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칸자부로

최근 편집일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나리타야 파일:71265600-B5C9-4AC7-B421-E2F29A4C32EC.png
이치카와 신노스케이치카와 에비조(공석)이치카와 단쥬로(11대, 12대)
오토와야 파일:1F9D7293-D46B-4798-BF05-D2DD4F530D37.png
오노에 우시노스케 → 오노에 키쿠노스케오노에 키쿠고로
코오라이야 파일:C65C1B3C-3EF6-4809-986D-880BA53AB71A.jpg
마츠모토 킨타로(공석)이치카와 소메고로마츠모토 코시로마츠모토 하쿠오
나카무라야 파일:C52585F0-9C97-4BBA-AB6D-FD9D0441A623.png
나카무라 칸타로 → 나카무라 칸쿠로나카무라 칸자부로(공석)
現 당주는 볼드체 처리


1. 개요
2. 역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1. 개요
3.2. 생애
3.3. 연기 스타일
3.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나카무라야 문장.png
나카무라 가문의 문장 카도키리긴소쿠(角切銀杏)[1]

나카무라 칸자부로 (中村勘三郎)

일본 가부키 업계에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배우의 예명 중 하나. 이 이름을 가진 배우가 이끄는 나카무라야(中村屋)는 에도에서 최초로 상설극장을 세운 가문으로, ‘에도 가부키의 원조’라고 불리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가부키 4대 명문가에 드는 가문이다. 아직도 극장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에도 공연이 성황한다.

세습 구도는 '나카무라 칸타로 → 나카무라 칸쿠로나카무라 칸자부로'이며 당주에게 습명되는 “나카무라 칸자부로”는 가부키계에서 제일 오래된 이름이고 그만큼 변천사도 많다. 하위 문단에서 소개하는 마지막 계승자가 열여덟번째 계승자일 정도.[2]

야고 또한, 초대부터 13대까지는 카시와야, 14대부터 16대는 마이즈루야, 17대부터 현재가 나카무라야이다. 여기서 14~16대는 사실상 습명하지 않은 보관명적의 명의로 족보에 올라가 있는 것이기에 편의상 야고를 붙였다. 에도막부 말기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던 이름이 되었다가 쇼와 시대에 와서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가 명성을 되찾았다.

2023년 기준, 마지막 계승자였던 나미노 노리유키가 2012년에 향년 57세 일기로 사망하면서 공석인 상태이다. 아들인 6대 나카무라 칸쿠로가 현재 나카무라 종가의 당주로 활동하고 있고, 가부키계에서의 활동력도 갖추었지만 아직 습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팬들은 칸쿠로의 장남인 3대 나카무라 칸타로의 활동이력이 차면 부자가 함께 동시 습명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 역대 나카무라 칸자부로[편집]


  • 초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무사 나카무라 가베이의 차남, 1597-1658.

  • 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초대 나카무라 아카시를 지내다 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습명을 받았다. 1647-1674.

  • 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초대 나카무로 칸자부로의 삼남. 1649-1678.

  • 4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양자. 처음으로 나카무라 시치노스케라는 이름을 사용한 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일 가능성이 있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1662-1713.

  • 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아들로 후세가 없던 4대 칸자부로의 양자. 1666-1701.

  • 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초대 나카무라 칸쿠로의 차남, 또는 4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동생으로 추정. 후에 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에게 입양돼 양자로 입적된다. 1688-1758.

  • 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장남, 1717-1775.

  •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차남, 1719-1777.

  • 9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양자. 초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 3대 나카무라 시치사부로 → 9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765-1785.

  • 10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차녀의 사위, 시기 미상-1810.

  • 11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삼녀의 사위, 아버지가 2대 이치카와 야오죠우이다. 1766-1829.

  • 1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1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차남, 1800-1851.

  • 1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아들, 1828-1895.

  • 14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2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문하생으로 애제자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가부키 계열의 사람이고 안무가였다. 1809-1886.

  • 1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3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아들, 1873-1940.

  • 16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5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자녀[3], 생몰년 미상.

  •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3대 나카무라 카로쿠의 삼남, 1909-1988.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장남, 1955-2012.

