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르노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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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르노 공국
Principatus Sale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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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년 ~ 1077년
위치
이탈리아 남부
수도
살레르노
정치체제
봉건제
국가원수

주요 공작
지코눌프(841 ~ 851)
구아페르(861 ~ 880)
과이마르 2세(901 ~ 946)
과이마르 4세(1027 ~ 1052)
기술프 2세(1052 ~ 1077)
언어
이탈리아어, 랑고바르드어, 라틴어, 중세 그리스어, 아랍어, 노르만어(후기)
종족
랑고바르드인, 라틴인, 그리스인, 아랍인, 노르만인
종교
가톨릭
주요사건
841년 지코눌프살레르노에서 거점을 세우고 베네벤토 공 라델치스 1세에 대항함
851년 지코눌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의 중재에 따라 살레르노 공국을 수립해 베네벤토 공국과 분열됨.
915년 과이마르 2세가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사라센 격파에 기여함
978 ~ 983년 카푸아 공국과 아말피 공국의 지배를 받음
1038~1047년 과이마르 4세가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공략함
1077년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정복됨.
성립 이전
베네벤토 공국
해체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 치하 풀리아-칼라브리아 공국

1. 개요
2. 역사
3. 역대 공작



1. 개요[편집]


841 ~ 1077년 살레르노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지배한 랑고바르드계 공국. 베네벤토 공국으로부터 분열된 뒤 신성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사이를 번갈아가며 봉신을 자처하면서도 독립을 유지했다. 이후 베네벤토 공국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한 때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제패하기도 했지만, 1077년 로베르 기스카르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2. 역사[편집]


살레르노는 기원전 6세기에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식민화되었다가 기원전 5세기경 삼니움에 정복되었고, 뒤이어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남이탈리아의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로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루카니아와 브루티아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동고트 왕국의 영역이 되었다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동로마 제국에 넘어갔다.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로 쏟아져 들어와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갉아먹었을 때, 살레르노는 나폴리, 가에타, 소렌토, 아말피 등 여러 해안 도시들과 함께 공성 기술이 취약한 랑고바르드인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랑고바르드인들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입지가 위태로워지다가 646년 랑고바르드계 공국인 베네벤토 공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774년 베네벤토 대공 아레치스 2세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킨 카롤루스 대제의 공세를 피하고 캄파니아의 해안 및 내륙 지역의 중심지인 살레르노로 수도를 옮겼다. 그가 죽은 뒤 수도가 도로 베네벤토로 옮겨졌지만, 살레르노는 베네벤토 공국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한 곳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던 839년, 베네벤토 대공 지카르드가 정체불명의 인물이 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재무관이었던 라델치스 1세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대공에 선임되었고, 지카르드의 동생 지코눌프타란토에 억류되었다. 이때 지코에 의해 카푸아의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에 선임되었던 라둘프가 지코눌프를 구출했고, 그는 살레르노로 간 뒤 대공에 취임한 후 라델치스에 맞섰다.

841년, 라델치스는 자력으로 지코눌프와 란둘프를 이기지 못하자 시칠리아 토후국에 막대한 재물을 바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많은 아랍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해 카푸아를 약탈했고, 란둘프는 트리프리스코(Triflisco) 언덕 인근에 새로운 수도를 세워야 했다. 지코눌프는 이에 대응해 많은 아랍인 용병들을 끌여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아랍인 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이들이 벌이는 약탈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특히 847년에 아글라브 왕조의 노예 출신인 칼푼이 바리를 탈취하고 바리 토후국을 건국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무슬림 국가가 최초로 등장했다.

851년, 봉신국인 베네벤토 공국의 혼란과 무슬림들의 이탈리아 진출을 보다못한 루도비코 2세가 두 사람에게 당장 타협하지 않으면 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라델치스와 지코눌프는 베네벤토 공국을 절반으로 나눠 가지는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지코눌프가 이끄는 살레르노 공국이 베네벤토 공국으로부터 이탈했다.

