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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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생
2.4.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구태와의 관계
3. 백제 건국
4. 치정
4.1. 외정
4.2. 내정
5. 사망



1. 개요[편집]


백제 창업군주 온조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출생[편집]


출생은 모르지만 기원전 3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2.1. 《삼국사기》&《삼국유사[편집]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여러 전승을 한꺼번에 전하고 있다. 첫번째는 졸본부여 왕의 차녀가 추모결혼하여 낳은 차남이다.

두번째는 북부여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졸본 사람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라는 것인데 이후 우태는 먼저 죽고, 소서노는 과부로 살다가 추모와 재혼한다.

첫번째 전승의 경우 온조왕은 고구려 계통에 추모의 3남으로 위로는 이복 형인 유리와 친형 비류가 있었다는 얘기이며 이에 따르면 백제 부여씨 왕가는 고구려 고씨 왕가(계루부)의 방계가 된다.

두번째 전승은 부여 해씨 왕가와 친연 관계가 있을 뿐 고구려 고씨 왕가(계루부)와 친연관계가 없으며, 동명성왕 추모는 어머니 소서노의 재혼으로 잠깐 온조의 새아버지였다가 곧 헤어진 사람이 된다.

《삼국유사》에서도 《고전기》(古典記)라는 사서를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추모의 셋째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전기》(古典記)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이다.】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2.2. 《제왕운기[편집]


백제 시조 온조는 어머니와 형 은조(殷祚)와 함께 남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워 은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5개월 만에 죽었다.


여기서는 온조가 은조와 온조라는 두 인물로 나눠져 있고, 온조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으나 너무 일찍 죽어서 온조가 시조가 되었다고 나온다.


2.3. 《해동고승전[편집]


《해동고승전》에서는 한국의 고대 사서인 《기로기》(耆老記)를 인용한 대목에서 백제의 건국이 등장하는데 이 기록에는 비류와 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2.4.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구태와의 관계[편집]


한편 외국 기록인 《위서》 <백제전>, 《북사》 <백제전>, 《주서》, 《수서》, 《책부원귀》 등에서는 구태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위의 우태와 음이 통하는 듯해서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서도 모두 부여 계승 의식은 확실히 하고 있지만 고구려에서 나왔음을 표방하는 사료는 없다. 다만 《북사》나 《속일본기》에서는 백제 부여씨 왕가의 조상을 '도모'라 하고 있는데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로는 삼국시대 당대 기록에서는 <연남산 묘지명>의 내용처럼 고구려 시조 추모왕과 부여 시조 동명왕이 엄격하게 구분된 별개의 인물로 보이고, 추모왕이 동명왕과 동일 인물이라고 인식하는 사료는 당대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첫번째 전승을 빨라도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정부가 아닌 타자에 의한 기록이 <백제본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 한편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와의 연관성만 나타나는 두번째 전승은 백제가 고구려와 내내 사이가 나빴던 점, 성왕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바꾸었듯 고구려 계승 의식보다는 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웠던 기록들과 아귀가 맞는다.

물론 이들 전승 모두가 반드시 맞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데 애초에 《삼국사기》를 쓴 고려시대 사람 김부식도 1,000년쯤 후대 사람이고, 남아있는 기록들 중 뭐가 진짜인지 짐작이 안 되니까 여러 설을 같은 책에 한꺼번에 실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제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는 근초고왕 당시 고흥의 《서기》도 온조왕 이후 몇백 년 뒤다. 《서기》가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면 그 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이었다거나 체계적이지 않은 기록만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런 식이면 충분히 전승이 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백제 건국[편집]


고구려 왕자였다는 전승을 따르자면 고구려에서 지내던 온조왕은 후에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온 이복 형인 유리태자가 되자 친형 비류와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아악(負兒嶽)[2]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중 한강 이남의 땅이 나라를 세우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고 십제(十濟)를 건국했다.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


하지만 위 기록에서 보이듯 친형 비류는 온조왕과 생각이 달랐다. 바닷가인 미추홀을 선택해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바다의 짠물 덕에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한 비류[3]백성들을 데리고 온조왕의 십제로 들어가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형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키운 온조왕은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4]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위례성에 대해서도 기록의 모순이 있다. 원년의 건국 기록에서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뒤이어 14년의 기록에는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그래서 일각에서는 온조왕이 처음에는 한강 북쪽인 하북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14년에 한강 남쪽으로 옮겼다고 주장한다. 하북 위례성의 후보지로는 요즘 와선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 일대가 유력한 상황이다. 하남 위례성으로의 천도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삼국사기》 문헌상 연대로 고이왕 대가 되는데, 실제로는 온조왕~고이왕까지 임금들 재위 기간이 상당 부분 부풀려진 것으로 보는 게 아귀가 맞다.


4. 치정[편집]


온조왕의 치정은 크게 낙랑말갈, 마한에 대한 외정과 백제 내부의 정비라는 내정으로 나뉜다.


