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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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시작
2.1. 제2차 세계 대전
2.2. 냉전/현대



1. 개요[편집]


폴란드군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2. 시작[편집]


폴란드는 군사적 역사가 깊지만, 직접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군대가 시초다. 이 폴란드 제2공화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상대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두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폴란드군이 밀렸지만 바르샤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로 다시 진격하게 되자 소비에트 정부는 다급한 나머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하여 벨라루스의 서쪽 절반과 우크라이나의 1/6을 폴란드령으로 하고 나머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령으로 하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는 이후 소련과 폴란드가 극심하게 대립하는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

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대체로 기병으로 승부가 갈렸으며 양국의 군사교리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폴란드는 기병에 엄청나게 투자했고[1] 소련의 보수파 장교들은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기병 중시, 그러나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혁신파 장교들은 기병이 아닌 기동력이 승부를 갈랐다고 보고 기갑부대와 공군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어쨌든 보수파 장교들 생각대로[2] 기병은 기병대로 유지하면서 기계화부대도 엄청나게 확충했다.

당시 폴란드는 옛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각각 점유해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양대 강국인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에 이를 갈았다. 이는 소련과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밀월관계를 촉진하였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 소련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소련은 서방-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를 아우르는 집단안보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매우 사이가 나빠 러시아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과 동맹을 맺기를 거부했고 대신 서방에 있는 동맹국, 프랑스-영국과 공동 안보조약을 맺어 전면전 상황에 대비했다. 이 틈에 나치 독일은 소련에 접근하여 폴란드를 나눠먹기로 하고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 폴란드 침공이 되었다.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은 각각 폴란드를 서-동으로부터 침공해서 비스와 강을 경계로 갈라먹었다. 소련은 폴란드가 다시는 소련에 대항할 수 없도록 엘리트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폴란드 포로들을 심사하여 2만 명가량을 학살하는 전쟁범죄카틴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폴란드의 전성기 이후 전투는 이기는데 전쟁은 지는 뼈아픈 전통이 있다.[3] 이는 근대 이전 폴란드 군사사의 가장 화려한 시대를 장식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시절 정치 체제가 '황금의 자유'라 불리는 귀족 공화정[4] 체제 자체가 답이 없는 조직력 때문에 적군은 다 격파해놓고 이제 적 영토로 쳐들어 가 전략적 목적을 강요하는 일만 남았는데, 폴란드 귀족의회 내부의 반발로 인하여 전술적 차원의 승리를 전과 확대와 정치적 차원에서 전략적 이득 달성으로 확장시킬 정치적 조직력이 잆어서 생긴 결과였다.

카자크 대봉기와 대홍수 시절만 보더라도 당장 자신의 영지를 유린하는 눈 앞의 적군이 사라졌다고 안심한 슐라흐타 대귀족들이 추가 군비와 병력 제공을 부결시켜 제대로 전쟁을 매듭짓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닌 사례가 상당히 많다. 중세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귀족적 전통에 스웨덴, 러시아, 타타르, 오스만 같은 사방의 적들을 상대로 한 끊임없는 국경 분쟁으로 단련된 귀족 공화국의 군사력은 이렇게 준비된 양질의 병사들을 항상 갖춘다는 장점과, 이러한 전술적 이점을 중앙화된 하나의 지휘 통제 체계 아래 놓아 전략적 차원의 강력함으로 승화시킬 정치구조가 생기지 못하게 막는다는 단점이 모두 뚜렷한 시스템이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공세가 아니라 수세적 입장에 몰리며 동시에 주변 열강의 야욕이 귀족 공화정 체제를 통해 폴란드 내부의 조직력 자체를 안으로부터 박살내기 시작하면서 결국 폴란드 분할이란 눈물 겨운 최후를 맞이하였다.

3번에 걸친 폴란드 분할 이후에도 조국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수많은 노력은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노력의 결정판이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가 주도한 개혁을 빌미로 러시아군이 쳐들어오자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소수의 폴란드군은 한줌의 병력으로 용전분투했지만 결국 패했다. 정치적으로도 이때 폴란드는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국내의 수많은 슐라흐타들이 포니아토프스키 국왕의 개혁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러시아군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군을 두들겨팼다.[5] 이런 윗분들의 큰 실책에 분노한 폴란드 농민들은 얼마 안가 전국적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미국 독립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했던 군인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봉기군의 주도자가 되었다. 봉기군은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에도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등 선전했으나 결국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패배했다.[6]

