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철
(♥ 0)
분류
- 1971년 출생
- 진도군 출신 인물
- 전주 최씨
- 오현고등학교 출신
- 숭실대학교 출신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선수
- 센터백
- 1996년 데뷔
- 2007년 은퇴
- 상무 축구단/전역
- 전북 현대 모터스/은퇴, 이적
- 전북 현대 모터스/역대 주장
- 원클럽맨/축구
- 대한민국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대한민국의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
-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참가 선수
- 대한민국의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
- 2002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감독
-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포항 스틸러스/역대 감독
- 축구 행정가
- 대한민국의 남성 방송인
- 운동선수 출신 방송인
- 체육훈장 맹호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축구 행정가. 선수 시절에는 큰 키를 활용한 제공권 장악이 주특기였던 수비수였다.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득점력도 상당히 좋았고, K리그에서 무려 해트트릭을 기록한 적도 있다! 1998년, 1999년에는 팀에 공격수가 부족해 공격수로 뛰기도 했는데, 두 시즌 동안 62경기 17골 8도움을 올리는 활약을 했을 정도였다.
전북 현대 모터스 시절 전북의 방패라고도 불렸다. 감독으로서는 대한민국 U-17 대표팀을 맡아 2015 FIFA U-17 월드컵 칠레에서 조 1위 16강 진출을 달성했으나, 이후 포항 스틸러스 감독을 맡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2.1.1. 전북 현대 모터스[편집]
25세(세는나이 26세)라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프로에 입단했는데 그 이유는 특이하게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먼저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5]
군 전역 후 1996 K리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전북에 지명되며 프로 선수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공격수였고 숭실대학교 축구단 입학 후 수비수로 전향했지만, 1997 시즌 종료 후 당시 전북의 간판 공격수였던 김도훈이 J리그로 이적하자 다시 공격수로 변신했다. 187cm의 장신을 이용해서 포스트 플레이를 잘했고 해트트릭도 1회 기록했다. 문제는 이 시절에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박건하, 노상래 등 기라성 같은 중견 공격수들에 이동국, 안정환, 박성배, 김은중 등의 신예들이 바글바글 했기에 공격수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는 거다.[6] 김도훈이 복귀한 2000년부터 다시 수비수로 컴백했고, 쓸 만한 수비수를 찾던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늦은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996년 전북 현대 모터스에 입단, 2007년 은퇴할 때까지 12년 동안 오로지 한 팀만을 위해 헌신했다. 전북의 2006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도 기여했고, 2007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전북에서 K리그 312경기 28득점 11도움, FA컵 23경기 1득점을 기록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2.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1997년 8월 10일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서 후반 막판 교체 출전으로 A대표팀에 데뷔했다. 당시 팀은 1:2로 패했다. 이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예선 대표로 합류했으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파죽의 4연승으로 일찌감치 본선 직행을 확정지었음에도 불구하고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는 굴욕을 겪은 뒤[7] , 거스 히딩크가 부임할 때까지 A대표팀에서 자취를 감췄다.
2.2.1.1. 히딩크호 시절[편집]
2001년 9월 16일 나이지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오랜만에 A대표로 뛰게 되었다. 당시 팀은 2:1로 승리했다. 이후 세네갈, 크로아티아, 미국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했고 다음 해에는 CONCACAF 골드컵 출전 명단에도 이름을 올려서 경기에 뛰었다.왜 저런 선수를 여태 뽑지 않았는가?