살레르노 공국 초대 대공 지코눌프는 얼마 안 가 사망했고, 아들 지코가 살레르노 대공에 선임되었다.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가정교사를 맡고 있던 피에트로 백작이 후견인을 맡았지만, 2년만에 피에트로에게 축출되어 이탈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에게 망명했다. 피에트로는 루도비코 2세로부터 살레르노 대공으로 인정받았지만 855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지코가 살레르노로 귀환하여 복위를 꾀했지만, 피에트로의 아들 아데마르가 지코를 카푸아에서 독살해 권력을 굳건히 다졌다. 이후 카푸아 백작 란둘프 1세와 아들 란도 1세가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여러 영토를 점거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 나폴리의 첫 세습 공작인 세르기우스 1세와 동맹을 맺었다.

858년, 살레르노와 나폴리 연합군이 카푸아를 공격했지만 격파당했다. 이후 859년 5월 8일 테오데몬도 다리 전투에서 세르기우스 1세의 아들인 케사르가 사로잡히면서, 나폴리는 더 이상 카푸아와의 전쟁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카푸아는 여세를 몰아 아데마르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을 부추겼고, 결국 861년 구아페르가 정변을 일으켜 살레르노 공국에서 아데마르를 축출했다. 아데마르는 나폴리에 망명한 뒤 복위할 기회를 노렸지만, 나폴리 측이 그를 구아페르에게 넘겼고, 결국 그는 구아페르에 의해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 구아페르가 이끄는 살레르노 공국은 카푸아 백국과 화해했고, 구아페르는 카푸아 백작 란도 1세의 딸인 란델라이카(Landelaica)와 결혼하여 과이마르 1세를 낳았다.

871년 아글라브 왕조가 파견한 사라센군이 살레르노에 쳐들어와서 1년간 포위 공격을 벌였다. 이로 인해 도시 내에서 굶주림이 만연하여 항복을 심각하게 고려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아말피 공화국이 보급품을 보내주면서 기사회생했다. 그 후 루도비코 2세가 구아페르의 1년이 넘는 탄원과 간청 끝에 프랑크군을 파견했고, 랑고바르드-프랑크 연합군은 살레르노 외곽에서 사라센군과 격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격파했다.

880년 구아페르가 은퇴한 뒤 새 대공에 선임된 과이마르 1세는 상당한 위협에 직면했다. 881년 사라센들이 아그로폴리에 진출한 뒤 살레르노를 위협했으며, 나폴리 공작 아타나시우스 2세도 살레르노 공국의 가신인 카푸아 백국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으려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 3세가 무능한 치세로 일관해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지 못하면서 살레르노 공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자, 과이마르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대신 동로마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886년 카푸아의 란도 2세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로마 황제 레온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파트리키오스와 프로토스파트리오스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았다. 이에 대한 대가로, 동로마 제국의 관리가 살레르노 공국으로 파견되어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과이마르 1세는 스폴레토 공작 귀도 4세의 여동생 이타(Itta)와 결혼함으로써 스폴레토 공국과 동맹을 맺었다. 895년 귀도 4세가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베네벤토 공국을 재정복한 뒤 베네벤토 대공을 겸임하면서 과이마르 1세에게 베네벤토의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그가 베네벤토로 가던 도중에 동로마 황실에 의해 가스탈다토(Gastaldato: 특정 지역의 군사 및 사법 분야에서 활동하도록 위임받은 관료)로 선임된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가 도중에 습격해 포로로 삼고 실명형에 처했다. 귀도 4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아벨리노를 포위 공격해 과이마르 1세를 돌려받았다.

895년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은 친 나폴리 파벌이 살라르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아들 과이마르 2세가 토벌대를 이끌고 출진해 가까스로 진압했다. 이후 실권은 과이마르 2세에게 넘어갔고, 과이마르 1세는 명목상의 권위만 있었다.901년 과이마르 1세가 아버지 구아페르처럼 은퇴하면서, 과이마르 2세가 새 대공에 올랐다.

과이마르 2세는 통치 초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고 충성을 바친 아버지의 노선을 따라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이어갔고, 카푸아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카푸아 백작 아테눌프 1세의 딸 가이텔그리마(Gaitelgrima)와 결혼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로틸다를 란둘프 1세의 아들인 아테눌프 3세와 결혼시켰다.

