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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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黃嗣永 帛書 事件
1801년(순조 1년)에 황사영 알렉시오가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해 외세의 군대를 끌어들여 정부를 뒤집으려는 역적 행위를 하려다 발각된 사건.
2. 황사영의 백서 작성[편집]
조선에서 가톨릭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제천(堤川) 배론(排論:舟論)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겼다. 황사영이 숨었던 굴의 사진
황사영은 굴 속에서 중국 북경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편지를 썼다. 2자 가량 되는 명주천에 1만 3,311자를 썼다. 명주천에 썼기에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걸 白書로 잘못 알아 '명반[1] 으로 쓴 보이지 않는 편지'를 보냈다고 쓰는 책도 있다.
먼저 당시 조선의 가톨릭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활동, 주 신부의 자수와 순교 사실, 신유박해와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간단한 전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조선 국내의 실정과 포교의 방안을 제안했다.
3. 백서의 내용과 발각[편집]
백서는 앞부분에서 박해의 전말을 알리면서 초토화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전하며, 신자 하나하나의 상황을 전한다. 그리고 황사영은 청나라가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해 청나라 황제(가경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주기를 요청했고, 더 나아가서는 청나라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기를 희망했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했다.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0,000 ~ 60,000명을 동원해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협박해주기를 희망했다.
즉 청나라에 의한 속국화 혹은 서양 군대에 의한 협박을 추진한 셈인데, 당연히 이는 반란이다. 세자 책봉이나 후계 과정에서의 갈등으로도 역모가 성립되던 전제군주제인 조선에서, 현대적 의미의 외환의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으니 정말 엄청난 일이다.[2] 이러한 백서를 가지고 청나라로 가려던 황심(토마스)[3] 은 검문에서 걸리고 말았고,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가경제의 치세였는데, 이 시기 청나라는 조선과 일본처럼 천주교를 박해하던 상황이었다.
백서 자체는 의금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25년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4] 주교가 입수해 교황 비오 11세에게 보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문 보기(위키문헌), 번역본
4. 후폭풍[편집]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다시 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이전까지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은 '문화 충격'+'기득권 지키기'의 성격이었다. 따라서 정순왕후 본인도 피에 굶주린 악녀가 아닌지라 당초 목적인 남인 및 노론 시파만 무력화하고 적당한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천주교=외세를 끌어들이는 반역자들'이란 인식이 박히고 말아 정순왕후가 박해를 끝내고 싶었다고 가정해도 박해를 중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신앙의 자유가 생기기커녕, 더욱 거세게 가톨릭을 탄압하게 만들었으며 지방 유생들을 비롯한 지방 유지와 학자들에게도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크게 심어줬을 뿐이었다. 즉, 기존의 천주교 박해 원인에 '외래 세력에 대한 적개심'까지 합해진 것이다. 조선인을 천시하고 인종차별하기로 악명 높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조차도 "조선 정부가 엄벌에 처한 걸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5]
당연히 대역죄인이 되어버린 황사영과 황심은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숙부 황석필은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귀양을 갔고[6] , 황사영의 어머니는 관비가 돼 거제도로 갔으며,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은 아내 정명련[7] 마리아가 제주도로 귀양올 때 추자도에 두고 떠나면서 노비가 되는 걸 면했다. 그 뒤 오씨 성을 쓰는 가족에게 발견돼 보호를 받으며 자라면서 추자도엔 황사영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오씨 할아버지가 황경한을 발견해 거둬 키운 것으로, 지금도 오씨와 황씨는 서로 형제라며 통혼을 안 한다고 한다.
이 백서로 인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더욱 거세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도굴사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인해 조선 지배층에겐 내통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개항기인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전까지 천주교도들은 외세와 내통하는 세력으로 지목돼 탄압받아야 했다.
