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섭/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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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최희섭


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4. KBO 리그 입단
4.1.1. 2007 ~ 2008 시즌
4.1.2. 2009 시즌
4.1.3. 2010 시즌
4.1.5. 2012 시즌
4.1.7. 2014 시즌
5. 국가대표 경력
6.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최희섭의 선수 경력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아마추어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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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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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청룡기 우승 후. 유니폼을 입은 윗줄에서 4번째가 최희섭, 앞줄에서 3번째가 이현곤이다.

영암군 시종면에서 자라다가 5학년 때, 송정동초 박태범 감독[1] 밑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광주광역시 대표팀으로 선정되어, 이현곤과 함께 6학년 당시 전국대회에 나가 우승하였다.

광주일고 시절, 191cm의 키에 110kg에 육박하는 몸무게로 한국인으로선 독보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

1998년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박찬호로 인해 한창 메이저리그 붐이 일어났을 때 미국에 진출, 시카고 컵스에 입단했다. 이 때 고려대학교를 입학하자마자 중퇴했다. 특기생 TO 문제 때문에 법학과에 배정됐는데, 자퇴원서의 사유란에 당당하게 "메이저리그 진출"이라고 적어서 법대 학사지원부 직원이 당황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다만 대한야구협회의 사전 동의 없이 미국으로 진출한 것 때문에 그는 김병현과 함께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로 인해 해태의 지명권도 날아갔다. 9년 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때 다시 지명을 받긴 했지만.


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편집]



3.1. 시카고 컵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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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A에 있을때는 타자 신인 중 최고의 잠재성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고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유망주 순위에서도 2001, 2003년 22위에 선정되는 등 기대가 촉망됐다.

그렇게 콜업된 메이저리그에서도 초반 나름대로 활약했다. 2003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4월의 신인으로 선정되는 듯 막 잘 나가려고 했으나, 6월 8일 뉴욕 양키스전에서 내야 플라이를 잡기 위해 마운드 근처로 접근하다 투수 케리 우드와 충돌, 뒷머리를 땅에 부딪혀 6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했고, 이 때 생긴 뇌진탕은 그 후로도 계속 그를 괴롭혔다. 다만, 은퇴 직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최희섭은 이후 자신이 부진했던 것에 대해 '솔직히 실력에서 버거웠다'며 뇌진탕으로 변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관련 인터뷰


3.2. 플로리다 말린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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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시즌 종료 후 말린스데릭 리[2]와 트레이드 되면서 제프 코나인과 같이 플래툰 시스템으로 엮여 출전하면서도 전반기에만 15홈런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치고 있었는데..


3.3. LA 다저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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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7월 30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전격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다저스가 브레드 페니를 받아오면서 말린스에 폴 로두카와 기예르모 모타, 후안 엔카나시온을 넘겨주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다저스가 추가로 최희섭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요구한 것은 아니고 당시 단장이던 폴 데포데스타는 빌리 빈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라서 출루율을 중요시하던 사람이었는데 데포데스타의 눈에 최희섭[3]이 걸려든 것.

단, 트레이드 이후에는 홈런을 한 개도 추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5년에도 플래툰 시스템으로 엮여 올메도 사엔즈와 번갈아 출전했지만, 그 와중에도 6월 13일 한 경기 연타석 3홈런을 포함하여[4] 3경기 6홈런이라는 미칠 듯한 포스를 보여주는 등 15홈런을 기록했다. 그 해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 초청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최희섭 자신의 순수한 실력으로 올라가기보다는 2006년 봄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앞둔 메이저리그 사무국 입장에서 WBC 개최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피력하기 위해 뽑혔던 것. 참고로 최희섭이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서 성공한 홈런이 5개였는데 이는 2014년 기준으로도 다저스 역대 홈런 더비 출전 선수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가 2015년 신인으로서 홈런 더비에 참가한 작 피더슨이 결승까지 가면서 가볍게 최희섭을 뛰어넘었다. 피더슨이 결승까지 친 홈런 숫자는 최희섭의 7.8배나 된다.

한편 이 당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잘 나가던, 어쩌면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레전드 3루수가 될 수 있었던 스캇 롤렌과 본의 아닌 충돌이 있었고 이로 인한 부상은 롤렌의 커리어에 큰 악영향을 주게 된다.[5]

시즌 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하여 병역특례를 받았다.


