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에 키쿠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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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야 파일:71265600-B5C9-4AC7-B421-E2F29A4C32EC.png
이치카와 신노스케이치카와 에비조(공석)이치카와 단쥬로(11대, 12대)
오토와야 파일:1F9D7293-D46B-4798-BF05-D2DD4F530D37.png
오노에 우시노스케 → 오노에 키쿠노스케오노에 키쿠고로
코오라이야 파일:C65C1B3C-3EF6-4809-986D-880BA53AB71A.jpg
마츠모토 킨타로(공석)이치카와 소메고로마츠모토 코시로마츠모토 하쿠오
나카무라야 파일:C52585F0-9C97-4BBA-AB6D-FD9D0441A623.png
나카무라 칸타로 → 나카무라 칸쿠로나카무라 칸자부로(공석)
現 당주는 볼드체 처리


1. 개요
2. 역대 오노에 키쿠고로
3. 7대 오노에 키쿠고로
3.1. 개요
3.2. 생애
3.3. 연기 스타일
3.4.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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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에 가문의 문장 카사네오우기니다키가시와 (重ね扇に抱き柏)

오노에 키쿠고로 (尾上菊五郎)

일본 가부키 업계에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배우의 예명의 하나. 가부키 4대 명문가 중 이치카와 종가 다음 가는 가문이다. 오노에(尾上) 종가당주격인 남성에게 주어지는 세습명(襲名)이다.

오노에 종가의 세습 구도는 '오노에 우시노스케 → 오노에 키쿠노스케오노에 키쿠고로'이다. 허나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친아버지가 7대 오노에 바이코우를 지낸 인물이기에 오노에 키쿠고로가 장수하며 현재의 세습명을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경우, 오노에 바이코우를 습명할 가능성이 높다. 야고는 오토와야(音羽屋). 오노에 종가는 10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이끌던 이치카와 종가 나리타야와 함께 메이지 시대에 인기와 연출이 몰락해 가던 가부키를 다시금 부흥시킨 가문으로 그 역사나 가치를 높게 평가 받고 있다.


2. 역대 오노에 키쿠고로[편집]


  • 초대 오노에 키쿠고로
교토에 위치한 유명 연극 찻집 출신이다. 교토에서는 온나가타를 주로 연기했으며 에도에 내려와서 타치야쿠로 이름을 알렸다. 1717-83.

  • 2대 오노에 키쿠고로
초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 친아버지는 2대 오타니 히로지이다. 초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를 지내고 초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사망하고 2년 뒤, 2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습명했지만 그로부터 2년 뒤 급사하였다. 1771-87

  • 3대 오노에 키쿠고로
초대의 오노에 쇼로쿠의 양자. 가부키 연출과 각본 제작을 맡기도 했으며 에도 가부키 연목 등을 정리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산을 남긴 명배우로 꼽힌다. 1784–1849.

  • 4대 오노에 키쿠고로
3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장녀의 사위이며 가부키를 배운 뒤에 장인의 양자로 입적했다. 오사카 출신이며 온나가타를 주력으로 삼았다. 1808-60.

  • 5대 오노에 키쿠고로
3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차녀의 아들. 친아버지는 에도 후기의 가부키 배우인 12대 이치무라 우자에몬. 9대 이치카와 단쥬로, 초대 이치카와 사단지와 함께 지금의 가부키좌를 세운 인물이다. 배우로서의 입지도 탄탄하여 오노에 키쿠고로라는 세습명의 명성은 5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44-1903.

  • 6대 오노에 키쿠고로
5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아들. 초대 나카무라 키치에몬과 함께 가부키좌와 가부키 무대 부흥에 힘썼으며,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외조부이다.[1] 1885-1949.

  • 7대 오노에 키쿠고로 (당대)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의 아들. 오노에 키쿠고로 극단을 이끌며 에도 시대의 가부키를 현대에서 재현하여 공연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현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당주. 1942–.

3. 7대 오노에 키쿠고로[편집]


7대 오노에 키쿠고로
七代目 尾上菊五郎 | Onoe Kikugorô VII
본명
寺嶋( てらじま秀幸( ひでゆき (테라지마 히데유키, Terajima Hideyuki)
예명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7대 오노에 키쿠고로
출생
1942년 10월 2일 (81세)
도쿄도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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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67cm, 65kg, AB형
학력
쇼난 학원 부속 유치원 (수료)
모리무라 학원 초등부 (졸업)
모리무라 학원 중등부 (졸업)
모리무라 학원 고등부 (졸업)[2]
가족
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 (1915-1995)[3]
어머니 테라지마 타마코
누나 테라지마 키요에 (1940-)
남동생 2대 오노에 에이노스케 (1944-)[4]
아내 후지 스미코 (1972년 결혼)[5]
장녀 테라지마 시노부 (1972-)
장남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1977-)[6]
외손 초대 오노에 마호로 (2012-)[7]
친손 7대 오노에 우시노스케 (2013-)[8]
친손 테라지마 토모요 (2015-)
친손 테라지마 아라타 (2017-)
직업
가부키 배우
야고[9]
오토와야 (音羽屋)
문장
파일:Yotsuwa.jpg

3.1. 개요[편집]


일본가부키 배우.