2.2.1.1.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2002년 한일 월드컵 32개국 본선에서는 홍명보, 김태영과 함께 스리백을 형성, 대한민국 사상 최고의 수비진을 선보이며 대한민국의 4강을 이끌었다. 커맨더형의 홍명보, 거침없는 파이터형의 김태영, 그리고 제공권 장악을 통한 헤더형인 최진철. 국내 수비수들 중에서는 그야말로 각 분야 최고의 수비수들이었다. 그야말로 강철의 3백. 역대 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진철, 김태영이 제공권을 장악, 끈덕지게 대인마크를 하고, 뚫어내면 귀신같이 홍명보가 커팅한 뒤 전방에 안정적으로 배급을 해주던, 이상적인 쓰리백이었다. 게다가 혜성같이 발탁된 최진철은, 피지컬적 우위와 뛰어난 대인마크로, 피지컬과 대인마크가 치명적 단점이었던 홍명보를 완벽히 커버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수비 전술은 단순하기 그지없어 선수의 개인 기량과 피지컬에 의존했던 경향이 컸는데, 거스 히딩크식 조합과 단련으로 역대 최강의 3백이 되었다. 거기에 대회가 진행될 수록 몸싸움과 공중볼 경합에 일취월장하여, 크리스티안 비에리 같은 싸움닭형 공격수들을 상대로도 세트피스 상황에서 1골을 내주는 선에서 막아내기도 했다.[8]
특히 그는 4강 독일전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막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9] 그러나 후반전에 안타깝게도 부상을 당하며 이민성과 교체 아웃되었고, 그가 교체되고 얼마 안 있어 대한민국은 미하엘 발락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얻어맞아 0:1로 석패했다.
3위·4위전 터키전에도 부상 여파로 출전하지 못했고 한국은 2:3으로 패했다.
2.2.1.2. 코엘류호, 본프레레호 시절[편집]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최우수 수비상을 받으며 우승을 경험했지만, 오만 쇼크와 몰디브 참사를 현장에서 경험했고,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16개국 본선에도 출전하였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 2차 예선에도 출전하였고, 레바논전에서는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경기는 1:1로 비겼다. 이후 2004년 12월, 후배 선수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김태영과 함께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2.2.1.3. 아드보카트호 시절[편집]
2.2.1.3.1. 2006 FIFA 월드컵 독일[편집]
[각주]
그러나 2005년 9월, 딕 아드보카트 전 감독이 새로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코치로 합류한 홍명보의 간곡한 설득 끝에 국가대표에 복귀하여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 36세의 노장이었던 그는 32강 조별리그 전 경기 모두 출장하여 1차전 토고와의 경기에서 당시 아스날 FC의 공격수로 활약하던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꽁꽁 묶어버려 2:1로 승리해 월드컵 원정 첫 승을 올렸다.[10] 프랑스전에서도 당시 대회 준우승을 했던 프랑스를 상대로 1:1 무승부 승점 1점을 획득하는데 공헌했다.
조별리그 3차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스위스의 수비수 필리페 센데로스의 선제 헤더골 당시 머리끼리 충돌하여 안면에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11] 붕대를 매고 계속 뛰는 투혼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0:2로 패배하여 월드컵 최종 17위로, 16강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면서 스위스전은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고 말았다.
2.3. 플레이 스타일[편집]
지금이야 아시아권에서도 187cm의 수비수는 흔한 편이지만 당시 동아시아 선수 중에서는 손에 꼽을 장신에 속했다.[12] 이 장신을 기반으로 제공권과 피지컬에 강점을 가진 수비수였다. 심지어 포스트 플레이 능력은 K리그 정상급 공격수들보다도 우수했고, 제공권 장악력은 리그 최고급이었기에 김도훈의 이적 후 최전방에 공백이 생겼을 때 중앙 공격수로 포지션을 전환하여 해트트릭을 기록한 적도 있다. 장신에 어울리지 않게 슬라이딩 태클도 수준급이었다. 스피드는 느렸지만[13] 뛰어난 위치 선정과 나쁘지 않은 점프력으로 극복했다.
K리그나 아시아권 팀들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했으나 세계 기준으로는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피지컬을 가진 국가대표 공격수가 꽤 있었다.[14] 그러나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도 크게 밀리지 않는 피지컬을 보여줬고, 정신력에서 지지 않겠다라는 듯한 허슬플레이를 자주 펼치며, 한국 수비진에 김태영과 함께 끈기를 더해 주며 2006년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 유니폼에 새겨진 투혼이라는 문구에 가장 어울리는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전에서는 이러한 장점을 기반으로 조별리그에서 같은 아시아팀인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헤더로만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국내 언론에서 고공폭격기라고 부르던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꽁꽁 묶었다. 16강전과 8강전에서도 당대 최고의 공격수들인 크리스티안 비에리,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도 힘겹지만 잘 막아내며 클래스를 증명해보였다.