이 시기 폴란드군은 가만보면 수백년 뒤 근대 독일군스러운 모습이 종종 드러나는데,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국체 보존을 위한 일련의 전쟁, 19세기 내내 들고 일어난 민족주의 봉기에서 폴란드 독립군 세력은 야전에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도 선조들의 무용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프로이센, 러시아의 카자크 기병들을 상대로 전술적으로 우월한 교전비를 보였다. 하지만 전략적 격차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전술적 차원의 우위는 무의미하다는건 동서고금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구 이중 공화국 시절 귀족 가문 출신인 폴란드 독립군의 기병들이 아무리 전술적 차원에선 프로이센 용기병, 러시아 카자크들을 썰어버려도 저런 일련의 민족주의적 봉기들의 전략적 목표인 바르샤바, 르부프, 빌뉴스 같은 주요 도시 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하니 결국 전투에선 이겼어도 전쟁에서 이미 져서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있다 보복을 피하러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 같은 곳으로 망명 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7]

그리고 이들이 망명간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 등의 나라들은 폴란드 국가 자체의 부재로 인해 써먹을 수 없는 이런 폴란드 기병들의 전술적 역량, 개인의 무용과 기병 운용이란 면만 국한하면 전 유럽에서 봐도 선진국이라 할만 인프라를 자국의 전시 체계에 편입하여 아주 잘 써먹었다. 하술된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육군에서 폴란드군이 보여준 활약은 너무도 유명하고, 모국 이중 공화국의 독립 주권 사수가 좌절된 이후 막 혁명이 터진 미국으로 망명 온 카지미에시 푸와스키는 (영어식 이름은 캐시미어 풀라스키) 사바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도 미국 기병사단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칭송을 들었고, 심지어 분할 점령국 당사자들도 러시아야 자체적으로 카자크란 훌륭한 기병들이 있었지만 상황이 다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오히려 폴란드를 지배하고 다스리면서 기병 운용의 측면에선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8]

나폴레옹 전쟁 때도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프랑스군에 지원하여 '폴란드 군단'을 조직하여 싸웠다. 나폴레옹도 이들의 분투를 보고선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줄 정도로 신뢰했다.[9] 이때 활약한 인물이 바로 폴란드의 민족영웅이기도 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대공이다. 나폴레옹을 등에 업은 폴란드군은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대불동맹군을 많이 격파하고 다녔다. 나폴레옹의 동맹국들은 대부분 무력으로 굴복시켜서 수하로 부린 나라들이었기에 그가 불리해지자 바로 배신 때렸지만 바르샤바 공국만은 끝까지 나폴레옹의 편에 서서 싸우다 멸망했다.

이후 그 자리에 러시아의 위성국인 폴란드 입헌왕국이 세워졌으나 얼마 뒤 1830년 겨울, 러시아의 부당한 정책에 항거하여 바르샤바에서 '11월 봉기'가 일어났다.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군으로 복무했던 장군들을 주축으로 한 봉기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나폴레옹의 부하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 폴란드군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자 러시아군은 순간적으로 폴란드군의 규모를 오판하여 일시적으로 철군하기도 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봉기는 국제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는데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이 다시 불타오르는걸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주도적으로 봉기군에 대한 외부지원을 차단하였다. 봉기군은 결국 러시아군의 물량공세에 밀려 패배하였다.

1863년 1월 봉기 때는 폴란드인 징집령이 내려지자 이에 항거하는 수많은 징병대상자들이 바르샤바 외곽의 숲으로 탈출한 뒤 봉기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전의 봉기들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폴란드의 모든 계층을 망라한 범국민적 참여가 이루어졌다.[10] 봉기군은 이전처럼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숲으로 들어가 유격전으로 맞섰다. 울창한 원시림은 러시아군의 숫적 우위를 상쇄시켜 주었고 봉기군은 각개 각지에 흩어져 지휘부조차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꽤 오랜 시간을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였는데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들은 폴란드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보냈으나 끝끝내 지원해주진 않았다.[11] 엎친데 덮친격으로 서쪽의 프로이센 역시 러시아를 지지하며 군을 투입해 봉기군을 진압하였고[12] 소수의 봉기군은 동서에서 들어오는 압박을 1년 4개월이나 버텼지만 1864년 봄, 지휘부가 사로잡히면서 봉기의 끝을 맺는다.