3.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편집]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十八代目 中村勘三郎| Nakamura Kanzaburō XVIII
본명
波野( なみの哲明 ( のりあき (나미노 노리아키, Namino Noriaki)
예명
5대 나카무라 칸쿠로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출생
1955년 5월 30일
도쿄도
사망
2012년 12월 5일 (향년 57세)
도쿄도 분쿄구 종합병원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신체
165cm, 65kg
학력
교세이 가쿠엔 초등부(졸업)
교세이 가쿠엔 중등부(졸업)
교세이 가쿠엔 고등부(졸업)[4]
가족
친할아버지 3대 나카무라 카로쿠
친할머니 야마모토 로쿠
아버지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909-1988)[5]
어머니 나미노 쿠에다[6]
큰누나 나미노 쿠리코 (1945-)[7]
작은누나 나미노 치요에
아내 나미노 요시에 (1980년 결혼)[8]
장남 6대 나카무라 칸쿠로
차남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친손 3대 나카무라 칸타로 (2011-)
친손 2대 나카무라 쵸자부로 (2013-)
며느리 마에다 아이
처남댁 미타 히로코
직업
가부키 배우
야고[9]
나카무라야 (中村屋)
문장
파일:나카무라야.png
소속
펀우드

3.1. 개요[편집]


일본가부키 배우. 쇼와헤이세이의 가부키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며 가부키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배우 중 한 명이다.


3.2. 생애[편집]


1959년, 모모타로 역으로 하츠오메미에, 첫 무대를 밟았다
1955년, 가부키 4대 명문가 중 한 곳인 나카무라야의 당주를 지내던 아버지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와 어머니 나미노 쿠에다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난다. 가문에서 그토록 바라던 고명아들이었기에[10] 가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혼자서 쿠마도리 그리기를 연습하는 모습
이때부터 각종 TV 드라마, 영화, 라디오 등에서 아역배우로서 연기했고, 아이답지 않은 특유의 느긋함과 유머, 진지한 연기로 대호평을 받았다. 뮤지컬과 연극에도 도전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카무라야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큰누나의 생일을 맞이하여 찍은 가족사진 [11]
아버지인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는 나카무라야의 명성을 되찾은 인물이었기에 평소에는 노리아키에게 살갑다가도 가부키를 연습할 때면 엄하게 변했다고 한다. 이때 전수 받은 연기력은 아직까지도 영상자료로 남아 회자되고 있다.[프로필]

1980년, 7대 나카무라 시칸의 차녀인 요시에와 혼인 [12]

파일:나카무라야 일가.jpg}}}
장남의 시치고산을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7대 나카무라 시칸의 차녀인 나미노 요시에[13]와 결혼 후,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장남 나미노 마사유키, 차남 나미노 타카유키. 후에 각각 6대 나카무라 칸쿠로,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가 된다. 당시 동일한 세대에 2남을 얻은 가문은 나카무라야가 유일하며 현재에도 그러하다.

아들들과 함께 공연 성공 기원 참배에 나선 모습[14]

아들들과 렌지시로 무대에 선 모습
나카무라야의 대표작 중 하나로는 '렌지시'가 있다. 아들이 두 명이기에 새끼사자가 둘이 되어 양 옆으로 볼거리가 풍성하고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연기와 선율이 더해져 렌지시 비디오는 그의 명연기를 남긴 유산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나카무라야 세 부자가 추는 렌지시는 그 가치가 뛰어나, 여러 가부키 집안이 이들의 시네마 가부키 테이프를 갖고 있으며 조기교육을 명목으로 자녀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코오라이야의 8대 이치카와 소메고로도 어릴 적부터 나카무라야의 렌지시 테이프를 몇 번이고 돌려보며 이를 동경하였고 렌지시로 첫 무대를 밟았다.

1999년, 제 50회 홍백가합전에서 백팀 사회자로 출연 [15]

2005년, 뉴욕에서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습명
2005년, 습명을 한 달 앞둔 시기에 차남인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가 술에 만취해 폭행사건을 일으켜 근신 처분을 내리는 등 골머리를 앓았지만 예정대로 그토록 고대하던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를 습명하였다. 허나 이 시기부터 컨디션 난조가 계속되고 난청을 겪는 등, 몸에 이상이 생겨갔지만 가능하면 계속 무대에 섰고, 연습 중 쓰러져야만 그날 공연을 쉬었다고 한다.

장손 나오야의 탄생 기념 참배에서 가족들과 함께
2011년, 장남 6대 나카무라 칸쿠로의 아들 나미노 나오야[16]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가 되었다. 당시 첫손주의 탄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 눈물을 보였을 정도로 감격했으며, 나오야가 아들 부부와 가부키좌에 방문하는 날에는 영락없는 손자바보의 모습을 보였다.

아들들과 아버지의 23주기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
2012년, 식도암에 걸려 긴급 휴식기를 가졌고 이때의 공백을 아들인 6대 나카무라 칸쿠로가 채웠다. 다만 갑작스레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꿔야했던만큼, 아버지의 연기력을 따라가기에는 부족했고 당시 공연장에는 칸자부로의 부재 소식에 객석의 반도 안 채워졌다고 한다.

