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메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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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메시에
Charles Messier
파일:473px-Charles_Messier.jpg
출생1730년 6월 26일
프랑스 왕국 바동빌레
사망1817년 4월 12일 (향년 86세)
부르봉 왕정복고 파리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svg

직업천문학
수상레지옹 도뇌르 훈장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천문학자로서의 발자취
2.2.1. 프랑스 해군에서 근무하게 되다
2.2.2. 혜성 사냥꾼 시절의 기록과 그 외
2.3. 말년
3.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static.panoramio.com/4452734.jpg
그의 가장 큰 업적인 메시에 천체 목록

프랑스천문학자. 천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천체관측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게 되는데, 유명한 밤하늘에 성단성운, 은하 등의 심원천체(Deep sky object)의 목록인 메시에 천체 목록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730년 프랑스 로렌 지방의 바동빌레(Badonviller)[1]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 메시에(Nicolas Messier, 1682-1741)와 어머니 프랑수아 그랑블레즈(Francoise b. Grandblaise, ?~1765) 사이에서 12남매 중 10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니콜라 메시에가 법원에서 일하는 데다 지역의 영주 살름 공작의 관리자였던 덕에 집안은 부유했으나 12남매 중 6남매가 어려서 죽는 등 다사다난하였고, 1741년 메시에가 11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니콜라 메시에도 사망했다. 그리하여 당시 24세였던 맏형 히아신스 메시에가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히아신스는 낭시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물려받기 위해 1740년에 바동빌레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샤를 메시에는 집의 창문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고, 형 히아신스가 8년간 집에서 여러 교육을 시켰다. 형에게 여러 교육을 받는 동안 샤를 메시에는 정확한 관찰에 대한 감각과 그 이후의 경력에서 중요시되는 세밀한 부분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샤를 메시에는 어려서부터 밤하늘에 별과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등 흥미를 느꼈다. 그가 14살 때 꼬리가 6개 달린 혜성을 관측하고 1748년 7월 25일에 고향에서 일어난 일식을 보며 천문학에 호기심을 품었던 것 같다.


2.2. 천문학자로서의 발자취[편집]



2.2.1. 프랑스 해군에서 근무하게 되다[편집]


1751년 프랑스가 재편되면서 살름 공작은 바동빌레에서 철수했는데, 히아신스 메시에는 살름 공작을 따라 바동빌레를 떠났다. 이때 샤를 메시에는 21세로 막 직업을 찾던 중이었고, 친구 Abbé Thélosen과 그의 가족 덕분에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큐레이터가 되는 것, 나머지 하나는 천문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샤를 메시에는 1751년 9월 23일 바동빌레를 떠나 10월 2일 파리에 도착했다. 손글씨가 좋은 덕에 그는 프랑스 해군 소속의 천문학자인 조제프 니콜라 드릴에게 고용되어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첫 일감은 중국 지도를 복사하는 일이었는데 지도가 매우 크다 보니 왕립 대학의 긴 복도에서 주로 작업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프랑스 해군 천문대(Hôtel de Cluny observatory)를 소개받고 그곳에서 일하며 관측자료를 기록하는 일을 맡아서 하였다. 이 천문대에서 메시에가 관측에 사용하던 망원경은 4'' 굴절망원경이었다.


2.2.2. 혜성 사냥꾼 시절의 기록과 그 외[편집]


샤를 메시에가 최초로 문서화한 관측은 1752년 5월 6일 일어난 수성의 태양면 통과현상이였다. 그 후 여러 관측을 하며 기록을 남기던 그는 1757년 핼리혜성을 찾기 시작했다. 1757년 그는 안드로메다은하와 위성은하이자 훗날 M32라고 불릴 은하를 관측했다. 1758년 돌아오리라고 예측된 핼리혜성을 찾기 위해 데슬리는 핼리 혜성의 예상경로를 계산했고, 메시에는 그 계산을 바탕으로 차트를 만들고 관측했다. 다만 데슬리의 계산에 오류가 있어서 메시에는 엉뚱한 하늘을 지켜보았다.