5. 후대의 평가[편집]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파리 외방전교회 샤를 달레 신부(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황사영은 외국인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낭만적인 오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사영의 경우 살아 생전 접한 사제가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밖에 없었을 것이고, 주문모 신부는 청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자들의 죽음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스스로 자수할 정도로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또한 황사영이 목격했던 신유박해가 비록 이후에 벌어질 병인박해보단 희생자 수가 적다고 할지언정, 성별이나 신분을 안 따지고 300명을 죽였단 점에서 충분히 거대한 박해다. 그전까지 가장 큰 옥사에 속하는 영조 31년의 옥사만 해도 죽은 사람은 200여 명, 그래도 그들은 양반계층이 주다. 신분과 남녀를 안 가리고 이 정도 죽은 일은 전례가 없다시피[8] 했다.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대사전>, 황사영 항목 中
황사영의 방안은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기 짝이 없어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청나라도 천주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은 데다가[9] 조선을 자국의 헤게모니 권역으로 보고 있었는데, 서양 국가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협박하는 걸 방관할 리 없다.
전쟁 없이 조정이 청나라에 복종해 조선이 속국화된다고 해도, 속국의 문제는 단지 '조정의 정권 교체'에만 해당하지 않으며, 조선인 전체에게 부정적 영향이 갈 수 있다. 그리고 서양 군대를 통한 무력시위란 방안도 현실성이 없다. 황사영은 "동양 여러 나라도 서양 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들이는 것이 매우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서양 군대가 무력시위를 하면 조선 조정이 '당연히' 선교사를 받을 것이니 무력 충돌이 미미하리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10] 그러나 당시 서구는 황사영이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세계는 아니었으며, 조선이 가톨릭을 허용한다고 한들 제국주의 야심으로 가득한 서구 국가들이 '무력시위만 하고' 순순히 물러날 리가 만무했다. 더군다나 당대 열강 중 가장 강력한 천주교 국가라 할 수 있는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 때문에 교황청과 관계가 틀어진 상태였고 말이다.[11] 수십 년 후 얘기지만 베트남은 가톨릭 박해 문제로 인해 프랑스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황사영의 주장대로 갔다면 조선은 프랑스(혹은 다른 가톨릭 국가)의 식민지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수로 끝나서 망정이지, 구체화가 됐다면 지금의 을사오적 대신 황사영이 매국노로 기억되고, 그 황사영으로 인해 강제된 가톨릭 또한 지금의 일제의 잔재처럼 적대시되어 철저히 쓸려나갔을 것이다. 미수로 끝나서 차라리 사람들에게도 가톨릭에도 다행이었다고 할만하다.
황사영이 몽상에 가까운 자신만의 판단으로 일을 저질렀고, 순교했지만 그 내용은 분명 매국, 반역이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오랫동안 그를 순교자로 대놓고 공경하지 못했다. 일단 백서 사건 이후에는 당시 왕실과 조정 권력자 중 천주교에 호의적인 인물이라도 천주교도들을 감쌌다가는 같이 대역죄인이 되니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결과 박해의 강도가 매우 세어져서 천주교도들이 더 많이 죽도록 만든 인물이다.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외세의 무력을 끌어들인다는 폭력적 방법을 원했던 것도 그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였고,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천주교 내에서도 그를 순교자로 인정하고 로마에 시성시복을 청하자는 데는 찬반이 갈려 있었고, 입에 올리는 것마저 꺼리는 인물이었다. 일반 신자들보다 성직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더했던 인물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순교자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공식적으로 황사영을 공경하라는 말을 못 했고,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공경하는 일을 묵인하는 정도로 논외로 치며 쉬쉬하던 존재였다. 물론 그를 마땅히 공식적으로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대 입장의 열혈 사제, 신자들도 꽤 있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긴 논란 끝에 2021년 6월 10일, 시성성에 황사영의 시복심사를 요청했다. 이미 적지 않은 신자들도 그를 순교자로 기리면서 그의 무덤과 동상, 기념비 등의 기념물에 순례하고 있었고, 황사영이 배교하지 않고 죽은 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제들도 "어쩌다 그런 상황으로 몰렸는가"라며 당시 상황을 중점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 국가보다 신앙이 소중하다는 것과, 신앙을 위한 군사적 개입은 정당하다는 건 다른 명제이다. 특히 한국 가톨릭 입장에선 황사영으로 인해 '외세에 대한 경계와 적개심'이 가톨릭 박해에 섞여버렸다는 게 난감하였다.[12]
