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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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 서부의 지급시. 지난에서 서쪽으로 7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해 있다. 지급시 주민 600만 중 도시 자체 (둥창푸구)에는 130만명이 거주한다. 순환도로로 둘러진 시가지는 황허와 평행을 이루는 투하이 강의 양편에 펼쳐져 있으며, 서쪽의 구시가지에는 대운하가 지나간다.
《수호전》에서 '몰우전 장청'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자 송강의 양산박과 장청이 전투를 한 동창부(東昌府)가 바로 이곳으로, 구시가지의 둥창 호수 안에 있는 라오청고성이 동창부성이었다. 남쪽 25km의 황허 물을 끌어다 만든 인공 호수인 둥창호는 항저우의 서호와 비슷한 크기이며, 그 아름다움과 비견된다. 호수 주위에는 수호전의 108 영웅 조각상이 있으며, 중앙의 무송 상이 가장 크다. 호수와 대운하, 투하이강과 많은 관개 수로들이 교차하기에 랴오청은 '강북에 있는'[1] 물의 도시로 불린다.
경제적으로는 인근 더저우와 마찬가지로 신재생 에너지 산업과 화학 공업이 발달하였고 주변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시가지 동부에는 종합대학인 랴오청 대학교가 있고, 운하박물관도 있다. 2007년 베이징 중국 도시 포럼에서 중국에서 살기 좋은 10대 도시들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한국의 의령군, 광명시와 자매 도시이고 작지만 한인 상회도 있다. 2005년에는 CJ 제일제당에서 랴오청에 라이신 공장을 설립하였다.
고성과 둥창 호수
황허 문명에 속한 룽산 문화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서부 거점이던 요성읍 (聊城邑)이 설치되었고, 현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한대에는 동군에 속하였고, 삼국지의 모사 정욱이 이곳 출신이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평원군에 속하였고, 현 시가지 동북쪽에 그 치소가 있었다. 당나라 시기 하북도 박주 (博州)에 속했으며 그 중심이었다. 오대십국 시대에 요현에 이어 요성현이 설치되었다. 송나라 대에 동창부가 설치되었고, 1070년 요성고성이 세워졌다. 원나라 시기에는 1267년 박주로에 이어 1276년 동창로에 속했다.
라오청고성의 위성 사진
전설에 따르면 랴오청 일대의 오동나무 숲에는 한 쌍의 봉황이 살며 백성들을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바다에서 나타난 흑룡이 수컷 봉황을 죽인 후 큰 호수를 만들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흑룡이 잠시 출타한 사이에 호수 중앙에 성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에 달아났던 암컷 봉황이 인간과 결혼해 낳은 왕동과 왕창을 데려와 성의 건설을 도왔다. 돌아온 흑룡은 호수에 세워진 성을 부수고 사람들을 헤치려 하였고, 암컷 봉황과 두 아들이 맞서 싸웠다. 결국 흑룡이 패하여 바다로 돌아갔는데, 흑룡이 빠져나간 구멍으로 물이 계속 들어와 성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왕동과 왕창이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저 구멍을 메웠고, 이에 두 형제의 이름을 따서 봉황성을 동창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나, 치수가 얼마나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과제였는지를 알려준다. 고성에 대한 설명
본래 요성고성은 토성이었는데, 명나라 초엽인 1372년 동창평산호지휘첨사 진용이 벽돌성으로 개축하였다. 11.7m 높이의 성벽은 너비가 밑단은 11.7m인데 상단은 6.7m로 좁아진다. 남쪽에서 바라볼 때에 동문과 서문이 봉황 모양처럼 보인다 하여 봉황성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호수를 해자 삼아 지어진 까닭에 '수성'으로도 불린다. 1374년 주변을 감시하고 시간을 알리기 위한 종루로써 세워진 광악루 (광웨러우)는 우한 황학루, 웨양 악양루와 함께 명나라 3대 명루로 불린다. 본래 성을 세우고 남은 목재로 세웠다고 여목루 (餘木樓), 현지 지명을 딴 동창루 (東昌樓)로 불리다가 홍치제 때에 광악루로 개칭되었다. 높이는 무려 33m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명대 누각들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청초 쓰인 요재지이와도 관련이 있다. 같은 聊(요=랴오)자를 들어있고 저자의 근거지가 이 주변의 산동성 서부이다.
청대 동창부 지도
청나라 시기 번영한 도시에 강희제와 건륭제는 각각 4차례와 9차례 들렸다. 그중 전자는 광악루에 필적을 남겼다. 1743년에는 산서성과 섬서성 출신 상인들이 산섬회관을 세웠는데. 그 희루는 일대 극단들의 주요 공연장이었다. 중일전쟁 중인 1938년 11월 도시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었고, 해방 후 중화민국에 속했으나 1946년 12월 주요 도시들 중 비교적 이른 시점에 인민해방군에게 점령되었다. 국공내전을 거치며 랴오청 고성이 파괴되었으나 추후 일부 복원되었다. 1949년 ~ 1952년 잠깐 동안 핑위안성에 속했으나 다시 산둥성으로 돌아왔다. 현에서 1958년 성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63년 재차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1983년 현급시를 거쳐 1998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기존 랴오청현은 지급시의 중심인 둥창푸구가 되었다.
대운하와 함께 한단-지난 동서 철도와 헝수이-허쩌 남북 철도가 지나간다. 그외에 12개의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로 손꼽힌다.