2002년 말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 때 호나우지뉴의 돌파를 태클로 막아냈던 장면과, 2002월드컵 폴란드전 전반 초반에 올리사데베가 홍명보를 뚫고 돌파하던 것을 몸을 던지는 슬라이딩 태클로 백업해주던 장면은 팬들이 꼽는 커리어 최고의 장면들.
2.4. 기록[편집]
2.4.1. 대회 기록[편집]
- 전북 현대 모터스 (1996~2007)
- FA컵: 2000, 2003, 2005
- 슈퍼컵: 2004
- AFC 챔피언스 리그: 2006
- 아시안 컵위너스컵 준우승: 2002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7~2006)
- FIFA 월드컵 4위: 2002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003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B팀
- 동아시아 경기 대회: 1993
2.4.2. 개인 수상[편집]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최우수 수비수: 2003
- AFC 챔피언스 리그 MVP: 2006
- K리그 베스트 XI: 2002, 2003, 2006
- K리그 대상 공로상: 2007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공로상: 2007
2.4.3. 수훈[편집]
- 체육훈장 맹호장: 2002
2.4.4. 통산 성적[편집]
2.4.4.1. 국가대표[편집]
2024년 4월 8일 기준이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코치 경력[편집]
3.1.1. 강원 FC 코치[편집]
많은 사람들은 은퇴 후 전북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거라 예상했지만 지도자 연수 후 신생팀인 강원 FC의 수비 전담 코치로 부임해 2011 시즌까지 활동하며 최순호 전 감독을 보좌하였다.
2011년 최순호 전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자, 팀을 떠났다.
3.2. 감독 경력[편집]
3.3.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편집]
2011년부터 KFA 전임 지도자로 합류하며 약 3년 간 유소년 국가대표팀 선수 육성을 위해 힘썼다.
3.3.1. 대한민국 U-17 대표팀 감독[편집]
그리고 2014년 4월, 대한축구협회 골든에이지 프로그램의 연속성을 위해 최진철이 직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16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번 연령별 대표팀이 바르샤 유스들 때문에 이례적으로 여론의 주목을 많이 받아 조금만 결과가 안 좋아도 여론의 질타를 받는 통에 고충이 심하다.
FIFA U-17 월드컵 직전에 벌어진 수원컵에서 안쓰러운 경기력과 결과를 선보이면서[15] 폭풍같이 까였으나,
[16]
U-17 청소년 대표팀은 2015 FIFA U-17 월드컵 칠레에서 24강 본선 조별리그에서 브라질과 만나 1:0으로 승리했다.[17] 이것이 한국이 FIFA대회 및 원정 경기에서 처음으로 브라질을 격파한 경기였다. 당시 브라질은 잉글랜드를 1:0으로 이겼으며, 에데르 밀리탕이 뛰었고, 남미 우승 진출 팀이었다.
연이어 벌어진 2차전 기니와의 경기에서도 후반 교체된 오세훈의 극장골로 2승을 거둬 경우의 수를 따지지도 않고 진출하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승우 빨로 진출했느니, 무전술이니, 무능한 낙하산 인사이니 뭐니 하면서 유소년 감독도 외국인 써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던 축구팬을 가장한 냄비들은 바로 태세전환해서 최진철을 명장이라 떠받들고 있다.
감독으로서의 활약은 최진철호 문서 참조.
