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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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성
2. 영국 식민통치
4. 전간기
6. 독립
7. 독립 이후



1. 형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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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ictoria_Disraeli_cartoon.jpg
델리에서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는 영국군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관을 바치는 디즈레일리를 풍자한 만평
인도인들이 영국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일으킨 반란인 세포이 항쟁이 진압된 이후, 영국은 무굴 제국을 폐지하고 대신 스스로 직접 통치하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인도의 통제권을 넘겨받아 1858년에 인도 제국을 설립했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1876년에 인도의 황제에 즉위했다.

한편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크게 3가지의 교훈을 얻는다. 첫째, 영국 정부는 당시 영국인들과 인도인들 사이에 더 많은 교류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영국군 장교와 인도의 관료들만이 겨우 소통하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민간 차원에서도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져 인도인들이 영국인들을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인도에 거주하던 영국인은 총 125,945명이었는데 이들 중 3분의 2인 84,083명이 모두 장교나 병사들이었고, 민간인들은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영국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이민 홍보 정책을 통하여 민간인들이 사업 및 거주의 목적으로 인도로 이주하도록 장려 정책을 폈다.

둘째,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들과 지방 토후들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대표적 기득권 세력인 대지주들과 토후들은 신변의 우려 때문에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고, 영국은 이들을 이용해서 인도인을 지배하기로 결심했다. 영국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정식적인 토지 소유를 허가하면서 각종 특혜를 베풀어주었고 이 대지주들은 그 대가로 영국에서 반란분자들로 취급하던 농노들과 농민들을 영국 대신 효과적으로 감시하고 탄압했다.

그리고 셋째, 강압적인 문화 이식 정책을 포기해버렸다. 세포이 항쟁 직전까지의 영국 정부는 사티 풍습을[1] 폐지하고 힌두 제례들을 억압하는 등 서구화 정책들을 펴고 있었으나, 이같은 급진적인 문화 변동으로 인도인들이 반발하자 '인도의 야만적인 풍습과 문화는 지나치게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라고 방향을 바꾸면서 이같은 문화 탄압도 끝냈다. 영국은 사티만 폐지한 것이 아니라 '문명'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생활 전반에 걸쳐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영국은 당근과 채찍 정책을 사용해서 186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인도 신민들을 천천히 길들여 나갔다. 영국 식민 체제의 부를 얻어낸 계급들이 생겨났고 중산층이 극히 얇게나마 인도에서 형성되었다.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에게 이들을 본보기로 보여주면서 '너희도 잘 살 수 있다.'라는 희망을 불어넣었고, 1867년에 캐나다캐나다 자치령으로 독립하여 나름 입법권을 부여받는 등 자치하는 모습을 선전하며 인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또한 마지막으로 인도 문화를 연구하는 백인 오리엔트 문화학자들이 등장하여 인도를 '위대한 문명의 요람'이라고 치켜세워주는 등 인도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으며 특히 군대 분야에서 인도인들을 고용해서 서로가 서로를 진압하게 하는 등 이간책을 쓰기도 했다.[2]

다만 역시 식민통치는 식민통치였던지라, 영국인들이 식민지 출신의 인도인들을 동등하게 대우해 줄 리는 없었고 곳곳에서 수많은 차별들이 일어났다. 결정적으로 당시 영국 총독 리폰 경이 벵골 지방에서 인도인 판사를 임명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인도인 엘리트층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결국 이는 인도 국민회의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3]


2. 영국 식민통치[편집]


