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환/지도자 경력

덤프버전 :

1. 개요
2. 코치 1기
4. 코치 2기
6. 평가
6.1.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
6.2.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7. 감독 전적


1. 개요[편집]


서정환의 지도자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코치 1기[편집]


1989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뒤 곧바로 해태 타이거즈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이후 1994년까지 해태에서 코치로 재직했고, 주로 작전, 주루, 수비코치 등 다양한 보직을 맡다가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년간 코치 연수를 받았다. 귀국한 후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의 수비코치로 영입되었다. 연수를 마치고 해태 복귀가 아닌 삼성 코치로 부임하게 되자 당시 해태에서 허락없이 빼갔다고 항의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던 코치였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 사람이 해태 시절에 후배였던 이순철. 참고로 이순철이 코치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을 때가 삼성 감독으로 서정환이 재임하던 시기였다.[1] 삼성에서도 2년간 수비코치를 맡으면서 백인천 감독 체제에서 새로운 내야 체제인 이승엽-정경배-김태균-김한수를 구축하는데 이바지했고,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최익성을 홀대했고, 결국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의 시작이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해태 코치 시절 롯데 자이언츠와의 원정 경기에서 김응용 감독이 히트 앤드 런 작전을 걸었으나 이건열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경기에서 패했고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지리산 근방에서 차를 세워 서정환 코치와 이건열을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서정환 코치는 '제가 선수에게 사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이건열을 감싸자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김응용 감독은 코치들에게 모든 걸 맡기는 타입이고 저런 사소한 것까지 되짚고 넘어가려고 하는 걸 보니 괜히 우승을 9번이나 하는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또한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게 1승 2패로 수세에 몰리게 되자 김응용 감독이 코칭스태프 회의를 소집해서 '야 이거 어떡하냐' 말을 하자 '놔두세요. 제가 작전 내고 할께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야 내가 언제 작전 내지 말라고 했냐! 서 코치가 알아서 해'하고 서정환 코치에게 일임하자 이종범에게 그린라이트를 부여했고[2] 이종범은 그 뒤로 혼자 날라다니면서 활약해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3. 삼성 라이온즈 감독[편집]


파일:external/89d39698cc6ae933929ada5221c15084b11986505226810d089c07cd0c42071f.jpg

삼성 라이온즈 No.72
서정환(徐定煥)

이후 1998년, 44세의 젊은 나이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지난 시즌 감독 대행으로써 팀을 수습하고 무난하게 이끌었던 조창수 대행이 백인천의 자리를 메꾸며 괜찮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굳이 그를 정식 감독으로 승격시키지 않고 서정환 코치를 감독 자리에 앉힌 것은 당시 삼성의 우승을 향한 갈망 때문이었다. 매번 KBO 한국시리즈에서 물을 먹던 삼성으로서는 경북고 출신이라 연고 지역인 TK 출신이기도 했으며, 해태 타이거즈에서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을 많이 해 봤던 그를 통해 한국시리즈에서의 한을 풀고자 했던 것.[3] 참고로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중 최초로 삼성 선수 출신 감독이다.[4]

일단 부임 첫 해인 1998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 이은 정규리그 2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무난한 데뷔를 한다.[5] 단, 플레이오프에서는 3위였던 LG 트윈스에게 1승 3패로 업셋당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됐고, 최종 순위 3위로 마무리한다.

문제는 부임 2년차인 1999년. 애니콜 임창용을 미친듯이 부려먹으며[6] 삼성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임창용이 5차전과 7차전에서 혹사 후유증이 몰려오면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7] 결국 2000년에 김용희 수석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준 다음[8] 잔여 연봉을 챙겨주기 위해 사장 보좌 역으로 1년을 보내고 해임된다.

당시 막강한 타격에 비해 투수진이 시원찮았던 삼성은 이를 메우기 위해 간판 스타였던 양준혁을 현금 20억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에 내 주는 대신 임창용을 데려오고, 쌍방울 레이더스에 현금 20억을 내주고 김기태[9]김현욱[10], 두산 베어스에서는 김상진을, 한화 이글스에서 노장진까지 데려왔다. 여기에 1999 시즌 중에는 포수 보강을 위해 두산 베어스에서 진갑용을 트레이드하여 영입했다.[11] 한 마디로 우승 못 하면 모든 게 감독 탓이 될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정규시즌 성과[12]에도 중도 해임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적당한 감독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평가가 상당히 낮은 편이다. 20세기 삼성 라이온즈 감독 중 김성근 다음으로 평가가 낮으며, 역대를 통틀어서도 김한수, 허삼영, 김성근, 선동열 4대천왕 다음으로 평가가 낮다. 자세한 이유는 후술돼 있는 평가 문단 참조.


