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자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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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창경궁 자경전
昌慶宮 慈慶殿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777년 (창건)
1865년 이후 (경복궁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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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자경전
1. 개요
2. 역사
3. 구조



1. 개요[편집]


창경궁의 대비전이다. ‘자경(慈慶)’ 뜻은 ‘자친(慈親), 즉 (왕의) 어머니가 복(慶)을 누린다’이다. # 훗날 고종 시기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처소로 지은 경복궁 자경전도 여기서 이름을 땄다.


2. 역사[편집]


1777년(정조 1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다. 위치는 양화당 북쪽의 언덕이었다. 왜 높은 곳에 지었는지는 모르나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는 혜경궁이 사도세자사당경모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려던 것이고, 둘째, 창덕궁과 가까우면서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에 지었다는 것이다. 창덕궁창경궁 지대의 높이 차이가 꽤 나서[1] 창덕궁에 살던 정조가 원래 혜경궁이 머물던 창경궁 경춘전으로 일일이 문안가려면 꽤 높은 계단을 이용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

첫 이름은 자경당(慈慶堂)이었다. 공식적으로 혜경궁 홍씨임금숙모이자[2], 왕이 되지 못한 전(前) 세자일 뿐이라 ‘전(殿)’[3]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는 혜경궁을 자신의 생모로서 극진히 대접했기에 사람들도 처소의 이름을 자경전으로 불렀고, 1778년(정조 2년)부터는 공식적으로도 자경전으로 언급했다. # #

창경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위치도 그렇고, 규모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는 사람이 사람이니만큼 건물의 위상은 굉장히 높았다. 혜경궁의 손자 순조가 훗날 지은 《자경전기》에 따르면 창경궁에서 위상이 법전, 즉 궁궐에서 제일 중요한 전각과 같다고 했다.

1780년(정조 4년)에는 화빈 윤씨의 가례를 여기서 올렸다. # 혜경궁은 이곳에서 계속 살다가 순조가 즉위한 후인 1802년(순조 2년)에 경춘전으로 옮기고 14년을 더 살다가 1816년(순조 16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혜경궁이 나온 뒤엔 왕대비 김씨(효의왕후)가 살았고 1821년(순조 21년) 여기서 승하했다. 1827년부터 1830년까지 효명세자대리청정하던 시기에는 이곳에서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순조 부부생일을 축하하며 즉위를 기념하는 잔치를 열었다. # # # 이때 연회공간으로 사용하면서 건물을 증축했다.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헐어서 자미당[4]으로 지었다. 이후 다시 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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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실박물관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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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시절의 모습
1909년(융희 3년)에 자경전 터 옆에 제실박물관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가 박물관으로 바꾸었으며 박물관을 덕수궁으로 옮긴 1937년부터 장서각[5]으로 활용했다. 해방 이후 1981년에 장서각의 보관 문서 전부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긴 후 빈 건물로 방치했다가 1992년 11월에 철거했다. 현재는 빈 터이며 자경전 터라는 표지판만 있으며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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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터[6]

3. 구조[편집]


※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옛 기록이나 그림들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 1827년에 제작한 《진작정계의궤》와 1829년에 제작한 《기축진찬의궤》에서 묘사한 모습이 다르다. 위에 언급했듯, 연회공간으로 쓰면서 증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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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이 높고 창경궁이 낮다.[2] 임오화변 이후 영조정조사도세자효장세자양자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정조의 법적 어머니는 현빈 조씨(효순왕후로 추증)였다.[3] 건물의 이름도 위계가 있었다. 제일 높은 것이 ‘전(殿)’이었다. 임금왕비, 상왕대비만 쓸 수 있었다. 세자도 원칙적으로는 못 쓰는데 경희궁 승휘전, 창경궁 저승전같이 아주 용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4] 위치는 경복궁 교태전경복궁 자경전 사이이며 이 건물마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5] 왕실 문서 자료관.[6]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진작정계의궤》의 《자경전도》
《기축진찬의궤》의 《자경전도》
  • 창건 당시부터 1827년까지 자경전의 모습을 보면, 정면 5칸으로 동, 서, 남쪽에 행각을 두고 자경전 본채와 연결시켜 ‘ㅁ’자 형태를 띄게 했다. 소맷돌이 없는 3개의 계단을 중앙에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1827년에서 1829년 사이에 증축한 모습은 《동궐도》에서 볼 수 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나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더 넓어졌다. 중앙의 3칸을 대청으로 두고 앞, 뒤로 툇간을 두었으며 대청 양 옆의 온돌로 두었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2칸의 방을 덧대었으며 동쪽 칸의 외부는 가퇴를 두고 나무 기둥으로 받쳤는데 가퇴의 외면에는 창문이나 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 전면에 월대를 두어 위엄을 돋보임과 동시에 여러 행사를 하기 편하게 했다. 계단도 전과 같은데 새 건물의 경우, 정면의 서남쪽에도 계단이 보인다. 각도 상 보이지 않으나 정황 상 동남쪽에도 계단이 있었던 듯하다. 이 외에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저 정도도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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