3.4.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편집]


하지만 2006년 노마 가르시아파라, 라파엘 퍼칼, 빌 뮬러 등이 영입되며 내야 자원들이 크게 늘어났고, 여기에 플래툰으로 나오던 올메도 사엔스한테 밀리면서 결국 자리를 잃고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이 과정은 좀 복잡한데, 토미 라소다와 폴 디포테스타의 다저스 내 권력 투쟁에서 라소다가 승리해 디포테스타가 다저스를 떠나자 그가 데려왔던 최희섭은 얼떨결에 휘말려 이도저도 아닌 입장이 되어 이적을 빙자한 쫓겨남을 당했던 것. 거기에 구단측에서 당시 40인에 들어있던 최희섭의 WBC 출전을 반기지 않았음에도 출장을 강행했던 것에 대한 징계성 트레이드이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잠재력을 살리지 못하고 계속 기량이 정체되었던 것이 가장 주요한 이유. 그 이후 내리막길이 계속되었다.


3.5. 탬파베이 레이스 시절[편집]


결국 2007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로 이적했다가 부상 악화와 기량이 기대만큼 발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답보 상태인 점 등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구단에 방출을 요구하여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3.6. 총평[편집]


마이너리그 당시 비슷한 유망주 랭킹에 위치했던[6] 알버트 푸홀스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특급 타자로 성장한 반면에 완전히 추락한 케이스. 후에 푸홀스가 마이너리그에 있는 최희섭을 보고 놀라워했단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최희섭의 성장 실패는 상당수의 스카우터들이 지적한 몸쪽 공 적응을 잘하면 40홈런 올스타 1루수, 못하면 AAAA리거가 나쁜 쪽으로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본인의 메이저리그 의욕이 좀더 강하고, 경험을 쌓아 몸쪽 공에 대한 적응도를 조금이라도 높였다면 언젠가 재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7]이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1루수였고 마이너시절 진짜 최희섭의 라이벌이었던 카를로스 페냐 역시 최희섭과 비슷한 약점을 가지며 비슷하게 플래툰 1루수로 커리어를 이어왔으나, 2007년 최희섭을 밀어내고 빅리그 기회를 잡더니 잠재력을 제대로 터뜨리며 MVP 투표 2위에 올랐다. 비록 2007 시즌의 포텐 폭발 이후로는 다시 성적이 뚝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포텐 터지기 전처럼 공갈포짓만 하는게 아니라 많은 볼넷을 통해 타출갭을 1할 이상 유지하며 준수한 OPS 히터로 수년 정도 MLB에서 더 활약했으니 꽤나 성공한 야구 인생을 산 것은 사실이다. 마해영의 야구본색에서 다시 20대로 돌아가도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자신은 없다는 솔직한 인터뷰를 했었다. 사실은 트리플 A 때부터도 수준격차를 너무 심하게 느껴서 힘들었다고 한다.


4. KBO 리그 입단[편집]



4.1.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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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2007 ~ 2008 시즌[편집]


2007년 5월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로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고향 팀 KIA 타이거즈의 제의에 응해 KIA에 입단, 국내 팬들의 엄청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부상을 이유로 1군 52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며 팬들이 기대하던 홈런 또한 7개밖에 치지 못했다. 그래도 후반기에 단타 위주의 타격을 보이며 3할 3푼의 높은 타율을 기록해 KIA 팬들은 2008년을 기대했다.

그러나 각종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55경기 출장에 타율 0.229, 22타점, 6홈런, OPS 0.640의 최악의 먹튀짓을 기록하며 KIA의 주적이 되었다. 은퇴 발표 후 본인이 밝힌 것에 의하면 2월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말하고 싶지 않아서 숨기고 치료에 적극 임하지 않고 몸만들기에 들어가서 더 나빠졌다고 한다. 당시 최희섭이 부상 치료를 위해 2군으로 내려가자, 조범현 감독은 '일요일날 통증을 느꼈으면 휴식일에 말을 해서 조치를 취하게 해야지 화요일 경기가 시작되고서야 말하면 어떻게 하나, 프로로서 마음가짐이 안 되어 있다'고 질책했으나 당시 KIA의 성적이 부진했던 터라 팬들은 조범현과 최희섭을 함께 깠다.[8] 최희섭과 플로리다 말린스 시절 잠시 인연을 맺었던 박철영 당시 SK 배터리코치는 최희섭에게 "기량 문제를 떠나 체중 감량이 우선"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체지방이 있어도 꽃등심처럼 마블링이 퍼져 있는 상태라면 문제없다. 희섭이는 마블링이 아니라 일부분에 기름이 낀 것"이라면서 "몸의 회전력이 과거보다 상당히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여담으로 최희섭의 홈 데뷔전은 이 경기로 엄청난 막장 경기가 되었다.

