'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1946년 8월 국립 부산대학교 총장에 베커 박사를 임명하고 1946년 9월 '국립 부산대학교'를 개교시켰다.

경상남도와 문교부는 애초 부산경남지역은 다른 지역들과 달리 수산인력 양성의 수산전문학교외 제대로 된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교양교육을 포함한 전인교육을 담당할 인문계 중심의 대학을 설립하려 했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교사(구 부산공립고등여학교)를 불하받으려던 계획이 어려움에 부딪히자 윤인구 경상남도 학무과장은 에디 고문관과 협의하여 새로이 설립될 국립대학을 기존의 관립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종합대학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즉, 부산수산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킨 다음 신설될 종합대학에 편입시켜 수산학부로 하고, 설립준비중인 인문계 대학을 또 하나의 학부로 병설하려는 구상을 성안하였다. 이것은 설립과정에 있어서 인문계대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합대학을 건설하려던 초기구상이 도중에 기존의 관립전문학교(부산수산전문학교)와 통합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교사(校舍)마련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국립 부산대학교의 종합대학 설립과정이 모두 문교부와 경상남도 윤인구 학무과장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부산수산전문학교 측의 의사(독립한 단과대학으로 발전)를 사실상 배제하였기 때문에 반발이 극심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이기는 하나 먼저 설립된 부산수산전문학교가 새롭게 설립되는 국립 부산대학교(종합대학)의 1개의 단과대학에 편입된다는 것과 대학행정을 담당하는 총장(베커 박사)을 비롯한 주요인사도 문교부와 경상남도에 의해 인문과대학을 중심으로 한 인사였기 때문에 사실상 건물만 제공하고 부산수전이 흡수합병되는 셈이어서 반발이 더 컸다.

(1) 1946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

釜山水專(부산수전)서 綜合大學(종합대학) 반대(反對) 진정(陳情) 【출처】 동아일보1946년 5월 30일 기사 참조

부산수전(釜山水專)에서는 이번에 실시되는 국립(國立) 종합대학(綜合大學) 설립에 대하여

“수산교육은 바다와 싸우는 특수한 정신적 학술적 훈련이 필요하며, 또 현단계의 조선수산의 급속한 발전에는 반드시 실천적이고 진실한 일꾼을 갈망한다. 현재 조선에는 전문정도 이상의 수산교육을 받은 자가 불과 50여명인데 조선에 수산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하며 현 실정이 어떠하며 수산은 직접 체험한 수산인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수전(水專)을 종합대학(綜合大學)의 일부로 편입하는 것을 고려하기 바란다.”

라는 반대성명서를 전국수산대책협의회와 부산수전(釜山水專) 동창회 동학생들이 군정청 문교부장에게 제출하였다.


(2) 1946년 6월 4일 동아일보 기사

조선유일(朝鮮唯一)의 부산수전(釜山水專) 종합대학(綜合大學)에 편입을 반대(反對) 【출처】 동아일보 1946년 6월 4일 기사 참조

부산수산전문학교(釜山水産專門學校)는 이번에 학제변경을 기회로 부산종합대학으로 편입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동교학생들은 물론 교수진 일동은 수전(水專)은 독자적인 학교로 존속시켜 달라고 열열이 대학편입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하여 반대차로 서울에 온 교수단 동창회 대표들은 지난 28일 문교부에 진정서류를 내놓고 교섭하는 한편, 각 방면으로 편입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조선정세로 보아서는 이런 류의 종합대학(綜合大學)도 좋겠지만 수산관계를 전공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단과대학 설립 보다 더 긴급한 것으로 부산수산전문(釜山水産專門)을 종합대학의 일(一) 본과(本科)로 만들려는 것은 지방과 중앙과의 연락이 불충분한 것과 수산에 대하여 일부 이해가 적은 부들만의 막상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편입 반대차로 상경한 동교 대표단과 문교당국의 의견을 들어 새로운 대책강구를 촉구하는 바이다.


(3) 1946년 6월 5일 동아일보 기사

아서 러취(Archer L. Lerch) 미군정장관(미육군 소장), 미군정청 기자단과 문답 - 수산전문 문제 【출처】 동아일보 1946년 6월 5일 기사 참조

[질문]

문교부에서는 부산수산전문학교(釜山水産專門學校)를 신설할 대학에 합병계획을 세운다고 하는데 수산학 전공능률로 보아 독립하여 수산전문학교로 경영하기를 일반은 바라는데 장관 의향은 어떠합니까 ?

