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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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명나라의 제9대[1] 황제. 명나라 최후의 성군[2] 이자 중국 한족 왕조 최후의 성군으로 평가받는다.[3] 묘호는 효종(孝宗), 시호는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 휘는 우탱(祐樘). 성화제의 아들.
2. 생애[편집]
2.1. 신분을 숨긴채 자란 어린 시절[편집]
홍치제 주우탱은 성화 6년(1470) 성화제 주견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행했다. 생모 기씨(紀氏)는 성화 원년(1465) 광서 지방에 거주하는 요족의 반란을 진압할 때 포로로 끌려와 후궁이 된 요족 여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성화제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는데, 그 후 성화제는 기씨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기씨는 이미 후궁들을 낙태해버린 만귀비가 두려워 황제의 승은을 입은 사실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근신하며 지냈다. 얼마 후 배가 점점 불러오자 기씨는 황제의 아이를 회임했다는 사실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회임 소식이 공숙황귀비(恭肅皇貴妃) 만정아(萬貞兒), 즉 만귀비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공포를 느꼈다.
기씨는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심정으로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소문에 민감한 궁녀들의 입방아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만귀비까지 기씨의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에 만귀비는 은밀히 궁녀를 보내 기씨를 정탐케 했는데, 궁녀는 "기씨는 회임한 게 아니라 복부에 혹이 생겨 중병에 걸린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만귀비의 악행에 치를 떨고 기씨를 남몰래 동정한 궁녀와 환관들이 있었고, 만귀비가 보낸 그 궁녀도 기씨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을 보고한 것이다. 만귀비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기씨를 안락당(安樂堂)에 유폐했는데, 안락당은 중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관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런 고초를 겪었음에도 기씨는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기씨는 여전히 만귀비의 보복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독한 마음을 먹고 태감 장민(張敏)에게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건네주며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장민은 목숨을 걸고 갓난아이를 궁중의 음습한 밀실에 숨기고 쌀가루, 엿당 등을 먹여 살려냈다. 만귀비가 수시로 탐문했지만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다. 폐후 오씨(呉氏)[4] 도 만귀비에게 원한이 있었으므로 어린 주우탱에게 젖을 먹여 키웠다. 주우탱은 6세가 될 때까지 유령인간으로 숨어 지내느라 배냇머리도 깎지 못했다.
성화제의 차남이자 태자였던 주우극(朱祐極)이 성화 8년(1472)에 사망했다. 황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성화제는 깊은 상심에 빠졌다. 성화 11년(1475) 어느 날 장민이 성화제의 머리카락을 빗겨줄 때 성화제가 거울을 보며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자, 장민은 만귀비를 중심으로 한 음해하는 자들 때문에 부득이하게 숨긴 주우탱이란 아들이 있음을 알렸다. 성화제는 크게 기뻐하며 같은 해 11월 6살 난 주우탱을 태자로 책봉했다[5] 그러나 주우탱의 생모인 기씨는 어명에 따라 영수궁(永壽宮)으로 거처를 옮겨 복록을 누리는 듯했으나, 아들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지 불과 몇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만귀비에게 독살되었다고도 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도 한다. 기씨가 죽은 뒤, 목숨을 걸고 주우탱을 지켰던 장민도 금덩어리를 삼키고 자살했다. 기씨는 죽은 뒤 공각장희숙비(恭恪莊僖淑妃)란 시호를 받았다.
만귀비는 여전히 태자를 해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만귀비의 음모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태자를 구원한 사람은 성화제의 어머니인 효숙태후(孝肅太后) 주씨(周氏)였다. 주태후는 태자를 자신이 거주하는 인수궁(仁壽宮)으로 데리고 와서 기거하게 했다. 만귀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만귀비가 아무리 총애를 받고 간악할지라도, 황실의 최고 어른인 주태후를 능멸하고 태자를 해칠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주우탱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후술된 내용은 민간전설, 즉 야사의 내용이므로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주우탱이 태자가 된 이듬해인 1476년에 주우탱의 이복동생 주우원[6] 이 태어났고, 1478년에 주우원의 친동생 주우륜이 태어났으며, 1479년에도 2명의 황자가 더 태어났기 때문이다. 존재가 드러난 직후라면 몰라도, 이 정도로 성화제의 자손이 번창한 상황이라면 만귀비가 주우탱을 해치기 쉽지 않았다.
