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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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축구인 김두현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클럽 경력[편집]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1기[편집]


통진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은 패스 실력과 벼락같은 중거리 슛 능력으로 이름을 떨쳤고 고교 졸업 후 당시 통진고와 연고 협약을 맺고 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동기 손승준과 함께 입단했다. 계약 기간은 3년.

2001년부터 김호 감독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며 신인치고는 많은 경기인 15경기에 출장하며 1도움을 기록하며 수원 팬들에게 고종수의 뒤를 이을 패스가 좋은 미드필더 유망주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2002년부터는 고종수의 장기 부상, 가비의 잔부상과 폼 저하 문제, 에니우의 기량 미달 등 공격형 미드필더진의 공백을 틈타 2002년 20경기, 2003년에는 34경기에 출장하며 수원 내에서 주전 자리를 굳히며 2001~2002년 아시안 슈퍼컵,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연패에 기여하며 아시아 최고의 구단으로 거듭나고 2001년 리그컵 우승, 2002년 FA컵 우승, 2003년 리그 3위 등 국내에서도 정상급 구단이 되는 데 기여했다.

2003 시즌 종료 후 FA로 풀리면서 J리그를 비롯한 해외 진출을 모색했으나 당시 2004 아테네 올림픽코엘류호 소집과 관련된 문제로 결국 이적하지 않고 수원과 2년 재계약을 채결했다.기사

2004년 새로 부임한 차범근 감독 아래 K-리그 우승을 기여했으나 차범근 체제에선 선호하는 자리였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내주고 3-5-2에서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동하게 되며,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소화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와중에 계약 기간을 6개월 앞둔 2005년 여름에 성남 일화 천마의 이적 요청을 받고 성남으로의 이적을 택했다.보도 자료


2.2. 성남 일화 천마[편집]


2005년 6월 8일 성남으로 전격 이적했고 계약 기간 3년에 이적료 20억이었다. 등번호는 8번을 받았다. 계약 조건 중 유럽 이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게 명시돼 있었다고 한다.#

2005 피스컵 코리아를 통해 성남에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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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감독이 선호하던 4-2-3-1 포지션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아서 성남 일화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수원의 차범근 감독은 김두현에게 공격과 수비의 부담이 같이 주어져서 공격도 수비도 안되는 어중간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으나 성남의 4-2-3-1에서는 김학범 감독의 페르소나인 김두현에게 주어지는 수비 부담이 덜어졌고 김두현이 공격에 전념하는 동안 김상식, 김철호, 손대호 등의 K리그 최상위권의 수비형 미드필더진이 뒤에서 궂은 일을 해 주면서 김두현의 수비 부담을 덜어 준 것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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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성남의 K리그 리그컵 준우승과 구단 통산 일곱번째 K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일등 공신이 되며 K-리그 MVP를 받았다. 저 튀어 보이는 옷은 축구를 사랑했던 앙드레김이 K리그 시상식에 서는 선수들을 위해 만든 옷 중 하나다.

2007 시즌엔 리그 27경기 7골 2도움을 기록하며 성남의 정규 시즌 1위에 기여했지만 포항과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패하며 리그 2연패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2007 시즌에도 시즌 베스트XI 미드필더 부문에 포함되며 4년 연속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다.


2.3.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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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계속된 K리그에서의 활약으로 풋볼 리그 챔피언십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초청을 받게 된다. 2007년 12월에 오퍼를 받은 후 2008년 1월에 6개월간 임대로 이적했고 2008년 5월에 2007~2008년 챔피언십 우승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승격과 함께 완전 이적 계약을 맺었다.

2008~2009 시즌 아스날과의 경기를 통해 인상적인 프리미어 리그 데뷔를 했고 이후에도 주전으로 뛰며 볼턴 원더러스과의 경기에서는 골대를 맞혀 거의 득점을 할 뻔하며 좋은 모습[1]을 보여서 영국 현지에서는 '썬더볼트'라는 별명까지 얻기도 했으나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8주 무릎 부상을 당한 이후 주전 자리를 빼앗기면서 거의 출장하지 못했다. 다만 정말 아쉬웠던 부분은 비슷한 시기 진출한 조원희에 비교하자면 초반 주전으로 나오는 듯했지만 무릎 부상이 EPL 생활을 흔들었다.