한편 1872년부터 1876년까지 인도 총독을 지낸 토마스 배링 경은 인도 제국 정부의 체계를 효율화하고 대규모 기근 구호, 세금 인하 등 유화적인 정책들을 펼쳤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쳤다. 덕분에 1880년대까지 인도에서는 자유주의적인 바람이 불 수 있었다.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조혼을 방지하는 내용의 법안이 제출되는 등 점차 진보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확산해나갔다. 이같은 자유주의의 풍조와 함께 민족주의가 함께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대표적 인도인의 정치 단체인 인도 국민회의가 이를 주도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지방의 힌두교 축제들을 주도하는 등 힌두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고취하려 노력했으며 언젠가는 영국을 몰아내고 힌두교가 중심이 되는 민족 국가를 세우기를 염원했다.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재임한 총독 커즌 경은 보수적이었던 선임자들에 비하여 유난히 개혁 정책에 신경을 많이 쏟았다. 철도 건설, 세금 인하, 치수 공사 확장, 금융 안정을 위한 금본위제 채택, 농노들의 빚 감면, 농업 은행 창설, 도서관과 대학 창립 등 여러 개혁적인 정책들을 많이 펼쳤던 것이다. 또한 커즌 경은 당시 인도에서 가장 거대한 행정구역이었던 벵골 지방을 쪼개버렸다. 이로 인하여 벵골 지방은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 동벵골과 아삼 주, 힌두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한 서벵골로 나누어진다. 이로인해 한순간에 자기가 대대로 살아오던 지역에서 종교적 소수파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이 문제는 현대까지 이어졌다.

한편 커즌 경이 벵골 분할령을 통해 종교로 사람들을 구분짓고, 인도인들이 하나되어 영국에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들을 연이어 펼치자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하여 스와데시 운동을 펼치고 외국산 물품들을 보이콧했다. 불온한 분위기가 캘커타에서 벵골까지 넓게 퍼졌고 덕분에 영국산 직물들의 수입이 무려 25%나 감소하는 등 나름대로 성과를 내기도 했다. 다만 정치적 움직임으로 발전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영국이 직접 나서 때려잡으면서 정치적으로는 기대한만큼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성과를 내자, 무슬림 엘리트층들도 이에 자극을 받아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창설한다. 이렇게 인도 현지인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의 움직임이 강해지자 영국 정부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1900년대 초반부터는 형식상이나마 인도인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기 시작한다. 1909년의 인도 위원회법이 시행되면서 인도인들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조금씩 공직을 얻는 것이 허가되었으며 덕분에 백인 일색이던 정부에 조금이나마 인도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만 이 인도인들 역시 영국에 충성하던 엘리트층과 지주층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기득권 계급들을 위한 정책들만을 지향했기에 보편적인 인도인들을 위한 정책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한편 1911년에는 조지 5세가 직접 델리를 방문하여 벵골 분할령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이와 함께 인도의 황제 자리를 승계했다.


3.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인도가 본격적으로 영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민족주의가 탄력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부터였다. 안그래도 인도 제국의 넘쳐나는 인구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 정부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도의 막대한 인적 자원을 끌어모아 엄청난 양의 징집병들을 모았으며 이 인도 출신 병사들은 주로 중동이나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투입되었다. 언론들은 영국의 승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인도 병사들의 활약을 크게 과장해서 내보냈고, 이같은 보도들이 쏟아지면서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는 민족주의의 싹이 틔어올랐다. 영국도 기껏 대대적인 선전까지 해놓은 마당에 인도 출신 병사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세계 대전 덕분에 인도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인도 제국은 '영국령 인도'라는 이름으로 국제연맹의 창립 회원국으로 영국과 따로 가입하기도 했다.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15년에는 그 유명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남아프리카에서 돌아왔다. 당시 간디는 이미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공동체에서 소작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변호를 해주는 등 이미 인도 국내에서도 나름 유명해진 상태였고, 간디는 돌아온 직후 1년 동안은 인도 전역을 여행하면서 인도의 전반적인 실태를 살펴보았다. 간디는 이 여행을 통하여 영국인 대지주들이 인도인 소작농들을 탄압하고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억지로 면직 산업에 투입하는 등 수많은 인도의 인종차별적인 병폐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간디는 이때부터 사티아그라하 운동, 즉 비폭력을 통한 저항운동을 인도에서 꾸리기 시작했다. 또한 '아힘사'를 통한 설교와 계몽 운동을 통하여 인도 독립 운동의 선봉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고, 후일 인도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라젠드라 프라사드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이후 라젠드라 프라사드는 간디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인도 국민회의 내에서 간디의 큰 힘이 되어준다. 어쨌든 간디의 등장과 함께 이미 불붙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은 한층 더 강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영국 정부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를 갖는다.