수술 이후, 다시 돌아온 나카무라자에서 장손인 나오야와 함께
식도암 수술 이후, 휴식기를 가진 뒤 무대에 돌아왔으나 얼마 안 가 폐질환이 발병됐고 폐렴에 걸렸다. 급성 호흡곤란이 오는 등, 또 다시 요양에 전념했으나 이번에는 이겨내지 못하고 급성 호흡곤란에 의해, 향년 57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생전 소원이 아들, 장손인 나오야와 함께 무대에 올라 삼대 렌지시를 연기하는 것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칸자부로의 관에 마지막으로 입맞춤하는 부인
생전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며 많은 사랑을 받던 배우라 장례식이 유명 정치인 못지 않았는데, 가부키, 연예계는 물론이고 정재계 인사와 일반인 조문객 등을 포함해 1만 2천여명 정도가 몰려들어 80미터 가량의 긴 줄이 생겼었다. 칸자부로의 생전 인품과 그의 살가웠던 연기력이 그간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아들들은 조문객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운구차가 떠날 때 모든 조문객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하얀 꽃가루 종이를 날리고 칸자부로의 야고인 '나카무라야'를 크게 외치며 그의 마지막 하나미치를 장식했다.

}}}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생전 마지막 활동을 담은 영상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주기 추도 영상

3.3. 연기 스타일[편집]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무용
칸자부로의 무용, 연기는 위의 영상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 절제된 춤과 표정 연기, 매끄러운 선율 등으로 일본에서는 학교의 무용 관련 시간에 대표적으로 많이 틀어주는 영상이기도 하며, 이것을 어린시절에 보고 매료되어 가부키나 일본의 고전 무용에 빠졌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특히 화려하고 익살맞은 안무가 주축이 되는 레퍼토리에 그 어떤 가부키 배우보다도 독보적인 위치에 오래도록 군림하였는데, 가령 간진초나 시바라쿠 같은 레퍼토리가 격렬한 동작과 육중한 장비로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공연이라면, 칸자부로의 레퍼토리는 서민극 위주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무용적으로도 상당히 고난도의 기교를 요하는 테크니컬한 요소들이 농후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힘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칸자부로는 이같은 기교를 표현해낼 재능이 충분하였고, 거기다 재치있는 입담으로 코믹한 연기에도 상당한 두각을 나타내었으니 과히 좌중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다카츠키(高坏)
상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카츠키는 유머러스한 전개에 더불어 상당한 기교를 요하는 고난도의 안무가 포함된 레퍼토리다. 다른 가부키 작품에 비교해봐도 독무로는 가히 독보적인 기예를 선사하는데, 탭댄스를 접목한 안무에 벌렸던 다리를 쭉 피는 등 어지간한 유연성이 받쳐주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고난도의 기술을 다채롭게 선보이고 있다. 26:00부터 폭주하는 칸자부로의 무용을 보면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
스케로쿠(助六) 中[17]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렌지시, 카가미 지시 등이 있지만 언변과 재치있는 유머, 익살스럽고 푸근한 연기 등으로 좋은 반응을 받았었다.

}}}
칸자부로의 산자마츠리 오도리

3.4. 여담[편집]


  • 장남 6대 나카무라 칸쿠로는 아버지를 기리는 뜻으로 칸자부로의 사망 이듬해에 태어난 차남 2대 나카무라 쵸자부로의 본명을 칸자부로의 본명 ‘노리哲(のり)아키’를 딴 ’나미노 노리유키'로 지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파일:나카무라 칸자부로, 시도.jpg}}} ||
    2대 나카무라 시도가 가부키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2대 나카무라 시도는 칸자부로의 사촌 형의 아들이다. 나카무라야에서 순회 공연을 돌 때에도 장남, 차남과 더불어 10대 시절의 2대 나카무라 시도도 항상 옆에 데리고 다녔다. 이후 프랑스에서 칸자부로의 차남인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와 시도는 나루히토 천황이 초청된 행사에서 가부키 극을 연기하기도 했다. 현재 시도는 헤이세이 나카무라자에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나카무라야의 무대에도 서고 있다.

    • 가부키 명문가 네 가문 중, 가장 영상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가문이다. 이유는 칸자부로가 자신과 가족의 사생활을 영상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었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현재 아들들이 운영하는 나카무라야 유튜브 채널에서 생전의 영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18]

    • 혈연을 중요시하는 가부키계에서 제자 양성에 힘쓰고 제자에게도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급에 해당하는 네임드 있는 역할을 잘 맡기는 편이다. 나카무라야는 에도 시대부터 가부키를 배우려는 자들에게는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생각했기 때문. 대표적인 사례로, 나카무라야의 핵심 배우였던 2대 나카무라 코산자[19]는 17대 칸자부로의 애제자였고, 2대 나카무라 츠루마츠[20]는 18대 칸자부로의 애제자였다. 1995년생인 2대 나카무라 츠루마츠는 2021년에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가부키에서 주연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나카무라야의 핵심 배우로 자리 잡았다.[21]

