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대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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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군국주의 국가의 감수성 넘치는 왕태자
2.1.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의 만남
2.2. 베를린으로의 귀환
2.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의 결혼
3. 근면하고 현명한 군주
4. 18세기의 유럽을 뒤흔든 명장
4.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4.3. 폴란드 분할
5. 사망




1. 개요[편집]


프리드리히 대왕의 생애에 대한 다룬 문서이다.


2. 군국주의 국가의 감수성 넘치는 왕태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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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프로이센 왕국의 두번째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그의 왕비 조피 도로테아[1]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다만 형들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어처구니없이 요절[2]하면서, 삼남인 프리드리히가 왕태자가 된다. 소년 시절 어머니의 배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 문화를 경멸하게 되었다. 동시에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누나에게 꽃 같은 건 싫고 북치고 놀겠다고 해서 부왕을 흐뭇하게 했던 활달한 아이였다. 다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사학을 배우면서도 문학과 음악 등에도 관심을 두었기에 무인됨만을 강조한 부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성장하는 동안 부왕의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인해 폭력과 학대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아지고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결코 호엔촐레른 가문과 프로이센 왕국의 전통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왕위 계승자로서 소년시절부터 힘든 군사훈련을 묵묵히 받았으며, 타고난 재능으로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이후 영국의 공주였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는 프로이센과 영국의 동맹 강화를 위해, 프리드리히 2세와 영국의 아멜리아 공주[3]간의 혼약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영국으로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유로 괘씸하게 여겨서, 영국에게 팔츠 선제후가 가지고 있던 베르크와 율리히 공작령에 대해 누가 봐도 무리한 승계권을 요구하며 혼담을 대놓고 사보타주한다. 다만 처음부터 반대한 건 아니고 영국-프로이센이 급격히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에서 그 결혼은 안된다며 결사 반대한데다, 그대신 영국이 꺼리던 베르크 공국의 승계권을 적극 지지하겠다고 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홀딱 넘어갔다.[4]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영국 왕실과 혼담을 주고 받던 누이 빌헬미네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이에 또 자극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가족과 떨어져 사냥용 궁전에서 살라며 출궁시켜버린다.


2.1.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의 만남[편집]


그런데 거기서 프리드리히 2세는 훗날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의 희생자가 되는 한스 헤르만 폰 카테를 만나 애인 사이가 된다. 표면상으로는 단순히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이 둘이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연인 관계였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자명했다.

한스와의 스캔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인생에 있어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 스캔들을 통해 프리드리히 2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 다 알게 되었고, 이는 프리드리히가 성공적인 군주가 되고 나서도 여전했다. 프리드리히 2세 주변의 예술가들이나 주치의들, 심지어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살기까지 했던 볼테르는 자신의 저서에 이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에 알링스(Alings)나 블래닝(Blanning), 부르크도르프(Burgdorf), 한(Hahn)와 같은 주류 사학자들은 모두 프리드리히 2세가 동성애자였다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프리드리히 2세 스스로가 자신은 여자에게 꽂히지 않는다고 전쟁수기까지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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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헤르만 폰 카테의 초상화

이 둘과 관련된 일화 중 하나로 어느 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좀 이른 시간에 사냥궁에 온 적이 있는데, 한스와 요한 요아힘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5]는 그의 눈을 피해 서둘러 자신들의 옷을 난로에 넣어 불태우고 벽장 뒤로 숨었다. 하지만 예리한 성격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곧바로 흔적을 발견했고, 이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쳤다. 이 때문에 한스와 요한은 1시간이나 좁아터진 벽장에서 나오질 못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위 사건도 그렇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가족에게 엄격하기만 하고 제멋대로인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폭발하면서 애인인 한스, 자기 아버지 때문에 먼 곳으로 쫓겨났던 카이트(Keith)의 페터 카를 크리스토프[6]와 페터의 동생인 로베르트 폰 카이트(Robert von Keith), 그리고 하급 장교들 몇 명과 모의해 어머니의 친정집인 영국으로 망명을 떠날 계획을 꾸몄다.