915년 가에타, 나폴리, 카푸아, 베네벤토, 라치오, 스폴레토, 로마,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개치는 사라센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그해 6월, 스폴레토 공작 알베리크 1세가 총사령관을 맡은 연합군은 캄포 바카노, 비아 카시아, 티볼리 및 비코바로 등지에서 무슬림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이에 알리쿠(Alliku)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가릴리아노 강 인근의 요충지인 트레토로 철수했다. 연합군은 트레토를 포위하여 3개월간 맹공을 퍼부었고, 동로마 함대는 해상에서 구원군이 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식량이 바닥난 무슬림들은 포위망을 뚫고 시칠리아로 도피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전원 죽거나 사로잡혔다.

929년 동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1세와 연합해 934년까지 동로마 제국령 아풀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 제국은 935년 파트리스 직책을 맡고 있던 코스마스에게 11척의 함대를 이끌고 슬라브 함선 7척과 함께 아풀리아로 파견했지만 혼란 수습에 실패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베네벤토와 살레르노 대공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국왕 우고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의 전쟁에서 별다른 이득을 챙기지 못한 과이마르 2세는 스폴레토 공작 테오발트와 동맹을 맺었지만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동로마 제국에 도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과이마르 2세는 살레르노 궁전을 재건축하고 산 피에트로의 팔라티노 교회 옆에 종탑을 세우는 등 토목 사업을 단행했고, 오랫동안 끊어진 금화 주조를 재개했다.또한 조부 구아페르가 설립한 산 마시모 수도원에 거액의 기부금을 냈고, 말년에 클뤼니 수도원 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에게 지원금을 제공했다. 943년 아들 기술프 1세에게 실권을 양도했고 946년 6월 4일 사망했다.

과이마르 2세 사후 대공에 오른 '''기술프 1세는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2세와 나폴리 공작 요안니스 3세의 침략으로 축출되었지만, 아말피 공화국의 공작 마스탈로의 구원 덕분에 복위했다. 947년, 기술프 1세는 란둘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나폴리 공국의 수비대가 주둔한 놀라 시 공략에 기여했다. 이후 나폴리 주교에게 유리한 특권을 내주며 나폴리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955년 직후 바리 총독부의 동로마 제국 스트라테고스인 마리아노스와 동맹을 맺고 파트리키오스의 칭호를 받았다. 966년 교황 요한 13세를 로마에 복귀시키려는 베네벤토 대공 판둘프 1세에 맞서 연합한 로마 민병대-투스카나 공국-스폴레토 공국과 손을 잡았지만, 막상 군대를 보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다가 요한 13세가 로마 귀환에 성공하자 테라키나에서 교황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973년, 베네벤토 대공 아테눌프 2세의 아들이었으며 940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백부 란둘프 1세에 의해 공동 대공에 선임되었다가 얼마 안가 추방당한 란둘프가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와 아말피 공화국만소 1세의 지원에 힘입어 기술프 1세를 몰아내고 살레르노 공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이에 베네벤토 대공 판둘프 1세가 즉각 살레르노로 진격해 란둘프를 몰아내고 기술프 1세를 복위시켰다. 이후 기술프 1세는 판둘프 1세의 가신으로 지내다가 978년에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기술프 1세 사후, 살레르노 공국은 베네벤토 대공이자 스폴레토 공작이며 카메리노 공작 겸 카푸아 백작이었던 판둘프 1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로써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계국 전역이 판둘프 1세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동로마 제국령 남부 이탈리아마저 석권하기 위해 공세를 계획하던 판둘프 1세는 981년 원정을 채 감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장남 란둘프 4세는 카푸아의 베네벤토 공국을 상속받았고, 차남 판둘프 2세는 살레르노 공국을 상속받았다. 반면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은 오토 2세에 의해 회수되어 트라사문트 4세에게 넘겨졌다.

판둘프 1세의 뒤를 이어 살레르노 대공에 오른 판둘프 2세는 얼마 안 가 아말피 공화국의 공작 만소 1세에 의해 축출되었다. 만소 1세는 아말피 공작에 살레르노 대공을 겸임하면서, 아들 조반니 1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이후 982년 7월 14일 콜로네 곶에서 시칠리아 토후국에게 참패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는 무슬림에 함께 대항할 동맹이 절실했기에 만소 1세가 살레르노 대공을 겸임하는 것을 인정했다.