참고로, 브라질에 거둔 승리는 FIFA 대회 및 원정 경기에서 대한민국이 브라질에 거둔 최초의 승리다.[18]
그러나 U-17 대표팀 탈락 이후 대한축구협회의 워크샵에서 16강 벨기에전에서의 패배 이유 중 하나로 특출한 한 선수가 팀에 악영항을 끼쳤다라는 발언을 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특정한 선수가 누구인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축구팬들 대부분은 이승우를 겨냥한 발언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으며, 더불어 16강 진출 이후 선수들에 자만심이 생겼다는 최진철의 발언에도 그럼 그걸 관리하라고 임명한 감독은 대체 왜 있냐?며 선수단 관리 실패를 선수 탓으로 돌리는 최진철을 까고 있다.[19] 물론, 이승우를 비롯한 어린 선수들에게 경중을 울리기 위한 충고라는 여론도 있었지만 열세한 여론이었고 아직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숙하지 못한 어린 선수들을 대상으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해당 발언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최진철 감독을 비판하는 여론이 대다수였다.[20]
하지만 2019년, 발언 대상이 된 선수의 행보와 극성 팬덤의 행태가 재조명되면서 최진철 역시 재평가 되고 있다. 관련 뉴스. 물론 공개석상에서 어린 선수를 콕 찝어 비판한 게 잘한 행동은 아니지만, 이는 다른 나라의 감독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일이며, 그 대상이 당시 과대평가되며 극성 팬덤을 몰고 다니던 이승우라서 더 까인 면도 있다. 한 예로, 기자와의 브리핑 도중 이승우의 드리블, 패스 타이밍을 못 잡는 게 좀 아쉽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 데 이때는 최진철이 오히려 격려조로 말하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해선 안될 말을 한 것처럼 비난을 받았다. 최진철이 공개 비판을 하기 이전 시점부터 이승우 팬들의 공개 비판에 대한 기준 자체도 매우 맹목적이고 정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감독이 선수를 감싸는 것과 선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며 선수가 그날 잘했냐 못했냐 어느 부분에서 부족했냐는 어느 감독이든 충분히 지적하거나 공개 발언에서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인데도 말이다. 멘탈은 그렇다 치고 실력에 대한 비판까지 하지 말고 감추는 것이 감독의 당연한 도리라고 우길 정도로, 최진철에 대한 여론이 극성맞았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또한 당시엔 최진철이 꼰대라거나 뭘 잘 모른다는 식으로 비난 받았는데, 이승우의 인성 및 훈련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안익수, 신태용 등 이후 감독들이나 선배 선수들도 지적한 바 있다. 그럼 이들 모두가 꼰대이거나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바로 옆에서 훈련 시킨 감독이 선수에 대해 자세히 알까? 아니면 인터넷에서 댓글을 다는 네티즌이 선수에 대해 자세히 알까? 심지어 이승우는 2019년 기준 벨기에 중하위권 팀에서도 훈련 태도 불성실을 지적받고 훈련 중에 라커룸으로 쫓겨나서 출전을 아예 못하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21] 최진철의 소통방식 역시 비판받을 부분이 물론 있지만, 전문가로서 평가를 내린 부분까지[22] 듣기 싫은 소리라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꼰대 취급하고 듣지 않았던 여론과 선수도 비판받아 마땅하다.[23]
단 이승우는 현재 수원 FC로 복귀해서 부주장까지 뽑히는 등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최진철은 평이 떨어졌기에 많이 역전된 상황.
3.3.2. 포항 스틸러스 감독[편집]
U-17 월드컵이 끝난 후 같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멤버였던 황선홍의 후임으로 포항 스틸러스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 일단 최진철 본인과 포항 측은 이를 부인했지만...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 결국 2015년 11월 23일, 황선홍 감독의 후임으로 포항 스틸러스 감독직에 취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포항빠들로서는 그리 환영하는 입장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최진철이 감독으로서 보여준 성과라고는 유소년 레벨이 전부라는 것과 포항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다른 팀의 레전드를 데려온다는 것이 영 못마땅하기 때문. 팬덤에서는 황선홍 감독과 동고동락해 온 강철 코치를 감독직으로 승격시키거나, 포항의 주축 멤버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 등을 키워낸 김병수 전 영남대학교 감독, 포항의 레전드 중 한 명이면서 같은 팀 컬러를 고수했던 박경훈 전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 등을 후보에 놓았는데, 전혀 생뚱맞은 인물이 왔으니... 하지만 예산 축소로 외부 영입은 커녕 있는 선수단도 거덜나기 직전인 포항의 2016 시즌 감독직은 사실상 독이 든 성배와 같은 지라 고육지책 중 하나라는 평가도 일단은 있었다.[24]