2.1.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육군 전차부대에게 창기병대를 돌격시켰다는 흔히 "폴란드의 낭패"라고 일컫는 일화도 있으나 여기엔 엄청난 과장이 들어가 있다. 당장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개전 시점에서 차량화 여단과 경전차 대대를 육군의 정식 편제로 이미 보유한 국가였다.

우선 향간에 도는 소문인 당시 폴란드군 포모제 기병여단 소속 창기병대가 독일군 전차가 종이와 나무로 만든 가짜인 줄 알고 "저딴 낚시에 낚일 울란이 아니다! 돌격!" 했다는 소문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정확히는 폴란드 18 창기병 연대 소속 2개 분대가 독일 76 보병연대 예하부대를 9월 1일 기습한 것이다. 기습의 결과로 독일 보병 부대는 11명 사망, 9명 부상의 피해를 입고 후퇴, 그러나 곧 측면 숲속에서 독일군 장갑차가 사격을 가해 폴란드군이 전사자를 내며 퇴각했던 것이 그날 전투의 실상이다. 따라서 전차에 돌격을 감행했다는 것부터가 거의 낭설이다. 정확히는 이탈리아 종군 기자의 낚시성 기사에 다들 낚인 것이었다.

먼저 전술적으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미 연발총과 기관총이 등장하여 기병의 전면돌격은 전면적인 자살행위로 인식되었고, 여기에 더해 적백내전과 전간기 폴란드와 소련의 전쟁을 거치며 기병이 어느정도 활약함에 따라, 동구권에서는 기병의 의의는 이미 기습적인 후방 타격과 기관총으로 대표되는 주요 전략자산의 신속한 재배치에 있다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상황이다.[13] 물론 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의 패러다임 변화를 거치며 폴란드군도 보병과 기갑의 전략적 비중을 늘리려 했으며 그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전차와 대전차포 등을 수입하긴 했으나, 폴란드군이 기존에 보유하고있던 기병을 갑자기 감축하여 전력을 약화하는건 전략적으로 부적절한 판단으로 여겨졌다. 폴란드군이 소련군과의 전쟁에서 기병의 효율적 운용을 충분히 경험해왔으며, 폴란드 기병이 엘리트 취급을 받았기에 최전선에 세우진 않더라도 위급시 급하게 파견할 수 있는 전략 예비대로서 폴란드는 기병을 상당수 유지해 두었고 독일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전선에 증원을 보내다 보니 당연하게도 기병대가 출동한 것이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울란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이었을 뿐, 미 7 기병사단이 베트남전에 그러했듯, 폴란드 기병들 역시 소총으로 무장한 현대화된 군대였으며(단 병사가 원할 경우 을 지참하기도 했다), 장갑차량을 상대하기 위한 대전차 화기들도 지급되었고, 기병여단 산하에 이미 상당수의 오토바이와 장갑차 연대가 있었으며 TKS 탱켓과 당시로써는 최상급 대전차 능력을 보유했던 7TP 경전차를 다량 보유한 부대도 있었다.

그래도 상당수가 말을 타고 다닌건 사실이다. 앞서 폴란드 기병이 독일 전차를 상대로 승리한 전투로 언급된 모크라 전투에 투입된 기병들도 대다수가 순수한 기병 편제였다. 그러나 순수 기병편제더라도 충분한 대전차소총이 지급되어 있었고, 대전차포를 기마포병 편제 또한 운용했다. 당시 폴란드 기병에 편제된 대전차포는 보포스 37mm 대전차포였는데, 가벼웠기에 말 두 필로 필요한 탄약까지 충분히 운반할 수 있었고, 가격 또한 저렴하였기에 비교적 다량이 편제될 수 있었으며, 그 당시 독일 기갑사단의 주력인 1호 전차, 2호 전차는 물론이고 당시 소수 배치된 초기형 3호 전차, 4호 전차도 500m 거리에서 관통시킬 수 있는 위력이었다. 앞서 말한 모크라 전투가 전력차가 크긴 했어도 폴란드군에겐 딱히 불리했던 전투는 아니었던 셈이다.

