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5년 리스본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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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재산 피해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으나 리스본 시에서만 대략 1만 채의 건축물들이 붕괴되었는데, 이는 리스본의 건물 중 85%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왕궁은 물론 약 7만 권의 장서와 티치아노, 루벤스, 카라바조 등의 작품을 소장한 도서관도 함께 붕괴되면서 많은 자료가 유실되었다.
이러한 피해를 입힌 리스본 지진의 의미는 상당하다. 지진이 발생한 18세기 중반은 포르투갈, 스페인과 같은 이베리아반도의 해외 식민 제국 선두 주자들의 위세가 한풀 꺾인 시기였다. 하지만 대항해시대와 근대를 시작하며 이루어낸 세계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열어 젖힌 해상 왕국 포르투갈의 심장인 리스본은 그 상징적 중요성과 내부적 영화로 여전히 위세가 높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인 의미가 깊고, 문화 유산과 부로 휘황찬란했던 도시가, 지진에 큰 피해를 입었다 정도가 아닌, 알파마 지구 등 몇몇 구역을 제외한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니 물리적 피해를 넘어 정신적 충격이 엄청났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종말을 방불케하는 재난이 지나간 후 포르투갈 가톨릭, 영국 성공회, 영국 개신교 성직자 생존자들은 평소 서로를 이단이라 부르며 으르렁대던 원수 지간이었는데도 서로 함께 기도하며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2. 사건 경과[편집]
1755년 11월 1일 만성절[3] 오전 9시 40분, 지진이 리스본을 강타했다. 최초의 진동은 약 5분간 지속되어, 전술한 대로 리스본의 건물 85%를 파괴했다. 축일을 맞아 초만원이었던 성당 안의 신자들이 일차적으로 참사를 당했으나, 포르투갈 왕실은 개인적인 일로 리스본을 잠시 비운 상황이었고, 귀족들은 관례적으로 약간 늦게 미사에 참례했기에 도착이 늦어져 화를 피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지진의 상황은 끔찍했다. 지진이 닥치기 전까지 리스본은 교회의 행사와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그들이 곧 대재앙을 맞이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축제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지진이 강타하자 축제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반전이 되어 공포와 비명으로 변했고,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깨짐과 동시에 촛대들이 넘어지면서 곳곳에 화재가 일어났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붕괴하는 아비규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화재를 피해 건물이 없는 탁 트인 곳이 안전할 것이라 판단하고[4] 부두와 강 등 물가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런 희망을 품고 모여든 그들을 맞이한 것은 수평선에서부터 몰려오는 해일이었다. 지진 발생 약 40분 후, 이미 해저가 드러날 정도로 물이 후퇴한 바다에서 거대한 해일이 밀려와 타구스 강과 부두, 도심지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뒤늦게 항구에서 멀어지고자 도망쳤으나 쓰나미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바닷물이 덮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로 인해 간신히 살아남았던 대다수의 생존자들이 사망했으며 현대의 지진학자들은 당시 지진이 리히터 8.5~9.0(보통 리히터 8.7) 정도에 달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해일의 근원지는 320km 떨어진 대서양의 카보베르데 제도 해저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그 뒤 해일이 2번 더 왔고, 이 파도들은 대서양과 마주한 유럽 해안 전체에 퍼져 아일랜드의 골웨이와 잉글랜드 대부분의 해안에도 영향을 주었다. 해일이 덮치지 않은 곳에서는 화재가 일어나 5일 밤낮으로 타올랐고, 지진으로 인한 건물 파손과 잇따른 화재는 도시의 중심지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당시 생존자들이거나 리스본이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에 몰려온 강도와 범죄자들이 넘쳐나 한때 아름다웠던 수도 리스본은 그야말로 혼돈과 무질서의 도가니 자체로 변해버렸다.