가부키 4대 명문가 중 나리타야 다음으로 명성과 위상이 높은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현 당주이다. 일본의 무형문화재인 인간문화재에 등재된 배우로 인간 국보이며 일본 예술원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즉 일본 예술계의 최고 핵심에 서있는 인물.

현대 가부키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며 가부키계에서는 코오라이야의 당주 2대 마츠모토 하쿠오와 더불어 살아있는 역사, 전설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3.2. 생애[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와 어머니 테라지마 타마코 사이에서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 자택의 정원에서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본래 오토와야하고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카사카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게이샤 출신의 어머니와 규슈 하카타구 출신의 사업가 아버지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난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시기부터 후계가 없던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입적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태어나자마자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입적되어 일본 무용과 가부키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6대 오노에 키쿠고로에게 친자가 탄생했음에도[10]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출중한 실력으로 오노에 종가의 직계로 인정받으며 그 위치를 꿋꿋히 지켰다. 그렇게 현재에 이르러 그의 아들이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당주, 현재의 7대 오노에 키쿠고로에 이른 것이다.

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와 함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7대 오노에 바이코우 일가는 태평양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중점 지역인 도쿄에서 하코네마치로 잠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종전이 된 1945년, 바이코우 일가는 혹시 모를 불안에 떨며 바로 도쿄로 돌아가지 않고 가나가와현의 오이소마치 후지사와시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일가는 이곳에서 한 어부의 집 2층에 세를 들어 잠시 지내었고 키쿠고로는 이때 잉어에게 먹이를 주거나 해변에서 혼자 놀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한다. 안정이 된 이후로 일가는 바로 도쿄로 돌아와 본격적인 가부키 활동을 재개하였다.
할아버지 6대 오노에 키쿠고로와 함께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하는데, 당시 장녀 출생 이후 몇 번의 유산 끝에 태어난 아이였기에 아들이었던 것도 컸지만 집안에서는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기적이라 부르며 금지옥엽으로 키웠다고 한다. 6대 오노에 키쿠고로 또한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나의 손자'라고 부르며 귀여워 했다고 한다. 7대 오노에 키쿠고로도 6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할아버지(じいちゃん)라 불렀다고.

아버지와 <스케로쿠> 中 찻집 여방
1947년, 5세가 되던 해에 당시 3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였던 아버지가 7대 오노에 바이코우를 습명받는다. 그의 습명 피로연의 대표 연목 중 <스케로쿠>에 본명인 테라지마 히데유키로 하츠오메미에 겸, 첫 무대를 가졌다.[11]

그리고 1948년 4월, 긴자의 가부키좌인 신바시 연무장에서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를 습명받아,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로서 첫 무대를 가졌다. 습명 피로연의 대표 연목은 <스케로쿠>.
학생 시절의 7대 오노에 키쿠고로
학생 시절에는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가 학교에 다니는 키쿠고로를 배려하여 연습은 많이 하되 무대에 서는 횟수를 줄여주었다고 한다. 대신 중학생 때부터 여러 스포츠 활동을 할 것을 장려하였고 키쿠고로는 부활동으로 야구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꽤나 잘 맞았는지 고등부에 진학하고도 야구를 놓지 않았으며 2학년에는 주장까지 맡아 타 학교와 여러 차례 시합을 겨뤘다고 한다.

쇼와 산노스케 (三之助)[12]
1965년 5월,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를 습명받으며 가부키 배우로서, 후계자로서의 길을 순탄히 걷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당시 훤칠한 외모와 청순미 넘치는 목소리로 주력은 온나가타였다.

NHK 대하드라마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中 요시츠네 役
1966년,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습명 이듬해에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에서 당시 23세에 최연소 타이틀을 달고 주연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열연하였다. 이 작품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여배우 후지 스미코와 만나게 된다.