핼리혜성은 마침내 1758년 크리스마스 밤에 독일의 아마추어 천문학자 요한 게오르그 팔리치(1723-1788)가 발견하였다. 샤를 메시에도 4주 뒤, 데슬리의 계산을 미심쩍어 하던 때인 1759년 1월 21에 독자적으로 발견했다. 하지만 데슬리는 이런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의 발견을 발표하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1759년 4월 1일, 데슬리에게 충성서약 비슷한 걸 한 뒤에야 겨우 발표를 할 수 있었는데 프랑스의 천문학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후로도 데슬리는 샤를 메시에의 혜성 발견 발표를 종종 막아섰다.

1761년 6월 6일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 후 기록했으며 토성 고리의 외관을 기록하였다.

1762년 5월과 6월 사이 혜성 C/1762 K1 (Klinkenberg) 관측을 시작으로 1763년 9월 28일 혜성 C/1763 S1 (Messier) 발견, 1764년 1월 3일 혜성 C/1764 A1 (Messier)을 발견하는 등 혜성 사냥꾼답게 혜성을 많이 발견하고 관측하였다. 최후까지 그가 최초로 발견한 혜성은 총 13개다.

1764년에 그는 할렘 학회(Academy of Harlem, 네덜란드)와 런던 왕립 학회(Royal Society in London) 외국인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1765년에는 오 세르 학회(Academy of Auxerre)의 회원과 볼로냐 연구소(Institute of Bologne)의 구성원이 되었다.

1766년 3월 8일 그는 새로운 혜성을 발견하고 4월 8일에도 새 혜성을 발견하였다.

1767년에는 새로운 해상용 크로노미터(정확도가 높은 시계) 시험을 위해 J.르 로이가 구성힐 팀의 일원으로 해군 생활 중 유일하게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L'Aurore호에서 약 3개월 반 동안 승함하며 발트해를 탐험하며 천문관측과 크로노미터 시험과 필요한 계산을 하였다.

1769년에는 스웨덴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과 베를린 과학 학회 회원이 되었다. 1769년 8월 8일에 샤를 메시에는 그해에 가장 크고 밝은 혜성인 C/1769 P1 (Messier)를 발견하였고[2] 이 혜성에 대한 지도를 그려 왕에게 헌납하기도 했다.

1770년 6월 14일에는 혜성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가 발견한 혜성에는 전부 자신의 이름을 지었지만 이 혜성은 D/1770 L1 (Lexell)로 등록되었다. 그 이유는 이 혜성의 궤도를 핀란드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Anders Lexell이 계산해 주었고 1770년 이후에 관측되지 않아서 D/의 식별 알파벳이 붙었다.

1770년 6월 30일에는 마침내 모국 프랑스의 파리 과학 학회에 선출되는 등 계속해서 저변을 넓혀갔다. 또한 1770년 11월 26일 40세가 된 샤를 메시에는 37세 Marie-Françoise de Vermauchampt와 결혼하였다. 이 둘은 메시에가 프랑스 대학에 기거할 때부터 15년 동안 알던 사이였다.

1771년 1월 10일 메시에는 그해에 가장 밝고 큰 혜성을 공동으로 발견하였고, 2월 16일 샤를 메시에는 후대에 메시에 천체 목록이라 불리는 Catalog of Nebulae and Clusters of Stars의 첫 버전을 파리 과학 학회에서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가 파리 과학 협회에서 발표할 수많은 발표 중 처음으로 알려졌다. 4월 1일에는 혜성 C/1771 G1 (Messier)을 발견하였다. 그가 독자적으로 발견한 혜성 중 12번 째이자 최초로 발견한 7번째 혜성이다. 9월 30일 마침내 공식적으로 프랑스 해군의 천문학자가 되어 매달 급여 1700프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774년에 2천 프랑으로 급여가 오른다.)

1771년 10월 31일 샤를 메시에와 그의 아내는 그동안 살던 프랑스 대학 내 데슬리의 아파트에서 프랑스 해군 천문대인 Hôtel de Clugny로 이사했다.