일반철도의 경우 다음과 같은 주요역과 노선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중국 산둥성 서부의 지급시. 지난에서 서쪽으로 7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해 있다. 지급시 주민 600만 중 도시 자체 (둥창푸구)에는 130만명이 거주한다. 순환도로로 둘러진 시가지는 황허와 평행을 이루는 투하이 강의 양편에 펼쳐져 있으며, 서쪽의 구시가지에는 대운하가 지나간다.
《수호전》에서 '몰우전 장청'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자 송강의 양산박과 장청이 전투를 한 동창부(東昌府)가 바로 이곳으로, 구시가지의 둥창 호수 안에 있는 라오청고성이 동창부성이었다. 남쪽 25km의 황허 물을 끌어다 만든 인공 호수인 둥창호는 항저우의 서호와 비슷한 크기이며, 그 아름다움과 비견된다. 호수 주위에는 수호전의 108 영웅 조각상이 있으며, 중앙의 무송 상이 가장 크다. 호수와 대운하, 투하이강과 많은 관개 수로들이 교차하기에 랴오청은 '강북에 있는'[1] 물의 도시로 불린다.
경제적으로는 인근 더저우와 마찬가지로 신재생 에너지 산업과 화학 공업이 발달하였고 주변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시가지 동부에는 종합대학인 랴오청 대학교가 있고, 운하박물관도 있다. 2007년 베이징 중국 도시 포럼에서 중국에서 살기 좋은 10대 도시들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한국의 의령군, 광명시와 자매 도시이고 작지만 한인 상회도 있다. 2005년에는 CJ 제일제당에서 랴오청에 라이신 공장을 설립하였다.
2. 역사[편집]
고성과 둥창 호수
황허 문명에 속한 룽산 문화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서부 거점이던 요성읍 (聊城邑)이 설치되었고, 현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한대에는 동군에 속하였고, 삼국지의 모사 정욱이 이곳 출신이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평원군에 속하였고, 현 시가지 동북쪽에 그 치소가 있었다. 당나라 시기 하북도 박주 (博州)에 속했으며 그 중심이었다. 오대십국 시대에 요현에 이어 요성현이 설치되었다. 송나라 대에 동창부가 설치되었고, 1070년 요성고성이 세워졌다. 원나라 시기에는 1267년 박주로에 이어 1276년 동창로에 속했다.
2.1. 랴오청 고성[편집]
라오청고성의 위성 사진
전설에 따르면 랴오청 일대의 오동나무 숲에는 한 쌍의 봉황이 살며 백성들을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바다에서 나타난 흑룡이 수컷 봉황을 죽인 후 큰 호수를 만들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흑룡이 잠시 출타한 사이에 호수 중앙에 성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에 달아났던 암컷 봉황이 인간과 결혼해 낳은 왕동과 왕창을 데려와 성의 건설을 도왔다. 돌아온 흑룡은 호수에 세워진 성을 부수고 사람들을 헤치려 하였고, 암컷 봉황과 두 아들이 맞서 싸웠다. 결국 흑룡이 패하여 바다로 돌아갔는데, 흑룡이 빠져나간 구멍으로 물이 계속 들어와 성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왕동과 왕창이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저 구멍을 메웠고, 이에 두 형제의 이름을 따서 봉황성을 동창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나, 치수가 얼마나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과제였는지를 알려준다. 고성에 대한 설명
본래 요성고성은 토성이었는데, 명나라 초엽인 1372년 동창평산호지휘첨사 진용이 벽돌성으로 개축하였다. 11.7m 높이의 성벽은 너비가 밑단은 11.7m인데 상단은 6.7m로 좁아진다. 남쪽에서 바라볼 때에 동문과 서문이 봉황 모양처럼 보인다 하여 봉황성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호수를 해자 삼아 지어진 까닭에 '수성'으로도 불린다. 1374년 주변을 감시하고 시간을 알리기 위한 종루로써 세워진 광악루 (광웨러우)는 우한 황학루, 웨양 악양루와 함께 명나라 3대 명루로 불린다. 본래 성을 세우고 남은 목재로 세웠다고 여목루 (餘木樓), 현지 지명을 딴 동창루 (東昌樓)로 불리다가 홍치제 때에 광악루로 개칭되었다. 높이는 무려 33m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명대 누각들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2. 근현대[편집]
청초 쓰인 요재지이와도 관련이 있다. 같은 聊(요=랴오)자를 들어있고 저자의 근거지가 이 주변의 산동성 서부이다.
청대 동창부 지도
청나라 시기 번영한 도시에 강희제와 건륭제는 각각 4차례와 9차례 들렸다. 그중 전자는 광악루에 필적을 남겼다. 1743년에는 산서성과 섬서성 출신 상인들이 산섬회관을 세웠는데. 그 희루는 일대 극단들의 주요 공연장이었다. 중일전쟁 중인 1938년 11월 도시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었고, 해방 후 중화민국에 속했으나 1946년 12월 주요 도시들 중 비교적 이른 시점에 인민해방군에게 점령되었다. 국공내전을 거치며 랴오청 고성이 파괴되었으나 추후 일부 복원되었다. 1949년 ~ 1952년 잠깐 동안 핑위안성에 속했으나 다시 산둥성으로 돌아왔다. 현에서 1958년 성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63년 재차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1983년 현급시를 거쳐 1998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기존 랴오청현은 지급시의 중심인 둥창푸구가 되었다.
3. 교통[편집]
대운하와 함께 한단-지난 동서 철도와 헝수이-허쩌 남북 철도가 지나간다. 그외에 12개의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로 손꼽힌다.
일반철도의 경우 다음과 같은 주요역과 노선이 있다.
4. 자매도시[편집]
5. 출신 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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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북은 기후 변화로 건조기후가 되어 수자원이 희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