4.1. 외정[편집]


  • 낙랑: 초기에 온조왕은 북쪽 옛 고조선 땅에 자리잡고 있던 낙랑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내 사이가 틀어져서 죽어라 싸우게 된다. 낙랑한테 마한 일대 강력한 국가들은 존재 자체가 낙랑에 대한 정치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낙랑은 직접적인 공격 외에도 후술할 말갈을 사주해서 백제를 공격하게 유도하기도 했다. 온조왕 집권 당시에는 전한이 멸망하고, 신나라가 들어서는 시기였으나 설령 그렇다한들 그런 변방 소국 하나 공격하고 말고를 황제가 직접 결정하는 건 크나큰 에러. 낙랑 태수의 독자적 판단이거나 낙랑 태수의 상급자인 자사나 주목 정도에서 끝날 일이다. 그나마 이런 추정도 기년이 맞다는 전제에서나 합당하며, 고고학적 성과에 맞게 기년을 내려서 추정한다면 실제로는 대방군이었을 개연성도 크다.

  • 말갈: <백제본기> 초반부의 말갈은 우리가 아는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부족이 아니라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지역의 맥 세력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영서 예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위말갈 문서 참조. 아무튼 이들은 건국 초부터 백제와 밀고 밀리며 피 튀기게 싸웠다. 한때는 낙랑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백제 초기 역사에서 신라와 더불어 백제와 가장 많이 박터지게 싸웠다고 기록된 세력이기도 하다.[5]

  • 마한: 온조왕은 처음엔 마한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사신도 보내고 선물도 보내는 등.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마한에 저자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왕 24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백제와 마한의 경계)에 목책을 쌓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도 없었을 때 내가 동북쪽의 땅 100리를 주어서 살게 해줬는데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을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항의하자,[6] 온조왕은 부끄러워하며 쌓았던 목책을 허물었다고 한다. 그 전에 낙랑 태수가 백제의 목책을 트집잡았을 땐 굽히지 않았던 것과 대조된다. 하지만 26년에[7]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겨울 10월에 사냥 가는 척하면서 마한을 기습해 꿀꺽해버렸다. 마한의 원산과 금현 두 성이 끝까지 온조왕한테 개겼지만 결국엔 1년 뒤 함락되고[8] 두 성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후에도 마한의 옛 장수였던 주근이 우곡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의 정설은 서기 3세기 중후반에 백제목지국을 타도하고 마한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4세기 13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마한의 영역이었던 부분들을 공격하여 경기, 충청, 전북 서북부 일대를 직접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나머지 전라도 일대는 간접 지배 아래 편재하는 데 그쳤으며, 웅진 천도 이후 만경강 유역까지 백제 세력이 확대, 25대 무령왕 대인 6세기 초엽에 가서야 전남의 마한 잔여 세력이 소멸하여 옛 마한 휘하에 있던 세력권들이 백제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대에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을 꺾어 버리고 마한 일대를 다 병합한 것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후대인 8대 고이왕이나 13대 근초고왕 대에 일어난 사건을 시조를 띄워주기 위해 온조왕 대에 갖다 붙여놓은 기사로 추정된다. 마치 《일본서기》에서 삼한을 정벌했다는 시대상 말도 안되는 기술의 백제 버전인 것.

백제의 초기 왕대는 워낙 신비에 쌓여 있어서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개중에는 '온조'라는 이름 자체가 '백제'라는 한자의 고대 한국어 버전일 뿐이며 온조는 가상 인물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9] 후대의 비류왕이 백제의 실질적 시조이며, 온조 설화는 후발 주자인 비류왕 집단이 온조 집단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학계에서도 시조인 온조왕의 원형이 된 인물 혹은 세력이 있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백제 초기에 말갈과 싸운 건 개연성이 높다. 막 고대 국가로 발돋움해서 한강 유역을 제패하기 시작한 백제국이 뻗어나갈 곳은 북쪽과 동쪽 밖에 없다. 남쪽은 마한의 맹주국이자 백제국의 상전인 목지국이 노려보고 있기에 적어도 당장은 무리였기 때문. 한편 동쪽에 웅거하고 있었던 주민이야말로 주로 말갈로 통칭되던 부여-옥저계 소국 내지는 소국도 이루지 못한 예맥 말갈 계열 유목민들이었으며, 이들은 유목 민족 특성상 백제가 설령 가만히 있어도 쳐들어와서 약탈해대는 게 취미인 이들이었기에 굴복시킬 대상 1순위였다. 한편 당대 한강 유역의 지배권은 한사군인 낙랑군이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다소 잘못 알려진 상황. 낙랑군은 문헌상 백제 건국 시기인 기원전 1세기에도 경기도는커녕 황해도마저 토착민을 제어하는 걸 상당히 버거워 하였다. 따라서 한강 유역 백제국이 정말로 문헌 연대상 기원전 1세기에 세워졌다면 임진강조차도 제대로 영향력을 투사하지 못하던 그 당시 낙랑군이 자체로 그렇게까지 백제국과 갈등할 상황은 아니다. 문헌상 기록대로 순식간에 목지국까지 슥삭슥삭해버리고 임진강 일대까지 넘보고 있었다면 낙랑군에 초비상이 걸렸을 개연성은 나름 맞지만, 이는 고고학과 전혀 들어맞지 않으므로 그랬을 가능성 또한 매우 적다.