하지만 팔츠 선제후국을 지나던 중에 조국을 배반한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로베르트가 그만 국왕을 찾아가 이 계획을 전부 고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결국 왕세자와 한스는 현장에서 붙잡혀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퀴스트린(Küstrin)[7]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왕세자를 맞이하려고 달려오던 페터는 체포 소식을 듣고는 다시 길을 돌려 헤이그로 달아났고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곧바로 재판이 이뤄졌고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는 재판에서 제외되었지만 함께 체포된 한스에게는 '탈영'을 죄목으로 2년형이 선고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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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장으로 끌려가는 한스와 절규하는 프리드리히 왕세자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왕의 권한으로 이 판결을 번복하고 사형을 선고하여 한스를 참수형에 처했으며 목을 효수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한스를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쇠집게로 사지를 찢어내고 교수대에 목을 매달아 놓는 반역자에게나 내릴 법한 처벌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나마 당시 재판관들도 이런 처형은 지나친 것이라며 반대해서 그냥 참수형으로 바꾸었다.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도 왕위 계승권을 비롯한 모든 신분을 박탈한 뒤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간신히 말려 프리드리히 2세는 요새의 감옥에 투옥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경험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하자마자 내린 첫 포고령은 고문의 폐지와 법관의 독립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창문 너머로 한스의 사형 집행과 죽은 애인의 목이 자신이 갇힌 방을 바라보도록 내걸리는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그것도 프리드리히가 그 광경을 안보려 할 수 있다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지시로, 경비병들이 강제로 프리드리히 2세를 붙잡아서 얼굴을 감옥 창살에 거의 고정시켜놓다시피 하였다.

아버지가 한스를 죽일 것이라고는 정말로 생각못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장면에 충격을 받고 기절까지 한다. 그러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를 보고는 오히려 더욱 화를 내면서 아들을 두고 '바보 같은 놈'이라 욕하며, 저놈은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니 같이 참수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사실 그 이전에도 화가 날 대로 난 프리드리히 2세 역시 감옥에서 차라리 날 죽이고 한스를 살려달라며 저항하고 있었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이를 듣고는 더욱 열받아한 것도 있었다. 이에 곁에 있던 프리드리히 2세의 모후인 조피 도로테아 왕비와 모든 신하들 및 왕족들은 물론, 이 막장 아버지의 말도 안되는 행동에 충격을 받은 이웃 나라의 왕들까지 나서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뜯어말렸다. 나중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까지 이 일에 개입해서 '왕족에 대한 재판은 제국 의회만이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폭주를 막았기에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8]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때 자신을 살려준 황제 카를 6세가 바로 프리드리히 자신의 평생의 라이벌이자 최종보스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였다.


2.2. 베를린으로의 귀환[편집]


살아남은 프리드리히 2세는 몇년 후 누이 빌헬미네의 결혼식을 위해 베를린에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기 전까지 한스가 처형당한 퀴스트린 요새에서 유배되다시피 살아야 했다.


2.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의 결혼[편집]




아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아들의 결혼 상대를 고려하는 도중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청혼했다. 결혼하게 되면 왕위 계승권도 포기하고 종교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당시에 큰 스캔들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카를 6세는 프리드리히의 청혼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면서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프로이센에서는 왕태자가 왕위 계승권이고 뭐고 전부 포기하고 오스트리아로 도망가겠다고 선언한 꼴이라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노발대발하여 결사반대해서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고 대신 사부아 공자 외젠의 제안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신교 계열 이종사촌이자 영국 왕실 하노버 왕조의 방계 집안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Braunschweig-Wolfenbüttel) 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와 결혼하였다. 훗날 남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9][10]과 여동생 필리피네 샤를로테[11]가 이 가문과 혼인하면서 겹겹사돈을 맺었다.

