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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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축구 선수 조재진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클럽 경력[편집]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편집]


대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수원의 김호 감독이 팀의 10년 대계를 바라보고 육성한 어린 선수들인 이른바 김호의 아이들 중 한 명이었으며 김두현과 함께 김호의 아이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케이스다. 하지만 쟁쟁한 선수들에 가려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던 조재진은 만년 후보로 지내던 중 일찌감치 병역을 해결하고자 2002년 상무에 입대했고, 꾸준한 경기 출전으로 실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조재진의 수원 시절 성적은 축구 팬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 회자되며 안티들에게 까였는데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수원 5경기 출장 득점 없음
2001년 수원 3경기 출장 득점 없음
2003년 상무 31경기 출장 3골 3도움 슈팅당 득점률 0.052
2004년 수원 8경기 출장 1골
총 4시즌(수원 3시즌, 상무 1시즌) 47경기 4골(1PK) 3도움 슈팅당 득점률 0.05

물론 수원 시절엔 후보였기에 출장 횟수가 너무 적어 제대로 된 표본이라 하긴 힘들다. 하지만 광주 상무 시절 기록만 봐도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아니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다.[1] 이런 처참한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무에서 중용된 것은 다른 공격수가 갖지 못한 그만의 장점 때문이었다.

수원, 그리고 상무 시절 조재진은 그야말로 헤더과 포스트 플레이에 특화한 선수였다. 강인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지치지 않는 스태미너와 몸싸움, 공간침투로 수비진을 교란시키고 장신을 활용한 공중볼 장악과 위협적인들어가진 않았지만 헤더로 2선 미드필더진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모여있던 수원에선 다소 빛이 바랬지만, 경기를 그려나갈 키 플레이어가 없었던 상무에서 이런 조재진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2.2. 시미즈 S펄스[편집]


상무 제대 후 수원으로 복귀했지만, 2004년 J리그 시미즈 S펄스로 이적했다.

K리그보다 수비의 압박이 덜한 J리그에선 꽤 먹어주는 실력으로 펄펄 날아다니며 시미즈 시절 통산 101경기 45골을 기록했다.


2.3. 전북 현대 모터스[편집]


단 1년뿐이었지만 전북 왕조의 밑거름이 된 선수

2008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뉴캐슬[2], 에레디비시의 위트레흐트[3] 등 몇몇 유럽 구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계약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시미즈와의 계약이 종료되자 전북에 입단한다. 이때 조재진의 표정이...

전북 시절의 조재진은 신인 때와는 스타일이 달랐다. 헤더 등 슈팅은 수원, 상무 시절보다 정교해졌지만, 그걸 제외한 다른 부분에선 오히려 예전보다 퇴보해서 왕성한 활동력은 많이 줄어 있었다. 압박과 몸싸움이 상대적으로 약한 J리그에 진출한 부작용으로 조재진만의 특화된 장점이 사라져 국대에서의 존재 의의는 점점 희미해졌다. 아마 선수생활 내내 따라다닌 고질적인 부상이 스타일의 변화를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전북의 최강희 감독은 조재진에게 활동량과 활동폭 대신에 문전 앞에서의 골사냥만을 요구하며 팀의 공격 전술을 조재진에게 맞추었다. 정규리그 24경기 8골의 성적은 언뜻 보기에는 주전 스트라이커로서는 저조한 성적이지만 전북의 득점은 2008년 24경기에서 총 39득점으로 전체 득점 4위라는 우수한 기록이었으며 조재진은 그 39골을 넣은 전북의 선수 중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다. 게다가 전북은 이 해에 2000년 이후 팀 사상 두번째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전북이 2008 시즌을 준비하면서 조재진, 강민수 등 좋은 선수를 영입했으면서도 시즌 초반 최악의 부진을 겪다가 정규리그 6위에 그친 것은 조재진을 비롯한 공격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전반기 내내 호흡이 맞지 않았던 수비라인의 탓이 크다.

즉, 아주 못한 것은 아닌데 2008년 10월 25일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 최태욱이 주워먹으라고 골대 1M 앞으로 찔러준 패스를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희대의 개발슛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저평가 받는 경향도 있다. 주요 감상 포인트는 들어간 줄 알고 골을 연호했다가 머쓱해하는 중계진과 패스를 찔러준 팀 동료 최태욱이 머리를 감싸쥐고 아쉬워 하는 장면. 넷상의 축구팬들은 이 슛을 리바이스 대반품 슛이라고 칭했다.