메이저리그 시절 약혼했던 일본인 스포츠 리포터 야스다 아야와 2007년 11월 27일 파혼, 그 충격과 더불어 반년만에 국내 투수들에게 모든 약점을 간파당한 채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다. 게다가 WBC 때의 모 기사로 인해 퍼진 자만심 넘치는 이미지와 함께 허우대에 맞지 않게 두통[9]등 각종 부상을 호소해 약골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인생의 승리자였던 최희섭은 한순간에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4.1.2. 2009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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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치부심하며 몸만들기와 훈련에 열심히 임하였다. 2009년에 성적을 내지 못하면 은퇴하겠다는 기사가 뜨기도 할 만큼 독심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9년에 적어도 수비는 확실히 메이저리거급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부진하던 타격도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일취월장했다. 파워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평. 한 번은 경기중에 타격폼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타격을했는데 그게 폴대를 살짝 비껴간 파울홈런이 나왔을 정도. 시즌 중 김상현의 영입으로 타선에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데다, 워낙 포구 능력이 좋아서 내야진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10] 6, 7월 두 달 동안 타격에서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최희수비의 명성은 보여주며 주전 자리를 잡고 있다가, 8월에 대폭발했다.

8월 21일 SK전에서 24호 홈런을 치면서 김상현, 클리프 브룸바와 함께 홈런 공동 1위까지 올랐으나 바로 다음 타석에서 김상현이 홈런을 치면서 1위의 기쁨은 한순간 멀고도 먼 홈런왕의 길이 아닐 수 없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2009년/9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결국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트레이드로 친정으로 돌아온 김상현에 이어 2009년 시즌에 두 번째로 30홈런을 때렸으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8회말에 역전 쓰리런을 때려내 기적적으로 100타점을 채우면서 김상현에 이어 2번째로 3할 30홈런 100타점에 가입했다. 이로써 그를 향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잠들었다. 역시 프로선수는 실력으로 말한다. 특히 이 홈런은 엄청난 비거리로 날아가[11] 팬들이 한동안 몇 미터를 날아갔는지 알아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2009 시즌의 최종 성적은 거의 풀 타임인 131경기(535타석) 출전에 타율 0.308(리그 11위), 타점 100(리그 공동 3위), 홈런 33(리그 2위), OPS 1.023(리그 4위). 그 외에도 98득점으로 득점 부문에서 정근우와 공동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팀 공헌도가 높았으며, 수비섭이라고 불릴 정도로 1루를 안정적으로 지켜 KIA 타이거즈의 시즌 우승에 중심을 담당했다. 1루수 KBO 골든글러브도 압도적인 표차로 획득했다.

연봉협상의 의견차가 커지면서 2009년 12월 15일 팀에서 이탈했다. 최희섭이 욕심을 부렸다기 보다는 프런트에서 별다른 협상 의지없이 제시한 연봉액을 강요했다는게 중론. 결국 연봉 4억원의 100% 인상안에 재계약했다.


4.1.3. 2010 시즌[편집]


잠실야구장에서 장외 홈런을 치는가 싶더니, 기록원의 매의 눈과 경기장 안에서 그 공을 주웠다는 사람 덕분에 장외 홈런이 아닌 걸로 판정났다.

이렇게 좋은 페이스로 시즌을 시작하나 싶었으나 4월 성적은 어게인 2008….

2009년과 다름없이 전체적으로 부진한 기아 타선에서 그나마 제몫을 하고 있지만 작년보단 부진한 모습. 나지완의 부진과 김상현의 부상으로 중심타선에 제대로 된 선수가 없는 것도 성적 하락의 원인 중 하나이다.

최종 성적은 타율 0.286 21홈런 84타점 81볼넷. 확실히 전 시즌보다는 하락한 성적이었지만 4할 1푼대의 높은 출루율과 함께 OPS 8할 9푼대를 기록하면서 공갈포로 전락한 김상현과 달리 여전히 리그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시즌이 끝난 뒤 내년을 위해 이를 갈고 있다고 한다. 삽질을 했던 나지완, 손영민과 등산을 함께 가고 신혼여행도 포기할 정도.