마침내 1916년, 보수적인 영국 정부마저도 인도에서 점점 커져가는 저항 세력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여전히 수많은 인도계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전쟁이 고착화되면서 영국은 인도 제국에 더욱 많은 희생을 요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본국의 체면 상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었다. 새롭게 취임한 총독 쳄스포드 경은 더이상 백인들만으로 구성된 인도 정부로는 인도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런던의 의회에 특사를 파견하여 인도 정부에 본격적으로 인도인들을 수혈할 것을 강력 요청했다.

몬태규 당시 인도 국무장관은 1917년의 포고령으로 '책임있는 행정을 위하여 모든 정부 부서에 인도인들을 채용할 것을 명령'했고, 이 시기 이후로 군대와 정부 등 중요한 행정기관들에 인도인들이 대거 발탁되면서 인도 정치계는 한층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몬태규 장관과 쳄스포드 경은 1919년 12월에 '몬태규-쳄스포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지방과 중앙 의회 의원들의 정수를 늘리고 인도인들의 입후보 자격을 보장하는 한편, 보건, 교육, 토지 등 일부 권한들을 인도인들이 다수를 차지한 지방 정부에 넘겨주었다.[4]

몬태규-쳄스포드 개혁안으로 인해서 상당수의 인도인들은 투표권을 보장받았다. 비록 성인 남성들 중에서도 10% 밖에 되지 않았던 적은 비율의 자산계급의 인도인들만이 투표를 할 수 있었으나, 모든 권한이 백인 영국인들에게 잡혀있던 이전과 비하면 놀랄 정도의 진전이었다. 영국의 유화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고 시골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친영 성향의 인도인들에게 의회의 의석들을 배정해주거나 지주, 사업가, 옛 귀족층 등 인도의 엘리트 계급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특혜를 베풀어주면서 인도인들의 반란을 찍어눌렀다.

다만 이 것도 완벽한 개혁은 아니었다. 여전히 영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압도적 다수였던 힌두교 신자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하고 무슬림, 시크교 신자, 기타 소수민족들에게 더욱 많은 혜택을 주면서 내부적인 갈등을 촉발시켰고 일부러 인도인들이 다수를 차지한 지방 정부에는 매우 적은 양의 예산을 배정하면서 중앙 정부에 기댈 수 밖에 없게 교묘하게 탄압을 계속했다. 게다가 중요한 관직들과 핵심적인 의석들은 여전히 영국 출신의 백인들이 쥐고 앉아 있었기에 유명한 영국 출신 인권운동가인 애니 베산트 여사는 이를 보고 '영국의 수치'라고 불렀다.[5]

한편 1916년에는 인도 국민회의와 전인도 무슬림 연맹이 러크나우에서 '러크나우 협정'을 맺어 소수 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합의하였다. 러크나우 협정에서는 이와 함께 무슬림 연맹이 인도 국민회의와 하나로 합치면서 인도 전체의 자치와 독립을 위하여 영국에 함께 대응하기로 약속했다. 대신 힌두 세력인 인도 국민회의는 무슬림들에게 지방의회 의석들을 일부 배분해주기로 약속했고 힌두와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는 등 인도 민족 전체를 포괄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 러크나우 협정을 통해서 맺어진 양측간의 평화는 지나치게 일부 무슬림 엘리트층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양 세력 사이의 뿌리깊은 불화로 인해서 체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토가 나게 되지만 당대 인도인들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영국에 공동대응하기로 손을 잡았다는 데에 큰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당연히 이를 잘알고 있던 영국 식민당국 역시 러크나우 협정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양 세력이 협력하지 못하도록 온 힘을 쏟았다.