1년 간 준수한 기량을 보이며 팀의 6강행에 기여했고, 전북을 떠나면서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할 때 이적료로 15억 원이라는 거금을 전북에 안겨 주었고, 전북은 이 돈을 잘 활용해 2009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이동국, 김상식, 진경선, 에닝요를 영입한다. 그리고 이 선수들은 2009년 전북의 K리그 우승을 견인하면서 전북 왕조를 열었다. 이런 이유로 전북에서 조재진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2.4. 감바 오사카[편집]


현역 마지막 소속 구단

2008년 K리그 복귀를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다음해 전북에 15억원이라는 거금의 이적료를 안겨주며 일본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했다.

2009~2010 일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4] 국내 복귀를 시도 중인데 에이전트에서 오퍼금액으로 최소 10억 이상이 돼야한다고 떠벌려서 구단과 축구팬을 어이상실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국내 최고 대우를 해달라는 뜻인데... 무슨 이동국처럼 한 시즌 20골을 넣어줄 골잡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몰리나처럼 경기 흐름을 뒤엎어버리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그런 거액을 선뜻 내줄 팀은 없었다. 정 안되면 미국이나 다른 곳도 알아본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K리그J리그의 수준 차이도 있다.

결국 K리그보다 수비가 널널한 일본에서 말아먹었으면 국내에서도 통할 리 만무하고 K리그에서 연봉 10억원급을 내 줄만한 구단인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같은 구단은 조재진을 필요로 할 분위기도 아니기에 쉽게 K리그 팀에 안착하기 힘들다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2.5. 현역 은퇴[편집]


2011년 3월 18일, 갑작스럽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동안 밝히지 않았지만 20살 때부터 선천성 고관절 이형성 문제로 뼛조각이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주는 상태였고, 선수 생활 내내 병행한 약물 치료도 한계에 부딪혀 병원에서도 더는 뛸 수 없다고 진단했다고. 은퇴 기사

앞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와 계약이 불발로 끝난 이유도 사실은 고관절 문제 때문에 메디컬 테스트에서 떨어져서였다. 당시 이적 보도를 냈던 최원창 기자[5]는 거짓보도를 냈다거나 쓸데없이 설레발로 기사를 내서 이적이 취소되었다는 이유로 네티즌들에게 엄청 까였었는데, 조재진이 은퇴를 하며 뉴캐슬 이적이 불발된 진짜 이유를 밝히고 또 고관절 부상 사실도 덮어주었는데, 그동안 뭣도 모르고 까서 미안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하지정맥류 또한 이른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런 부상들 때문에 점프 한 번만 해도 착지하고 나서 엄청난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2011년 4월 16일, K리그 6라운드 전북 vs 광주의 경기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은 한 시즌밖에 안뛴 조재진의 은퇴식을 치러주며 훈훈함을 남겼다. [6]


3. 국가대표 경력[편집]



3.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3.1.1. 2004 아테네 올림픽[편집]


아테네 올림픽 조별리그 3차전 말리전에서 헤더로 2골[7]을 기록해 3:3 무승부[8]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견인하며 국대 간판 스트라이커였던 이동국의 백업 요원으로 떠올랐다.[9]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파일:PP11.jpg


3.2.1. 코엘류호[편집]


상무 및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모습을 바탕으로 2003년 코엘류 감독 시절 국가대표팀에 첫 발탁되어 A매치에 데뷔했다.


3.2.2. 본프레레호[편집]


2004년 12월 한국이 독일을 3:1로 이긴 레전드급 경기에서 3번째 골을 넣었다. 참고로 차두리슈팅한 어시스트한 골로 원래 오른발로 차려고 했는데 빗맞아서 디딤발인 왼발을 맞고 들어갔다(...) 일명 디딤발 슛...그렇게 넣고 세레머니는 폭풍간지급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로 '자신이 올리버 칸을 상대로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을 증명해서 기쁘다'고 해서 살짝 비웃음을 당했다(...)


3.2.3. 아드보카트호[편집]



3.2.3.1. 2006 FIFA 월드컵 독일[편집]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50E77; font-size: 0.8em"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각주]



그리고 2006 FIFA 월드컵 독일을 앞두고 4-3-3 시스템에서 원톱을 맡던 이동국이 갑작스런 십자인대 부상으로 하차하면서 조재진의 축구 인생은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평가전에서는 안정환이 주전으로 나왔으나,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고, 최전방에는 장신의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서는 것이 맞다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판단 하에 조재진이 본선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나오게 된다.[10]

한국은 독일 월드컵에서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조재진은 3경기 모두 선발로 나서 유럽, 아프리카의 장신 수비수들과의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많은 공중볼을 따내 외신들의 호평을 받았다.[11] 그러나, 국내 팬들에겐 골을 못 넣는다고 욕을 먹었지만(최전방 공격수인데 유효슈팅 0개...) 그나마 프랑스전에서 분데스리가 최고의 라이트백 윌리 사뇰,프랑스 국대 레전드 수비수 릴리앙 튀랑과의 공중볼 경합에서 이기며 박지성의 동점 골]을 어시스트해서 체면치레는 하였다.