작품 관련으로 후지 스미코와 대화를 나누는 키쿠고로
사실 후지 스미코와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세세히 따지고 보면 먼 친척관계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두 집안의 왕래 또한 잦았고 스미코는 어릴 적부터 7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히-짱'(ひㅡちゃん)[13]이라 부르며 우정을 드러냈다. 다만 부부의 연을 맺기에 문제되는 관계는 아니였기에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 키쿠고로는 가족 관계를 일일히 따져가며 그녀와 결혼이 가능함을 확인하자 본격적으로 구애하였다고 한다.[14]

아내 후지 스미코와의 결혼사진
1972년 3월, 키쿠고로의 끊임 없는 구애 끝에 둘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 데 성공한다. 본래의 이름은 슌도 준코였기에 입적한 이후, 테라지마 준코가 된 후지 스미코는 같은 해 12월에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를 출산한 뒤 육아를 위하여 연예계 활동을 중단하였다.

아버지와 7대 오노에 키쿠고로 습명을 발표
1973년, 10월 대가부키에서 여러 연기를 완벽하게 해낸 그에게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당주에게 주어지는 세습명인 오노에 키쿠고로의 습명이 결정되며 7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되었다.

1973년, 습명을 기념하여 아내와 아사쿠사 방문

장남 테라지마 카즈야스 탄생 기념 촬영한 가족사진
1977년 8월, 장녀 시노부를 얻은지 5년만에 장남 6대 오노에 키쿠노스케가 탄생했다.

딸과 아들의 시치고산을 맞이하여
2003년,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간 국보 자격을 받게 되면서 할아버지 6대 오노에 키쿠고로, 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에 이어, 삼대가 인간 국보로서 인정받았다.

첫손녀 테라지마 토모요의 탄생 기념으로 촬영한 가족사진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자신과의 결혼 생활로 인해 배우 생활에 공백기가 생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평생 가졌다고 한다. 그랬기에 장남인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에게는 '가부키 집안에 대해 잘 아는 일반인 여성과 결혼하라'고 늘 당부했다. 그 시기에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와 코오라이야의 10대 마츠모토 코시로의 약탈혼 해프닝이 일어나며 코오라이야와 절연하겠다고 선언한 키쿠고로였지만 코오라이야의 당주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가 자택에 찾아와 진심어린 사과를 전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2대 마츠모토 하쿠오의 소개로 그의 동생인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의 딸들과 장남인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된다. 그렇게 키치에몬의 4녀와 키쿠노스케가 부부의 연을 맺으며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과 사돈을 맺게 된다.

장손 7대 오노에 우시노스케의 습명 발표 회견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둘이 함께 손자인 7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를 위해 창작 가부키극의 각본과 연출을 짜고 무대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등 지극정성으로 손자의 앞 날을 밀어주었다고 한다.

외손자 초대 오노에 마호로 습명 공표[15]
한편,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의 장남인 오노에 마호로가 초대 오노에 마호로라는 세습명을 받고 본격적으로 가부키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일본-프랑스' 두 국가간의 외교에 큰 역할을 하면서 키쿠고로는 우리 집안에 인재가 났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1942년생인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현재 몸 상태가 많이 쇠약해져 대부분의 배역을 장남인 키쿠노스케에게 넘기고 휴연을 취할 때가 많은 편이다. 동갑내기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 또한 같은 상황인데 둘 다 하나 둘씩 작품에서 물러나며 다음 세대들을 위한 작품 양성이나 멘토로 위치를 옮겨가고 있다. 물론 주요 연목의 경우 특별 공연 형식으로 단기간에 공연하기도 하며 티켓을 구하기 어려운 편이다.

3.3. 연기 스타일[편집]


<칸진쵸>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16]
젊은 시절에는 온나가타를 주력으로 삼았지만 40대에 접어들고부터 목소리의 변화로 타치야쿠의 비중이 늘더니 이내 더 이상 온나가타는 맡지 않게 되었다. 장남이자 온나가타에서 명연기를 선보이는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와 부부 역으로 자주 묶여 극에 오르는 편이다.

무용 스타일은 온나가타를 오래 연기한 배우답게 선율이 가볍고 동작의 폭이 좁지만 동선을 많이 확보한 특유의 연기 스타일을 고집하여 볼거리가 풍부하다고 인간 국보 지정 당시 궁내청에서 평했다.

특히 칸진쵸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경우 그가 연기하는 요시츠네가 현대에서 확일할 수 있는 가장 요시츠네 다운 요시츠네라는 평이 자자하다. 이는 키쿠고로의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가 요시츠네 연기를 오랜 세월 간 주력으로 삼아왔기에 그에게서 직접 연수받았기 때문인 것도 크다.[17]

온나가타, 타치야쿠뿐만 아니라 사자 춤이나 현대극에도 강하며 연기 폭이 굉장히 넓은 배우이다. 흔히 비교 상대로는 나카무라야의 선대 당주인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가 꼽혔었고 이를 의식했는지 쇼치쿠 자체의 연말 일본 무용 공연에 둘이 페어로 나온 경우가 잦았다.