국왕은 이 소식을 듣고 귀족들과 함께 서둘러 귀환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이미 폐허로 변한 리스본이었다. 전쟁이 났더라도 이정도의 폐허는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된 수도의 모습에 왕이나 귀족들도 경악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수도의 핵심 장소인 왕궁에 보관되던 행정 체계와 신대륙에서 목숨 걸고 탐험한 모험가들이 그린 지도, 각종 유서 깊은 기록들까지 불타 버려 문제가 심각했다.
3. 수습 및 재건 과정[편집]
3.1. 카르발류의 활약[편집]
개인사로 잠시 리스본을 비웠던 주제 1세가 급히 돌아와 보니 리스본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6] 수많은 건물과 주민들이 죽어 도시가 초토화가 된 것도 모자라 여기에 감옥이 파괴되며 범죄자들이 마구 뛰쳐나오며 자연재해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도시를 더욱 악화시켰다. 도시 곳곳에서 약탈, 강간, 방화 행위가 잇따랐다. 도시가 사실상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실의에 빠진 국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신하 카르발류에게 사태의 해결을 위한 전권을 맡겼고, 결과적으로 이는 매우 현명한 판단이 되었다.동 주제 1세 국왕(D. José I): 이런 재난에 도대체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
: 죽은 자는 장례를 치르며, 산 자는 돌보고 항구를 닫으소서. (Sepultar os mortos, cuidar dos vivos e fechar os portos.)
우선 카르발류는 사방에서 날뛰는 도둑들과 강간범, 살인자 같은 범죄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즉결 재판에 넘겨 처벌했고, 치안의 확보를 위해 지방에 주둔해 있던 군 병력들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재난을 간신히 피한 귀족들과 유력자들이 공포에 질린 시민들을 진정시킨 뒤, 카르발류는 대주교와 긴급히 면담하여 일체의 장례미사를 생략하고 시신을 속히 수습하는 것에 동의를 받아냈다. 시신을 재빠르게 수습한 것은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을 막아주었다. 이후 생존자들을 불러모아 식량 배급소를 열고 군인들이 직접 대동한 자리에서 식량을 공평하게 배분했다. 모든 것이 정확히 그의 계획대로 돌아갔다. 심지어 그 당시는 18세기. 제대로 계획을 세우는 것도 힘들겠지만 그 난리통에 제대로 된 통신 수단도 없이 그렇게 큰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초인적인 일이다.
사람들은 이제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르발류는 도시 재건 사업을 잠시 보류시킨 뒤, 1758년 7월 12일에 도시 계획법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재건하도록 했다. 건축이 5년 이상 지연될 경우에는 부동산 구입을 희망하는 타인에게 권리가 넘어갔으며, 대부분의 집들은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출처)
리스본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건물은 4층 이상 지을 수 없었고, "가이올라"라는 신 건축 공법을 도입해야 했다.[7] 또한 모든 건물은 그 기초 밑에 목재 더미를 묻어두어 건물이 흔들리는 지반 위에서도 유연하게 탄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리스본의 모든 건물에 내진설계를 의무화한 것이다. 또한 거리에 잔해가 쌓이더라도 안전할 공간을 확보하도록, 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넓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7개의 대로가 18m[8] 폭으로 깔렸으며 동서 방향으로는 12m의 폭으로 유지되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이 재건된 것도 이때의 일.
신임 도시 설계자로 에우제니우 두스산투스(Eugénio dos Santos), 마누엘 다 마이아(Manuel da Maia), 카를루스 마르델(Carlos Mardel)이 임명되었다. 마이아는 예전 런던 대화재 이후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구상했던 설계도를 기초로 해서 기하학적 구조의 도시를 설계했다. 모든 건축 자재들은 대량 양산을 위해 표준 규격을 잡아놓고 신속하게 찍어냈다.