영국 정부는 몬태규-쳄스포드 개혁안을 통해서 인도인들에게 당근을 쥐어주었으나, 1918년에는 영국의 저항 세력들을 탄압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롤래트 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채찍 정책도 함께 사용했다.[6] 당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은 전시 상황에서 인도 내부에서마저 골치아픈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롤래트 법'에서는 크게 벵골, 봄베이, 펀자브, 이렇게 3개 지방을 '불온 세력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총독의 전시 권한을 이용해서 증거 없는 임의 체포와 구속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배심원들 없이 3명의 판사들만으로 약식으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으며, 지방정부들에게는 재판없이 단기간 피고인들을 수감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9년, 150만 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이 각종 전선에 나서서 전투를 벌였으며, 인도 제국은 매년 1억 4,600만 파운드를 전비라는 명목으로 본국에 갖다 바쳤다. 이같은 엄청난 세금을 본국과 전쟁에 쏟아부으면서 세율을 대폭 인상하면서 국내외 무역과 경제 상황이 파탄났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참전 용사들이 인도로 귀환하면서 인도의 실업률은 크게 올랐다. 게다가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봄베이, 마드라스, 벵골 지방에서는 폭동마저 일어났으며 그 해에 가뭄마저 겹치면서 인도는 갈수록 사회가 불안정해졌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돌고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터지며 국제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국제 무역조차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인도의 정부 관료들은 점차 러시아처럼 인도에서도 혁명이 발발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한편 롤래트 위원회는 급변사태를 막기 위해 총독과 중앙 정부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롤래트 법'을 발의했다. 의회의 인도계 의원들이 전원 반대표를 던지면서까지 항의했으나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던 백인 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롤래트 법은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 다만 인도계 의원들이 워낙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통과된 개정안에는 초법 권한의 부여 기간을 3년으로 제한하고 오직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는 폭력 행위'에만 적용한다는 추가 조항이 들어가기는 했다. 어찌되었든 인도인들의 눈에는 자신들을 탄압하고 백인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법으로 비쳤고, 이후 마하트마 간디 등 대표적 민족운동가들이 정부를 전면적으로 규탄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4. 전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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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탄압에 반대한 간디의 '소금 행진'
영국이 본격적으로 인도인들의 독립과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1919년 4월 13일의 암리차르에서는 점차 독립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때 영국이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여 가둔 것에 대한 항의로 수많은 인도 군중들이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당시 상황을 지휘하던 레기날드 다이어 장군은 50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명령하였다.

이 사건을 '암리차르 학살사건'이라고 하며 영국 정부에서는 379명이 사망하고 1,100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인도 국민회의에서는 피해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최소 1,000여 명 가까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다이어 장군은 학살에 책임을 물어 직위해제당하고 영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이후 조치는 그뿐이었고 오히려 본국에서는 "야만인들을 잘 진압했다"고 칭찬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같은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오자 인도 사회는 당연히 격분했고, 암리차르 학살 이후의 인도 독립운동은 한층 더 강화된 모습을 띠게 된다.

1920년에는 영국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인도인들의 인권을 대대적으로 억압하면서 인도인들의 날선 시위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본격적인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인도인들은 이에 따라 영국이 수여한 훈장들을 반납하고 공무원직에서 사임했으며 영국산 물건들을 사지 않는 등 사회 전반에서 영국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또한 간디는 인도 국민회의의 입당 자격을 무소득층도 할 수 있도록 개혁하면서 회의의 스펙트럼을 넓혔으며, 인도산 면직물 애용을 강조하면서 영국인들에게 비협조, 비폭력, 비복종을 통한 시위를 연이어 열었다. 불복종 운동은 1922년에 경찰이 심지어 비폭력 시위를 벌이고 있던 군중들에게까지 발포하는 '차우리 차우라 사건'이 터지면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개되었다. 게다가 1928년에 인도 총독이 개헌을 추진하면서 인도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자 인도 국민회의에서는 착취당하던 소작농들에게 지세를 내지 말 것을 요청하면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영국의 부당한 탄압에 맞섰다.

