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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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性出
1924년 10월 4일[1] ~ 1989년 12월 4일 (향년 65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이다. 본관은 온양(溫陽)[2].

2. 생애[편집]


1924년 10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에서 아버지 방도세(方道世, 1886. 2. 7 ~ 1937. 1. 30)와 어머니 선산 김씨 김순리(金順里, 1895. 1. 9 ~ ?)[3]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마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8기)와 단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4],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경리실장, 재무관을 지냈다. 1963년 2월 1일 준장으로 예편한 뒤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해 11월 26일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함안군-의령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민주공화당에서 경남 제7지구당위원장과 중앙상임위원을 지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공천받았으나, 그해 3월 3일 중학교 동창이던 영화감독 백서운(白序雲)에게 사기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그 이유는 백서운이 지난 1964년 10월 경찰공무원을 주제로 한 영화 '버림받은 유산'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자금 부족으로 촬영이 중단되자 방성출이 백서운에 접근해 내무부의 보조금을 타게 해주겠다고 한 뒤 백서운으로부터 접대비 명목으로 10만원을 받아 이후 착복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천은 취소되었고 검사 출신인 김창욱이 대신 공천을 받아 그해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또한 8월 23일에는 나용균·강선규·조남철·김익기·김두한 등 전직 국회의원들과 함께 가불금(假拂金) 반환 청구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후 돈화문 앞 6.3회관에 나가서 바둑을 즐기기도 했으며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의 중앙상임위원에 다시 선출되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시도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사단법인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내다가 1982년 5월 지병으로 사임했다. 1983년 5월에는 공산권문제연구소 상임고문에 위촉되었다.

1989년 12월 4일 새벽 1시 50분에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 국군수도병원에서 고혈압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89년 12월 6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함안군-의령군)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26,585표 (33.34%)
당선 (1위)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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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양방씨대동보 권11 599쪽에는 1923년 7월 7일생으로 등재돼 있다.[2]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33세 성(性) 항렬.[3] 김우용(金禹鎔)의 딸이다.[4] 군번 13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