단, 1990년대 말부터 포항 스틸러스에 존재하는 기묘한 감독 징크스가 있는데, 퐁당퐁당 형식으로 삽질을 한다는 것. 아직 맛가기 전의 전성기였던 박성화 시절 => 재미없는 수비 축구로 팬들 다 떠나 보내고 남은 팬들과 대립하던 최순호 시절 => 스틸러스 웨이가 정착되고 리그와 아챔을 정복한 세르지오 파리아스 시절 => 흑역사(...) 와우데마르 레무스 시절 => 쇄국축구로 다시 전성기를 만들어낸 황선홍 시절 등 영광과 삽질을 번갈아 하는 상황의 반복. 징크스가 들어맞는다면 이번 최진철 시기는 삽질한다는 패턴인지라(...) 포항빠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25]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2016년 6월 기준으로 포항은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 H조에서 최하위로 탈락, 리그에서는 8위라는 참혹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심지어 대한축구협회 FA컵은 홈에서 챌린지 팀인 부천 FC 1995에게 슛 하나 제대로 날리지 못하였고, 특히 신화용의 선방쇼에도 불구하고 0:2로 패하며 32강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포항빠들 사이에서는 와우데마르 레무스[26] , 최진할, 최빌 등의 안 좋은 소리들을 들을 정도로 FIFA U-17 월드컵의 커리어를 말아먹는 것으로 모자라서, 본인의 감독 커리어 자체도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파리아스 및 황선홍 두 감독이 10년 세월에 걸쳐 쌓아올린 스틸러스 웨이는 최진철이 U-17에서 보여줬던 선수비 후역습 전술과는 극상성이었던 탓에, 일부 축빠들은 최진철 선임 소식이 뜨자마자 과거 숙적 울산 현대의 조예스처럼 어설프게 팀 컬러를 뜯어고치려다가 팀이 망가지는 것 아니냐 우려를 표했다. 심지어 시즌 전 인터뷰에서 '제로톱은 없다'느니 '스피드를 접목시키겠다'느니 물정 모르는 소리들만 줄창 늘어놓으면서 포항 축구를 본 적도 없는 거 아니냐는 실소마저 자아냈다.[27]
더군다나 포항 전력의 80%를 차지하는 손준호까지 시즌 시작 2달 만에 시즌 아웃을 당하고, 구단의 미적지근한 투자, 미드필더진의 줄부상과 얇은 스쿼드, 신인들의 경험 부족으로 2016년 포항의 상황은 황선홍 시절보다 더 답이 없는 스쿼드인지라 과연 감독만의 책임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 그런 와중에 궁여지책으로 스리백으로 잠시 전환하면서 일단 승점을 쌓으며 리그 중위권에서 버텨나가고 있다. 결국 부상자들이 복귀하고 포항 구단에서 약속한 전력 보강이 가능한 여름이 지나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듯 하다.
결국 5월, 대한축구협회 FA컵에서 상대를 얕잡아보고 이도 저도 아닌 스리백 - 투톱 전술을 써서 정예 멤버를 내보내고도 부천 FC에게 0:2으로 완패하고, 뒤이어 동해안 더비에서도 답이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다시 여론은 악화 중이다. 무엇보다 선수단의 상황이 안 좋은 건 별개로 치더라도, 경기 중에 감독이 정신줄을 놓으며 의미없는 교체 카드를 남발하다가 경기를 더욱더 말아먹는 게 한둘이 아닌지라 팬들의 비난을 더욱 받고 있다. 더욱이 시즌 중반 전임자인 황선홍 감독이 포항의 라이벌 구단 중 하나인 FC 서울의 수장으로 반년 만에 리그에 복귀함으로서 최진철로서는 더욱 더 부담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전반기 이후 구단에서도 외국인 용병 쿼터를 모두 맞춰주었으나, 수비 축구를 하려는 것 같은데 수비는 안 되고, 공격은 원래부터 안 되었고, 미들은 그냥 증발한 총체적 난국을 보여주며 팀의 성적까지 수직 낙하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제는 리그 경기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선수들 컨디션과 체력 관리가 엉망인 건 보너스. 그 결과 전반기 막판 3연승을 끝으로 11경기 2승 2무 7패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찍으며 명문팀 포항을 강등권으로 처박아버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팬들과의 소통은 부족하지, 선수 교체도 제대로 못 하지, 경기 도중 상대 감독의 전술 변화에 못 맞추지, 경기 후 인터뷰는 선수 탓 뿐이지(...). 가히 포항빠들의 분노 수치는 이미 한계점을 넘은 상태다.
자세한 행보는 포항 스틸러스/2016년 문서 참고.