라호르에서 열린 인도 국민회의 대회에서 자와할랄 네루의 주도 하에 '푸르나 스와라지', 즉 '완전한 독립'을 인도 국민회의의 최종 목표로 설정하였다. 간디와 네루는 1930년에 영국이 소금 생산을 금지하고 오직 영국이 파는 비싼 소금만을 살 수 있게 한 악법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직접 바다로 행진하여 소금을 만들어낸 '소금 사티하그라하'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끊임없이 벌여나갔다. 이로 인해 간디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나 영국 정부도 인도인들의 여론을 무시하기는 어려웠고 결국 런던으로 데려가 사회 개혁안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의 공무원 사회는 이미 그 질과 양 모두가 떨어지던 시점이었다. 당시 영국은 ICS라고 해서 주로 백인들로만 구성된 공무원 체계를 운용하고 있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점차 머나먼 인도까지 떠나 식민지 공무원을 하겠다는 영국 백인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싫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올 수도 없었으니, 이에 따라 자연스레 인도 공무원 내에서의 백인 비율이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영국이 비폭력 운동에도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면서 사회에 영국 식민정부에 대한 불신과 부정이 만연했고, 영국을 자신들의 정부로 여기기는커녕 오만한 정복자 따위로 인식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1930년대부터는 불복종 운동에 따라 소작농들이 지세를 내기를 거부하면서 인도 제국의 핵심 세원이었던 토지세도 감소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인도인들이 거의 장악해버린 지방정부에서는 영국인 징수원들에게 오히려 불리한 쪽으로 정책을 펼치면서 백인 중심의 중앙정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위해 애썼다.

결국 이같은 상황에 봉착한 영국 본국에서는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와의 협상을 통하여 1935년 신인도통치법을 제정하여 인도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독립적인 의회 구성을 허가하였고, 영국이 직접적으로 지배하던 지역과 간접적으로 지배하던 영토 모두를 포괄하여 통치하는 중앙 정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만 여전히 선거구들을 종교와 인종, 재산 등에 따라 19개씩이나 만들어 나누었고 계급이나 신분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대 투표가 이루어질 수 없게 하는 등 끝까지 식민지인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 이 때문에 인도 국민회의와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이 법에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었지만 어째되었든 없는 것보다는 나은 법이었고 1937년에 실시된 첫 의원선거에 후보 명부를 제출하면서 자연스레 개혁안을 승인해버린 셈이 되었다.

한편 인도 국민회의는 선거 승리를 위하여 당원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1935년에 당원이 47만 명에 불과했던 데에 비해 4년 후인 1939년에는 450만 명까지 세를 대폭 불렸다. 인도 국민회의는 그 덕에 1937년 치러진 첫 의원 선거에서 11개의 지방정부 의회들 중 7개의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이같은 대중적인 지지를 통한 압승은 당시 인도 국민회의를 그저 소규모 엘리트들만의 집단으로 보고 있던 영국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후 영국이 식민지 정책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5.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이렇게 영국의 살벌한 탄압으로 인도인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르던 도중,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인도 제국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도인들의 동의없이 추축국 세력에 전쟁을 선포했고 이때문에 인도 국민회의의 간부들이 지방정부를 대표하여 영국 본국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다만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참전에 대한 전격 지지를 표명했고 덕분에 무슬림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벵골, 신드, 펀자브 지역 등 대도시권에서는 생각보다 반영 시위가 적게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녹록하지 않았고, 더이상 인도인들은 영국의 전쟁에 협력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전인도 무슬림 연맹이 인도 국민회의와 다른 목소리를 내었던 것은 날로 심각해지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 사이의 감정의 골 때문도 있었다. 이 시기에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이자 민족운동가인 모하마드 진나는 무슬림들에게 '독립된 인도에서 우리는 소수파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면서 인도 국민회의와 대립각을 세웠고, 벵골 주에서 1944년에는 5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당원들을 모집하는 등 빠르게 세를 불려나가면서 힌두 세력인 인도 국민회의와 맞먹는 정치 집단으로 떠올랐다.