물론 반발이 있었다. 자기 땅의 소유권을 잃을까 염려한 서민들, 더 이상 주택으로는 차별성을 기대하기 힘들어지게 되어[9] 자존심이 상한 귀족들이 불쾌해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당분간은 찍소리를 못 내고 있었는데, 당시의 여진이 카르발류 사후 10년이 넘은 180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지진의 공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심판을 무시하고 감히 재건을 했다가 다시 더 큰 심판을 겪게 될까 불안해했다. 심지어 카르발류는 아베이루(Aveiro)를 주축으로 한 일부 귀족들 사이에 반란모의가 있었다는 것까지 밝혀냈고[10] 그들을 엄중하게 처벌했다. 시민들의 동요는 군인들이 직접 내리눌러서 통제에 따르도록 했다. 가브리엘 말라그리다(Gabriel Malagrida)를 주축으로 하는 일부 예수회 소속 성직자들이 통제에 따르지 않자 카르발류는 그들을 국외추방하는 법령을 공포하는 것으로 맞섰다.[11]
3.2. 카르발류의 설문 조사[편집]
카르발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국의 모든 교구에 다음과 같은 13개의 질문이 적힌 설문지를 돌렸다.[12]"...세계 최초로 지진에 관한 객관적 설문조사를 실시한 공식적 시도였다..."
- 리처드 험블린, 《테라: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
위의 질문에 대한 사제들의 답변은 오늘날에도 포르투갈 국립 문서 보관소인 토르 두 톰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이 지진의 현대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 종합적으로 이 지진의 최대 진도는 XI(Extreme)이고, 쓰나미의 최대 높이는 15 m 정도이다.[13] 15 m는 4~6층 건물 높이인데 당시 이 높이만 한 건물이 흔하지 않았으며, 건물 대부분이 지진화재로 불타 없어졌다.1. 11월 1일 몇 시에 지진이 시작되었고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가?
1. 진동이 특히 강하게 느껴지는 방향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방향이 따로 있었는가? 예컨대 남쪽인가 북쪽인가? 건물의 어느 한쪽만 유독 심하게 무너졌는가?
1. 얼마나 많은 건물이 무너졌는가? 그 가운데 중요한 건물이 있었는가? 무너진 건물은 어떤 상태로 남았는가?
1. 몇 명이나 죽었는가? 그 가운데 유명 인사가 있었는가?
1. 바다나 연못, 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 바닷물이 처음에 솟아올랐는가 가라앉았는가? 또 평소에 비해 얼마나 더 높이 솟아올랐는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몇 번이나 했는가? 파도가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
1. 땅이 갈라진 곳이 있었는가? 있다면 거기서 어떤 특이점을 발견했는가? 샘이 새로 생긴 곳이 있었는가?
1. 각 교구의 신부와 군대, 관료들은 즉시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1. 11월 1일 이후 진동을 느낀 적이 있었는가? 있다면 언제였고 어떤 피해가 있었는가?
1.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지진을 겪은 적이 있었는가? 있다면 어떤 피해가 있었는가?
1. 각 교구의 주민 수는 얼마이며 남자와 여자는 각각 몇 명인가?
1. 식량이 부족한가?
1. 만약 불이 났다면 불길이 얼마나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입은 피해는 무엇인가?
3.3. 다시 태어난 리스본[편집]
비가 내린 뒤 땅이 굳어졌다.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겪은 뒤 폐허가 된 한 도시가, 지진 대비와 재난 관리에서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모범적 선례로 거듭났다. 카르발류의 재난대비 시스템은 리스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바로 위 문단에 소개했듯 전국 규모로 지진에 대한 설문지를 돌렸고, 이렇게 얻은 데이터를 수집, 분석, 참조함으로써 지진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했다. 서유럽에서 해당 지진으로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다른 국가들은 포르투갈에 사절을 보내서 해당 자료들을 공유하고 교환하며 국제 공조를 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스페인 왕실에서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금을 지원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원조가 필요할 시 돕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예외적인 사례가 네덜란드인데, 개신교 국가로서 가톨릭 국가와의 갈등이 깊었기 때문에 이 재난을 하나님의 정당한 징벌로 이해했고 어떤 원조도 하지 않았다. 반면 같은 개신교 국가였던 영국의 경우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신속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했는데, 이는 포르투갈과 영국 모두 스페인에 맞서 동맹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상업을 영국 상인들이 좌우하다시피했던 상황을 감안한 조치였다. 이들 상인 가운데 적잖은 수가 리스본 재건 사업에 참여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영국의 지원이 후하기는 했어도 마냥 공짜는 아니었던 셈이다.