[답변]

문교부에서는 이를 합병하는데 있어서 지방인사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계획을 작성제출하라고 지방청에 요구했다. 종합대학(綜合大學)의 일부분으로서 수산전문은 그 부분의 학생들이 장래도움이 될 다른 과목도 배울 수 있고, 대학내 설비를 자유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의의하에서 능률을 더욱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 바이다.

[해설]

문교부에서 부산수산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1개의 단과대학으로 편입시키고, 그와 별도로 인문계대학을 신설하여 인문계 1개 단과대학과 자연계 1개 단과대학 체제의 국립 부산대학교(종합대학) 설립을 인가(1946.5.15.)하자 '부산수산전문학교측'이 수산교육의 전문성과 능률성의 이유를 들어 독립발전하겠다고 반발했으나, 이에 대해서 아서 러취 미군정장관은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안'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결국 미군정 당국의 이와같은 입장에 따라 문교부에서 국립 부산대학교 총장에 베커 박사를 임명하고 1946년 9월 '국립 부산대학교'를 개교시켰다.


(4) 1946년 6월 6일 동아일보 사설 - 부산수전(釜山水專) 문제(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은 전국적인 이슈)【출처】 동아일보 1946년 6월 5일 사설 참조

이번 문교부(文敎部)에서는 학제를 전면적(全面的)으로 변혁(變革)하게 된 기회(機會)에 부산수산전문학교(釜山水産專門學校)를 종합대학(綜合大學)으로 확장하려는 것으로 기존(旣存)의 수산전문학교(水産專門學校)를 그 종합대학(綜合大學)의 일분과(一分科)로서 변개(變改)하기로 방침(方針)이 결정(決定)된 것이다.

이에 대하야 부산수산교직원(釜山水産敎職員)과 재학생(在學生) 그리고 동교동문(同校同門) 동교동창생(同校同窓生)들이 일치결속(一致結束)으로 반대사정(反對事情)을 문교당국(文敎當局)에 제출(提出)하야 그 반대의사(反對意思)를 표시(表示)하게 되었거니와 그들의 반대의사(反對意思)가 결코 종합대학(綜合大學)의 설립(設立)을 부정(否定)하자 함에 있음이 아니라 수산교육(水産敎育)의 특수성(特殊性)으로보아 부산수전(釜山水專)을 단과수산대학(單科水産大學)으로 승격(昇格)하야 그 기구(機構)와 내용(內容)을 충실히 함으로 수산교육(水産敎育)의 실질적(實質的 효율(效率)을 얻도록 하되 문교부(文敎部) 계획(計劃)의 종합대학(綜合大學)은 이와 별개(別個)로 설립(設立)하는 것이 양전(兩全)을 위(爲)하야 조흘 것이라 하는 것이 그 이유(理由)인 것이다.

【해설】 1946년 5월 15일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된 "국립 부산대학교"의 설립문제는 기존 관립 부산수산전문학교를 새롭게 설립되는 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편입하는 문제로 부산수산전문학교측의 반발이 심해지자, 1946년 6월 5일 아서 러취 미군정장관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부산수산전문학교의 분리없이 종합대학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이에 대해 1946년 6월 6일 동아일보가 사설(社說)을 통해 수산교육의 특수성을 고려해 부산수산전문학교를 종합대학과는 별개로 독립된 단과대학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사설이다. 어쨌든 그 당시 국립 부산대학교의 설립문제는 동아일보 사설에 게재될 만큼 교육계의 전국적인 이슈였다. 결국은 부산수전(釜山水專)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립 부산대학교는 인문과대학과 수산과대학(수산전문학교를 단과대학으로 편입) 2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종합대학 체제로 출범하게 된다.


(5) 1946년 6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부산수전(釜山水專) 맹휴 오교수에 철직처분 【출처】 동아일보 1946년 6월 15일 기사 참조

종합대학 반대로 물의가 분분한 부산수산전문학교 교수 김병철, 이방규, 양재목, 유호열 등 6월 1일 철직처분을 당하였는데, 이밖에 양, 전, 맹 세 교수도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동교 학생자치회에서는 이날 학생회를 열고 종합대학의 불합리를 지적하며 전기 교수에 대한 처단의 취소증을 내걸고 11일부터 동맹휴학을 개시하였다.