1940년에 라호르에서 열린 당대회에서는 '벵골 등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 북동부 지역의 의회들에 종교 대표들을 선출하고 샤리아를 반영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목표는 독립 인도를 완전한 세속 국가로 만드려던 인도 국민회의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것이었다. 인도 국민회의는 곧바로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거세게 비난했으며, 그와 함께 이같은 행동 뒤에 영국의 공작이 숨어있음을 파악하고 영국 정부에 대한 맹공을 퍼부었다. 어찌되었든 인도 내부에서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 간의 갈등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었으며, 이를 중재해야할 영국은 오히려 이를 즐기며 관조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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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병사들을 사열하는 영국군 장교
인도 국민회의가 반대하든 말든 어쨌든 전쟁은 벌어졌고, 영국군이 수많은 병사들을 모집하면서 인도 군대는 금세 22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군을 이루었다. 또한 소규모의 독자적인 해군과 공군이 창설되었고, 2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군대에 지원하면서 인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국 세력의 핵심 축이 되었다. 인도 군대는 주로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을 펼쳤으며 전쟁 내내 총 24,000여 명 사망, 64,000여 명 부상, 12,000명 실종[7], 60,000여 명이 싱가포르에서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다만 전쟁이 인도에 무조건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었다. 인도인들의 참전 비용과 군수 물자 비용은 모두 런던에서 대주었으며 군수물자 생산기지를 노동력이 값싼 인도에 설치하면서 군복, 총기, 탱크 등 온갖 종류의 군수산업들이 인도에서 발전했다. 덕분에 인도의 직물 산업은 16%, 강철 산업은 18%에 달하는 초고속 성장률을 보였으며 군인들을 나르기 위한 철도 시스템이 중요해지면서 인도 전역에 효율적인 철도들이 대거 깔렸다.

한편 전쟁 발발 3년째가 되던 1942년에 전쟁이 장기화되고 시민들의 심리적 피로감이 커지면서, 전쟁에서 빠질 것을 주장하고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인도 국민회의와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내부에서 커져만 갔다. 민족주의자들은 서양인들의 전쟁에 인도인들의 고귀한 목숨을 희생할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전쟁 자체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꼈고, 국민들 역시 이에 동감하면서 전반적으로 인도에 반전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그나마 인도에 친화적이었던 영국 노동당 출신의 스탠포드 크립스 경이 인도를 찾아가 마하트마 간디모하마드 진나 등을 포함한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을 약속하는 대신 전쟁 기간 동안만은 영국을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크립스 경의 노력 덕분에 영국과 인도는 일말의 타결점을 찾나 싶었지만… 당시 영국의 전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워낙 강경한 보수주의자에 식민지주의자였던 터라 인도 독립에 펄쩍 뛰고 나서면서 결국 파토났다. 이후 영국은 인도 국민회의와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수뇌부들을 대거 체포하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인도인들을 전쟁에 끌고 나섰으며 1942년 이후 전쟁에 대한 인도인들의 여론은 극히 좋지 않았다.

크립스 경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이후, 인도 국민회의 세력은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을 펼치며 아예 '모든 영국인들이 인도에서 손을 떼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영국은 8월 8일에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들을 모조리 체포해버렸고 1945년에 종전될 때까지 이들을 풀어주지 않으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참다참다 못한 인도인들은 특히 북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켜 영국군들을 내쫒으려 들었으나 아직까지는 영국의 화력을 이기기에는 무리였고 당시 영국도 전시라 절박했기에 극단적인 폭력을 써서 이들을 진압하면서 6주 만에 대부분이 진압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팔 인근에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등 이제는 완전히 영국의 통치 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인도인들 대부분이 영국의 통치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으면서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이 인도를 계속 통치한다는 것은 이미 영국의 희망 따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와중에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영국의 적인 나치 독일일본 제국과 손을 잡고 무력으로 영국군을 인도에서 몰아내려 한 자가 있었으니, 이 자가 바로 찬드라 보스였다. 극렬 독립운동가인 찬드라 보스는 지나친 극단주의 성향으로 이미 1939년에 인도 국민회의에서 퇴출당하고 독자적으로 독립 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영국 경찰에 체포당했으며 1941년에 영국의 손아귀를 탈출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던 일본은 찬드라 보스를 이용해서 인도에마저도 영향력을 끼치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찬드라 보스에게 싱가포르 전투에서 생포된 인도군 포로를 대거 인계하여 국민군을 창설했고, 이들은 영국에 대한 항전에 투입된다. 그러나 1945년에 추축국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 이들 역시 해산된다. 이후 찬드라 보스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서 인도를 독립시킬 구상을 품고 타이완으로 향하는 일본 군용기에 몸을 실었으나, 추락으로 사망했다. 추축국에 부역했으나 찬드라 보스는 인도의 독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인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다.