이때를 계기로 리스본 시가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과거 교회 권력에 대한 유럽 계몽주의의 승리이자 도시공학, 건축학의 눈부신 발전, 재난 관리의 실제적 경험, 국제 공조 시스템, 기타 모든 것들에 대한 성취와 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교육비를 치르기는 했지만, 이제 리스본은 더 이상 지진에 취약한 도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때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비용을 너무 많이 썼기에 포르투갈의 경제적 황금기는 끝나버렸으며, 그 결과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을 수 없었다.
4. 종교사적·철학적 의의[편집]
동서고금을 통틀어 악의 문제처럼 신의 존재에 의심을 가지는 담론에는 수많은 종류의 종교적 해명이 따라왔으나,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가공할 재난은 아예 그 입을 막아버릴 정도의 정치적 여파를 발생시켰다.[15] 희망을 잃은 민중에게 계몽주의는 즉각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볼테르, 루소, 괴테 등 당대의 철학자들이 앞다투어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다 죽인 대지진을 막지는 않은 주님'에 대한 회의감을 쏟아냈고, 교회에서는 이러한 냉소를 막을 수 없었다.
철학자로 잘 알려진 칸트는 사실 50대부터 본격적으로 철학 저술을 시작했고, 대지진 당시였던 30대에는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런 재앙을 신의 뜻으로 해석한 당대의 사람들[16] 을 비판하며 지진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글을 쓰기도 했다. 당연히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완전히 옳은 분석은 아니지만, 현대 지진학의 초석이 되는 이론들을 내놓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찾으려는 그의 태도는 이후 잘 알려진 칸트 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교회에서 논의하는 악이란 단지 개인 차원의 고통 내지는 불행 정도에 그쳤다. 그렇기에 "그것은 경고입니다,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뜻입니다, 뭔가 죄를 지어서 그럴 겁니다"와 같은 해명이 그간 꽤 설득력도 있었고 또한 잘 먹혔다.[17] 그러나 이번 대지진은 달랐다. 성대한 축일을 위해 성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바티칸 역시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뒤늦게 리스본 대주교가 "이번 재난과 하느님의 섭리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간신히 입장을 밝힌 행간에는, 사목자들과 일반 신자들의 당혹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게다가 리스본에서 그나마 재난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구역이 도리어 재난 이전에는 가장 타락한 곳이라고 지탄받던 집창촌 알파마였다. 대부분의 교회가 무너지고 신자들이 죽었는데, 집창촌과 매춘부들은 도리어 살아남은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교회나 관공서같이 높은 건물로 가득 차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는 지진에 큰 피해를 보기 쉬웠지만, 집창촌은 높은 건물이 별로 없으며 인구 밀집도가 낮고 교회나 도심을 피해서 위치해 있기에 2차 피해인 화재와 해일에도 피해를 적게 본 것이었다.[18]
프랑스 혁명 등 이어지는 사건들과, 계몽주의적 사고 확산과 함께 유럽인들은 점차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세기 중엽 세속화(secularization)로 이어져 비로소 유럽인들은 그리스도교적 교리와 가치관을 생활 규범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해졌다.