4.1.4. 201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최희섭/선수 경력/201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5. 201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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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대 삼성전에서 끝내주는 시구를 보여준 이수정 씨와 한 컷.

정초부터 큰 논란에 휘말렸던 최희섭은 결국 전년 대비 57.5%가 깎인 1억 7천만원에 연봉계약을 맺었고 동시에 상벌위원회를 열어 구단 이미지 실추 및 팀워크 저해, 프로야구선수로서의 품위 실추 등을 이유로 최희섭에게 벌금 2,000만원과 정상적인 체력 회복까지 재활군 훈련에 임하라는 징계를 내렸다.#

손바닥 골절 부상으로 3개월이나 결장하게 된 김상현을 대신해서 4월 10일 홈개막전부터 1군에 콜업될 예정이다. 4월 11일 삼성전에서 0:0으로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팀의 승리를 이끄는 중요한 안타를 쳐낸데다 12일에는 2루타로 타점을 올렸다. 4월 15일에는 마수걸이 투런홈런까지.

특히 애리조나 전지훈련 다녀온 타자들이 죄다 삽질하는 상황에서, 이탈파문을 일으키며 국내에서 그것도 뒤늦게 훈련에 임한 최희섭이 이범호가 돌아오기 전까지 혼자 기아의 타격을 이끌고 있는 모양새라 야구는 잘한 놈이 잘한다며 기아팬들은 최희섭을 찬양중. 별명도 저메'대왕'으로 격상. 변수라면 동계훈련을 소화하지 못한 만큼 체력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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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2일 한화전에서 2타점 2루타를 날리고.

5월 22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8회말 무사 1, 2루, 팀이 3: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2타점 동점 2루타를 때려내며 크게 활약했다. 물방망이가 되어버린 기아 타선에서 이범호와 함께 쳐야 할 때 쳐 주는 선수로 칭송받고 있다.

6월 9일날 vs롯데전에서 롯데의 마무리 투수 김사율을 상대로 대타로 나와 동점 솔로 홈런을 작렬, 팀의 vs롯데전 12연패에 종지부를 찍는 데 교두보가 된 귀중한 한 방을 날렸다.

클린업 타자나 대타로 출장하며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동계훈련에 빠졌던 탓인지 체력 문제로 풀타임 선발 출장이 힘들어 보인다. 김주형이 대수비 땜빵을 맡기도 했지만, 답이 안 나오는 플레이로 결국 조영훈을 트레이드 해오게 만들었다.[12] 어찌됐든 아직 최희섭은 기아 타선에서 아주 빼놓을 수 없는 타자임은 분명하다.

7월들어 계속 부진하더니 7월 12일자로 치질수술을 받았다는 기사가 떴다.

7월 19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팀이 0:4로 이기던 5회말 2사 2루[13] 상황에서 가운데 담장을 넘는 투런 쐐기 홈런을 때려냈다. 팀은 0:6으로 완승. 시즌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홈런으로 장식하며 시원하게 마무리했다.

8월 9일 복통으로 병원에 갔더니, 요로결석 진단이 나왔다고 한다. 본인은 팀이 상승세를 타는 상황이라 빠질 수 없다며 입원을 거부하고 덕아웃에 나오고 있다.[14] 시즌 초 팀 이탈을 하던 상황에 비해 멘탈 측면에서 성숙한 모습이지만, 이범호김상현 모두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이라 걱정스러운 모습이다. KIA의 주축 클린업 선수들이 모두 골골대는 터라 하루빨리 대체 자원을 찾아야 하는 상황.

8월 14일, 이번에는 장염이라고 한다. 선동열 감독도 단단히 화가 난 듯하다.

9월 15일에는 치루 수술을 받으며 재활에 4주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시즌 아웃이 되었다.

시즌이 끝난 후 몸상태를 끌어올리며 마무리 훈련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몸을 잘 추스려서 2009년의 활약을 다시 보여주길 바랄 뿐.# 다행히 무사히 오키나와 마무리 훈련에 참가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이는 등 부진했던 2012년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4.1.6. 201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최희섭/선수 경력/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7. 2014 시즌[편집]


작년 9월말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을 했으나 회복이 더뎌 스프링캠프에 나서지 못했고 2014년 6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재활한답시고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중. 일단 본인 입으로는 마음은 늘 그라운드를 향한다고 하는데 팬들 반응은 매우 차가운 상황. 무슨 양심이 있어서 몸값은 1억은 꼬박꼬박 받아먹으려고 하냐는 비아냥도 들을 정도다.