6. 독립[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인도인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6년 동안 전시라는 이유로 인도 사회 전체에 엄청난 탄압을 가한 영국인 식민지 총독영국 본국에 대한 악감정은 이미 임계점을 넘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장에서 돌아온 인도인 참전용사들에 대한 영국의 대우가 영국 출신 백인 병사들에 비하여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으니 그 불만은 더욱 기폭되었다.

상황이 더더욱 심각했던 것은, 전쟁 기간 동안 군사훈련을 받은 인도 병사들이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영국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키는 반영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치안군은 이같은 시위들을 신속하게 진압하였으나, 더이상 반영 감정은 일개 총독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그때 영국 정권을 차지한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와 독립에 유화적인 영국 노동당 정권은 진지하게 인도의 독립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한다. 영국은 4년 전에 협상을 주도했던 스탠포드 크립스 경과 인도 국무장관 로렌스 경을 보내어 인도의 민족주의자들과 협상을 시도했고, 이를 통하여 인도의 독립이 마침내 실현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인도의 독립이 마침내 이루어지기 직전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도 내부의 최우선 문제는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 간의 끝없는 갈등이었다. 이전부터 서로 대립각을 세워온 인도 국민회의와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이미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였고, 1946년에는 전인도 무슬림 연맹이 인도 국민회의의 타협안을 거부하고 "인도 제국을 분리시켜서 무슬림이 다수인 북동부 인도 지역을 따로 이슬람 공화국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당연히 인도 국민회의는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고, 결국 1946년 8월 16일에는 다이렉트 액션 데이가 벌어진 캘커타에서 양측의 무력충돌로 수천 명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인도 전역에서 무슬림-비무슬림 간의 충돌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등 준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인도인들이 서로 죽고죽이는 것을 본 인도 국민회의와 영국 정부는 경악했고, 그해 9월에 인도 국민회의가 임시정부를 설치하고 영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행정을 인계받으면서 인도 독립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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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의 붉은 요새에서 인도의 독립을 축하하는 인도인들
파키스탄의 독립을 기뻐하는 군인들
한편 2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지칠대로 지친 영국은 더이상 폭동과 갈등이 들끓는 인도 내부의 상황까지 감시할 여력이 없었고, 결국 노동당 정부는 몇 백여년에 걸친 인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1947년에는 영국 정부가 1948년 6월 이전까지는 무조건적으로 정권을 인도인들에게 이양한다는 협약을 발표했고 중간의 중재자가 되어야할 영국이 빠져버리면서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 사이의 갈등은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독립일이 다가올수록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이 서로 학살하는 등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영국 치안 병력들은 이를 방관하면서 더이상 인도 내부의 종교 갈등은 봐줄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결국 영국은 인도 제국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승인했고 1947년 8월 14일, 모하마드 진나가 주도하는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 자치령이, 8월 15일자와할랄 네루가 주도하는 비무슬림 국가인 인도 자치령이 따로따로 수립되면서 인도 제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2개 국가로 갈라지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분열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었지만 오히려 그에 반감을 느낀 힌두교 극우파 청년 나투람 고드세에게 암살당했다. 참고로 마지막 인도 총독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카라치에서 열린 파키스탄 자치령의 설립 축하식과 뉴델리에서 열린 인도 자치령의 설립 축하식에 모두 참석했다고.


7. 독립 이후[편집]


이 때 인도 제국이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나누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도 자치령에는 막대한 수의 무슬림들이, 파키스탄 자치령에는 수많은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살던 곳을 떠나 자신들의 종교를 믿는 '조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500만 명으로 바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이주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며, 양국간의 골도 여전히 깊었다. 마침내 결국 1947년 카슈미르를 놓고 내전과 국제전 성격을 모두 가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으며 결과적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은 지금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지도를 찾아보면 인도-파키스탄 간 카슈미르의 국경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동족혐오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원래 이들은 문화도 종교도 역사도 상당히 이질적인 민족과 지역들이 영국 점령기 치하에 한 나라로 묶인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한국일본, 만주, 몽골, 대만중국 동부 해안, 위구르, 티베트, 베트남 북부를 한 나라로 묶어서 '동아시아 제국' 따위의 이름으로 통치했다면 영국이 떠나간 이후에 이들간의 분열으로 헬게이트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테고, 이를 동족혐오라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8]