아이러니하게도 황사영 본인은 자신의 행위를 반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발언에서 보듯, 황사영은 조선인 신자들이 털끝만한 불충도 저지르지 않았고 난을 일으킨 것도 아니며 오히려 난은 가톨릭의 진실된 표양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면 "이씨 왕조의 명성과 위세는 배가 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13] 하지만 현대에도 영해에 낯선 군함 1척이라도 갑자기 오면 긴장해야 할 처지에[14] 전혀 못본 외세나 바로 앞에 있다 해도 일반 백성들에겐 먼나라가 온다고 하면, 의도가 어쨌든 간에 긴장할 건 불 보듯 뻔하고, 무력시위라도 한다면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건 뻔한 일. 당연히 이들은 '침략자'로 인식될 것이고, 그렇다면 조정의 위신이 서려면 이들과 싸워 이기는 것뿐이다.[15]"성교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비록 억지로 역적의 죄목을 뒤집어씌웠지마는 실은 털끝만한 불충의 증거도 잡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어질고 착한 태도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미덥고 진실함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나라의 교우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난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교의 진실된 표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개 개인의 편지가 당장은 힘도 없고 편지가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당시 프랑스는 곧 나폴레옹과 함께 전 유럽을 상대로 맞다이를 떠야 되는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머나먼 극동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아무리 빨라도 서양의 제국주의 열풍 시대 때는 되어야 편지를 발견함으로서 조선으로 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즉, 프랑스인들이 이 편지를 읽으면 "아! 조선에선 우리의 지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구나?"라며 침략 구실을 만들게 되어 버린다. 당장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화할 때 내세운 핑계가 자국 선교사가 포교하다가 사형당한 것이었고, 청을 침략할 때 영국 원정군에 끼어든 명분이 자국 선교사가 살해된 것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침략 청원 백서가 발견되면 그야말로 대놓고 침략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상황이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은 믿음 하나 때문에 앞뒤 생각 안 하고 행동한 광신도인 셈이다. 이 편지를 뒤늦게 안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서양 가톨릭 신자 및 선교사들도 기겁할 정도면, 이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허무맹랑한 행동이었는지 알 수 있다.
2002년,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가 공저한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 박노자는 "황사영이 지키려 한 것은 보편적 정의"라며[16] "조선 천주교 신자를 위해 움직일 '외세'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황사영은 천주교를 세계 보편진리로 여겼기에 요즘으로 치면 UN에 탄원한 것"이라고 온정적으로 해석했지만, 허동현은 "신념을 위해 또 다른 폭력을 부른 건 잘못"이라며 이에 대해 비판했다[17]
요약하면 믿음에 너무 심취하여 편협된 시야를 가짐으로서 잘못된 길을 선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좋게 말하면 판단력 부족이다.[18]
5.1. 오해[편집]
다만 황사영에 대한 비판이 워낙 거세다 보니, '백서 사건 이전엔 처형하더라도 양반 남성에게만 집행했고 여성이나 평민 이하의 백성에겐 관대했는데 황사영 때문에 더 거세졌다'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백서 사건 이전에 있었던 신유박해에서도 양반만 죽였던 건 아니다. 이는 한국 124위 순교복자 문서만 잠깐 훑어보아도 알 수 있으며, 양반만 죽였다거나 하는 건 근거 없는 오해다. 신유박해까지의 순교자들 중 양반 남성들이 있지만, 그것은 양반 남성'도' 죽인 것이지 양반 남성'만' 죽인 게 아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든다면, 음력 8월 26일 황심을 만나 황사영은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발송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성만 거론하더라도, 그 전인 음력 5월 24일에 이미 조정은 강완숙 골룸바, 강경복 수산나,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한신애 아가타를 참수했다. 그리고 참수 이틀 후엔 또 윤점혜 아가타, 정순매 바르바라를 처형했다. 즉 백서 사건 때문에 여성 등에게도 박해가 확대됐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실관계가 잘못된 것이다.