이 결혼은 오스트리아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장인은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였으며 그의 처남들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군인으로 복무 중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군주 가문의 자제라 하더라도 모국이 이름 없는 소국일 경우 큰 나라의 궁정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처남들이 휘하 장군으로 큰 활약을 했으나 전쟁 후의 불화로 인해 프로이센을 떠나기도 했다.[12]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던지라[13] 엘리자베트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의무에 따라 결혼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이에는 사랑도 우정도 있을 수 없다. 차라리 자살하고 싶다'고 썼다. 결혼 직후부터 동침하지 않고 별거했으며 왕위 즉위 후에는 아예 아내를 베를린의 별궁에 거주케 하며 잘 만나지도 않았다. 7년 전쟁 이후 몇 년 만에 만났을 때에는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말만 전했다고 하며, 이러한 냉랭함으로 인해 둘 사이에 자식이 없어 조카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렇지만 아내 엘리자베트의 생일만은 꼭 참석했다고 한다. 그나마 결혼의 대가로 부왕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건강이 좋지 않아 누워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라인스베르크 별궁에서 지내며 독서와 음악을 즐기면서 그동안의 울분을 달랬다. 나중에 아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이때의 시절을 가장 좋았을 때라고 회고했다.


3. 근면하고 현명한 군주[편집]


길고 우울한 청소년기/청년기 속에 살아야 했던 왕세자였지만, 프리드리히는 정치철학과 합리적인 사고에 있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정치에 관한 저술은 아마추어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저술한 《반마키아벨리론》[14]에서 프리드리히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자신이 쓴 책의 내용처럼 프리드리히 2세는 합리적인 사고와 '국가에 봉사하는 태도'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국왕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또한 부지런히 일하였으며, 관료 조직의 규모를 축소시키되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도 군림하는 군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 유럽 국가의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모습이었다. 또한 과학의 발달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했으며, 이처럼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임에 따라 여전히 지속되던 가톨릭개신교 간의 갈등을 피해 유럽 각지의 저명한 학자와 유능한 인재들이 프로이센의 날개 아래로 모여들어 프리드리히가 역설한 강력한 국가의 체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탄탄한 지식 기반을 이루었다.[15]

게다가,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비록 아들과 관료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이자 왕이었지만, 강한 군사력을 육성하고 아울러, 근면함을 강조했던 국가운영을 통해 많은 유산과 8만에 이르는 군사력을 남겨주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수도인 베를린을 화려하게 건설하는 한편, 국방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 덕에 프리드리히 2세 즉위 직후 8만 명 정도였던 프로이센의 군대는 총 19만여 명에 이를 만큼 거대하게 성장하였다.[16]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 정복을 꿈꾸는 타 국가에 대한 예방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4. 18세기의 유럽을 뒤흔든 명장[편집]


사춘기 시절 감수성이 넘치는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는 왕위에 즉위하자 냉철하고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였다.


4.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편집]


즉위하자마자 같은 시기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상속받자 이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주도하여 일으켰다.[17] 7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로 공업이 발달한 부유한 보헤미아 왕국슐레지엔 지역을 획득했다.[18] 이 전쟁을 통해 독일의 작은 연방국이었던 프로이센은 단숨에 유럽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프리드리히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젊은 명군주로 전 유럽 시민들에게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은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에서 작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대승에 고무된 프리드리히는 호엔프리드베르크 행진곡(Der Hohenfriedberger Marsch)를 작곡했다. 이 군가는 사람들이 18세기 프로이센군이라면 바로 떠올리는 유명한 곡 중 하나다.[19]

이후 프리드리히는 포츠담상수시 궁전으로 불리는 별궁을 세우고 학자, 문인과 함께 토론을 즐겼으며 작가 볼테르를 불러 상주하도록 했던 때도 있었다. 볼테르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개인적 호감을 보이던 프리드리히 2세는 볼테르를 상수시 궁전으로 초대해 지내게 했으나, 곧 볼테르가 같이 살기에 굉장히 피곤한 사람임을 깨달았고, 결국 볼테르가 프로이센 학술원장과 대판 싸우고 난 뒤에야 출궁을 허락하였다.[20]

둘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며 좋은 친구로 남기로 하고, 50년 지기의 친구가 되었다.[21] 상수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거대한 궁전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으며, 프리드리히는 이 곳에서 시종 몇 명과 함께 검소하게 지냈다. 또한 베를린 시내에 국민들을 위한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 국민들도 품격 높은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22] 또한 프리드리히 자신은 불가지론자로 여생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을 지어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4.2. 7년 전쟁[편집]


그러나 프로이센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프로이센에 패배한 오스트리아에 실망을 느낀 영국은 든든한 동맹을 찾는 프로이센과 서로 이해가 일치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이해가 일치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결국 프로이센과 영국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게 되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이 벌어졌다.[23]