1772년 3월 15일 샤를 메시에는 두 아들 앙투안과 샤를을 얻었지만 두 아들과 아내가 모두 그 달에 숨졌다. 여담이지만 그는 아내의 죽음보다 그가 13번째로 발견할 뻔한 혜성을 놓친 것을 더 슬퍼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혜성에 미친 놈

그해 3월 26일에서 4월 3일까지 혜성을 관측하였다.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 동안 그는 로렌으로 휴가를 갔다. 그는 또한 브뤼셀 학회와 헝가리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73년 10월 13일 하나의 혜성을 발견하였다. 이 혜성은 4.5등급으로 맨눈으로도 충분히 보이던 혜성이라 카더라.

1774년 그는 혜성 C/1774 P1 (Montaigne)를 관측하였다. 그해에 그는 제롬 드 랄랑드(Jerôme de Lalande)에게 소개를 받아 프랑스의 천문학을 이끌던 피에르 메생을 소개받았고 그 후 자주 만났다.

1777년까지 샤를 메시에는 그 어떤 혜성과 성운, 성단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1월 9일에는 라 하프(La Harpe)의 추천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학회에 이름을 올렸다.

6월 17일에는 태양면을 통과하는 작은 천체 몇 개를 보고하며 수성 궤도 안쪽에 행성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다만 그는 이것이 '대기 현상'이거나 어쩌면 작은 운석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1779년 1월 6일 메시에는 한 혜성을 찾았다가 놓쳤다. 그래서 요한 엘레르트 보데(Johann Elert Bode)와 공동으로 혜성을 찾던 중 열사흘이 지난 19일 재발견하였다. 이 혜성은 처녀자리처녀자리 은하단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이 덕에 다른 천문학자들과 5월 19일까지 쳐녀자리 은하단을 많이 관측하여 메시에 천체 6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샤를 메시에는 보데 혜성의 자취를 따라 별을 관측하던 중 소행성 2 팔라스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소행성 관측 사상 첫 번째로 알려진 기록이다. 이 사실은 벨기에의 천문학자이자 역사학자 René Bourtembourg가 2012년에 확인하여 알려졌다.

메시에 천체 목록 두 번째 판은 M68까지를 포함하여 1780년 프랑스 연감에 발표되었고, Connaissance des Temps 1783호에 발표되었다. 1780년에 스웨덴의 울살라 문학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1780년 8월 말부터 샤를 메시에는 피에르 메셍(Pierre Méchain)과 같이 더 많은 성단성운을 기록하기 위해 활발히 노력하였다 .1780년 말 샤를 메시에는 혜성 C/1780 U1 (Montaigne-Olbers)를 놓치고 난 직후인 10월 27일 새로운 혜성 C/1780 U2 (Messier)를 발견하였다.

1781년 3월 13일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이 누이인 캐롤라인 허셜과 공동으로 천왕성을 발견하자 4월 14일 그가 마지막으로 관측했던 구역에 대한 기록을 컴파일한 뒤 관측을 시작했다. 그 뒤 윌리엄 허셜에게 편지를 써 축하를 전했다. 이 관측기록을 프랑스 파리 고등법원의 재판장이자[3] 천문학자, 수학자였던 드 사론(Jean Baptiste Gaspard Bochart de Saron)이 받아 궤도 등을 계산했는데, 천왕성근일점 부근을 지나는 중이며 혜성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거기에 더해 천왕성토성 궤도 밖에서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천문학자들과 천왕성 관련 계산을 하면서 이즈음 발견한 메시에 천체들에 대해선 추가검사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같이 협업하던 피에르 메셍은 1781년 6월 28일과 10월 9일 각각 혜성을 하나씩 발견하였다.

1781년 11월 6일 메시에는 25피트 정도 높이의 얼음 저장고에 빠져 심한 부상을 당해서 같은 달 9일까지 제대로 서지 못할 정도였다.