또한 당시 미필이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다시 한국으로 복귀해야만 하기도 했다.


2.4. 수원 삼성 블루윙즈 2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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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기 감각 회복을 위해 2009년 시즌 중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했다. 사실은 직전 소속인 성남 일화 천마로 복귀하려고 했으나 구단의 자금줄이 사라지면서 같이 영입하려던 몰리나와 김두현 둘 중 하나밖에 잡을 돈이 없었고 결국 성남은 김두현을 포기하고 몰리나를 영입했다.[2]

2010년 중반에는 수원 신인 시절 2군 코치였던 윤성효 감독이 부임했고, FA컵 2연패에 기여했다.


2011년에는 경찰 축구단에 입대해 R리그에서 뛰었다. 경찰에 입단한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 출신 2012년 10월 3일 전역을 신고하며 수원으로 복귀했고 신인 시절 달았던 등번호 25번을 받았다.


2013년을 앞두고 2년 재계약을 채결했고, 서정원 신임 감독 아래 주장을 맡아서 홈 개막전에서 강원 FC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 줬다. 그러나 3월 17일 포항전에서 전반 12분 만에 전방 십자인대 파열로 교체됐고 6개월 부상을 끊었다.#


그 뒤로는 간간히 나오면서 수원의 중원을 책임지는 것은 여전했으나 존재감은 미미했다. 첫 팀에서 은퇴하고 싶었지만, 기량에 비해 기회가 적었다.어째 이적하는 배경(부상 → 전력 외)이 반복된다


2.5. 성남 FC[편집]


2014 시즌 종료 뒤 수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은 채 개인 훈련을 하면서 고심하던 끝에 옛 스승 김학범 감독의 말에 따라 2015년 2월 2일 FA 자격으로 친정 구단 성남 FC로 이적했다. 이적료는 4억. 계약 기간은 1년으로 추정된다. 이걸로 두 팀에 번갈아 두 번씩이나 소속된 선수가 됐다. 수성수성, 계마계작 사실 이 당시 알려진 부분으로는 전북의 최강희 감독도 김두현에 대해 욕심을 낸 듯하다. 예전부터 최강희 감독은 김두현을 되게 높이 평가했다.

김두현의 이적 소식에 성남 FC의 팬들은 과거 팀을 K리그 우승으로 이끌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를 대비해 울산 현대 축구단으로 이적한 김태환제파로프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겠다면서 대체로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오 제라두현 오오 성남 FC로 돌아온 김두현은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으로 이적한 이후 8년 만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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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3일 오전 성남시청 대회의실에서 공식적으로 김두현의 성남 FC 입단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함께했다.[3] 공식 기자 회견에서 김두현은 "8년 전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면서 우승을 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가만, 성남의 리그 우승 마지막은 (본인도 상을 받은) 2006년(9년 전)인데??--#

그러고 자신을 상징하는 등번호 8번을 받았다.


2.5.1. 2015 시즌[편집]


그리고 곧바로 김학범 감독과 함께 성남의 구마모토 훈련장으로 떠나 특훈에서 1위를 찍었고 24일 부리람에서 주장 완장을 받고 성남 복귀전을 치렀다.

같은 해 3월 22일에 벌어진 3라운드 친정(수원) 상대의 경기김두현 더비[4]에서는 피로 누적으로 경기 후반 중간께 쓰러져 교체되며 팀의 쓰디쓴 패배를 지켜 봤으나 4월 4일 4라운드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는 동점골(1:1), 추가골(3:1) 및 쐐기골(4:1)을 넣으며(시즌 1~3호 골) 2015년 K리그 클래식 1호이자 자신의 생애 두 번째이자 프로 첫 해트트릭[5]을 기록했다. 1도움까지 기록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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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소속 100경기 기념 포스터 이 모습을 골 자축 동작으로 밀었다

이후 ACL 16강 1차전 광저우 헝다와의 홈경기에서 막판 극적인 결승골을 PK로 넣으며 시민 구단의 저력을 보이는데 일조를 했으나, 광저우에서의 원정 경기에서 체력적 열세와 날씨의 이중고를 못버티고 팀이 지면서 ACL 여정은 종료. 이후 김두현뿐 아니라 성남 선수단이 다같이 폼 저하를 보이며 리그에서 순위가 서서히 떨어졌다.