주우탱은 황태자가 된 후 황제 수업에 충실했다. 성화 23년(1487) 봄에 만귀비가 병사하자, 성화제도 실의에 빠져 같은 해 8월에 붕어했다. 그리고 주우탱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로 즉위한 후 신하들이 "만귀비의 전횡을 징계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홍치제는 이를 그냥 없던 일로 했다. 사실 아버지 성화제 때에도 "만귀비를 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만귀비를 너무 아꼈던 성화제 역시 이를 그냥 넘겨버렸다. 효성으로 이름난 홍치제였기에 아버지의 결정을 따른 것이라곤 해도, 자기를 핍박했던, 그것도 목숨까지 위협했던 여인을 단죄하지 않고 그냥 넘겼음을 보면 대단한 사람이다.[7]
또한 홍치제는 어머니 기씨를 효목자혜(孝穆慈慧) 황후로 추시하였다.
2.2. 즉위[편집]
주우탱은 9세 때부터 정규교육을 받았다. 태자에게 성군의 도를 전수하는 일은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막중한 대사였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태자 교육을 담당했다. 한림원시강학사 정민정, 한림편수 유건 등이 주우탱에게 유가의 경전, 제자백가의 학설, 자치통감, 대명률 등 치국의 도를 논한 명저들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강의했다. 태어나자마자 5년 동안 유령인간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주우탱은, 황궁 안에서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가운데 겸손하고 근신하며 학업에 열중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정한 현실을 너무나 어린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랐고, 스승들도 주우탱을 기특하게 여겨 아껴주었다.
즉위 후 업적은 제법 볼 만하다. 홍치 원년(1488)에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연을 개설했다. 경연이란 원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가 임금에게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의 내용을 강론하기 위하여 개설한, 일종의 어전 강석이다. 그런데 경연은 임금을 위한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임금과 신하가 국정 현안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며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이는 동아시아의 절대군주제 국가인 중국과 조선에서 임금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다스림을 신하들이 견제하는 장치였고, 신하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길도 되었다. 그렇기에 홍치제는 경연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여론을 수렴하는 방법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홍치제의 부친 성화제는 불교의 열반 사상과 도교의 신선방술에 미혹한 황제였다. 그로 인해 혼란에 빠졌던 국정을 수습하고자 홍치제는 선친이 남긴 적폐를 청산하고자 했다. 즉위 초부터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궁궐에서 행하는 불교와 도교의 각종 의식을 금지하고 아울러 성화 연간에 승려와 도사들에게 하사한 칭호를 모두 철폐했다. 또 태감 양방(梁芳), 만귀비의 남동생 만희(萬喜), 내각수보 만안(萬安) 등 성화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부렸던 간신들을 처단했다. 당시 죄질이 가장 무거웠던 계효는 기시를 당하고, 이자성은 옥사했고, 부패한 관리 1천 명은 파면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그런데 효종이 성화 연간의 적폐를 일소하기 위하여 옥사를 일으킬 때, 가급적이면 잔혹한 형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도량이 넓으며, 형벌이 아닌 관용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했던 황제였다. 홍치 13년(1500)에는 문형조례(問刑條例)를 제정하고, 홍치 15년(1502)에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면서, 명나라의 헌법이나 다름없는 대명률 가운데 잔혹한 형벌 조항들을 삭제한 것이 좋은 예이다.
명나라 같은 대국은 황제가 처리해야 하는 공문서나 상소문이 하루에도 수백 건씩 올라온다. 일반적으로 역대 황제들은 중요한 문건만 친람하고 결제하였을 뿐, 대부분 문건은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하여 처리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황제가 방만하면 환관들이 얼마든지 성지를 조작하고 사실을 왜곡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홍치제는 환관의 국정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환관이 황제를 대신하여 비준하는 관례를 폐지했고 공문서와 상소문은 황제에게 바로 전달하게 하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올라온 문건을 일일이 검토한 뒤 조회에 참석하여 대신들과 상의했다.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의 방법으로 국정을 다스렸다.
그래서 홍치제는 진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간언이라면 즉시 받아들이는 현명한 군주였다. 홍치연간에 명나라에 많은 충신이 배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홍치제의 자질과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홍치 15년(1502) 대명회전이 완성된 후 홍치제는 유건, 이동양, 사천 등 조정 중신들에게 망의를 하사했다. 망의란 용처럼 생긴 이무기의 무늬가 그려진 관복이다. 동아시아에서 용은 임금을 상징하고 이무기는 용에 버금가는 동물이므로, 망의를 입은 신하는 황제 다음가는 존귀한 인물이란 뜻이다. 신하로서는 무궁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명나라는 홍치제 때부터 조정 중신에게 망의를 하사하는 제도가 생겼다. 그가 얼마나 중신들을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다.[8]
다만 홍치제가 유가의 이념에 충실한 문신을 신임했다고 해서 결코 무신을 박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직한 무신을 적극 옹호하고 우대해주었다. 외정적으로는 당시 명나라는 비교적 오랫동안 큰 전란이 없었으므로 군기가 문란해지고 방비가 소홀했다. 결국 홍치제가 즉위한 직후에 몽골족이 명나라군의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서북지역의 변방을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홍치 2년(1489) 병부상서(兵部尚書) 마문승(馬文升)이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을 엄격하게 검열하여, 부패하고 나약한 장수 30여 명을 파직했다. 그의 단호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간신들이 그를 여러 차례 음해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효종이 그의 숙군 정책을 지지하고 신변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건주여진과 타타르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명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런 주목할 만한 치적 덕에 그의 치세를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 부르며 혼란에 빠졌던 명나라가 다시 부흥한 시기로 평가한다.