최근엔 고령의 나이탓인지 동작들이 많이 뻣뻣해지고 간소화된것을 볼 수 있다.


3.4. 여담[편집]


  • 현재는 작고한 나리타야 이치카와 종가의 선대 당주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절친한 사이였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도 있었고 같이 연기하는 작품의 스타일이 비슷한 것이 컸다고 한다. 때문에 이들의 가족은 가깝게 지냈으며 아들인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와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도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서 연을 쌓았다.

  • 아내와의 결혼 발표 당시, 유명 여배우와 가부키 황태자의 결혼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탄생 이후 여러 광고 출연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왔다고 한다. 보통 가부키 배우의 광고는 아버지와 자녀만 출연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쪽은 온 가족 모두가 CM에 출연해야지만 효과가 있었다.


  • 최근 '정말 열심히 배우고자 하여 그것을 증명한 이에게만 오노에 키쿠고로의 세습명을 맡길 것이다'라는 인터뷰를 하였는데, 장남인 키쿠노스케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여 연습 때마다 자잘한 일에 화를 많이 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또한 외손자 테라지마 마호로에 대해 오노에 바이코우를 물려주고 싶다는 발언까지 했는데, 첫손주에 대한 애정이 강한 듯 하다. 다만 엄연한 장손이 있는데다 장손의 외가 역시 가부키 명문가 하리마야이기 때문에 곧 해당 발언을 철회하긴 했다. 이 때문인지 한살 차이인 두 손자들은 현재 선의의 경쟁자 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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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장녀가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와 혼인하였다.[2] 모리무라 재벌의 창립자인 6대 모리무라 이치자에몬이 1910년, 요코하마시에 설립한 일관제 사립학교이다.[3] 본명은 테라지마 세이조. 일본의 무형문화재, 인간 국보이다. 아버지는 사업가였으며, 태어나기 전부터 자녀가 없던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입적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훗날 친자인 2대 오노에 쿠로에몬이 태어났음에도 양자인 오노에 바이코우가 우시노스케와 키쿠노스케를 습명하며 종가의 후계를 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현대의 오노에 종가 또한 바이코우의 후계이다.[4] 1979년 2월 무대를 마지막으로 가부키를 그만두었다.[5] 본명은 테라지마 준코로, 혼전 성은 슌도. 절세 미녀 연기로 명성이 자자하며 쇼와 시대의 유명 여배우였다. 결혼 후 사실상 연예계에서 은퇴했으나 2010년에 다시 복귀했다.[6] 본명은 테라지마 카즈야스.[7] 본명은 테라지마 마호로.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의 장남이며 가부키 활동 외에도 혼혈인 아역 배우로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외삼촌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와 함께 탑코트에 소속되어 있다.[8] 본명은 테라지마 카즈후미. 장남인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의 장남이며 직계 후계인 장손이다.[9]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4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주요 야고가 있다고 한다.[10] 2대 오노에 쿠로에몬. 본명은 테라지마 키요아키.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첫 번째 부인은 아니고 후처 테라지마 치요의 소생이다. 6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병사한 뒤 미국으로 이민하여 하버드 대학,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가부키를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하와이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1922-2004)[11] 전시 상황이 이어지던 때에 태어났던지라 하츠오메미에를 비교적 늦게 치뤘다.[12] 좌측부터 당시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초대 오노에 타츠노스케,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훗날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는 10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지낸 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지냈다. 이 셋을 언론과 팬들은 '산노스케'라 칭했는데 전부 이름에 '노스케'가 들어가며 같은 시기에 태어난 동년배에 서로 친한 사이였기에 삼인방을 묶는 것이 가능했다. 여담으로 산노스케는 이들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이는 '헤이세이 산노스케'라고 분류된다. 구성원은 그대로 당시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2대 오노에 타츠노스케,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13]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본명인 테라지마 히데유키에서 따온 것.[14] 일본은 법적으로 3촌까지만 친족에 해당되며 4촌 관계부터는 합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하다. 키쿠고로 본인이 가부키 배우만 아니었더라면 바로 혼인신고를 올렸겠지만 가문의 당주로서 세세히 따져봤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일반인들도 주변 시선이 안 좋기에 빈도 수가 줄다 못해 소멸했다시피 하여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혼인은 아니게 되었다.[15] 좌측부터 사위 로랑 그나시아, 장녀 테라지마 시노부, 손자 초대 오노에 마호로, 장남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7대 오노에 키쿠고로.[16] 코오라이야의 당주, 2대 마츠모토 하쿠오무사시보 벤케이를 연기했다.[17]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나리타야의 선대 당주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습명 피로연 칸진쵸에서도 요시츠네를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