결국 후반기 전남 드래곤즈, 수원 FC,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등에 골고루 승점 3점씩을 퍼다주는 바겐세일을 벌이며 불과 2달 만에 강등권에 있던 전남과 자리 바꿈을 하면서 스플릿 리그 시행 이후 처음으로 포항은 상위 스플릿 진출에 실패하게 되고, 강등권과 승점 4점차까지 추락하게 된다. 상하위 스플릿을 결정짓는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결국 K리그 클래식에서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6년 9월 24일,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최진철의 참혹했던 포항 스틸러스 감독 시대는 마무리되었다.[28]
3.3.3. 중국 생활[편집]
포항 감독 사퇴 뒤,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8년 한국프로축구연맹 경기위원장으로 부임해 1년 간 행정가로 활동하였으며, 2019년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이끄는 중국 23세 이하 축구 대표팀의 코치로 합류하였다. #
하지만 2019년 9월,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경질되면서 같이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20년 9월 같은 중국 청소년 대표팀 코치였던 최진한이 네이멍구 중여우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동시에 팀의 코치로 부임하였다. # 2021년부로 팀이 해체되며 팀을 떠났다.
2021년 도쿄 올림픽 직후 김학범 감독의 후임 자리를 두고 황선홍, 최용수 등과 함께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차기 감독 얘기가 진하게 나왔으나 결국 황선홍에 밀려 선임되진 못했다.
4. 방송 경력[편집]
- 2018년 히딩크의 축구의 신에 출연했다.
- 2021년 2월 11일~12일 SBS 설특집 파일럿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축구 감독 4인방[29] 중 1인으로 출연했다. 이후 2021년 6월 16일 정규 편성이 확정. 파일럿에서는 구척장신이 꼴등을 하면서 정규 편성 전 전격 경질되었으나[30] , 신규 팀인 FC 월드 클라쓰[31] 감독이 되었고, 골때녀 리그에서 최종 3위를 차지했다. 시즌 2에서는 신생팀 FC 탑걸의 감독을 맡았다. 탑걸의 슈퍼리그 진출 실패 후에 월클로 다시 복귀했다가 시즌 3에서 FC 탑걸로 복귀해 사상 첫 슈퍼리그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시즌 4에서는 신생팀 FC 스트리밍파이터 감독을 맡아 팀을 창단 3개월 만에 승강전에 진출시키면서 세계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 아는 형님에도 출연하였다. 골때녀 이후로 방송 출연을 활발하게 하는 중이다.
- 이후 전설이 떴다 군대스리가에도 출연하였다.
4.1. 골 때리는 그녀들[편집]
자세한 내용은 최진철/골 때리는 그녀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2010년 KT에서 나온 CF 황선홍밴드 멤버로 발탁(?) 됐는데 비하인드로 나온 장면에서 심각할 정도로 노래를 못 불렀다. 그래서 나온 별명이 발창력 최진철. 유튜브에 영상이 몇몇 있는데 들어보면 진짜 못 들어줄 정도.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왔는데, 전국 노래자랑 버전, 미녀는 괴로워 버전 등이 있다. 사실 전문 운동선수들이 노래를 잘 부르기가 힘든데, 평생 운동만 했을 뿐 음악 같은 건 배울 시간도 없는 건 둘째치고 노래는 온몸에, 특히 목에 힘을 빼고 불러야 하는데, 평생 운동만 하면서 힘을 주고 근육을 단련하는 연습만 하다 보니 노래를 부를 때도 자연히 목근육과 성대를 강하게 조여서 부르게 되어 목 조이는 소리가 나는 것이다.
- 김남일과 더불어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의 파격적인 선수 등용의 수혜자. 정확히 말하면 이 둘 뿐이다. 2002년 멤버들은 아무리 늦어도 허정무호 1기에서 태극마크 달았던 레귤러 자원들과 아마추어 시절부터 전국구 유망주(설기현, 이천수, 최태욱, 송종국) 자원들의 조합이라 정말 파격적인 발탁이라 할 선수는 1997년 친선 경기로 데뷔전만 마치고 대표팀과 인연 없던 최진철과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선발되긴 했으나 투박하다는 혹평만 받고 전남 서포터즈조차 왜 뽑냐고 성토할 정도였던 김남일 뿐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후에는 현대자동차 베르나 광고 모델[32] 로 기용되어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야말로 천리마가 뒤늦게 백락을 만나 활짝 꽃을 피운 사례이다.
