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 토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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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토후국
Emirato di Bari
إمارة باري هي

847년 ~ 871년
위치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수도
바리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아미르
역대 아미르
칼푼(847 ~ 852)
무파라그 이븐 살람(852 ~ 857)
사우단(857 ~ 871)
언어
베르베르어, 아랍어
종족
베르베르인, 아랍인
종교
이슬람교(수니파)
주요사건
847년 건국
871년 멸망
성립 이전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 왕국

1. 개요
2. 역사
3. 역대 아미르



1. 개요[편집]


바리를 중심으로 풀리아 지방을 지배한 베르베르계 아미르국.

2. 역사[편집]


827년 지야다탈라 1세가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단행한 이래, 아글라브 왕조는 수십년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칠리아를 지속적으로 공략했고 시칠리아에 정착한 아랍인베르베르인들은 시칠리아 토후국을 수립했다. 그러던 840년, 베네벤토 공국의 침략에 시달리던 나폴리 공국이 시칠리아 토후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를 빌미삼아 처음으로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가 브린디시약탈했다.

841년, 베네벤토 공국에서 라델치스 1세지코눌프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라델치스 1세는 자력으로 카푸아의 가스탈트[1]를 맡고 있던 란둘프와 연합한 지코눌프를 이기지 못하자 시칠리아 토후국에 막대한 재물을 바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많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해 카푸아를 약탈했고, 란둘프는 트리프리스코(Triflisco) 언덕 인근에 새로운 수도를 세워야 했다. 지코눌프는 이에 대응해 많은 아랍인 용병들을 끌여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아랍인 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이들이 벌이는 약탈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그러던 847년, 아글라브 왕조의 노예 출신인 베르베르인 칼푼(Kalfūn)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바리를 탈취한 뒤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베네벤토 공국이 내란에 휘말려서 여기에 별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 풀리아 지방을 빠른 시일에 공략했다. 852년 칼푼의 뒤를 이어 아미르에 오른 무파라그 이븐 살람은 이탈리아 국왕 루도비코 2세의 공격을 격퇴한 뒤 856년 나폴리를 습격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으며,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한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인 왈리(Wali)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857년 무파라그를 암살하고 즉위한 사우단은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 아데마르와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아델치스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한 뒤 두 공국으로 쳐들어가 막대한 재물을 약탈하고 수많은 인구를 끌고 갔다. 859년 카푸아와 테라 데 라보로를 심각하게 약탈한 뒤 바리로 귀환하던 사우단은 스폴레토 공작 람베르토 1세, 르시 백작 제라르, 텔레세의 가스탈트 말레포토, 보이아노의 가스탈트 완델베르토가 이끄는 연합군의 저지를 받았으나 격파했다. 860년 베네벤토 공국과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충성을 서약받고 공물을 받아냈으며, 864년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왈리로 선임되면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기독교도 연대기 작가들은 사우단을 잔혹하고 간교한 이교도로 간주했지만, 11세기 유대인 연대기 작가 아히마즈 벤 팔티엘(Ahimaaz ben Paltiel)은 그가 도시를 현명하게 다스렸으며 저명한 유대인 학자 아부 아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호평했다. 이탈리아 중세 역사가 조슈에 무스카(Giosuè Musca. 1928 ~ 2005)는 바리 시는 사우단의 치세 동안 노예, 도자기, 와인 등 각종 상품이 오가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했다고 밝혔다. 또한 살레르노 연대기에 따르면 바리 토후국에서 파견된 대사가 살레르노 궁정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하며, 루도비코 2세에 대항했던 스폴레토 귀족들이 바리로 망명하기도 했다.

865년, 루도비코 2세는 파비아에서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겠다고 선포하고 북부 이탈리아의 전사들에게 루세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병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아 출진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루도비코 2세는 황후 엥겔베르가와 함께 캄파니아 일대를 여행했다. 이에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조속히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지 않으면 무슬림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하고 로마까지 몰아붙일 테니 서둘러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867년 봄, 비로소 바리 토후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한 루도비코 2세는 마테라를 공략한 뒤 철저히 파괴하고 오리아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무슬림이 장악한 바리와 타란토와의 교통로가 끊어졌다. 이후 베네벤토에 도착한 루도비코 2세는 868년 겨울을 베네벤토에 머물면서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바리 토후국을 향한 합동 공세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당시 그에게는 마땅한 해군이 없었기에, 해안도시인 바리의 해상을 봉쇄하려면 동로마 함대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마침 바리 토후국이 아드리아해 연안을 연이어 습격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던 바실리오스 1세는 루도비코 2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루도비코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확실히 얻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자신의 딸 에르멩가르다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와 결혼시키고자 했다.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사이가 돈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 함대 사령관이 루도비코를 '프랑크인'이라고 부르자 루도비코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어그러졌다. 루도비코는 바실레프스 즉, 로마 황제라는 칭호로 불러주기를 원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루도비코 2세간의 불화로 인해 합동 공세가 미뤄지자, 바리 토후국은 870년 선제 공격을 감행해 대천사 성 미카엘의 성역을 포함한 풀리아의 가르가노 반도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공세를 재개한 루도비코 2세는 무슬림군과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리 주변의 여러 마을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이후 프랑크인, 독일인, 랑고바르드인지상군발칸 반도에 정착한 남슬라브 종족인 스클라베니(Sclaveni)인으로 구성된 동로마 함대의 지원을 받아 바리 공성전을 단행했다. 871년 2월 성채가 함락되었고, 사우단은 체포되어 사슬에 묶인 채 베네벤토로 끌려갔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건국된 이슬람 토후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3. 역대 아미르[편집]


  • 칼푼(Khalfun): 847년 ~ 852년
  • 무파라그 이븐 살람(Mufarrag ibn Sallam): 852년 ~ 857년
  • 사우단(Sawdan): 857년 ~ 8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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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