이때 저위의 리듬타기나 골을 못 넣는 공격수로 까이긴 했지만 프랑스, 스위스의 국대 수비수들을 상대로도 적어도 조재진이 헤더는 따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외신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 평가가 월드컵 이후 해외팀들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결국 해외진출은 못했지만[12]

그리고 스위스전 패배이후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화제가 되어 CF를 찍기도 했다.


3.2.4. 베어백호[편집]



3.2.4.1. 2007 AFC 아시안컵 동남아 4개국[편집]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7 최성국 · 8 김두현 · 9 조재진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50E77; font-size: 0.8em"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코치
파일:미국 국기.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홍명보 · 파일:브라질 국기.svg 코사



독일 월드컵 전후로 대표팀 주전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골 결정력 부재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2007년 아시안컵에도 주전 공격수로 나왔으나 역대급 빈공에 시달리던 당시 대표팀의 모습에 따라가먼서 대회 무득점으로 마감했다. 정작 승부차기에서는 이란, 이라크, 일본을 맞아 4번, 3번, 1번 키커로 나서서 세 번 다 힘차게 흔들었지만...


3.3. 기록[편집]


조재진의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일시
장소
상대
경기 결과
대회명
2003년 9월 25일
인천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5-0
2004 AFC 아시안 컵 예선
2003년 10월 24일
무스카트
파일:네팔 국기.svg 네팔
7-0
2004 AFC 아시안 컵 예선
2004년 12월 19일
부산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3-1
친선 경기
2006년 2월 1일
홍콩
파일:덴마크 국기.svg 덴마크
1-3
2006 칼스버그 컵
2006년 5월 26일
서울
파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기.svg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0
친선 경기
2006년 9월 6일
수원
파일:attachment/TWN_Flag.jpg 대만
8-0
2007 AFC 아시안컵 예선
2006년 10월 11일
서울
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2-1
2007 AFC 아시안컵 예선
2007년 7월 5일
서울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2-1
친선 경기

[1] 상무 시절 동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동국 27경기 11골(5PK) 6도움 슈팅당 득점률 0.123, 이광재 17경기 5골 1도움 슈팅당 득점률 0.192, 손정탁 34경기 4골 1도움 슈팅당 득점률 0.111.[2] 당시 뉴캐슬의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강력히 원했다. 후술되지만, 메디컬 테스트 과정에서 '선천적 고관절 이형성 문제'가 발생되어 계약이 취소되었다.[3] 위트레흐트같은 경우 감독이 2007년 서울에서 열린 대한민국네덜란드와의 평가전을 직접 관전할 정도로 관심이 있었지만 경기 도중 부상으로 실려나가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4] 감바 오사카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려나버렸다. 부상이 점점 악화되어 정상적인 폼 유지가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5] 전 일간스포츠 소속 기자로 박지성의 PSV, 맨유 시절 전담 기자로 오랫동안 취재하였다. 현재는 수원 삼성의 운영팀장으로 근무 중이다.[6] 이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은 K리그를 넘어서 아시아에서도 내로라하는 전북이지만 조재진이 입단한 2008년에는 06년 아챔 깜짝 우승이 다인 언더독 지방구단 이었다. 모기업의 적극적 투자가 이뤄지기도 전이라 아챔 우승하고도 주전들 내보내야 했던 팀이었다.(대표적으로 염기훈) 여기에 조재진이라는 스타가 온 것은 맨체스터 시티에 호비뉴가 온것과 동일한 수준의 충격이었다. 거기에 한 시즌 뛰고 감바오사카로 가면서 이적료로 15억이나 남겨줬다.(이는 디종으로 이적한 권창훈의 이적료와 맞먹는다.) 또한 가장 잘 나가는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이나 팬서비스에 솔선수범하여 팀 전체에 귀감이 되었다.[7] 그리고 18년 후, 다른 아프리카팀과의 경기에서 또다른 曺씨가 이를 완벽하게 재현했다.[8] 0:3으로 뒤지고 있던걸 조재진의 연속골과 말리 수비수의 자책골로 동점을 만들었다.[9] 사실 국대 입성 초반엔 이동국을 밀어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자주 출전했다. 득점력 때문에 곧바로 이동국에 밀리기는 했지만(...) 즉 처음엔 이동국의 경쟁자였다. 이동국은 이미 주전이고 조재진이 엄청 분발해서 백업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10] 프랑스전에서 월드 클래스 수비수들을 제치고 헤더는 다 따냈다. 다만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11] 그래서, 조재진은 "동국이 형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했었다.[12] 사실 프랑스전에서는 최전방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미드필더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이 밀리는 바람에...그래도 조재진은 미드필더 라인까지 내려와서 수비가담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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