여기에 기계화가 잘 되었다는 신화의 독일군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00만필 가량의 말을 대량으로 운용했으며 기계화 부대는 사실 전 육군의 1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을 완전히 기계화한 것은 미군과 미국의 차량을 지원받은 영국군과 소련군 정도였다. 심지어 소련군도 타찬카 항목을 보면 언급되듯 독소전 초기에는 마차에 기관총을 올려서 쓸 정도였고, 아직 렌드리스가 무의미한 수준이던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전까지 기병을 대규모로 운영했으며, 이들은 사실 트럭 타고 다니는 차량화 보병처럼 운용되었다. 소련군은 미국 트럭을 대규모로 공여받은 이후에도 기병을 산악이나 숲, 진창 같은 험지에서 일종의 전지형차처럼 운용해 기습에서 큰 효과를 보곤 했기 때문에 전쟁 끝까지 기병-기계화 집단을 운용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기계화 독일군은 신화에 불과하다. 실제론 얼마 안되는 정예부대만 기계화 부대이고 대다수는 걸어다니면서 말로 보급받았다(전격전의 전설 문서 참조).

폴란드 사람들은 수백년간 유럽 제일의 기병하면 폴란드 기병이라고 믿어왔고 이것은 윙드 후사르 목록과 이 문서에서 볼 수 있듯, 역사적으로도 여러차례 검증되었다. 그래서 폴란드인들은 지금까지도 기병대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에 전차에 돌격한 멍청한 기병 따위로 무시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직도 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열을 내며 반박한다. 심지어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한 가장 몹쓸 짓이 기병대를 바보로 만들어 퍼뜨린 것이라는 인터넷 댓글도 있을 정도이다. 위키피디아 폴란드어판에는 아예 해당 낭설에 대항하기 위한 항목마저 설치되어 있다. 항목에 들어가보면 바로 나오는 사진이 등에 대전차소총을 멘 채 말에 탄 폴란드 기병대원의 모습이고 그 바로 밑에 보포스 37mm 대전차포의 기마포병 편제를 볼 수 있으며, 영어 위키피디아보포스 37mm 대전차포 문서에도 이러한 사항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전차에 돌격한 폴란드 기병 얘기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미국의 고등학교 역사 수업에서도 가르쳤다고 한다.# 이렇게 서양인들에게는 군사무기 매니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얘기였으니 폴란드인 입장에서는 속상할 만하다.

개전 초기 전투 중 하나였던 모크라 전투에선 역으로 폴란드 우치 야전군 소속 보윈 기병여단이 독일 16 기갑군단 소속 1 기갑사단과 4 기갑사단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하였다.

소련과 독일의 양동작전으로 개전 한 달 만에 폴란드 전역이 압도적으로 함락되었지만 독일군도 전사자 2만 명, 부상자 3만 7천 명이 생기는 피해를 입었다. 비록 폴란드가 사상자 20만 명을 내고 전쟁에서 패했다고는 하나, 압도적인 전력과 전쟁기간, 양면전쟁의 상황 속에서 독일군 역시 예상보다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하다. 당시 병력비는 독일군만 하더라도 폴란드군의 1.5-2배 이상, 야포 전력은 2배, 전차 전력은 3배, 항공 전력은 6배 가까이 많았다. 거기에 소련군이 역시 강한 육군력으로 후방을 공격했다.

참고로 이 기병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불과 십수년 전에 고전적인 기병 돌격으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건국 초기 소비에트와의 전쟁에서인데 1920년 코마로프 전투에서 폴란드 창기병 6개 연대가 러시아 제1기병군(20개 기병 연대)을 상대로 1:10의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병 돌격을 감행해 4천여명을 죽이고 패주시키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소련군 기병대는 적백내전기부터 기병 돌격은 구시대적 전술이라 생각해 배격하고 기습적으로 사격하고 철수하는 일종의 힛앤런 전술을 선호했는데, 잘못된 판단은 아니고 이득도 많이 봤지만 그래서 기병 돌격을 당하면 대응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폴란드와 독일 전쟁에서 굉장한 사례가 하나 있으니 바로 비츠나 전투이다. 폴란드 군인 약 700명이 물러서지 않고 독일군 4만 명과 맞서 싸운 전설 같은 전투이다. 폴란드의 테르모필레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훗날 폴란드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인정신의 표본이 되었고, 이 전투를 묘사했던 노래가 스웨덴 메탈그룹 Sabaton이 부른 40:1이다.

압도적인 독일 공군의 기습에 박살났으나 역량만큼은 세계적이었던 폴란드 공군 조종사들은 영국에 건너가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맹활약하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영국에 망명하여 독일군에 대항하여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싸웠다. 특히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은 용맹함으로 소문났으나 서방 연합군 희대의 뻘짓 마켓 가든 작전에서 의미없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자유 폴란드군 문서 참조.