(6) 1946년 9월 1일 동아일보 기사 (국립 부산대학교(종합대학)의 출범)

신대학제(新大學制) 실시(實施) 국민개학(國民皆學)의 제일보(第一步) 【출처】 동아일보 1946년 9월 1일 기사 참조

(중략)

종대(綜大)는 실현(實現)

그리고, 고등교육에 있어서는 한동안 반대여론으로 말성이 많던 국립서울대학도 드디어 9일부터 개학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경기도 안에 있는 8개 관립 단과전문학교와 치과의전(사립)을 합친 국립서울종합대학과 연희(延禧), 고려(高麗), 이화(梨花)의 세 사립종합대학 이 밖에 15개의 단과대학에는 도합 1만 2천여명의 학도를 이 새나라의 동량이 되는 길을 닦게 되었다.

이 밖에

부산(釜山)에서는 수산전문(水産專門)을 바탕으로 하여 인문과학계통을 종합한 대학이 나타나게 되어 교육조선의 약진상을 여실히 보이고 있다.




3.3. 역사적인 개교[편집]



파일:국립부산대학교개교.jpg

국립부산대학교는 1946년 5월 15일 인문학부(인문과대학), 수산학부(수산과대학)으로 조선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고, 1946년 9월 1일[14]부터 국립부산대학교는 개교하였다. 개교식은 국립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 강당(현 부경대학교)에서 거행되었고 개교식 거행 사진(위 사진 참조)이 남아있으나,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귀환동포를 실은 귀국선이 입항한 부산에 콜레라가 상륙하여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국의 교통망이 마비되고 여행이 금지되는 바람에 신입생들의 입학이 지연되어, 1946년 9월 24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파일:베커박사부산대취임식.jpg

개교식과 같은 날 1946년 8월 임명된 아서 린 베커(Author Lynn Becker) 박사의 총장 취임식도 함께 거행되었다. 베커 총장은 한국에 장기간 거주하였기 때문에[15] 한국말도 제법 잘하였다고 한다. 취임식이 끝났을 때 베커 총장은 한국말로 「국립 부산대학교 만세」를 선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식이 끝난 후 김찬성 부산대 사무국장은 전체 신입생앞에서 학생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머지 않아 광활한 학교 앞바다에 구류양식장이 조성되고 국립부산대학교 수산과대학에는 수천톤급의 실습선이 확보될 것이므로 6년후 졸업기에는 인문과대학, 수산과대학의 모든 학생들이 실습선으로 구미 각국으로 수학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국립부산대학교는 인문과대학과 수산과대학이 대연동 소재 舊부산수산전문학교(현 부경대 캠퍼스)내에서 동거하면서 종합대학으로 함께 출범하게 된 것이다. (참고자료 : 부산수산대학교 50년사, p116 참조)



4. 대학의 역사인식[편집]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 지배기관인 조선총독부가 궁극적으로 조선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설립한 일본의 제국대학이나 관립전문학교를 대한민국 국립대학의 역사나 연혁으로 삼고 나서는 것은 마치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와 연원이 조선총독부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으며, 이는 1945년 우리민족의 해방과 독립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개인자본가들의 손에 의해 설립된 사립대학과는 달리 대한민국 국립대학이라면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즉,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자제와 친일지식인을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식민의 역사를 대학이 수용하는 순간 그들의 설립목적과 정신까지도 면면히 계승된다는 사실을 적어도 국립대학이라면 직시해야만 한다."

"해방 후 일제식민지 교육을 완전히 청산한 새로운 대학의 설립"이라는 '국립부산대학교 설립배경' 중에서

【해설】 조선총독부는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2월 11일 제정·공포)」에 근거하여 발하여진 일본 천황의 칙령 제319호 「조선총독부설치에관한건」에 의해 조선의 강제합병일인 1910년 8월 29일에 설치된 일본정부의 조선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해 설치된 식민지 조선 통치조직(일본정부의 지방조직(직제)에 속함)이며,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관제(朝鮮總督府官制)’와 ‘조선총독부지방관제(朝鮮總督府地方官制)’에 의하여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존속된 일제의 식민통치 및 수탈기관이었음.


(1) 부산대학교는 일제강점기(왜정시대) 일본정부에 의해 설립된 관립대학이나 관립전문학교가 아니다.
(2) 부산대학교는 해방 후 우리나라가 새롭게 세운 최초의 국립대학이다.