하지만, 팀이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주장으로서 중심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 황의조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의 인터뷰에서 김두현의 영향력이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올스타로 출전할 정도의 활약을 선보이고 있으나 그 혼자만 전후방 전체를 뛰어다니는 성남의 현실이다. 성남 FC: 김두현이 있는 날과 없는 날의 차이를 경험해 보세요

팀이 무려 삼전사기 만에, 그것도 4위로 상위스플릿에 가는데 큰 몫성남의 치트키을 맡았다. 두현 도움 = 의조 득점이라는 공식(?)이 생겼을 정도. 그 공을 기려 두목김밥이 등장했다.[6]

다만 스플릿에 접어든 뒤에는 선수단의 체력 저하와 본인의 부상[7]이 겹치며 1승 3무 1패로 5위, AFC 챔피언스 리그 도전에 실패했다.

그래도 김두현(도움)+황의조(골)의 득점 공식을 만들어내고 오랫동안 부진했던 팀을 무시못할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야말로 '치트키' 플레이어.

김두현의 이적 소식이 떴을 땐 수원 팬들이 분노의 목소리를 토해내기도 했지만 김두현의 부재로 확실하게 주전을 꿰찬 권창훈이 성장하면서[8]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되었다.


2.5.2. 2016 시즌[편집]


그러나 2016 시즌에는 역시 나이를 못 이기는지 잔부상이 많아지며 체력도 많이 떨어졌다.

김두현을 받쳐 줄 줄로 알았던 황진성유리몸을 되찾는(...) 와중에 황의조도 폼이 떨어진 성남은 티아고 하나만 바라보다(그래도 티아고가 있을 때는 황금티 콤비를 자랑하며 승점을 많이 가져왔다) 티아고가 사우디로 떠나자마자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더니 김학범 감독도 퇴출되고 결국 11위로 리그를 마친 후 승강 플레이오프를 거쳐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종착역은 챌린지


2.5.3. 2017 시즌[편집]


2017년을 앞두고 인천에서 온 배승진에게 완장을 넘겼다. 3라운드에서야 선발 출장을 하는 등 아직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나 새 주장인 배승진이 결장하면 주장으로 나서며 여전히 쏠쏠한 활약을 보였다.

26라운드 홈 부산전에선 멋진 프리킥 동점골(1:1)로 팀을 패배 직전에서 건져내고 다음 대전 원정에선 페널티 킥 골(1:4)로 두 경기 연속 득점 및 2연속 무패도 기록했다.

시즌 도중 박경훈 감독을 찾아가 "기회를 달라"고 직접 말한 후 다시 기회를 부여받았다. 김두현 인터뷰

하지만 체력 문제도 있고 해서 출전 기회도 적었고 팀은 4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3위 아산에 0:1로 패하면서 시즌이 종료됐다.


2.6. 느그리슴빌란 FC[편집]


2017 시즌 종료 후 성남과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말레이시아 슈퍼 리그네그리 셈빌란 FA로 이적했다.

등번호 29번.

본인은 축구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면서 자녀들과 함께 영어를 배울 수도 있는 말레이시아로 이적한 것이다. 은퇴가 아니기 때문인지, 은퇴 경기도 은퇴식도 없이 고별 영상만 남기고 갔다.

새로운 환경을 맞아서 시즌 초반 주장으로 나서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고 있으나 리그 18경기, 컵 1경기 득점은 없이 사실상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으로 말레이시아에 김두현 글로벌 축구센터를 개설했다. 국제 학교와 도 계약을 맺는 등 활발한 활동 중.