또한 제법 특이한 기록이 하나 있다.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기 마련이었던 여러 중국 황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황후 1명하고만 혼인했다. 비공식 후궁들은 여러 명 있었으나 정식 혼인상대는 정실 황후인 효성경황후(孝成敬皇后) 장씨(張氏) 1명만 있었고, 황후와 금실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한 번은 성화제의 국장 기간 동안에 어마감좌소감(御馬監左少監) 곽용(郭鏞)이 미녀들을 예비 비빈으로 선발해두었다가, 성화제의 3년상을 치르고 난 뒤 그들 가운데 2명을 비빈으로 책봉하자고 홍치제에게 주청했다. 이에 한림원시독(翰林院侍讀) 사천(謝遷)이 "3년상도 안 끝났는데 어찌 후궁을 들이겠느냐?"며 이를 반대했는데, 그는 주우탱의 스승으로 그가 태자였을 때부터 유가의 통치 이념과 예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의했던 자였다.
주우탱은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주우탱 사후에 그의 묘호를 효종으로 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효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을 정도로 중시했다. 그는 그의 스승 사천의 간언이 옳다고 여기고 비빈을 선발하는 일을 중지했다. 훗날 효종실록을 편찬한 초방은 "사천이 장황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홍치제의 비빈 간택을 막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홍치제에게 비빈을 책봉하라는 상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홍치제는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9]
이렇듯 업적과 인간성 딱히 흠잡을 만한 곳이 없고 모두에게 신망받는 군주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했고 황제가 되어서도 쉬지 않고 과로를 했기 때문인지 오래 살지는 못했다. 홍치 18년(1505) 감기를 앓다가 어의가 가져온 약을 마시고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결국 병상에서 재상들에게 "태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재위기간은 18년, 향년 36세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이 바로 정덕제였다는 점. 그야말로 호부견자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10]
어쨌든 홍치제 본인은 군주로서 모범을 보였고, 그의 치세 동안 경제적 호황과 잠잠한 변방이 함께 해서, 명나라의 태평기를 이끈 중흥의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 뒤의 암울한 명나라의 황실사를 생각하면, 진정한 임금 구실 제대로 한 마지막 명나라 임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군주. 말 그대로 한족 왕조의 마지막 성군[11] .
3. 명사의 논찬[편집]
명나라는 천하를 차지하여 16대를 전했는데, 태조와 성조 이외에 칭송할 만한 이는 인종, 선종, 효종 뿐이었다. 인종과 효종의 재위기에는 처음으로 나라의 기세가 오르고 기강이 세워지고 순박함이 아직 스며들지 않았다. 성화 연간 이래에 이르러 태평무사로 칭송되었으니, 편안하면 태만에 빠지기 쉽고 재물이 풍성하면 점점 사치에 빠진다. 효종은 홀로 능히 공경하고 검약하며 일정한 제한을 두며, 정무를 근면하게 처리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며, 안녕을 지키고 번창하는 도리에 신중하고 삼가며, 조열을 평온하게 부려 백성들이 안락하고 재물이 풍족해졌다. 주역에 이르기를 “비탈지지 않은 평지는 없고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으니 고난이 오래되더라도 허물이 없다.”라고 한다. 이런 도리를 아는 이는 오직 효종 뿐이었다.
4. 기타[편집]
홍치제의 시기는 조선 성종 말년과 연산군 전반에 걸친다. 또한 홍치제 즉위 초에 제주도에서 태풍에 휘말려 표류했던 최부가 표해록을 남겨 이 당시 중국의 사회상이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 사료로 활용된다.