- 프로 데뷔 후 은퇴할 때까지 전북에서만 뛰었기 때문에 전북특별자치도 출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사실은 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이고 성장 자체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했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초중고를 모두 나왔기 때문에 제주특별자치도 내에서는 아직까지 제주특별자치도를 대표하는 최고의 축구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 187cm의 큰 신장에 비율도 좋고 몸매 라인이 빼어나 정장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 거기다가 홀쭉한 얼굴에 진한 눈썹 때문인지 이창훈을 닮았다는 시청자 평도 있다.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수트를 입은 모습을 보면 타 구단 감독진을 압도하는 기럭지와 우월한 수트빨로 완벽하게 회춘하여 미중년 포스를 낸다.
- 2021년 SBS 연예대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2022년에는 올해의 리더상을 수상했다.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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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도군에서 태어나 5살 때 부모님과 함께 제주특별자치도로 이주했다. #[2] 한국프로축구연맹 공식 프로필. 링크[3] [4] 1998년~1999년에는 공격수로 뛰기도 했다.[5] 그래도 상무 축구단에 들어갔기 때문에 군대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상무는 아마추어 리그 소속이었기 때문에 프로 데뷔를 했다는 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이렇게 병역을 미리 해결하는 경우로는 마해영, 박상오가 있다.[6] 당시 K리그에서 득점왕까지 차지했던 김현석조차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못 올릴 정도였으니 '공격수 최진철'의 자리는 더욱 없을 수 밖에. 게다가 지금의 강호 전북과 달리 이때는 팀이 간신히 유지만 하던 시기로, 천안 일화와 함께 조명도 없는 경기장에 손에 꼽을 관중 모아 놓고 경기하는 비인기 구단으로 통했던 때다. 박성배도 1998 시즌 신인 라이벌로 묶이고 유상철과 득점왕 경쟁까지 했음에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7] 참고로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 중 유일하게 1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당시 차범근 전 감독 신격화에 한창이었던 주요 언론들 조차도 최진철 홀대(?)는 옥의 티라고 비판했었고, 최진철 본인은 당시 나는 국가대표와 인연이 없는 운명이구나라 생각했었다고.[8] 실제로 김태영, 최진철 둘 다 비에리가 힘이 장사더라고 술회할 정도로 버거웠던 상대인지라 비에리가 우격다짐으로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가자 결국 헤딩으로 선제골을 내주기는 했다. 또한 악랄한 팔꿈치 공격까지 감행하는지라 김태영이 코뼈가 내려앉는 중상을 입을 정도였다보니 이런 위협에 눌려서 추가로 골을 두들겨맞지 않은 것이 다행인 수준, 하지만 풀타임으로 비에리의 엄청난 떡대를 막아낸 최진철은 경기 종료 후 완전히 탈진하여 링거를 맞아야 했다. 체력적으로 엄청나게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비에리를 막았던 것이다.[9] 지금은 월드컵 통산 최다 득점 및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한 레전드 공격수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클로제는 신인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미 조별리그에서만 헤딩으로 무려 5골을 넣을 만큼 엄청난 성장의 조짐을 보였고, 최진철은 이에 맞서 밀리지 않는 체격을 바탕으로 클로제와 헤딩 경합을 다투었으며 이를 넘지 못한 클로제는 골을 기록하지 못하였다.[10]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아데바요르는 실제로 붙어보니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평가하며, 오히려 선제골을 넣었던 쿠바자가 훨씬 위협적이었다고 했다.[11] 필리페 센데로스 역시 골을 넣었지만 부상을 입었다. 