부상에서 회복되고 사흘이 지난 후인 12일, 메시에는 수성의 태양면통과를 관측했다. 그 후 계속 혜성 관측을 위해 부지런히 관측활동을 계속 했지만 더 이상 메시에 천체 목록을 위한 성운, 성단 관측에 대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윌리엄 허셜이 메시에가 하던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데다 그가 이 활동에 관심을 잃은 것일수도 있다. 다만 개인 기록지에 있는 프레세페 성단플레이아데스 성단, 안드로메다 은하와 그 동반자들에 대한 스케치를 그리기도 하고 위치 수정을 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1785년 이후로 많이 나타난 혜성들을 관측하였다. 1785년 1월 7일 6.5등급의 혜성 Messier-Méchain을 발견했다. 동업자 메셍은 1785년 3월 11일 다른 혜성을 발견했고, 1786년 1월 17일 엥케 혜성을 관측하였다.

1798년 4월 12일 메시에는 또 다른 혜성을 발견한다.

1801년 3월 30일부터 5월 24일까지 71세가 된 샤를 메시에는 처녀자리 알파(α)인 스피카에 의해 가려지는 엄폐 현상 관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7월 12일에는 공동으로 혜성 폰즈(comet Pons)를 발견했는데 이것이 메시에의 혜성 사냥꾼 시절 마지막 사냥감이 되었다. 또 당시 행성[4]이던 세레스팔라스를 처음 관측하였다.

메시에의 마지막 혜성 관측은 1807년이다. 이때 나이 77세.


2.2.3. 메시에 천체 목록 작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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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메시에가 1774년에 스케치한 M42 오리온 성운

1758년 8월 14일 핼리혜성을 찾다가 다른 혜성을 관측하는 데 성공하였고 11월 2일까지 그 혜성을 추적하며 관측했다. (이 혜성은 C/1758 K1 De La Nux 혜성이며 De La Nux가 1758년 5월 26일에 먼저 발견하였다.) 이 혜성을 관측하던 1758년 8월 28일 샤를 메시에는 황소자리에서 혜성과 같은 물체를 관측하게 된다. 다만 이 물체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기에 혜성이 아닌 것이라 판단하였다. 1758년 9월 12일, 샤를 메시에는 혜성과 닮은 천체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여 기록하였는데 이 천체가 바로 메시에 천체 목록의 첫 번째 천체인 M1 게 성운[5]이다.

1760년 9월 11일 이전에 장-도미닉 마랄디가 발견했던 M2를 독자적으로 재발견한 후 이를 차트에 기록하였다.

이후 1764년 혜성을 찾는 중 M3을 최초로 발견하면서 그는 혜성과 혼동할 만한 천체들을 찾아 기록하는 것을 혜성 관측과 같이 하기로 한다. 이것은 자신보다 한 세대 앞 천문학자인 르 장티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기존에 이미 알려져 있던 천체를 찾아 기록하는 것부터 새로운 천체를 찾아내는 것까지 가리기 위해 좀 더 꼼꼼히 밤하늘 구석구석을 찾기 시작했다.

샤를 메시에가 메시에 천체 목록을 작성하면서 기존의 자료를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 목록을 살펴보자면

과 같다.

그는 1764년 한 해 동안 M3을 찾아 기록하는 것을 시작하여 M40까지 찾아서 위치와 생김새를 기록하였다.

1765년 초에는 산개성단 M41을 발견했다. 이 해에 데슬리는 은퇴하였고, 샤를 메시에는 그의 업무까지 맡아 호텔 드 클루니 천문대(Hôtel de Cluny observatory)에서 계속 관측을 이어갔다.

1769년 3월 4일 기존의 M41까지의 관측 자료와 추가로 관측한 M42부터 M45까지의 천체를 추가한 첫 번째 버전의 메시에 천체 목록을 완성하였다.

1771년 2월 16일 샤를 메시에는 후대에 메시에 천체 목록이라 불리는 Catalog of Nebulae and Clusters of Stars의 첫 버전을 파리 과학 학회에서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가 파리 과학 협회에서 발표할 수많은 발표 중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발표 3일 후 그는 M46부터 M49까지 4개의 천체를 더 발견하여 관측하였다. 그러나 이 중 M47M48은 메시에의 기록 중 부호를 잘못 적는 실수 때문에 약 200년간 실종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다 1959년 T.F.모리스가 오류를 정정하여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M49는 최초로 발견된 처녀자리 은하단에 속한 은하다. 다만 이때에는 은하라는 개념이 없던 때라 단순히 별이 없는 성운 정도로 생각했다.