홍치제와 그 전 황제들의 어진과 그 이후의 어진을 비교하면 같은 황족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제로 이전까지는 영락제, 선덕제, 정통제, 성화제는 물론 성격은 유약하다는 홍희제도 거대한 체구에 풍성한 관우 수염이 돋보이는 황제들이었지만[12] , 홍치제 이후에는 황제들의 얼굴이 마른 체형에 수염도 풍성하지 못하다. 그나마 만력제가 풍채는 비슷하지만 수염이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홍치제는 성화제의 친자식이 아니라 폐후 오씨와 태감 장민이 남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기씨가 낳은 자식이라고 성화제를 속인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을 정도다. 다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외모는 어머니에게서도 물려받기 때문에 홍치제가 선대 황제들과 다르게 생긴 것이 그가 황족이 아니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가정제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홍치제의 후손이 아님에도[13] 홍치제 이전의 황제들과 그리 외모가 닮지 않은 것을 보면, 그냥 세대가 여러 차례 바뀜에 따라 선대 황제들의 유전자가 옅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공교롭게도 조선도 성종까지는 태조 이성계로부터 전해진 유전자가 발현된 듯하지만 연산군 때부터 다른 모습이 나온 것 같다. 태조 이성계는 남아 있는 어진을 통해서 얼굴과 체형을 알 수 있다. 태조의 3남 익안대군의 초상, 손자 효령대군의 초상, 증손자 수양대군의 초상을 보면 얼굴이 네모형이고 기골이 장대했다. 성종은 세종대왕을 닮았다는 평이 있고, 폐비 윤씨가 "전하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아, 이성계의 무장 체격을 물려 받았던 모양이다. 연산군의 외모에 대해서는 인조 대의 대신 이덕형[14] 이 임진왜란 당시 피난 중 97세 노인을 만났는데, 그때 노인이 연산군 시절에 향군으로 서울에 가서 연산군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노인의 기억으로 "연산군은 살결이 희고 얼굴과 허리가 가늘었으며,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고 한다.[15]
홍치제의 치세 초기에 원말명초를 휩쓴 고려양의 복식을 금지시켜서, 이전의 한족의 한푸로 돌아갔다.원명 시기의 한류, 고려양 명나라 관리였던 육용(陸容 1436-1494)이 저술한 숙원잡기(菽園雜記) 권10에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馬尾裙始於朝鮮國, 流入京師, 京師人買服之, 未有能織者. 初服者, 惟富商, 貴公子, 歌妓而已, 以後武臣多服之, 京師始有織賣者. 於是無貴無賤, 服者日盛. 至成化末年, 朝官多服之者矣. 大抵服者, 下體虛奓, 取觀美耳. 閣老萬公安, 冬夏不脫. 宗伯周公洪謨, 重服二腰, 年幼侯伯駙馬, 至有以弓弦貫其齊者. 大臣不服者, 惟黎吏侍淳一人而已. 此服妖也, 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馬尾裙)은 조선국에서 비롯되어 수도에 유입되어 수도 사람들이 이를 사고 입었으나, 능히 이를 짤 수 있는 직공이 있지 않았다. 처음에 입은 자들은 부유한 상인, 귀족, 기생뿐이었으나 이후 무신(武臣)들 대다수가 이를 입었으니, 수도에서 비로소 이를 짜서 파는 자가 생겼다. 이에 귀천을 떠나 입는 자가 날로 성해졌다. 성화(成化 1465-1487)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이를 입었다. 대체로 옷은 하체가 비어있고 펴져있으니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각로(閣老,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뭇 공(公)들은 이를 편안히 여겨 겨울과 여름에도 벗지 않는다. 종백(宗伯, 예조판서) 주홍모(周洪謨 1420-1492)는 두 옷으로 겹쳐 입었고, 나이 어린 후(候), 백(伯), 부마(駙馬)들은 활시위를 옷자락에 꿰놓은 자가 있을 정도다. 대신들 중에 안 입는 자들은 여리(黎吏)와 시순(侍淳, 종)들뿐이다. 이 옷은 요사스러워, 홍치(弘治 1488-1505) 초기에 비로소 이를 금지하는 법례가 생겨났다.
숙원잡기(菽園雜記) 卷10
홍치 13년(1500년)에는 전국옥새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예부상서 부한은 이를 위조된 물건으로 보았고 나아가 전국옥새의 신빙성 그 자체와 그 정당성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부한은 이 사안을 조용히 덮을 것을 주장하였고, 홍치제는 이를 따라서 옥새를 찾은 자에게 적당히 상금을 내리는 것으로 끝냈다.[16]
5. 대중매체에서[편집]
2016년 드라마 육선문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후반에 모후가 성화제를 독살하자 황좌에 앉는다. 황권강화를 위해 모후를 연금하고 동창의 수장을 독살하고 스승이자 홍치제 지지세력의 수장인 수보대신을 독살하고 형부상서도 독살했다.
2018년 드라마 양릉전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극초반부터 각혈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