다만 주 타깃이 양반 남성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박해의 처음 목적은 반대파 탄압으로 남인을 탄압하기 위해 그들이 많이 믿던 천주교를 금지한 것이고, 당연히 당대에 정치성을 띄고 활동하던건 양반 남성들이니까. 그렇다고 그런 양반들'만' 대상으로 천주교를 금지한게 아니니까 천주교를 믿는 일반인 남녀를 안 가리고 처벌받은 건 사실이지만.
6. 후일담[편집]
후에 황사영과는 인척인 정하상[19] 바오로가 천주교를 옹호하기 위해 상재상서란 책을 썼는데, 여기서도 "황사영은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다"라며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황사영의 후손이 남아있지만, 그의 가문은 황사영에 대해 그다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고 감추고 싶어한다고 한다. 황사영의 4대손은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의 아들인 황사영의 5대손은 도쿄에서 외국어학원 원장으로 지내다가 사망해, 일본에도 황사영의 후손이 살고 있다.
7. 관련 작품[편집]
- 1980년대 문화방송에서 방영한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선 백서를 나무토막 사이에 넣고 황심이 나무꾼으로 변장해 지게로 나무토막을 가득 싣고 검문을 통과하던 도중에 수레와 부딪히면서 넘어져 수문장이 우연히 발견해 들통나는 것으로 연출됐다. 결말은 당연히 사망. 드라마에선 종교상으로 그런 것이란 말을 하며 모진 고문을 받는다. 당시 김조순을 연기한 연기자가 "가소로운 놈,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그딴 사교에 대한 믿음이나 지껄이느냐. 천하에 둘도 없는 역당에겐 거열이 가장 어울린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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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반을 물에 풀어 천에 글을 쓰면, 마른 상태에선 그냥 천으로 보이지만 천을 물에 담그면 글씨가 보인다고 한다.[2] 현대 대한민국 기준에서도 외환죄는 사형, 무기징역으로 처단한다는 멘트가 들어있을 정도로 엄격히 다뤄진다.[3] 황심 토마스는 1796년에 서양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등이 시도했던 대박청래운동 때 밀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 때는 1801년과 달리 서신을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했지만 구베아 주교는 요청을 기각했다. 그리고 유항검도 신유박해 때 가족과 함께 체포돼 옥살이하다 백서 사건에 연루돼 처형된다.[4]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5] 황사영은 신앙심이라도 진실되었지 이 인간은 전형적인 19세기 말스러운 제국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뮈텔이 황사영에게 비판할 자격이 없는게 맞다. 그만큼 황사영이 저지른 죄가 매우 크다는 소리다.[6] 역모사건 시 백부, 숙부같은 직계가 아닌 경우엔 유형 3,000리에 처했다.[7] "정난주"라고도 한다.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이다.[8] 조선 초기의 왕씨 몰살이 그나마 비견할 수준이다.[9] 건륭제 때부터 역시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 되었고 강희제 때부터 제사 문제로 말썽이라 옹정제, 강희제도 계속 요주의로 보고 있었다.[10] 실제로도 수십 년 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조선은 서양의 힘을 느끼게 된다. 비록 겉으론 깨닫지 못한 척했지만 적어도 조선 조정에서만큼은 수뢰포나 화륜철선 개발 등으로 서양에 맞설 무기를 개발하려 시도했고, 그걸로도 안된다는 판단이 서자 대원군이 물러난 뒤 결국 개항하게 된다.[11] 황사영 백서가 작성된 당해인 1801년에는 그나마 정교협약으로 인해 공포정치 시절보단 관계가 호전되어 있었지만.[12] 일본도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 가톨릭이 '반정부 세력'이란 인식이 제대로 박혀 혹독한 기독교 탄압의 계기가 됐다지만, 시마바라의 난은 단순히 키리시탄에 대한 탄압만이 아니라 당시 다이묘들의 과도한 징세와 학정에 대한 반발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종교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일종의 '민란(잇키)'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많다. 당장 키리시탄을 싫어하던 낭인들조차 대거 가세한 반란이었다. 그래서 막부도 기독교 반란이라기보다는 단순 민란으로 해석하여 다이묘들도 처벌했다. 기독교 탄압은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걸 그대로 했을 뿐이다.