5월까지 브렛 필의 맹활약으로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었나 싶었는데, 필이 부상을 당하자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는 중.

6월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6월 14일 드디어 근황이 공개 되었는데 재활하면서 12Kg을 감량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재활중이라는 소식도 함께 들려와 팬들의 한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또 소식이 없다가 7월 22일자 기사에서는 8월 말이나 9월쯤에야 겨우 타석에 들어설 수 있다고 했으나, 결국 9월 시행 확대 엔트리 진입에도 실패하였다는 기사가 떴다. 브렛 필이 2009년 최희섭과 비견되는 포스를 풍기는데다 멘탈은 비교도 안되는지라 은퇴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2014년 시즌은 결국 통으로 날리며 마감하였다. 심지어 2군에서조차 단 한 경기도 출전한 적이 없다고 한다. 예정되어 있었던 타격 훈련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SUN의 한숨 “최희섭, 야구할 의향은 있는 건지…” 팬들 사이에선 선감독과 손잡고 나가라고 아우성이다. 과연 2014 시즌 1, 2군에 코빼기도 안보이고도 연봉 1억을 지킬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할 일.

2014년 10월말 머리를 짧게 자르고 구단에 찾아가 마무리캠프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달라 읍소했다 한다. 역시나 또 어김없이 스토브 리그가 시작되자 열심히 훈련중, 내년에는 다르다라는 인터뷰를 했다.

선동열 부임 후 트레이드 소동부터 시작해 온갖 구설수로 선동열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그 때문에 선 감독 재임 기간중 고의적으로 태업했다는 의혹도 있다. 그래서 선 감독이 자진 사퇴했으니 이젠 잘하겠지...라는 의견이 없지 않으나, 전에도 몇 번 이런 전적이 있는데다 몇 년째 유리몸, 유리멘탈에 학을 뗀 팬들은 반응이 매우 차갑다. 선 감독이 기회를 주는데 아프다고 하니 쓸 수가 없었던것. 오죽하면 연봉협상 기간이 얼마 안남았다고 대놓고 억대연봉 유지하려고 언플하는거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

야구인생 최초로 내년 연봉을 백지위임했고, 12월 30일 연봉 7000만원에 사인했다고 한다. 1억 지키기는 깨졌지만 몇몇 팬들은 7,000만원도 아깝다고 깠다.


4.1.8. 2015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최희섭/선수 경력/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국가대표 경력[편집]



5.1. 2006 WBC[편집]


메이저리그에서 좌타 플래툰 1루수로서 활약하던 최희섭은 2006 WBC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이는 최희섭의 처음이자 마지막 성인 국제대회 참가로 남았다.

당시 박찬호, 김병현, 김선우, 서재응, 구대성, 봉중근 등 다수의 메이저리거가 대표팀에 합류했지만 타자는 최희섭이 유일했다. 하지만 유일한 타자 메이저리거임에도 불구하고 국민타자 이승엽의 존재 때문에 1루수가 아닌 지명타자로서 경기에 출전했다.

최희섭은 1라운드 1차전 대만과의 경기에서 5번타자 겸 DH로 선발출전했다. 이 날 대한민국대만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뒀다. 최희섭 역시 4타석 동안 1안타만을 기록했지만, 장타(2루타)를 기록하며 장타력을 뽐냈다.

대만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김동주가 해드퍼스트 슬라이딩 도중 부상을 입으며 팀의 4번타자를 잃게 되었다. 이에 최희섭이 1라운드 2차전 중국과의 경기부터 팀의 4번타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대표팀 4번타자를 맡은 이 날 4타수 2안타, 1타점의 맹타를 휘두르며 김동주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에 앞장섰다.

이후 1라운드 3차전 일본과의 경기 역시 4번타자 겸 DH로 선발출전 했지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3타수 0안타를 기록한 이후 홍성흔과 교체되어 나왔다. 하지만 팀은 이승엽의 투런포를 앞세워 1점차 신승을 거두며 조 1위로 2라운드(8강)에 진출했다.