소련은 동부전선이 개전한 이후 포로로 잡고 있던 폴란드인들을 중심으로 친소련계 폴란드군을 재건했다. 같은 시기 서방 진영에서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따르는 폴란드군이 있어서 동서방 양측에서 각각 다른 편에 선 폴란드군이 활약했다. 소련은 친소련 폴란드군을 믿지 못해 많은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이 부대에 입대시켜 이들을 감시하였다. 이 친소련 폴란드군은 동부전선에서 활약했고 바그라티온 작전이나 베를린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이들이 후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폴란드 인민군의 주춧돌이 되었다. 서방에서 전투를 벌인 폴란드인들은 고국에 세워진 공산정권과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에 눌러앉았고, 이들은 새롭게 창건된 폴란드군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2.2. 냉전/현대[편집]


공산화 이후의 폴란드 인민군은 한때 바르샤바 조약군 중에서 소련 다음으로 가는 제2의 전력을 자랑했다. 당시 서독을 우회하여 침공하기 위한 해상강습부대와 나토군과 직접적으로 맞붙을 강력한 육군력을 보유했으며, 전시에는 신속대응군 역할을 맡은 동독군과 협력하여 1선에서 육로를 통한 빠른 서유럽 진군이 주 목표였다. 심지어 폴란드군은 1970년대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기도 했다. 실베스테르 칼리스키(Sylwester Kaliski)라는 물리학자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에서 자금을 지원받아서 수소폭탄을 만드려고 했으나 1978년 칼리스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 때 폴란드의 핵개발을 원하지 않았던 KGB가 관여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군대 전체가 바보가 되었다.

공산권 붕괴 이후에는 빠르게 전향해서 NATO에 가입했다. 현재 NATO 최전선으로서 서방, 특히 미국독일의 지원을 많이 받고 있다. 그중에서 지상군 장비라든가 전술에서 독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과거 서방을 향한 대규모 전력이 칼끝을 정반대편을 겨누어 대동방 최전선이 된 것이다. 냉전시기 서독의 역할을 현재 들어서는 폴란드가 수행하고 있다. 수십년에 걸친 소련의 영향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빠르게 서구화, 현대화를 단행한 결과 권총에서 중기관총에 이르는 보병 화기 탄종도 전부 서방제인 5.56x45mm, 7.62x51mm로 교체하고, 기갑 장비도 상당수 서방제로 도입했다.[14] 더 나아가 미국에게 "MD 기지를 설치하고 싶으면 군사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을 미국이 받아들여서 대량의 군사원조가 들어가게 됐는데 그 덕분에 M1 에이브람스를 도입하게 되었다!

2008년에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다. 본래는 2년동안 복무였는데, 훈련도 많지 않았고, 훈련의 질도 낮았으며 병영에서 술을 마시는 등 군기가 개판이었고, 가혹행위가 매우 심각하여 모든 세대의 악몽으로 남았고, 모병제로 전환하긴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내리갈굼으로 인한 초대형 참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는 징병에 대한 거부가 매우 심한 편. #



유럽 연합에서 벌이는 군사작전이나 원조 작전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차드 분쟁에 파견된 유럽 연합 구성국 군대 중 3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파견한 곳이 폴란드군이었다. 이외에도 폴란드가 친미 국가인 관계로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특수부대인 GROM그린베레네이비 씰이 자신들과 동급으로 인정하고 함께 합동작전을 할 정도의 최정예 엘리트로 명성이 높다.

2017년 11월 17일에 미국으로부터 패트리어트 미사일도입하기로 했다.

2022년 2월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가 뚫리면 그 다음 표적이 바로 폴란드가 될 것이기에 이를 대비하여 폴란드군을 현대화하고 병력을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동년 7월에 대한민국 방위사업체와의 대규모 방산계약을 체결했다.