983년 만소 1세가 정적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억압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살레르노 주민들이 봉기해 만소 1세와 조반니 1세 부자를 축출하고 조반니 2세를 새 대공으로 선임했다. 조반니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산타 마리아 데 도미노를 설립해 살레르노 대교구의 관할에 넣었으며, 산 마시모 수도원의 재산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라도알드를 수도원장에 앉혔지만 성직자들의 반발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남부 이탈리아 각지를 습격한 사라센의 침략으로 파괴된 이르시나 수도원을 재건하기도 했다.

994년 조반니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과이마르 3세가 새 대공에 선임되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아마투스(Amatus)가 기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999년경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 노르망디 공국으로 귀환하던 40명의 노르만족이 살레르노에 잠시 들렀다. 이때 사라센 해적이 쳐들어오자, 그들은 두려워하는 살레르노인들을 독려하고 해적들을 몰아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과이마르 3세가 그들을 고용하려 하자, "우리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센이 도시를 짓밟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었을 뿐이다"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뒤 동포들을 초대해 대공을 섬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시기에 살레르노 공국과 노르만족간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 것만은 분명하다. 11~12세기 잉글랜드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역사가 오데리크 비탈리스(Orderic Vitalis)에 따르면, 과이마르 3세는 노르망디 공국에 사절을 보내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1009년, 바리랑고바르드계 귀족인 멜루스가 처남 다투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바리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아스콜리와 트로이아를 석권했다. 그러나 1010년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가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면서 1011년 6월 11일 바리를 상실하고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은거했다. 과이마르 3세는 반란 진압 후 살레르노에 찾아온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를 융숭하게 대접하며 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지만, 한편으로는 멜루스를 보호하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렸다.

멜루스는 과이마르 3세와 교황 베네딕토 8세의 지원에 힘입어 가릴리아노 요새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노르만 용병대장 라눌프 드렝고(Rainulf Drengot)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원하면서, 풍부한 전리품을 약속했다. 1017년, 라눌프와 노르만 용병대는 카푸아에서 멜루스 휘하의 랑고바르드군과 합세한 뒤 아풀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1018년 10월까지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며 동로마 제국을 남이탈리아에서 축출하는 듯했다.

그러던 1018년 10월,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바랑인 친위대와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은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군대를 일으켜 그 옛날의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투와 같은 장소의 칸나이에서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동로마군의 압승이었고, 멜루스는 아내와 아들 아르이로스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병력, 세력 기반을 모조리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과이마르 3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동로마 제국에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102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 대공이자 과이마르 3세의 처남인 판둘프 4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베네벤토로 진군해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5세를 굴복시키자, 과이마르 3세는 즉시 제국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공물을 바쳤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한 뒤 새 황제 콘라트 2세가 각지에 반란에 시달리면서 남이탈리아에 간섭할 여력이 없자, 제국에 사절을 보내 처남을 석방시켜달라고 간청해 허락을 얻어낸 뒤 카푸아로 돌아온 판둘프 4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거부했다.

1027년 과이마르 3세가 사망한 후, 아들 과이마르 4세가 대공에 선임되었다. 1037년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의 가신이었던 노르만 용병대장 라눌프 드렝고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03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남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고자 남하하자, 즉시 동로마 제국과 맺었던 종주관계를 청산하고 황제 편에 섰다. 콘라트 2세는 카푸아를 공략하고 판둘프 4세를 내쫓은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과이마르 4세에게 카푸아를 넘기기로 했다. 그 후 과이마르 4세는 란둘프 드렝고를 아베르사 백작으로 선임해 정식으로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그 후 과이마르 4세는 남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노르만 용병들을 대거 고용해 장차 남이탈리아를 재패할 발판으로 삼았다. 1038년 8월 15일 로카 반드라를 공략한 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양도했으며, 란눌프를 산그로강 계곡으로 보내 그 일대를 통제하게 했다. 1039년 4월 아말피 공화국의 공작 만소 2세가 실명형에 처해진 후 추방되자, 그를 구원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말피로 진격해 만소 2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조반니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추방한 후 스스로 아말피 공작을 겸임했다. 그 해 7월에는 소렌토를 공략하고 동생 귀도를 그곳의 공작으로 세웠으며, 나폴리 공작 조반니 5세를 가신으로 삼았다.