    • 가수 호시노 겐의 노래 '괴물(化物)'의 모티브가 되었다. 호시노 겐은 2003년 아마추어 시절, 그와 한 무대에 섰고, 커튼콜 때 주연인 칸자부로의 손을 이끌어 그를 무대로 모셔오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때 대기하며 서로 잠깐 얘기할 시간이 생겼는데 칸자부로가 '공연이 끝나면 출연진과 관객 모두가 머리 위까지 손을 들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주어, 무척 기뻐지지만, 집에 가서 목욕을 할 때는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심정'에 대해 말해주었는데, 그때 그 말과 그의 행실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괴물'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며 '이 노래는 나에게 부활이란 의미를 알려준 칸자부로 씨가 하늘에서 나에게 선물하신 노래'라 표현할 정도. 이후 'Pop Virus'에서도 칸자부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사가 나오며 칸자부로의 차남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와 친구가 되어 그의 동창인 마츠모토 준을 소개받기도 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
    헤이세이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었기에 생전에 많은 CM에 출연했었다. 특히 중년에 들어서는 푸근하고 어딘가 정겨운 이미지로 술, 담배 광고 등도 여럿 맡았다. 네 번째 CM에는 어린 시절의 칸쿠로와 시치노스케도 함께 출연했다. 일본에 맥 커피가 처음 판매되었을 때 나카무라야의 배우들이 CM을 맡기도 했다. #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30 18:49:31에 나무위키 나카무라 칸자부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스미키리이쵸.[2] 유서가 깊다는 나리타야의 당주에게 세습되는 예명 이치카와 단쥬로도 당대는 13대이다.[3] 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4] 치요다구에 위치한 학교 법인 교세이 학원 소속의 유서 깊은 가톨릭 일관제 사립학교이며 남학교이다. 교세이 중등부를 졸업한 학생들만이 교세이 고등부 입학 시험을 치르는 게 허가되었다. 많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 학교 재단 출신이며 가부키 배우들도 여럿 다녔다. 대표적으로 코오라이야의 초대 마츠모토 하쿠오와 2대 마츠모토 하쿠오. 그의 장남인 10대 마츠모토 코시로가 있으며 오모다카야의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 9대 이치카와 츄샤 또한 본교 출신이다.[5] 본명은 나미노 세이지. 일본의 무형문화재 보유자. 즉 인간문화재로 인간국보인 인물이다.[6]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장녀이다. 혼전 성은 테라지마.[7] 유명 신파극 배우로 미시마 유키오를 포함하여 많은 쇼와의 대표 작가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연기해달라는 러브콜을 계속 받았다. 4세였던 1950년, 아버지인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습명 피로연에서 함께 첫 무대를 섰다.[8] 인간문화재이자 나리코마야 출신인 7대 나카무라 시칸의 차녀이다.[9]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4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주요 야고가 있다고 한다.[10]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가 두 명 있었다.[11] 왼쪽부터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큰누나 나미노 쿠리코, 어머니 나미노 쿠에다, 아버지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작은누나 나미노 치요에.[프로필] 5대 나카무라 칸쿠로 습명 당시 프로필 파일:5대 칸쿠로.jpg[12]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6대 나카무라 칸쿠로까지 3대가 같은 장소에서 결혼하였다.[13] 혼전 성은 나카무라.[14] 저 당시 각각 5대 나카무라 칸쿠로, 2대 나카무라 칸타로,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였다.[15] 이후 2012년, 제 63회 홍백가합전에서 아들인 6대 나카무라 칸쿠로가 심사위원으로 출연이 결정되었다. 홍백가합전의 애청자였던 칸자부로가 이 사실을 듣고 매우 기뻐했지만 끝내 아들이 출연한 모습을 못 보고 사망하였다.[16] 후에 3대 나카무라 칸타로가 된다.[17]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함께 무대에 올라있으며 은근슬쩍 타카토시에 관해 축하한다는 얘기를 한다.[18] 다른 가문들도 사생활 촬영에 너그러운 반응이지만 NHK에 한정된 특집 다큐멘터리 촬영뿐일 때가 있다. 특히 오토와야의 경우,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하다.[19] (中村小山三). 본명은 후쿠이 사다오. 1920년생이며 부모를 여읜 채 4살 때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눈에 들면서 가부키계에 입문하게 된다. 18대 칸자부로의 하츠오메미에에서 칸자부로의 옆을 지켰다. 무려 17대, 18대, 18대의 아들과 그의 손자까지 보고는 2015년 4월, 94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나카무라야의 선대, 당대, 차세대까지 모든 당주를 섬겼다.[20] (中村鶴松). 본명은 시마즈 다이키.[21] 가부키 배우로서 바빴지만 학업도 놓치지 않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