2.7. 인디 일레븐[편집]


파일:KIM-STAR-TEXT_large.jpg
소식이 뜸하던 차에 미국 2부 리그인 USL의 인디 일레븐(Indy Eleven)과 플레잉 코치로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디 일레븐은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를 연고지로 둔 구단으로 동부 컨퍼런스에 속해 있었고 당시 감독은 서울 이랜드 FC 전직 감독으로 한국 팬들에게 친숙한 마틴 레니다. 2018 시즌에는 16개 구단 중 7위로 마무리한 중위권 수준이다. 나이도 있으니 플레잉 코치로 계약한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코치 명단에 없다. 구단 기사에도 코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구단 방침상 비밀...

그리고 공식 이름은 여전히 Do Heon이지만 유니폼에는 Doo Hyun으로 돼 있었다. 이를테면 등록명이 Doo Hyun인 듯.

수원 신인 시절 달던 등번호 25번을 달았다.

레니 감독은 가는 구단마다 나름 돌풍을 일으키는 지라 이랜드에 있을 때 김두현 영입을 추진했으나 태평양 건너에서 드디어 손을 잡았다. 2019년 6월 8일 멤피스 901전에서 문전 프리킥으로 데뷔골-2:0)을 기록하며 구단 내 득점 공동 5위... 그것도 슈팅 총 5회 중 한 개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시즌 중 귀국해 성남종합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이와 부상 여파를 이기지 못했는지 합류 다섯 달 만인 8월 13일에 결국 인디 일레븐도 떠났다. 총 9경기 1골.


3. 국가대표 경력[편집]


국가대표로는 2003년 한일전으로 데뷔. 그러나 K리그에서는 제라두현, 램파두현 별명을 붙일 정도로 본좌급 활약을 벌이는 것에 비해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 일부 축빠 사이에서 국내용 vs 국대용 선수에 대한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국가대표 경기에서 잠수를 계속 타다가 중거리 슛 한방에 점수를 내고 다시 잠수를 탄다고 해서 불려진 별명이 '닌두현'.[9]

사실 국대가 4백을 쓴 이후로 큰 경기에서 4-2-3-1 포메이션으로 공격형 미드필더를 쓸 때는 대부분 후반에 골을 노릴 때라 수비적인 면이 떨어져도 공격적인 면이 훨씬 뛰어난 안정환에게 밀릴 수밖에 없으므로 포메이션이 4-3-3일 때나 간혹 중앙 미드필더로 주전으로 나섰고 심지어 4-3-3을 쓸 때에도 이번에는 다른 선수도 아닌 박지성이 중앙으로 오면 김두현의 자리는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난 선수.


3.1. 본프레레호[편집]


이렇듯 국가대표 경력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지만 이 선수가 아니었다면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은 진작에 물거품이 됐을 수도 있다. 2004년 당시 아시아 3차 예선이 진행될 때 한국은 3월 31일, 몰디브와의 원정 경기에서 0:0 무승부라는 치욕을 맛봤으며 이로 인해 움베르토 코엘류 감독이 자진 사퇴[10]하고 조 2위 레바논승점 1점 차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양국이 계속해서 1승을 쌓아가며 순위 변동이 없다가 10월 13일, 레바논과의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11월 17일 몰디브와의 상암 홈경기에서 최종 순위가 결정되는 상황. 조 1위만이 최종 예선에 진출하기에 몰디브와의 홈경기를 무조건 이기지 못하면 월드컵 도전은 경우의 수로 넘어가는 일.[11] 후반까지 몰디브를 상대로 쩔쩔 매며 위기에 봉착한 순간, 김두현이 중거리 슛으로 골을 만들어 냈다. 이후 이동국의 추가골로 간신히 2:0 승리를 거뒀고 김두현의 득점은 극찬을 받았다.


3.2. 아드보카트호[편집]


이렇게 본프레레호에서는 핵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딕 아드보카트 신임 감독 아래서 초반에 기회를 받았다. 특히 2006년 겨울 전지훈련에서 백지훈이나 김정우와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 줬다.

