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덤프버전 :
<bgcolor=#ffffff,#1F202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 펼치기 · 접기 ]
1. 개요[편집]
1892년 2월 15일에 치러진 일본 제국 의회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
2. 배경[편집]
1890년의 1회 중원선 이후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과 이당(吏党)[1] 은 번벌(藩閥)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고, 이에 반해 민당(民党)은 경비절감과 감세로 국민생활을 재건하자는 민력휴양(民力休養)론을 내세워 예산안을 삭감하는 등 대립했다. 다만 양 당파가 별다른 충돌 없이 탐색전을 계속했고, 정부로서도 첫 의회가 해산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도 좋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산되지 않고 1891년 3월에 회기를 마쳤다.
1891년 5월 6일에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은 총사퇴하고, 제1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이 들어섰다. 그러나 5월 11일에 오쓰 사건이 터지면서 해군・농상무・체신대신을 제외한 모든 장관이 사퇴함에 따라 추진력이 크게 약해졌고, 이는 동년 11월에 열린 제2회 제국회의에서 민당이 정부에 대한 반대의견을 더욱 적극적으로 내는 계기가 되었다. 11월에는 정부가 전년대비 650만 엔 증액된 예산안을 제출했는데, 민당측에서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해군 경비 800만을 삭감하는 안을 내놓았다. 이에 해군대신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는 12월 22일에 국회에 출석하여, "(민당이) 번벌정부니 뭐니 해도 4천만 인민의 안녕을 지킨 것은 현정부이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자, 민당측에서는 즉각 "무례 천만(無礼千万)한 소리", "해군대신은 퇴장하라", "제국의회를 뭐라고 생각하는거냐" 등의 반발이 이어졌다. 이 사건을 만용연설(蛮勇演説)이라 하는데, 다수파였던 민당은 이에 자극받아 결국 삭감된 개정예산안을 채택한다.
수세에 몰린 마쓰카타 수상은 결국 12월 25일에 중의원을 해산시켰고, 1892년 2월 15일에 두 번째 중원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3. 제도[편집]
선거구, 선거권, 피선거권, 임기는 1회 중원선과 같았다.
4. 선거 결과[편집]
5. 선거 후 상황[편집]
5.1. 의회 구성[편집]
- 이당(吏党)은 선거 전에 비해 40석이 증가했고, 민당(民党)은 39석이 감소했다.
5.2. 보궐선거 및 경정[편집]
1894년의 3회 중원선 이전까지 총 21개 선거구에 대해 보궐선거(補欠選挙)가 치러졌으며, 사유로는 임기 중 사망이 8건, 사임이 13건이었다. 또한 당선소송에서의 당선무효 결정으로 인하여 3개 선거구, 4개 의석에 대해 재판소(법원)의 경정(更正)이 이루어졌다.
6. 지역별 결과[편집]
6.1. 도호쿠[편집]
- 이당이 11석, 민당이 14석을 획득하여 민당이 약간 우세하였다.
6.2. 간토[편집]
- 이당이 8석, 민당이 39석을 획득하여 민당이 우세하였다.
6.3. 주부[편집]
- 이당이 26석, 민당이 31석을 획득하여 민당이 약간 우세하였다.
6.4. 긴키[편집]
- 이당이 28석, 민당이 14석을 획득하여 이당이 우세하였다.
6.5. 주고쿠[편집]
- 이당이 21석, 민당이 8석을 획득하여 이당이 우세하였다.
6.6. 시코쿠[편집]
- 이당이 2석, 민당이 17석을 획득하여 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6.7. 규슈[편집]
- 이당이 32석, 민당이 9석을 획득하여 이당이 우세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14:09:46에 나무위키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