양쪽 모두 피를 흘렸지만 한쪽은 환호하고 다른 한쪽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12] 이해를 돕자면, 평균 신장이 지금과 3cm~4cm 가량 차이가 나던 시대의 187cm는 지금으로 따지면 190cm 초반에 해당한다. 20년 후 벤투호의 월드컵 대표팀 명단 중 필드 플레이어 최장신이 190cm의 김민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동아시아 최강급의 피지컬로 손꼽힐 수준이 맞았다.[13] 단, 순간 속도가 느릴 뿐 좋은 운동 능력으로 초등부 육상 수상 경력이 다수 있을 정도로 평균 속도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30대였던 히딩크호 당시 측정한 바에 따르면, 유상철과 함께 100m를 12초 초반(평균 속도로 따지면 약 30km/h)에 끊었다고. 윙백으로 데뷔한 선수와 대등한 속도면, 세계 기준으로도 평범하면 평범했지 절대 느린 편이 아니다.[14] 일례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상대한 크리스티안 비에리는 피지컬로는 세계 최강급에 속하던 선수였다. 유럽에서도 작정하고 힘대힘으로 붙어서 그를 이길 수비수가 많지 않았다. 최진철도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 당시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막느라 탈진해서 경기 후 링거를 맞아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15] 브라질 0:2 패, 나이지리아 2:2 무, 크로아티아 2:2 무.[16] 피파 유튜브.[17] 당시 라인업 자료 1, 당시 라인업 자료 2[18] 1999년 최성용의 오른발 크로스에 이은 김도훈의 골로 1:0 승리를 거둔 적은 있지만 이 경기는 A매치 평가전이었다.[19] 여담으로, K리그 B급 발언으로 덩달아 까였던 같은 2002 멤버인 홍명보가 연상된다는 평가도 있다.[20] 사실 이런 경우는 어느 나라 축구계에서도 왕왕 볼 수 있는 거지만. 발언 대상이 딴 선수도 아니고 하필...[21] 근데 이건 나중에 이승우가 밝힌 바로는 감독이 이승우에 상담요청도 무시하는 등 무시하고 별 큰일도 아닌데 과장돼서 보도 되었다고 밝혀졌다. 게다가 후임 감독과 팀 주장에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성실하고 열심히 한다고 밝히며 전혀 틀린 말임을 알수 있다.[22] 불성실하다고 한 건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한 때가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기량을 평가할 때 나온 발언이다.[23] 이승우의 팬덤은 원래부터 비판에 대한 입막음이 심하기로 악명 높다. 이승우에게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하거나 대접을 안해주면 무조건 감독을 공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이승우가 대놓고 반항을 하는 상황에서도 기용 안 했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전 국대 감독까지 막 까이고 있는 판이다. 정작 본인은 논란에 사과도 하고 나이 먹으면서 비교적 조용히 지내는데 괜히 팬들만 아우성. 이승우와 엮인 감독 중에 이승우 팬들에게 좋은 소리 들은 감독이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자.[24] 후일 밝혀진 바로는 오히려 황선홍 감독은 강철 코치를, 포항 프런트에서는 김병수 전 감독을 추천하였으나, 군산고등학교 - 전북대학교 출신의 신영권 전 포항 스틸러스 사장이 독단으로 최진철을 앉혔다고 한다. 결국 낙하산 인사였던 셈.[25] 이 징크스는 후술한 내용대로 그대로 들어맞고... 훗날 짝수였던 김기동 전 감독이 선전하면서야 깨진다. 하지만 김기동 전임 최순호 전 감독이 포항 감독을 두 번 했기 때문에 김기동 감독이 사실상 홀수라고 주장하는 팬들도 있는 상황.[26] 왜 이런 평가를 받는지는 와우데마르 레무스 항목 참고. 참고로, 해당 인물은 포항빠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흑역사로 기록되어 있다.[27] 포항 축구를 본 적도 없이 스틸타카 별칭만 듣고 티키타카 아류라고 생각하는 입축구 X문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착각이다. 제로톱은 궁여지책일 뿐, 황선홍 감독은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없으면 임대라도 해서 시즌에 임했다. 그리고 스틸러스 웨이는 티키타카와 정반대로 점유율을 포기하고 공격 전개 속도를 올리는 철학이다.[28] 정작 사퇴한 날 치뤘던 마지막 경기에서는 승리를 했다.[29] 나머지 3인은 황선홍, 김병지, 이천수. 이후 정규 편성 때 최용수, 이영표가 추가로 합류했다.[30] 에스팀 소속 모델들로 구성된 팀이다. 최진철이 경질된 후 최용수가 신임 감독으로 선정되었다.[31] 외국인들로 구성 된 팀이다.[32] 20년이 지난 2022년 10월에는 기아의 대형 세단인 기아 K9 광고 모델로 발탁되었다.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