이 동맹에 프리드리히를 무척 싫어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러시아 제국, 한 때 프로이센의 편을 들었던 스웨덴도 가담한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 러시아 여제 옐리자베타,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이렇게 세 여인이 모였다 하여 삼부인 동맹이라고도 한다. 특히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획득을 위한 다방면의 물질적, 군사적 기반이 필요했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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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전투 직후의 대왕을 그린 초상화[24]

결국, 1756년 영국령 미노르카 섬에서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를 시작으로 7년 전쟁이 발발하고,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지에서는 프랑스&스페인 대 영국,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작센&러시아&스웨덴 대 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충돌했다. 오스트리아를 초반에 굴복시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군한 프로이센군은 로보지츠, 라이헨베르크, 프라하 등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며 보헤미아로 진입했으나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스트리아를 무릎 꿇리지 못했고, 이 해 여름 동안 전병력의 1/3을 잃으면서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1757년, 로스바흐에서는 42,000명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22,000명의 병력으로, 로이텐에서는 8만이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36,000명의 병력으로 철저히 박살내는 신기에 가까운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다.[25] 더 무서운 건 이 격전의 와중에도 프로이센군이 입은 피해는 상대의 절반 이하였다는 것.

허나 다구리 앞에 장사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 북쪽의 스웨덴이 각각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해오고,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남쪽에서 몰려오자 조른도르프 전투부터 삐긋거리기 시작하더니 호크키르히 전투, 카이 전투에서 연패했고, 이 연패에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쿠네르스도르프 전투로 51,000명의 프로이센군이 6만명 가까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프리드리히 본인도 이 전투에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포로로 잡힐 뻔도 하다가 기병대 장교가 가까스로 구출해 탈출했다.

이 와중에 동맹국인 영국이 내각 교체로 인해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사태가 겹치면서[26][27] 말 그대로 무참히 관광당했다. 결국 전 국토가 유린당하면서 수도 베를린도 함락당하고[28] 그 와중에 리그니츠토르가우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분전하였으나 압도적인 국력 차로 찍어누르는 다굴빵은 군사 천재인 프리드리히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프리드리히 자신은 쫓기게 되어 목에 걸고 다니던 로켓에 담긴 독약으로 자살할 생각까지 하는 등,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어려운 순간이었으나,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급서한 이후 1762년에 즉위한 독일 출신의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즉위하기 전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을 지지해왔던 표트르 3세는 제위에 오르자 전쟁 이전의 영토를 기준으로 한 화의를 맺자고 제의했고,[29] 이로써 프리드리히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여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해에 이르러 7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승리를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칭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위해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유럽에서 일찌감치 손을 떼는 등 유럽 전선의 판세 자체를 뒤엎었다. 그러나 식민지 쟁탈전에서는 오히려 패배의 상징이 되어 퀘벡 지역을 포함한 많은 해외 영토를 상실,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다만 승리한 영국의 부담도 만만치 않아, 갑자기 높아진 조세 부담에 대한 북미 식민지 주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해 보스턴 차 사건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1775년에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30]


4.3. 폴란드 분할[편집]


이후 1772년 폴란드 분할에 참여[31]서프로이센을 획득하여 본토인 브란덴부르크와 동쪽의 프로이센 공국을 육로로 연결했고, 이로써 '프로이센왕'으로서의 칭호도 프로이센 공왕(König in Preußen)에서 프로이센 국왕' (König von Preußen)으로 바꾸었고[32], 국민들로부터 대왕이라는 칭호도 헌사받았다.

그리고 바이에른 계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는 등 프로이센을 유럽 북부의 최강자로 자리매김시켰다. 이처럼 화려한 전적은 단순히 군사력의 승리로만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학술, 교육, 복지 등을 크게 발전시켜 프로이센을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닌 진정한 중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결과이기도 했으며 계몽군주답게 미국 독립전쟁 때 자신의 장교들을 파견, 대륙군을 크게 강화하는데도 한 몫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 대표적.[33]


5. 사망[편집]


1786년, 노년의 몸을 이끌고 직접 군대를 검열하던 중 폭우를 맞고 발병한 폐렴으로 인해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가 사망하자 갓 독립한 미국은 조기를 올리고 예포를 쐈으며[34],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어머니의 적이었음에도 "이제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라는 말로 심정을 대신했다.