과이마르 4세는 북쪽 방면으로도 세력을 넓혔다. 1039년 5월 코미노, 아퀴노, 트라에토를 제패했고, 1040년 6월에 폰테코르보, 소라, 가에타를 공략했으며, 그 해 10월에 베나프로를 공략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아풀리아에서 발발한 노르만 용병대의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틈을 타 1041년 동로마 제국의 가신이었던 나폴리 공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렇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라눌프 드렝고의 활약이 컸기에, 과이마르 4세는 1042년에 란눌프를 가에타 공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1042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고 이탈리아에 돌아온 판둘프 4세가 일부 영토를 회복하면서, 그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1042년 노르만인들에 의해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에 추대된 강철팔 기욤(William Iron arm)은 1043년 과이마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작위를 인정받았다. 1044년 기욤과 함께 칼라브리아 일대를 평정했으며, 스퀼라체에 큰 성을 지었다. 1045년 가에타 공작이자 아베르사 백작을 맡던 란둘프 드렝고가 사망하자, 란눌프의 조카인 아스클레틴이 과이마르 3세의 동의를 얻고 아베르사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가에타 시민들은 과이마르 3세의 동의 없이 아퀴노의 랑고바르드 백작 아테눌프 1세를 공작으로 추대했다. 과이마르 4세는 이를 괘씸하게 여겨 아스클레틴을 대신하여 가에타를 공격해 전투에서 아테눌프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았다. 이후 판둘프 4세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받는 대가로 아테눌프 1세가 가에타 공작에 맡는 것을 용인했다.

1045년 말 아스클레틴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노르만인들은 아스클레틴의 사촌 란눌프 2세 트린카노테(Rainulf Trincanocte)를 아베르사의 새 백작으로 추대했다. 과이마르 4세는 자신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결정한 것에 책임을 물었지만, 아베르사의 노르만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는 판둘프 4세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분개한 과이마르 4세는 아베르사로 진격해 란눌프 2세를 사로잡았지만, 기욤의 형제 드로고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를 풀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아베르사 백작을 계속 맡게 했다. 1046년 강철팔 기욤이 사망하자, 과이마르 4세는 드로고가 아풀리아 및 칼라브리아 백작을 맡는 것을 인정하고 여동생 가이텔그리마를 드로고와 결혼시켰다.

10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남이탈리아에 제국군을 이끌고 와서 공작들로부터 주종관계를 다시 맺었다. 그는 카푸아를 판둘프 4세에게 반환하고 아베르사와 아말피를 자신의 종주권으로 삼았으며,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 대해 과이마르 2세가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하고 그곳을 지배하는 노르만족을 자신의 직속 가신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1038년부터 1047년까지 10년 가까이 추진했던 남이탈리아 통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반감을 품은 과이마르 4세는 황제의 공격을 받고 자신에게 망명한 베네벤토 공자 다우페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후 황제가 돌아가자 1048년 카푸아를 탈환하기 위해 판둘프 4세와 전쟁을 재개했다.

1048년 아베르사 백작 란눌프 2세가 사망하고 갓난아들 헤르만이 백작위에 올랐다. 당시 헤르만의 사촌이었던 리샤르 드랭고는 드로고에게 반역을 꾀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과이마르 4세를 그를 석방시키게 한 뒤 아베르사로 데려와서 섭정으로 삼게 했다. 2년 후 리샤르 드렝고가 헤르만을 축출하고 아베르사 백작에 올랐을 때 이를 인정했다. 이리하여 아베르사는 과이마르 4세 편으로 돌아섰다.

1051년, 교황 레오 9세는 남이탈리아에 찾아와 과이마르 4세와 드로고를 면담했다. 교황은 노르만족이 많은 교회를 약탈하고 많은 수도자를 살해하고 수녀를 강간하는 등 현지 이탈리아인들을 심하게 핍박하는 상황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교황이 사절을 보내는 대신 직접 찾아온 것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교황의 부탁을 받자마자 다시는 교회에 손을 대지 않겠으며 동족들이 주민들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그 해 8월, 드로고는 교황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보비노 인근 몬테이라로(Monteilaro)에서 암살당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주민들이 드로고를 암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풀리아를 회복하려는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아르이로스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드로고 사후 아풀리아 백작에 선임된 옹프루아는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형이 살해된 몬테이라로를 공략한 뒤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노르만족은 옹프루아의 지휘하에 주변 일대를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약탈했다. 이에 레오 9세는 노르만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고자 독일과 이탈리아 제후 및 기사들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노르만인들이 남이탈리아를 제패하려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재원이라 여겼던 과이마르 4세는 교황청과 노르만인들간의 분쟁을 중재하고자 했다.