백제국이 초반부터 낙랑국과 대립했던 건 등장 자체로 낙랑군이 쫄아서가 아니라, 백제국이 그때까지 있었던, 목지국을 포함한 다른 마한 거수국들과는 달리 주변 거수국들을 대놓고 때려잡으면서 역량만 되면 직접 지배 지역으로 전환하며 단일한 국가 체제로 우뚝 선데다, 임진강 유역까지 제패를 완료해서 낙랑군과 대방군 바로 밑바닥까지 쳐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마한 거수국들이야 개별적으로 협상하거나 지들끼리 다투게 하거나, 아니면 목지국을 통해 제어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한강 유역에서 갑자기 혼자서 1:1로도 낙랑군과 싸워볼만한 고대 국가가 나타났으니, 고구려의 존재만으로도 골치가 아픈 낙랑군 입장에선 이런 백제국이 악몽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낙랑은 자기네들의 역량이나 예맥 세력을 사주하기도 해서 백제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 수백년 뒤에 분서왕처럼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암살당한 사태까지 있었으니... 313년 고구려 미천왕한사군을 공격하여 없애버리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하여 육로로 중국과 교류하고 싸우던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을 피해 바다를 직접 건너 중국을 오가는 외교를 하게 된다.


4.2. 내정[편집]


재위 10년 장남 다루를 태자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13년 행정구역을 개편했고 재위 14년에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38년째 되던 해에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연 재해가 잇달아 발생해서 농사를 말아먹은 백성들이 많았기에 나라를 돌며 백성들을 직접 돌보고, 농사와 잠업을 권장했으며 부역에 동원하는 걸 자제시켰다고 한다. 또한 41년에는 위례성을 보수했다. 재위기간 내내 많은 성과 목책을 쌓아 주변세력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천자인것을 과시했다.


5. 사망[편집]


28년 2월에 승하했다. 그 후 태자 다루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1] 강종훈,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사료 계통과 그 성격>에서는 이 전승이 통일신라 시기 김대문의 《한산기》계통의 자료가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2] 부아악(負兒嶽)은 현재의 북한산 인수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 북한산 인수봉은 전문 산악인도 올라가기 힘들어하는 고난도 코스에 해당해서 정말 인수봉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만 현대 한국에 전해지는 지명 중에 負兒嶽이라는 이름이 있는 곳은 북한산 인수봉이 맞기는 하다. 지형은 조금씩 바뀌는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는지라 무려 2,000년 전에도 지형이 지금과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역사 시대와 현재 지형이 바뀐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예시가 원래 바다에 접해 있다가 내륙으로 들어간 감은사김해시 가야 유적들이 있다. 2010년대 들어서 지질학 연구가 진척되면서 북한산 인수봉 일대에 지진이 여러차례 있었다는 지질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때문에 온조왕이 인수봉을 올라가던 2,000년 전에는 지진이 별로 없어서 인수봉이 완만했다는 가설이 신빙성있게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인수봉을 올라가는 암벽등반 등산가들에 의해 인수봉 정상부에서 절터가 발견됐다! 원래는 현재보다 완만했던 인수봉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인수봉 바위가 박살나서(...) 현재처럼 깎인 것으로 보인다.[3] 일부 학자들은 이를 "온조로 대표되는 농업 세력과 비류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해양 세력이 농업 세력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사실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다는 등의 내용은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농업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곳에 정착했으니 망할 수밖에'였을 뿐. 실제로 이보다 더 열악한 지역에 정착하여 크게 성공한 경우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들 수 있다.[4] 십제가 미추홀의 비류 세력을 병합한 것은 온조왕 당대의 일로 보기도 하고 더 후대인 초고왕 대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5] 단 신라의 경우 현재는 신라라기 보다는 진한계 국가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초기 신라의 영토는 백제와 국경을 맞닿을만큼 거대하지도 않았다.[6]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서, 북쪽에서 내려온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것도 빈 땅에 정착한 게 아니라 마한 왕의 협조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치 위만고조선에 왔을 때 방패로 삼기 위해 받아주었던 것과 비슷하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백제가 마한의 여러 구성국 중 하나로 나오는 기록과도 합치한다.[7] 처음 마한 왕의 질책에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었다고 한 기록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이다.[8] 참고로 두 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나오는데 무령왕 때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성왕때 고구려가 금현성을 함락시켰다고 나온다[9] '온'이 100이고, '조'가 '제'와 통한다는 것. 다만 음운만으로 추정하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다른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또한 '온'은 한자 百으로 번역했으면서 '조'는 번역이 아닌 濟로 음역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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