부산대학교는 "대한민국 국립대학이 다른 사립대학들의 역사와 같이 해방이전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어 오랜 전통을 갖춘 대학으로 보이기 위해 대학의 역사를 일제강점기 시기로 거슬러 올리는 것"은 대학의 뿌리를 일본으로 내리게 하는 것이므로 몰역사적이라고 보았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본격화하면서 만주사변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학생의 강제징병제까지 실시하며 사지(死地)에 내몰았던 "충량유의(忠良有爲)한 황국신민(皇國臣民) 양성(일제에 충성하는 백성을 키워낸다는 뜻)이라는 교육이념"을 36년간 처절하게 강요받았던 우리민족은 일제의 친일교육 이념과의 단절은 국립대학의 존재이유와도 같은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립대학으로서의 정체성과 정통성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며, 학문에 국경이 없기 때문에 대학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혼동해서도 안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나 통감부하에서 설립된 교육기관의 침략성과 근대성을 떼어내서 근대적 건물, 근대적 시설, 근대적 학문의 기능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주적 근대 학문의 싹을 말살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교육체계의 전진기지 구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교육의 실태】

우리나라에서 식민지교육이 구체적으로 실시된 시기는 1911년 8월 22일 조선교육령(칙령 제229호) 제정· 공포되면서부터 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4차례에 걸친 조선교육령의 제․개정을 통하여 교육정책을 바꾸어 가면서 한반도를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당시 학교나 관공서의 모든 행사는, ‘저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마음을 합해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라는 황국신민의 맹세를 낭독하며 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황국신민(皇國臣民 : 일본천황의 백성이라는 뜻)’ 의식을 불어넣으려고 ‘동방요배(東方遙拜)’라 하여 날마다 천황이 사는 동경을 향하여 큰 절을 하게 하고, 신사를 찾아 천황의 조상에게 참배하여야(神社參拜) 했다. 그 밖에 ‘단발령’, ‘창씨개명’, ‘조선어교육의 금지’ 등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교육을 단행하여 나갔으며, 이 당시 설립된 교육기관의 목적은 일제의 식민통치이데올로기 창출과 강화에 있었다. <참고> 일본의 식민지대학교육정책 비교연구, 송한용(와세다대학)