그러던 1052년 6월 초[1], 과이마르는 아말피 해안가를 걷고 있던 중 아내 게마의 형제 아테눌프와 란둘프를 비롯한 4명의 암살자에게 공격받고 36번이나 칼에 찔러 죽었다. 이때 과이마르 4세의 형제 판둘프도 피살되었고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 등 가족들은 투옥되었지만, 동생 귀도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과이마르 4세를 살해한 처남 아테눌프와 란둘프는 테라노 백작 판둘프 6세의 아들이며 자신들과 함께 과이마르 4세를 처단한 판둘프 3세를 새 대공으로 옹립했다.

귀도는 아베르사로 피신해 노르만인들에게 과이마르 4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알렸고, 노르만인들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살레르노로 진격했다. 암살자들은 순식간에 제압되었고, 감옥에 갇혀있던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구출되었다. 귀도는 암살자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살려주려 했지만, 노르만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이마르 4세의 몸에서 발견된 자상의 수에 근거해 판둘프 3세 등 암살자 4명을 36차례 찔러 죽였다. 이후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기술프 2세로서 살레르노 대공으로 선임되었다.

기술프 2세는 노르만인들이 지역민들을 핍박하고 교회 재산에 손을 대는 것에 반감을 품었기에, 아버지와는 달리 노르만족을 적대했다. 살레르노 공국을 섬기던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대공에 반감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칼라브리아의 산 마르코 성에 자리를 잡은 로베르 기스카르는 살레르노 공국에 속한 여러 마을을 공략했고, 아베르사 백작 리샤르 1세도 독립했다. 그는 이에 맞서고자 아말피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 후 로베르 기스카르의 이복 형제인 기욤이 소렌토 공작 귀도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고 살레르노 공국에 있는 귀도의 모든 영지를 물려받은 뒤 기술프 2세를 적대했다. 이에 기술프 2세는 기욤과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접근해 1058년 자신의 딸 시켈가이타를 로베르 기스카르와 결혼시켰다.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가 전쟁을 통해 세력을 급격하게 팽창하자, 기술프 2세는 위협을 느끼고 1071년경 카푸아 대공 리샤르와 함께 아풀리아에서 로베르 기스카의 조카들인 오트빌의 아벨라르, 오트빌의 헤르만, 그리고 몇몇 소영주들의 반란을 지원했다. 또한 아말피와 피사를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여 군자금 확보에 진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분노와 노르만족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아말피와 피사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악수였고, 살레르노 공국은 이로 인해 고립되었다.

1076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는 군대를 일으켜 살레르노를 포위 공격했다. 기술프 2세는 수 개월간 항전했지만 12월 13일 시민들이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자 요새로 후퇴해 1077년 5월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면서 성이 함락되었고, 살레르노 전역이 노르만인들에게 심하게 약탈당했다. 기술프 2세는 카푸아로 도주한 뒤 그들이 로베르 기스카르를 적대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곳에서 곧 쫓겨난 두 로마로 피신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살레르노의 참상을 알리며 노르만인들을 파문에 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분쟁에서 승리하려면 노르만인들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요청을 묵살했다.

1088년 3월 노르만족의 침략에 직면한 아말피 공화국은 기술프 2세를 공작으로 추대해 맞섰지만 1089년 4월 20일 항복했다. 그 후 여동생 가이텔그리마가 안착한 사르노 성채에서 여생을 보내던 기술프 2세는 1090년 또는 1091년에 사르노에서 사망해 그곳에 안장되었다. 이리하여 살레르노 공국의 명맥은 끊어졌고, 살레르노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후계자들이 대대로 맡은 아풀리아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3. 역대 공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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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네벤토 연대기에는 6월 2일, 아마투스 연대기는 6월 3일, 몬테카시노 연대기는 6월 4일로 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