2라운드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 역시 4번타자 겸 DH로 선발출전한 최희섭은 일본전에 이어 다시 한번 3타수 0안타를 기록하며 부진에 빠졌다. 비록 팀이 이번에도 1점차 신승을 거뒀지만 4번타자 최희섭의 부진은 상당한 걱정 요소였다. 실제로 최희섭이 대만, 중국과 같은 한 수 아래의 팀들만을 상대로 좋은 활약을 펼친 반면 일본, 멕시코와 같이 객관적 전력이 한국보다 위인 팀을 상대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국내에 비판여론이 생성되기 시작했다.[15]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바로 다음 경기인 미국전에 말끔히 해소됐다. 최희섭은 대회 처음으로 선발이 아닌 교체로서 투입됐지만 휠러를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작렬하며 팀의 기적같은 4점차 완승을 이끌었다. 상대투수가 앞타순의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보낸 후 때려낸 홈런으로 메이저리거로서 자존심을 단숨에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이 날 승리로 대표팀은 4강 진출을 조기에 확정짓게 됐다.

2라운드 3차전 일본과의 리매치, 최희섭은 4번타자로서 선발 라인업에 복귀했다. 하지만 1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상대로 맥을 못추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2타수 0안타로 부진한 후 김태균과 교체됐다. 다행히 팀은 이번에도 1점차 신승을 거뒀다.

일본과 세번째 만난 4강전 역시 4번타자로 선발출전한 최희섭은 또 한번 무안타로 부진했다. 이 날 3타수 0안타, 1볼넷을 기록한 이후 송지만과 교체됐다. 팀 역시 0:6으로 완패하며 초대 대회 3위에 만족해야 했다.

최희섭에게 2006 WBC는 긍정적인 모습, 부정적인 모습을 모두 보여준 대회였다. 1라운드에서의 활약과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때려낸 3점포는 메이저리거의 위용을 과시하기에 분명 충분했다.
하지만 4번타자 겸 DH로서 22타수 4안타(홈런 1, 2루타 1), 1볼넷의 부진한 표면기록, 최대 라이벌 일본을 상대로 8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모습은 분명 이름 값에 비해 아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기적과 같은 3위를 기록했고, 최희섭 역시 병역특례를 받게 되면서 훈훈한 분위기 속에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6.1. MiLB[편집]


  • 한 연도에 동일 구단 산하 여러 레벨의 기록이 존재할 경우, Rk → A- → A → A+ → AA → AAA 순으로 서술.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1999
랜싱 러그너츠(A)
79
290
.321
93
18
6
18
70
71
2
52
.422
.610
1.032
2000
데이토나 컵스(A+)
96
345
.296
102
25
6
15
70
60
4
43
.369
.533
.902
웨스트 텐 다이아몬드잭스(AA)
36
122
.303
37
9
0
10
25
25
3
25
.419
.623
1.042
2000 시즌 합계
132
467
.298
139
34
6
25
95
85
7
68
.383
.557
.940
2001
아이오와 컵스(AAA)
77
266
.229
61
11
0
13
45
38
5
34
.313
.417
.730
2002
135
478
.287
137
24
3
26
97
94
3
101
.406
.513
.919
2003
18
66
.258
17
4
1
6
16
12
0
10
.351
.621
.972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06
포터킷 레드삭스(AAA)
66
227
.207
47
9
1
8
27
35
0
49
.347
.361
.708
MiLB 통산
(5시즌)
507
1764
.275
494
100
17
96
350
335
17
314
.380
.511
.891


6.2. MLB[편집]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2
CHC
24
50
.180
9
1
0
2
4
6
0
7
.281
.320
.601
-0.4
-0.5
2003
80
202
.218
44
17
0
8
28
31
1
41
.350
.421
.771
1.0
1.1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4
FLA
95
281
.276
96
16
1
15
40
48
1
55
.388
.495
.883
1.5
1.5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4
LAD
31
62
.161
10
5
0
0
6
5
0
12
.289
.242
.531
-0.4
-0.3
2004 시즌 합계
126
343
.251
106
21
1
15
46
53
1
67
.370
.449
.819
1.2
1.2
2005
LAD
133
320
.253
81
15
2
15
42
40
1
42
.336
.453
.789
1.1
0.8
MLB 통산
(4시즌)
363
915
.240
220
54
3
40
120
130
3
157
.349
.437
.786
2.8
2.6

