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징웨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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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Wang Jingwei-ism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정치인이자 중국국민당 개조파의 영수 왕징웨이의 사상이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확고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대신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항상 타협하려는 성향이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났으며, 정치적 비난을 받을 때 맞서는 대신 사퇴하여 유럽으로 외유를 떠나는 우유부단함[1] 도 있었다.
왕징웨이의 이러한 성향은 너무 자주, 때때로는 너무 갑자기 발현되어 그가 뚝심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라는 의심도 생겼고, 종종 왕징웨이 자신과 그 계파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2. 성향[편집]
2.1. 1929년 이전[편집]
2.2. 1929년 ~ 1931년[편집]
자세한 내용은 개조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러나 1928년 11월 왕징웨이가 귀국하고 그가 국민당 좌파를 영도하게 됨에 따라 왕징웨이의 사상이 개조파에 묻어난다. 왕징웨이는 이전 사회주의 색채가 짙던 개조동지회의 성향을 자신이 중시하던 민주주의 요소로 바꾸었다. 이 시기 왕징웨이는 민주주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다른 인사들에게 삼민주의에서 다른 두 원칙(민생주의, 민족주의)를 무시한다고 비판받았는데, 여기에 왕징웨이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삼민주의 전체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나 특정한 때와 특정한 상황에서는 삼민주의 중 어느 부분을 먼저 실현해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에서 나라와 인민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공산주의 일당독재와 장제스의 일인독재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반대하기 위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민주의 전체를 바탕으로 (현 정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먼저 옹호하는 것이다. 이는 전체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특정 질병에 특정 처방을 내리는 의학적 치료와 같다.
1931년 7월 3일, 왕징웨이, 광저우에서 당원들에게 한 연설.
그러나 왕징웨이는 유럽과 미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소수의 부르주아의 이익만 대변할 뿐 대다수 국민의 의견은 무시한다며 반대했고,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결국 일당독재만을 낳을 뿐이라며 반대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억압받는 인민 대다수를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정의하고 정치, 경제적인 기회 균등을 추구했으나 서방 민주주의의 이론과 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등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민주주의 이론을 반장의 무기로도 사용하였으며, 때문에 장제스를 끌어내리기 위한 전쟁인 중원대전과 제1차 양광사변에 깊게 드러났다.
2.3. 1931년 ~ 1937년[편집]
장왕합작이 수립되자 왕징웨이의 주요 이념이 다시 한번 바뀐다. 그가 아직 제1차 양광사변으로 광저우 정부에 있을 때, 만주사변이 한창 진행되던 1931년 10월 중순의 한 담화에서 그는 "대일문제는 국제연맹을 통한 해결에 주력해야 한다"고 하였고, 11월 중순에는 "국제연맹이 우리를 돕지 못한다면 우리는 저항 능력과 희생의 결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생각은 장왕합작 이후까지 이어져 1932년 2월 초 발표된 <대일 문제에 대한 담화>에서 한 면으로는 저항하고, 한 면으로는 외교적으로 교섭하는 이른바 <일면저항, 일면교섭>으로 요약된다.
2.4. 중일전쟁 이후[편집]
3. 참고문헌[편집]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The Kuomintang left in opposition, 1928-1931 : the leftist alternative in Chinese politics, So Wai-Chor, 1986.
4. 같이 보기[편집]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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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징웨이는 일생 동안 이러한 이유로 외유를 4번이나 떠났다. 배경한 교수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성향을 '낭만적 혁명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