생전부터 유럽에는 프리드리히 대왕 빠들이 매우 많이 양산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알렉산드르 1세,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35],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프리드리히 대왕을 벤치마킹했다.
[1]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의 딸이다.[2] 장남은 세례식에서 왕관을 씌워줘야 한다고 우기다가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인해 사망, 차남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예포를 쐈는데 포성을 듣고 발작을 일으키며 사망했다.[3]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의 오빠 조지 2세의 딸로 프리드리히 2세와는 사촌 지간이다.[4]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문서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노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오스트리아에 속았다며 이를 갈았다.[5] 프리드리히에게 플루트 부는 방법을 알려준 인물이다.[6] 프리드리히가 한스와 만나기 이전에 염문이 터졌던 인물이다. 프리드리히의 사상과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나 결국 소문이 퍼져 나가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페터를 네덜란드와의 접경지였던 클레페(Kleve)로 강제 전근시켰다.[7] 오늘날의 폴란드 코스트신나트오드롱 지역. 오데르강으로 갈라져 일부는 독일에 남아있다.[8] 사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힘이 약하지만 프로이센 왕국에서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강역 밖이지만, 수도인 베를린이 위치한 브란덴부르크와 항구 슈테틴이 있는 포메른은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압박이 가능했던 것.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7년 전쟁 이후였다. 물론 그때에도 형식적으로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 구성원으로 남아있었으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독일 연방이 구성된 후에도 오스트리아 제국보오전쟁 전까지는 독일 연방 내에서 서열이 프로이센보다 위였다.[9]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이제와 결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아버지.[10] 프리드리히 대왕 즉위 후 장군이 되어 7년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을 정도로 무재가 뛰어나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왕태자 대신 후계자로 고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본인도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건 매한가지라 아버지를 매우 경멸했고 형과의 사이도 좋은 편이었다.[11]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1세와 결혼. 프로이센의 왕세자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어머니.[12] 프리드리히 2세의 장모 안토니아 아멜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는 친자매간이다. 즉, 프리드리히의 아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종사촌 관계.[13] 상술한 것처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청혼한 것도 아버지의 학대에서 도망치는 게 목적이었다. 두 사람이 정말 결혼했다면 여장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격상 대판 싸우고 살았을지도 모른다.[14]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기초로 군주의 위엄과 백성에 대한 공포정치를 주장하던, 혹은 당시 그렇게 해석되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15] 그 유명한 장 자크 루소가 문제적 저작인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쓰고 프랑스와 제네바에서 모두 쫓겨났을 때 보호했던 사람이 프리드리히 대왕이었다.[16] 군대 규모를 총 인구 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시의 프로이센은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된 국가였다. 다만, 병력의 반 이상은 프로이센 외부 출신들이었는데, 이는 인구가 적은 프로이센의 현실상 병사로 차출하는 것보다 경제활동을 통해 세금을 내게 하는 게 낫다는 판단 하에 내려진 결정이었다.[17] 물론 프리드리히 대왕 본인은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계승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이었지만 슐레지엔을 통해 국가의 재정을 채우고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였기에 명분을 만들어야했고 제 시기에 딱 맞아 떨어졌다.[18] 슐레지엔은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체 세금 수입 중 22% 가량을 차지하던 알짜배기 지역이었다. 또 개신교가 강세인 지역이어서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이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깃발을 꽂자 호의를 보였다.[19] 배리 린든에서 배리 린든이 프로이센군으로 복무할 적의 배경음악으로 나온다.[20] 볼테르의 작품을 읽어봐도 알 수 있겠지만 비꼬기를 좋아하고 입이 험하다.[21] 이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가 주고받은 편지가 참 비범하다. 