[각주]



결국 이변 없이 월드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며 자신의 첫 성인 무대 국제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그러나 월드컵을 앞두고 아드보카트 감독은 김두현 대신 김남일-이을용-이호 등 수비력에 강점이 있는 미드필더를 기용하기를 선호했고, 아예 스리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해 버리는 등 가장 좋은 폼을 보이던 공격형 미드필더인 김두현의 설자리는 점점 사라졌다.

결국 본선 세 경기에서 스리백을 기반으로 수비적인 미드필더를 중용하거나 아예 안정환이나 설기현과 같은 공격수를 후반 조커로 사용하는 전술이 주가 되며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대회를 마무리했다.


3.3. 베어벡호[편집]


후임 감독인 핌 베어벡에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와일드카드로도 선발되는 등 역시 신임을 얻으며 출발했다.

그러나 2007년 6월 네덜란드와의 평가전에서 "김두현의 플레이는 최악이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성남에서밖에 뛸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해 줬다"라며 강하게 비판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지성, 안정환 등 비슷한 포지션 내 경쟁자들이 빠진 2007 AFC 아시안컵 최종 명단에도 포함돼 2차전 바레인 쇼크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었다.

해당 경기에 대한 충격파인지 이후 대회에서 김정우와 주전에서 밀리며 주로 벤치에서 경기를 출발했다. 이란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직전 교체 투입돼 3번 키커로 나섰지만 상대 키퍼 바히드 탈레블루에게 막히며 실축하고 말았다.


3.4. 허정무호[편집]


2008년 출범한 허정무호 초기 국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특히 여름 웨스트 브로미치에서 적응을 완료한 직후 짧지만 약 반 년 정도 허정무호의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했다.

특히 박지성이 부상으로 제외된 2008년 9월 소집 당시 요르단-북한 2연전에서 각각 이청용-기성용에게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구해냈다. 당시 주장 김남일이 교체 아웃되면 직접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고 심지어 직전 투르크메니스탄 원정에선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 직후 리그 경기에서 무릎 내측 인대 부상을 당한 뒤 대표팀에서 약 1년간 소집되지 못하며 그 사이 빠르게 성장한 기성용-이청용-염기훈 등에게 밀리며 서서히 입지를 잃어갔다. 결국 2010년 동아시아 대회를 끝으로 허정무호에 차출되지 못하며 월드컵 진출이 좌절됐다.


3.5. 최강희호[편집]


2년 후인 2012년 5월, 최강희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에 안산 경찰청 축구단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 스페인과의 친선전에서 골을 넣었다.

10개월 후인 2013년 3월 카타르전을 앞두고 재소집됐으나 무릎 부상으로 하차했다. 이후에는 국대에 불리는 일이 전혀 없었고 이로써 마지막 국대 경기는 2012년 스페인전으로 남았다.


3.6. A매치 득점 연대[편집]


A매치에서 총 열두 골을 득점했다. 이중 여덟 골을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 중거리 슈팅으로 넣었으며 놀라운 점은 주발이 오른발인데도 다섯 골이 왼발 중거리 슈팅이라는 거다. 그의 득점 분포를 보면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의 중거리 슛 여덟 골이 있고 페널티 박스에서 넣은 네 골 중 세 골은 제법 거리가 있는 위치에서 넣었으며 나머지 한 개는 페널티 킥 득점이다. 이 페널티 킥은 2008년 6월 14일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 5차전 투르크메니스탄과의 원정 경기에서 넣은 것으로 앞서 두 골을 득점한 상황이었던 상태여서 페널티 킥을 성공시킴으로 생애 처음으로 A매치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당일 김두현의 원맨쇼로 3:1으로 승리를 거뒀다.

A매치 마지막 골은 2012년 5월 30일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 전반 종료 직전 성공시킨 동점 골이었으며[12] 당시 실점한 스페인의 골키퍼는 라치오 등에서 활약한 바 있는 페페 레이나(당시 리버풀 소속)이다. 여담으로 헤딩 골은 없으며 왼발과 오른발로 각각 여섯 골씩 넣었다.