[1] 폴란드가 기병을 근대화, 기계화하기를 등한시했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실상을 말하자면 '안 했다'라기보다 '못 했다'고 보아야 적절하다. 실제로는 기병을 포함한 육군력 전반의 차량화, 기계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신생 독립국이던 폴란드 입장에서 공업 생산력과 경제력의 한계에 발목을 붙잡혀 차량화와 기계화를 하기엔 돈과 기술이 없다보니 성과가 지지부진했던 것이었다.[2] 당시 소련 보수파들도 기병이 사양세라는 사실은 알았다. 다만 당시 소련의 경제력과 공업력으로는 붉은 군대에게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만큼 기계화를 하자니 감당이 안 되었거니와, 기병 병과도 기병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기에 기병을 중시하였다.[3] 그렇다 하더라도 이긴 전쟁은 상당히 많다. 17세기 초에 러시아와 전쟁을 2번 치룬 적이 있었는데 두 번 다 승리했다. 그러다가 대홍수 시기에 결국 러시아군에 패배했고 이것이 러시아가 강국이 되는 바탕이 되었다.[4] 여기서 공화정은 세습 군주가 없는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이 아니라, 군주가 있던 없던 국가를 하나의 공공재이자 공공선(common wealth)로 인식하고 이에 따라 집단적 합의를 통해 국정 운영을 추구했던 근대 이전 르네상스 시절의 의미로 공화정을 의미한다. 폴란드/역사 항목에 들어가면 나오듯이, 당시 귀족의회의 선출로 외국에서 꿔다놓은 대표의 성격이 강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들은 여러 차례 다른 유럽 왕실처럼 권력의 중앙화와 거대한 국가 기관을 조직하여 중앙 집권을 추구했지만 강력한 귀족층의 집단적 반발에 국력만 낭비하고 거듭 실패했다.[5] 이 개혁이 슐라흐타들의 특권을 대놓고 제한하는 것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당장의 이득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의 행보는 현재까지도 폴란드에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한다.[6] 폴란드군이 헛짓거리를 한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능력 이상으로 잘 전투를 벌였고 러시아군을 모랄빵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하필 이때 러시아 진압군의 지휘관이 러시아 희대의 먼치킨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였다.[7] 같은 분할 점령국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예전부터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친밀감도 있고, 제국 자체가 피지배 소수민족의 자치에 관대한 편이라 분할 시기 독립 투쟁도 오스트리아 상대로는 대대적 무장 독립 전쟁 수준으로 커진 사례도 거의 없고, 오히려 더 억압적인 러시아, 프로이센에서 같은 폴란드 동포들이 망명 오는 경우도 흔했다. 그리고 이렇게 망명한 폴란드인들은 1848년 혁명, 남북전쟁 같은 혼란기 때 일종의 용병으로 참전하였다.[8] 오스트리아도 물론 헝가리안 후사르라는 훌륭한 자체적인 경기병 수급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윙드 후사르와 헝가리안 후사르의 차이 그대로 헝가리안 후사르는 폴란드 울란 같은 정면 창기병 전투를 벌이는 병과가 아니었다. 뽀대와 파괴력은 확실하지만 양성하기 비싸고 무게 때문에 제대로 운용하기 힘든 퀴레시어, 정면 충돌은 자살에 가까운 경기병 후사르 사이 딱히 없는 중간 체급의 기병을 폴란드 창기병들이 훌륭하게 채워 준 셈이다.[9] 특히 폴란드 창기병은 프랑스 제국 근위대에 포함될 정도였다.[10] 코시치우슈코 봉기 때는 귀족들이 배신 때리고 있었고 11월 봉기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소수의 귀족들과 폴란드 왕국군만 싸웠다.[11] 이때는 크림전쟁이 끝난지 몇년 안 되던 해였다. 괜히 러시아와 또 마찰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던 것.[12] 러시아는 이때 독일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이후 보불전쟁에서 독일 편에 섰다.[13] 물론 해당 개념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총 기병대와 연발총, 개틀링 포대로 이미 어느정도 검증되긴 했으나, 유럽에선 남북전쟁에 대해 무관심했고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전선의 전황이 참호전 일색으로 흘러감에 따라 서유럽에선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기병이란 병과 자체가 도태되었다. 반면 동유럽은 그 광활한 넒이를 효과적으로 커버하기엔 폴란드는 물론이고 독일이나 소련도 20세기 초중반 수준 중공업으론 도저히 부족했기 때문에 여전히 기병을 잘 활용해야했고 보급과 병참이란 측면에선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우마가 중심이었다.[14] 한 국가의 군대에서 사용하는 표준 구경탄은 쉽게 바꿀 수 있는게 아니다. 생산 라인부터 보급 체계, 사용 총기 바꾸는건 물론이고 그에 따른 재교육, 재고탄들의 처리 문제까지 시간과 돈이 엄청나게 깨진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맹국이었거나 구 소련 구성국이었던 국가들중에선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리스크를 감당하면서까지 개혁을 단행한 나라가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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