이러한 역사인식의 근거는 부산대학교의 설립배경이 '일제 식민지교육을 완전히 청산한 새로운 대학의 설립'이였기 때문이며, 대학교육 방식도 윤인구 총장의 미국, 영국 유학의 경험[16][출처]미군정청의 영향[17] 으로 영미학제를 수용하였다. 부산대학교는 다른 국립대학들처럼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설립된 관립전문학교라는 물적 토대도 없이 無에서 有를 창조하듯이 순수하게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문교부에 의해 해방 후 최초로 설립된 국립대학이다. 따라서 부산대학교는 대학의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전혀 없고 대학의 역사 또한 우리나라가 해방된 후 1946년 5월 15일 시작되었다. 서울대, 부경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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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대 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주요 대학들(27개)이 1946~1947년 미군정기에 승격 또는 설립인가를 받은 대학들인 바,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이를 인정하여 교육법이나 국립학교설치령으로 반영하여 제정하거나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미군정법령 제102호)과 같은 군정법령을 대한민국 법령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밟은 것에 불과하였다.[2] 1903년 11월1일 경남 동래부 구포(지금의 부산시 북구 구포)에서 아버지 윤상은 씨와 어머니 박영자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한민국의 종교인이자 교육자이다.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과 연세대학교 제3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메이지가쿠인대학(Meiji Gakuin University)의 신학,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PTS)의 신학,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의 조직 신학, 즉 세계 3대륙의 신학의 장단점을 모두 배운 그 당시로서는 유일한 목사였으며, 교육가이자 교육행정가였다.[3] 윤인구(1903-1986)는 1903년 11월 1일 경남 동래부 구포에서 윤상은(1887-1984)과 박영자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윤인구의 어머니, 박영자는 구한말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던 부산의 선각자 박기종(朴琪淙, 1839-1907)의 막내딸이었다. 외할아버지 박기종은 일본자본 및 열강자본과 치열한 경쟁을 하여 1898년 최초의 한국 민간철도회사를 설립했다. 평생을 통하여 철도부설에 뜻을 두었으며, 국내철도는 민족계 회사에 의하여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최초의 기선회사를 설립에 참여한 인물이자 부산에서 최초로 근대학교인 부산상업학교 전신인 개성학교(1896년)를 설립했던 선각자였다. 윤인구의 할아버지 윤홍석은 양산에서 만선재를 열어 많은 인재를 길러낸 분이었고, 그의 자녀들은 구한말 관료계에서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윤상은은 박기종의 사위가 되었다. (이상규, "부산경남지방 기독교회의 선구자들", 고신대학교 출판부, 2012, p.290)윤인구의 아버지, 윤상은(尹相殷)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기초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구포은행) 설립자, 행정관료, 교육가, 농업경영가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를 개척하고 경영했던 부산의 대표적 선각자이다(발굴 한국현대사인물 윤상은(1887~1984),'민족은행 세워 일제 돈줄장악 저항' 한겨레신문 1991년 10월 25일 기사 참조)[4]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시에 위치한 신학대학으로, 아이비 리그 소속 명문대학인 프린스턴 대학교와 같은 도시에 위치해 있으며 프린스턴 대학교 측에서 설립을 주도했다.[5] 1945~1946년 당시 국립 부산대학 설립을 주도했던 경상남도 학무과장 윤인구의 구상은 1945년 해방 후 국고부족으로 초창기 대학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문교부에서 재정적 부담을 지기가 쉽지 않아 경상남도가 주축이 되고 도민들의 성금으로 대학설립기금을 모아 국가에 헌납하고 그 자금으로 운영하겠지만, 새롭게 설립되는 대학은 신학대학이 아니라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학문의 전당으로써 종합대학이 되어야 하고 교육은 국가적 차원에서 유지관리되어야 하므로 설립주체는 국립이여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계속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방덕수, "윤인구 박사 그 참다운 삶과 정신", 제일인쇄, 1988, 참조)[6] 부산대학교 설립인가일 1946년 5월 15일, 서울대학교 설치령 1946년 8월 22일(개교일 1946년 10월 15일), 경북대학교는 특이한데, 경북대 설립인가일은 1951년 10월 6일이고 개교일은 1952년 5월 28일이다. 경북대의 전신인 대구농과대학(1946.9.1.승격), 대구사범대학(1946.10.15.승격), 대구의과대학(1946년 도립 이후 국립)이 모두 1946년 9월 이후 4년제 국립대로 승격되었으므로 년도는 소급해서 1946년으로, 개교일은 1952년 개교일이었던 5월28일을 혼합해서 1946년 5월 28일로 간주한다. 그 외 전남대학교는 1951년 10월 6일이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경성제국대학과 서울지역에 소재한 관공립 및 사립 전문학교를 합쳐서 '국립서울대학교 안"을 만들었으나 기존학교들의 반발과 혼선이 심해 미군정청에서도 늦은 1946.7.13. 국대안 발표 후 1946.8.22.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을 만들고, 초대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 미국 해군 대위까지 선임했지만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들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의 극심한 반대운동(국대안 파동)으로 1946.10.15.에야 비로소 개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부산대가 설립인가 기준으로 최초가 된 것은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안) 파동에 따른 반사적인 영향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었다.