6.3. KBO[편집]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07
KIA
52
199
.337
67
17
0
7
46
20
3
18
.386
.528
.914
2008
55
188
.229
43
2
1
6
22
17
4
18
.295
.346
.640
2009
131
435
.308
134
23
0
33
(2위)
100
(3위)
98
(1위)
2
103
(2위)
.435
.589
(4위)
1.023
2010
126
444
.286
127
22
1
21
84
78
4
85
.413
.482
.881
2011
70
242
.281
68
14
1
9
37
36
1
39
.379
.459
.838
2012
80
246
.252
62
17
0
7
42
31
1
52
.379
.406
.785
2013
78
252
.258
65
17
1
11
42
29
1
51
.380
.464
.845
2014
1군 기록 없음
2015
42
125
.256
32
3
0
6
20
18
0
23
.369
.424
.793
KBO 통산
(8시즌)
634
2131
.281
598
115
4
100
393
327
16
389
.388
.479
.868

[1] 현 광주광역시야구소프트볼협회장.[2] 데릭 리는 2005년 내셔널리그 타격왕 및 홈런 2위로 폭주했다.[3] 최희섭은 컵스 시절도 그렇고 말린스 시절에도 출루율은 좋았다.[4] 이 때 당시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훗날 KIA 타이거즈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게 되는 데니스 홀튼이었다.[5] 커리어하이 시즌이자 어깨 부상을 당하기 바로 전 시즌인 2004년까지의 커리어, 그리고 그 이후의 커리어와 수술 경력을 생각해본다면 어깨 부상이 롤렌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롤렌의 커리어가 망해버린 것은 아니고, 부상 이후로도 꾸준히 활약하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다.[6] 사실 이건 푸홀스가 마이너리그에서 너무 짧은 기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푸홀스는 마이너리그에 얼마 머물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로 올라왔고, 드래프트 랭킹도 낮았기 때문에 당시 굉장히 저평가받은 상태였다. 때문에 실제로 최희섭이 가장 많이 비교된 타자는 한국에서나 이야기가 많은 푸홀스가 아니라 애덤 던이나 카를로스 페냐다. 물론 푸홀스같은 역대급 선수가 아닐 뿐 두 선수도 강타자로서 MLB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수들이다.[7] 미국에서 활약하던 시절에 스윙폼이 배트스피드가 느릴 수 밖에 없는 매커니즘이라 메이저리그의 패스트볼을 공략하기 좋지 않다는 평가는 자주 제기되었다.[8] 조범현이 2003년부터 2016년까지 2007/2012/2013년을 제외하고 프로야구 감독을 맡아 왔지만, 최희섭 같은 사례는 없었다.[9] 상술된 바, 최희섭은 수비시 투수와 부딪혀 넘어지며 뇌진탕을 당했고, 후유증이 나름대로 있어서 DL까진 안 오르더라도 꽤 많은 경기를 결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크보 팬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는 김태균이 홈 쇄도하다 뇌진탕 증상을 입고 고생한 것과 같다. 다쳐 본 사람은 뇌진탕 무시 못한다. [10] 사실 최희섭의 키가 5cm만 작았더라도 악송구가 되었을 공이 상당하다. 특히 김선빈이 덕을 가장 많이 봤다. 지금이야 김선빈이 땅볼처리부터 뜬볼까지 잘 처리하지만, 2016년까지만 하더라도 만세를 자주 불렀다. 거기다 당시 김선빈은 데뷔 첫 신인이었기 때문에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 또한 답답했을 때였다. 괜히 지병을 달고 있었던 이현곤이 유격수를 본 게 아니다.[11] 무등야구장 뒤편의 교회를 넘어갔다는 얘기도 있다.[12] 짐짝이라며 욕만 먹던 김주형과는 달리 만루홈런까지 터뜨리기도 하며 1루 구멍을 훌륭하게 메꿔주고 있다.[13] 김상현의 우익수 쪽 펜스 맞는 2루타. 조금만 넘어갔으면 홈런이 될 상황이었다.[14] 사실 요로결석은 입원을 꼭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질병은 아니다. 물론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종합병원에서 진단을 받아서 입원 권유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돈 벌려고[15] 이 당시 최희섭의 부진-이승엽의 맹활약에 KBO선수들의 활약이 더해지며 MLB를 얕잡아보는 여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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