통산일시장소대회상대득점결과
1호2003년 12월 4일도쿄국립경기장2003 EAFF 동아시안컵홍콩 축구 국가대표팀1:0 (선취골)3:1 (승)
2호2004년 6월 9일대전월드컵경기장2006 FIFA 월드컵 독일 2차 예선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2:0 (추가골)2:0 (승)
3호2004년 11월 17일서울월드컵경기장2006 FIFA 월드컵 독일 2차 예선몰디브 축구 국가대표팀1:0 (선취골)2:0 (승)
4호2006년 2월 22일알레포 알 함다니아 스타디움2007년 AFC 아시안컵 예선시리아 축구 국가대표팀1:0 (선취골)2:1 (승)
5호2006년 5월 23일서울월드컵경기장친선 경기세네갈 축구 국가대표팀1:0 (선취골)1:1 (무)
6호2006년 8월 16일수원월드컵경기장2007년 AFC 아시안컵 예선대만 축구 국가대표팀6:0 (추가골)8:0 (승)
7호2006년 9월 6일대만 충암 스타디움2007년 AFC 아시안컵 예선대만 축구 국가대표팀3:0 (추가골)3:0 (승)
8호2007년 7월 15일겔로라 붕카르노 스타디움2007년 AFC 아시안컵바레인 축구 국가대표팀1:0 (선취골)1:2 (패)
9호2008년 6월 14일아시가바트 경기장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예선투르크메니스탄 축구 국가대표팀1:0 (선취골)3:1 (승)
10호2008년 6월 14일아시가바트 경기장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예선투르크메니스탄 축구 국가대표팀2:1 (역전골)3:1 (승)
11호2008년 6월 14일아시가바트 경기장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예선투르크메니스탄 축구 국가대표팀3:1 (추가골)3:1 (승)
12호2012년 5월 30일슈타드 드 스위스친선 경기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1:1 (동점골)1:4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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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는 골라인을 넘어서 골이 맞았다. 다만 당시에는 골 판독기가 없었기에 주심이 보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했다.[2] 몰리나는 그 전해에 성남이 영입하려 했으나 막판에 계약이 틀어졌다. 그후 몰리나는 성남 일화 천마를 이끌면서 엄청난 성적을 내 결과적으로는 김두현을 포기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몰리나를 구단에서 돈이 없다고 너무 급하게 헐값으로 15억에 FC 서울에 팔아서 그렇지... 참고로 김두현은 성남 구단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충성심도 강했다. 해외 진출 후에도 비시즌엔 성남의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는 모습을 보였다.[3] 이때의 인연으로 김두현은 이재명의 단식투쟁 현장에 두 번이나 방문했다. 첫 번째 단식 때 두 번째 단식 때[4] 성남 홈피에서는 계작살(鷄鵲殺)이라고 썼고 '설레발은 필패'라는 교훈을 되새기는 일이 됐다…[5] 대표팀 시절(2008년), 개인 첫 해트트릭 기록이 있다.[6] 사실, 성남 구단과 시청, 상인회의 합작 캠페인으로 만들어진 4대 브랜드의 하나. 나머지는 준혁선빵(...), 용지에 꼬치다(...), 의조빠닭.[7] 포항에선 아예 코를 얻어맞아 약 10분간 밖에서 치료받기도 했다.[8] 국대에도 선발되어 첫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었다.[9] 닌자 + 김두현.[10] 말이 자진 사퇴지 사실상 경질이나 다름없다.[11] 물론 경기 이후 벌어지는 레바논베트남의 경기 결과에 따라서 한국의 최종 예선 기회는 유동적이긴 했다. 허나 레바논이 베트남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에 만약 한국이 몰디브와 무승부 이하를 기록할 경우 레바논이 베트남을 잡아 최종 예선에 진출하고, 직전 대회 4위가 지역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12] 이때도 중거리 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