아래 기타 문단 참조.[22] 당시 유럽에서 오페라 하우스는 왕과 귀족을 위한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23] 이 시기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전통의 강대국이자 라이벌이었다. 더욱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편에 섰다.[24] 7년 전쟁 중인 1757년 콜린 전투 직후의 대왕을 그린 것으로, 여기서의 패배로 인해 프로이센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었다.[25] 오스트리아군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주특기인 측면 공격을 피하기 위해, 전열을 무려 4마일까지 늘리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양동작전으로 상대의 예비대를 한쪽으로 몰아넣은 뒤, 횡대를 종대로 바꾸는 파격적인 기동을 통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26] 이 자금, 물자 지원 중단으로 가용 병력이 15만명에서 6만명으로 쪼그라들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군 병사중 7할이 외국인 용병이었기 때문. 자세한 것은 조지 3세 항목 참조.[27] 영국의 이와 같은 오락가락한 대 프로이센 정책에 원한을 품은 프리드리히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 측과 무장중립동맹을 맺고 프로이센 장교단을 보내서 군사훈련을 도와주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도 프리드리히 사후 추모를 했고 현재도 호감을 갖는 사람이 많을 정도.[28] 다만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으로 진군하던 러시아군에게 돈을 쥐어주고 도시 내로 입성하는 것만은 막아서 약탈은 피할 수 있었다. 대신 프로이센의 왕궁이 있는 포츠담은 얄짤없이 털렸다.[29] 물론 표트르 3세는 러시아 최악의 암군 중 한명이 되었다. 결국 이 일 이외에는 한 것도 없이 반 년만에 아내에게 쫓겨났다. 로마노프 왕조 참조.[30] 히틀러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위와 같은 전개를 기대했다. 영화 몰락의 후반부에서도 히틀러가 벙커 안의 자기 집무실에 걸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나온다. 턱 밑까지 칼날을 들이댄 소련군의 맹공을 연일 간접적으로 얻어맞던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공산주의를 내세워 유럽을 위협할 수 있는 소련을 경계할테니, 이미 철저한 반공을 천명한 독일이 미국에게 반공 동맹을 세우기 위한 강화를 맺자고 하면 괜찮지 않겠냐는 게 그나마 희망적인 생각이였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미 대세는 심각하게 기울어 소련군이 하루 종일 쏟아붓는 포화에 베를린 시내가 박살나고 있었으며, 나치의 만행이 점차 드러나는 상황에서 미국이 갑자기 독일과 강화를 맺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도의상으로도 불가능했다. 되려 장차 소련과의 대결을 위한 유럽의 요충지로서 독일을 써먹으려면 우선 밭에서 피를 뽑아내듯 독일에서 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 선동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나치를 뽑아내야 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살했고, 나치 독일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해 전범국으로 전락했다.[31] 폴란드는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이미 러시아의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통째로 흡수하기 전에 오스트리아와 합세하여 견제한 것이다.[32] 'von'이 아닌 'in'을 쓰게 된 이유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국왕은 슬라브 문화권인 보헤미아 국왕뿐이었기 때문. 명나라 봉작체계의 공식적인 국왕이 조선국왕 뿐인것과 비슷하다. 신성로마제국 황태자의 봉호인 로마왕도 국왕은 아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협상할 당시 본토인 브란덴부르크가 아닌 신성 로마 제국 바깥의 프로이센 공국의 이름을 빌려 공왕을 칭했고 그래서 'von'(국왕)이 아닌 'in'(외공내왕)을 사용해야했다. 여담으로 독일어에서 'in'과 'von'의 차이는 크다. 동아시아로 치면 'in'은 외왕내제와 비슷한 표현.[33] 동성애자였던 폰 슈토이벤은 동성애 혐의로 자신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것 같다는 기미를 보고, 미국으로 도망친 사람인데 웃긴 건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대왕부터가 동성애자였다.[34] 미국은 프리드리히마리아 테레지아의 라이벌매치였던 7년 전쟁의 나비효과로 태어난 국가라서 미국 독립을 주도한 건국의 아버지들 상당수가 프리드리히 팬이었다.[35] 나폴레옹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7대 명장에 프리드리히 대왕을 포함시켰고, 그들의 기록을 반복해서 공부한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프로이센을 박살내고 베를린에 입성했을 때 나폴레옹은 포츠담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 앞을 지나며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춘 뒤, 휘하 장교들에게 "제군, 모자를 벗게. 이 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린 여기 있지 못했을 걸세."라고 그를 고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전리품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썼던 회중시계와 칼을 챙기며 이것이 가장 가치있는 전리품이라고 희희낙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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