1771년 6월 7일에는 M62를 발견하지만 대략적인 위치만 측정하고 넘어갔다가 1779년에 다시 관측하였다.

1772년 4월 5일 M50을 발견하여 위치 및 생김새를 기록하였다.

1773년 8월 10일 그는 안드로메다 성운동반자M110을 발견하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메시에 천체 목록에는 추가하지 않았다.

1774년 그는 M51M52를 발견하였다.

1777년까지 샤를 메시에는 그 어떤 혜성과 성운, 성단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1777년 샤를 메시에는 2년 전 요한 엘레르트 보데(Johann Elert Bode)가 발견한 M53을 관측하고 목록에 작성하였다.

1778년 그는 1764년에 과거 라카유(Lacaille)가 찾았다고 보고했던 성운들을 찾았지만 실패했던 M54M55를 찾는 데 성공하였다.

1779년 1월 19일 보데와 공동으로 혜성을 찾은 이후 5월 19일 까지 처녀자리부근의 처녀자리 은하단을 살피며 M56부터 M61까지 6개의 천체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M61은 1779년 5월 5일 Oriani라는 천문학자가 처음 발견하였고 메시에도 같은 날 찾았지만 그는 M61을 혜성으로 착각하였다가 5월 11일 혜성이 아님을 알아내었다.

1779년 1771년에 놓친 M62를 다시 관측하여 목록에 기록한다. 6월 14일 피에르 프랑수아 앙드레 메샹(Pierre François André Méchain)이 처음 발견한 M63을 혜성을 찾기 위해 하늘을 훝던 중 비슷한 시간에 발견했다.

1780년 1월 에드워드 피곳(Edward Pigott)과 요하네스 엘레르트 보데(Johann Elert Bode)가 1779년에 찾은 M64를 독자적으로 발견하였다. 또한 M65M66도 이 해에 발견한다. 1773년 한 혜성이 M65M66 사이로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을 메시에는 관측했지만 이때에는 이 두 천체를 알아채지 못한 듯하다. 4월에는 메시에 67M68을 발견하여 목록에 기재하였고 이로써 메시에 천체 목록의 두 번째 판 관측이 완료되었다.

두 번째 버전의 메시에 천체 목록은 M68까지의 천체를 포함하여 1780년 프랑스 연감에 발표되었고, 부록으로 M69M70을 추가하여 같은 해에 Connaissance des Temps 1783호에 발표되었다.

1780년 8월 말부터 샤를 메시에는 피에르 메셍(Pierre Méchain)과 같이 더 많은 성단성운을 기록하기 위해 활발히 노력하였다. 이때 M69M70을 발견하였다. 1780년 말에 샤를 메시에는 M79를 발견해 기록하였다.

1781년 4월까지 메시에 천체 목록M100까지 100개로 늘어났다.

1781년 3월, 피에르 메셍이 발견한 M105를 찾다가 간과하여 놓친 뒤 최종 메시에 천체 목록에서 누락되기에 이른다.

1781년 메시에 천체 목록의 최종 버전이 Connoissance des Temps 1784호에 실려지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발표된 천체의 수는 103개인데 원래는 100개를 발표하려다 피에르 메셍에 의해 관측된 M101~M103을 추가로 검증하지 않고 올려 최종적으로 103개가 되었다. 이는 1781년 3월 13일 윌리엄 허셜천왕성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새로이 관측하며 검증 및 계산을 하느라 새로운 메시에 천체에 대한 추가 검사가 소홀해졌기 때문이다.

1781년판이 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781년 5월 11일 샤를 메시에는 M104를 발견한 후 M102M103의 위치기록까지 개인기록지에 옮겨둔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기록한 된 천체들은 M97M108, M109가 더 있다.

1782년 4월 피에르 메셍이 마지막으로 M107[6]을 발견하였다.