[13] 나라와 정부를 없애 놓고 그 나라의 명성과 위세가 배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생각없고 멍청한 소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14] 일반 어선이라 할지라도, 어선임이 확인되기 전까진 경계해야 한다. 그게 진짜 어부들이 탔는지, 아니면 어부를 가장한 간첩이 타고 있거나, 해적 및 사략 집단이 어부를 가장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기 전엔 모른다.[15] 모가디슈 전투만 봐도, 소말리아 사람들은 명백하게 좋은 의도를 지닌 미군이 아닌, 시시때때로 폭정을 일삼는 현지 군벌들의 손을 들어줬다. 사람은 같은 폭력이라면 그래도 살기 위해 지배층 쪽 폭력의 편에 서거나 침묵하게 되어있다. 이방인은 믿기도 어렵고, 설령 믿었는데 미적지근하게 굴다 떠나면 손 들어준 사람들은 매국노가 되니까.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탈레반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 취급이지만, 미군은 어중간하게 굴다가 늦어도 수년 내에 떠날 게 분명하고, 남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탈레반에게 학대당할 게 뻔한지라 그냥 침묵하거나 탈레반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물론 반대로 외지인과 현지인이 손을 잡고 현지 정권을 끝장낸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는 외지인이 현지 사정을 잘 읽고 현지인과 잘 협조해서 해낸 것이지 현지인이 순진하게 외지인을 믿고 엎은건 아니다. 즉 외지인이 현지 사정을 잘 읽고 현지인에게 이익을 약속하거나 최소한 있을 것처럼 속이는 능력이라도 있어야 협력을 얻어 엎어버릴 수 있지 그런것도 없이 무대포로 나서면 당연히 반발만 산다.[16] 오늘날 몇몇 독재국가의 인권탄압에 대해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게 해석해볼 수 있다.[17] 생각해보면 허동현의 주장이 더 맞을 수 있다. 당시엔 국제기구 같은 게 전무했고, 그 당시에 이성적으로 행동하자면 오히려 조정에 목숨 걸고 탄원하거나, 아니면 타협해서 더 이상 박해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옳다. 정하상 같은 경우가 이 사례다. 정하상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러차례 조정에 천주교에 대한 오해에 대해 반박하며 천주교 박해를 멈춰줄 것을 탄원했다. 하지만 이 인물은 그저 믿음 하나만 살리려고 다른 이들을 생각도 안 했기에 그렇다. 이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베트남과 알제리가 일제강점기 당시의 한반도처럼 고통받다가 20세기 중반에 대규모 전쟁까지 치르고 난 후에야 간신히 독립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그리고 프랑스가 조선을 속국화하는 도중에 평소 이들과 사이가 나쁜 영국이나 프로이센, 혹은 다른 열강들도 조선을 먹으려고 달려든다면 조선은 그날로 열강들 싸움에 새우 등 터진 신세가 돼 헬게이트가 열릴 게 자명하다. 몰론 조정에 그 내용으로 탄원했다간 대역죄인으로 능지형이나 거열형 확정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다. 물론 언젠가는 터질 일이긴 했지만 100년이나 늦춰졌다.[18] 참고로 이 '판단력'이라는 것을 가톨릭 신학교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전과자 등 도덕적으로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통과하는 사람은 대개 한국 천주교 정도의 사제양성 과정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되는 건 판단력 부족으로 교리 해석을 잘못하거나, 황사영처럼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을 해서 교회를 말아먹거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제나 신학생에 대해 '판단력 부족'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심한 비난 중 하나라고 한다.[19] 이 사람은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천주교 신자였다. 기해박해 때 어머니 유 세실리아,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순교했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됐다(한국 103위 순교성인).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 가롤로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됐다(한국 124위 순교복자). 한편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의 딸과 결혼했으므로, 정약용의 집안과 인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