1962년에는 인도와 중국간에 국경분쟁으로 전쟁이 터졌고(중인전쟁 또는 중국-인도 국경분쟁), 이때 인도는 한 마디로 개박살났다. 그리고 이때 문제가 되었던 국경 역시 지금도 점선이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로 인도계 국가와 중국이 국가 주도의 전쟁을 수행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965년에는 파키스탄이 인도가 중국에게 털렸던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는지, 석유가 묻혀있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를 합병하려고 인도를 공격하면서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인도의 반격으로 파키스탄이 참패하여 수세에 몰리고 UN소련의 중재로 유야무야 끝났다.

인도 제국의 분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이번엔 파키스탄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인도 제국 시절에는 벵골 주에 속했으며 파키스탄 독립 후 동파키스탄 지역이었던 방글라데시가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 정부의 지배와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1971년 독립을 선언하면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결국 1979년 12월 인도가 분쟁에 개입,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파키스탄의 지배에서 독립시켜 주었다. 그 결과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우군으로 끌어들였지만[9]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파일:벵골 분할령.png

이 같은 일련의 분열 과정은 인도 제국 시절의 역사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바로 1905년 영국이 인도의 지역감정을 조장할 목적으로 실시한 벵골 분할령이 그것. 인도인들의 통합을 막고 분열을 야기할 목적으로 실시한 이 정책은 아주 기가 막히게 효과를 봐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3국 분열 모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대망의 1998년, 3개월 차이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개발했다! 종교적 이견에서 출발한 갈등은 마침내 종교가 인류멸망을 초래할 수준에 도달해버린 것이다.[10] 만약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 진원지로 가장 유력한 후보가 카슈미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인도 제국을 비롯한 영국의 남아시아 식민지는 1947년에 해체되었지만, 대신 인도 제국은 인도,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어 각각 영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그래서 인도, 파키스탄은 한동안 모두 형식적으로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시는 왕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각국은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자치령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이 되었는데, 인도는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파키스탄은 1956년에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후 영국의 자치령은 내정 자치권뿐만 아니라 외교권과 군사권도 갖는 등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각국의 독립 시점은 자치령이 된 1947년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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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아내도 함께 죽여 매장하거나 화장시키는 인도 전통 풍습. 유럽인들은 당연히 이를 '야만인의 관습'이라고 부르며 극도로 혐오했다.[2] 물론 당시 백인 고고학자들은 오리엔탈리즘백인 우월주의에 찌들어있었던 탓에 그들의 연구 결과 역시 곡해되었다.[3] 인도 국민회의는 창설 후 약 20여 년간은 영국의 정책 비판이나 토론을 통해서 불공정한 무역 정책, 인종차별 등에 대해 공론화하곤 했다. [4] 다만 이때도 국방이나 조세, 외교나 사법 같은 핵심적인 권한들은 여전히 백인 일색의 중앙 정부와 총독이 틀어쥐고 있었다.[5] 참고로 이 애니 베산트 여사는 영국 백인이면서도 인도와 파키스탄, 미얀마의 인권 개선과 정치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인권운동가이다. 백인이자 영국 시민권자였기에 영국 정부도 인도인들에게 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가두기가 어려워서 매우 애를 먹었다. 인도 독립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 롤래트 위원회는 당시 보수적인 롤래트 판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에 '롤래트 위원회'라는 이름이 붙었다.[7] 사실상 사망으로 간주[8] 오늘날 현재 아프리카서남아시아의 상당수 국가들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전과 전쟁, 민족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등을 겪고 있다.[9] 그렇지만 방글라데시와 인도 역시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이후에는 영토 분쟁과 국경 분쟁으로 관계가 안 좋아진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방글라데시 문서 참조.[10] 다만 아직 둘 다 보유하기는 했어도 투사력은 둘째치고 위력이 확실한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상황이다. 특히 인도의 핵 전력은 대부분의 학자들도 위력이 약할 것이라고 수긍하지만, 파키스탄은 현재까지 논란이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