이후 메시에 천체목록 103개는 후대의 천문학자들이 메시에의 개인 기록 등을 찾아 연구하며 오류를 정정하고, 관측과 기록은 했지만 추가 검수를 하지 않아 누락되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빠진 천체 7개를 포함하여 1966년 최종적으로 110개가 되었다.

2.3. 말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Tomb_of_Messier_in_Pere_Lachaise%2C_Sept_2011.jpg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샤를 메시에의 무덤

1815년 샤를 메시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왼쪽 반신이 마비되었다. 부분적으로 회복되어 학회 한 두 곳에 참석하기도 하였으나 일상생활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1817년 4월 12일 새벽,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만 86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4월 14일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 11구역에 묻혔다.


3. 기타[편집]


에는 샤를 메시에의 이름을 딴 분화구가 풍요의 바다에 있다.

1996년 1월 16일에 클렛 천문대에서 찾은 소행성 7359의 이름 또한 '메시에'이다.

메시에 천체 목록에 수록된 천체들은 대체로 정확하지만 메시에도 사람인지라 오류가 존재했다. 유명한 사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사실 차트에 정확히 기재되었는데 이후의 사람들이 찾질 못해서 오류인 줄 알 았다(…). 혜성과 혼동될 만한 성운성단의 기록을 남겼는데 뜬금없이 이중성이 나온데다가 1764년 자료에서 nébuleuse성운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사람들이 M40을 찾고도 모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1863년에 재발견됐을 때에도 M40인 줄 몰랐고, 1966년에야 그때 발견한 것이 메시에가 묘사한 M40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존재가 확인됐다.

메시에가 좌표를 계산하다가 부호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단체로 빅엿을 먹었다. 메시에가 잘못했네 이후 다른 사람들이 목록을 작성하고, 심지어 NGC 번호를 부여할 때도 그 위치에 없는 별인데도 번호를 붙였을 정도. 1959년에 T.F. 모리스가 계산오류임을 입증하고 마찬가지로 혼돈의 카오스였던 M48까지 구분해내면서 그 존재가 확인됐다.

아마도 천구를 나타내는 격자가 잘못 그려져 생긴 오류라고 추정한다. 이 때문에 1934년 오스왈드 토머스가 발견은 했는데 M47로 오인했고, T.F. 모리스가 1959년 M47과 함께 이를 정확히 구분하여 존재가 확인됐다.

M58과 M89를 착각하는 바람에 위치를 잘못 기록하여 한동안 이거 뭥미 상태였다. 한동안 뜬구름 잡는 추측들이 나오다가 1969년에야 간신히 오류를 설명할 수 있을 법한 위치에서 가장 근접한 천체가 확인되어 사실상 공인됐다.

큰곰자리 나선은하 M101을 중복관측한 것이라거나 용자리의 은하 NGC 5866을 말하는 것이란 추측도 있다. 그 외에 후보가 되는 천체가 많은데 대부분 그럴 수도 있을 법한 이유가 있어 영구미제로 남았다.


4. 메시에 천체 목록[편집]





[1] 혹은 읽는 방법에 따라 바동비예라고 하기도 한다.[2] 최대 꼬리 겉보기 크기가 약 100도였으며, 최대 밝기는 약 0등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파를망 중에서도 특히 파리의 파를망(고등법원)은 앙시앵 레짐 시대 최고의 사법기관의 위치에 있었다. 이 탓에 드 사론은 1794년 4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대에 결국 처형당했다.[4] 현재는 소행성이지만 이 때는 그런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행성으로 분류했다.[5] 초신성 SN1054가 폭발한 뒤 남은 초신성 잔해[6] 왜 M110이 마지막이 아니라 M107이 마지막이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원래 메시에 천체 목록은 103번까지 수록되었다. 천체 7개를 더 발견하긴 했지만 자료 발표 시에 제대로 검증이 안된 천체들을 빼고 103개의 천체만 발표하였고, 훗날 천문학자들이 메시에의 자료를 검증해서 7개를 더 추가하였다. M107은 마지막에 발견되었지만 운좋게(?) 107번이 되었고, 한참 전에 발견된 M110은 1960년대에 추가되어 꼴지의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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