[7] 서울대학교는 부산대학교 설립인가일(1946.5.15.) 보다 설치법령(미군정 법령 제102호)이 3개월 뒤에 제정(1946.8.22.)되었다는 것 이외에도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9개 관·공·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을 설립한 것으로 기존 9개 학교 학생들의 학제와 학력을 모두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설립(1946.8.22.) 후 다음년도인 1947년 7월 11일에 곧바로 제1회 졸업생 215명을 배출하는 등 경성대학과 기존 관·공·사립 전문학교를 승계하여 개편한 대학의 의미가 있어 순수하게 1학년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대학을 창설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교부가 국립종합대학교로써 대학예과를 거쳐 대학본과 1학년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대학을 창설한 것은 국립 부산대학교가 유일한 대학이라는 것이다.[8] 강명숙, '미군정기 사립대학 설립과 고등교육기회의 확대', 아시아교육연구 4권 1호(2003), p158 참조[9] 위트컴 장군은 부산역전 화재 구호 이외에도 1954년 11월 24일 테일러 우드 주한 미8군 사령관에게 공문을 보내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부산에서 병원 건립(7개국 17만 달러 추가 지원)을 포함해 191개 대한미군원조처(AFAK)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또한, 미군 장병들에게 월급 1%를 헌금으로 하는 기금을 만들어 중구의 메리놀병원의 건설에도 큰 도움을 주었으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퇴역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위해 고아원을 지었다. 한국인인 한묘숙(90; 1927-2017, 2017년 1월 1일 별세.) 씨와 결혼했으며 1982년 7월 한국에서 숨졌다. 그리고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미국 웰링턴 국립묘지 대신에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유해를 모셨다.[10] 국제신문 2012.6.18. 기사 참조[11] 경상남도 재무국장 윤상은(윤인구 총장의 부친. 게이오대학 경제학과 졸업)은 일본 동경유학시절 인연을 맺은 절친한 친분관계였던 친구 유억겸(조선미군정청 학무국장-지금의 교육부장관, 1946년3월7일 학무국이 문교부로 개편됨, 동경대학 법학부 졸업)과 논의하여 경남도민의 숙원인 국립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유억겸 학무국장(문교부장으로 개편- 지금의 교육부장관)은 국립대학 설립기금으로 2,000만원을 국고에 납부할 것을 경상남도 당국에 요구하였다. 그러한 거액의 조달방법이 막연한 경상남도 당국은 설립기금을 감액하여 줄 것을 진정하였다. 그 결과 설립기금은 1,000만원으로 감액되었고, 이 설립기금만 국고에 납입하면 미군정청이 부산에 국립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확약을 문교부 유억겸 학무국장(지금의 교육부장관)으로부터 받았다. 윤상은(尹相殷)은 1920년 장남 윤인구(부산대 초대총장)와 장녀 윤연숙을 데리고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学, 일본최고의 사학) 경제학과를 입학했다. 이 때의 윤상은의 나이는 34세였다. 유학시절 그 당시 일본 도쿄에 유학하고 있었던 유억겸, 최승만, 김준연 등에게 매년 50엔씩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 때 유억겸과의 인연이 국립부산대학교 설립확약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차철욱, "구포 윤상은 집안의 문서", p3 및 부산대학교 60년사 p38-40 참조[12] 단, 부산대학교는 베커 박사를 초대 총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13] 부산 남구 대연동에 소재한 부산 제2의 국립대학인 현 부경대학교의 전신이다.[14] 미군정 당시에는 미국의 학제와 동일하게 9월 1일에 신학년이 시작되었다.[15] 교육선교사로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게 그가 20대 초반이었던 1903년이었고, 평양의 숭실학당을 거쳐 1915년 경성에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된 이래 일제 말인 1940년 추방당할 때까지 계속 수물과 교수로 일했던 사람이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반도 땅에서 일한 최초의 물리학 박사로 한국 과학계의 기초를 다진 사람 중 하나이다.[16] 부산대학교 모델에 대한 윤인구 총장의 구상은 교양교육을 강조하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나 문리과대학(College of Arts and Sciences)처럼 전체학과가 교양과목 위주로 하는 문리학부로 2년을 공부하고 3학년에 올라가면서 인문학부, 이학부, 법학부, 상학부 등 여러학부중 하나를 선택하여 2년간 수학하는 학제였다. 이유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학제의 대학은 너무 전문화되었기에 교양교육 강화는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1956년 부산대학교에 교양학부를 두었다. 일본식 제도를 고집했던 문교부도 점차 윤인구 총장의 구상을 수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체제에 벗어나 교양교육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윤인구 총장의 교양교육 강조는 연세대 총장으로 가서도 이어져 1962년 8월 연세대 교양학부를 설치하고 교양학부 건물로 유억겸기념관을 세웠다.[출처] 부산대 건학정신 컨퍼런스자료집<왜 이시대에 윤인구인가>중에서 "윤인구와 삶과 사상", 김유신 부산대 전자공학과 교수 p17~22 참조)[17]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일본 통치하의 구교육제도를 타파하고 미국식의 제도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미국인은 그것을 “교육제도의 재조직의 목적은 일본식의 것을 뿌리채 뽑아 없애고, 그 대신에 미국식의 제도를 세우려는 것이었다”고 표현하였다. 출처 : E. Grant Mead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New York: King's Crown Press, Columbia University, 1951, p.213(손인수,『한국교육운동사』1권, 75쪽 재인용)[18] 서울대 전신=경성제국대학 부경대 전신=부산수산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