5. 어록[편집]
"...격렬하게 요동치던 땅이 잠잠해지고 무시무시한 파도로 해안가를 덮쳤던 타구스 강이 잔잔해진 뒤에야, 모든 것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생존자들은 리스본의 종말을 경고한 예언들을 기억해냈다... (중략) ...요한묵시록에 묘사된 최후의 날 ㅡ 당대 사람들은 리스본 지진을 그렇게 기억한다. 사실 1755년 11월 1일은 최후의 날이나 다름없었다. 땅과 바다, 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리스본을 돌이킬 수 없는 폐허로 만들었다."
니콜라스 시라디(건축 비평가)
"...이는 5세기 로마의 몰락 이래로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참사다."
토머스 D. 켄드릭(역사학자)
"...18세기에는 우리가 오늘날 아우슈비츠를 입에 올리는 것만큼 빈번하게 리스본을 입에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신뢰의 붕괴를 의미하는 데는 그 장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수전 니먼(철학자)
"...리스본 참사 이후 하느님의 도덕적 인격이 이런 재난을 허용할 수 있다는 논증은 처음에는 철학자들에게, 나중에는 신학자들에게도 그 견인력을 잃기 시작했다. 리스본 참사는 중세적 사유에서 일어난 피로골절(stress fractures)을 아주 극적으로 드러냈으며, 한때는 이런 참사를 포용할 수 있었던 윤리적, 신학적 범주를 단숨에 압도해 버렸다... (중략) ...만일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간에, 피에 굶주린 그의 폭력성은 무작위적이고 무분별하다고 볼 수 있었다. 모든성인대축일에 일어났던 리스본 참사 배후에 도덕적 의지가 존재했다면, 그것이 전달할 수 있었던 도덕적 교훈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의지적 잔인함은 극단적이었다."
《고통과 씨름하다》, 토머스 G. 롱, p. 41
"리스본의 지진은 볼테르에게서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라는 질병을 제거하기에 충분했다."
《부정 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p. 361
6. 대중매체에서[편집]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주인공이 바로 이 지진 속에 휘말리는 대목이 나온다. 애초에 해당 소설의 작성 동기는 이 대지진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1807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 '칠레의 지진(Erdbeben in Chili)'의 모티브 중 하나가 된 사건이다. 비록 이 작품의 제목과 작중 배경은 칠레의 지진을 가리키고 있지만,[19] 작품 내적인 전개의 실질적인 모티브는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본다.
어쌔신 크리드: 로그에서는 에덴의 조각 회수 임무를 맡은 셰이 패트릭 코맥이 리스본의 카르멜 성모 성당 밑에 있는, 이수의 유적지에 있던 지구자기장 조절 장치를 건드려서 발생한 것으로 나오며 이 사건은 셰이가 암살단에 회의를 느끼고 템플러로 전향하는 계기가 된다. 다만 여기서는 지진 직후 시내를
모바일 게임 명일방주의 국가 이베리아에 닥친 재앙 '고요함'이 이 지진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베리아라는 이름에서 보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 포르투갈이 배경이며, 어마어마하게 높은 해일이 이베리아 전체를 집어삼켰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최강대국이었던 이베리아가 이 사건 이후로 순식간에 몰락한 것도 이 지진에서의 양상과 유사하다.
해당 사건과 관련은 없지만 베르세르크의 단죄 편에서 비슷한 사건이 나오는데 알비온에 이변이 닥치자 모즈구스 같은 광신도는 물론이고 그저 신의 요행만을 바라던 우민들은 싹 다 죽었지만 가츠 일행 및 창녀들은 살아남는다. 이때 가츠가 명언을 남기는데, "너희들은 그저 두 손을 부여잡고 여자 한명을 죽이라고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살고 싶으면 그 손을 들어서 뭐든 해라!"
6.1. 미국의 작가 에바 마치 태펀의 소설(1914)[편집]
미국의 여작가 에바 마치 태펀(1914)이 쓰고, Houghton Mifflin 출판사에서 출간한 소설은 이 대재앙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는 극화된 내용이며 P파나 S파 따위의 내용은 전해지는 과정에서 첨부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