4. 코치 2기[편집]


KIA 타이거즈 No.89
서정환(徐定煥)
2001 시즌 다시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수비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가 2003년에 다시 2군 감독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6월 16일에 음주운전을 저질러 면허가 취소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이상윤 수석코치가 투수코치로 보직이 바뀌면서 수석코치가 되었으나 6월 21일에 다시 2군 감독으로 내려갔다. 이후 2004년 7월 26일부로 유남호 코치가 감독대행 → 감독으로 1년 동안 생활하다가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05년 7월 25일에 사임하자 당시 수비코치였던 서정환이 감독대행으로 2005 시즌을 소화하였다.


5. KIA 타이거즈 감독[편집]


파일:external/opds.joins.com/htm_200708162053130101000001010200-001.jpg

KIA 타이거즈 No.89
서정환(徐定煥)

2005 시즌이 끝나자마자 기아와 3년 6억의 계약을 맺고[13] 정식 감독이 되었다. 6년만에 다시 감독이 된 서정환은 조계현, 이케우치, 신동수 투수코치와 박철우 타격코치, 백인호, 김태룡 수비코치를 해임하고 김종모, 이건열 타격코치와 김태원, 이강철 투수코치, 김종윤, 차영화 수비코치, 정인교 배터리코치를 새로 영입하면서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다. 게다가 10억 유망주인 한기주의 입단 소식은 기아에게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물론 지금 서정환에 대한 평가는 가히 타이거즈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돌정환, 서토라레[14], 서백정이라 불리며 남에게 모두 읽히는 작전 구사능력의 소유자라 불리며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다. 그래도 2006년 기아가 4위를 기록하며 이듬해를 기대하게 했으나, 후술하겠지만 이는 투수진을 갈아넣어서 억지로 쥐어짜낸 성과였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그 여파를 맞고 투수진이 줄줄이 이탈했으며, 거기에 보너스로 서머리그[15] 우승 드립을 치면서[16] 무릎 부상 상태의 장성호까지 날려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정환이 혹사시킨 투수들이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감독으로써의 평가는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히게 되었다. 결국 2007 시즌을 한 경기 남기고 사퇴하는 걸로 기아에서의 감독 커리어가 끝났다. 말이 사퇴지 시즌이 마무리된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마침 말이 정규시즌이지 정규시즌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경기가 한 경기 남아있으니 욕 덜 먹을 겸 알아서 나간 것. 남은 한 경기조범현이 정식 감독으로 부임해서 마무리했다.[17]
파일:2kkmZ9q.gif

이 짤방과 관련된 기사

비슷한 시기에 막장테크를 탄 이순철, 강병철 감독과 셋이서 싸잡아서 까였으며, 공교롭게도 이 세 팀이 바로 엘롯기다. 아무튼 이 세 분들이 얻어먹은 욕만 해도 불로불사가 가능할 정도니 말 다했다.[18] 그나마 강병철은 이전에 쌓아온 감독 커리어 자체가 다른 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인데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병철의 양아들로 대표되는 타자 유망주들이 대부분 포텐을 터뜨리며 안목은 있었다고 재평가라도 되었지, 서정환은 그럴만한 여지도 없다. 하지만 당시 서정환이 무능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패를 끊으면서 팬들에게 절하는 모습을 회상하면서 조범현 감독 지휘하에 16연패를 당했던 KIA 타이거즈의 팬들로부터 조금이나마 재조명을 받았다.[19] 나중에는 07시즌 부진했던 이종범을 신인 육성이란 명목하에 케어하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20]


6. 평가[편집]


선동열과 함께 해태 출신 선수에 삼성, KIA의 감독을 맡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최악인 것도 데칼코마니이다.[21]

가장 큰 문제점은 투수 혹사인데, 김경문, 김성근, 김기태 못지않게 혹사를 해서 투수들을 망친 전적이 많다. 삼성 시절에는 '애니콜' 소리까지 듣던 임창용이 대표적이며, 기아에서는 한기주2달간 약 60이닝[22]이라는 기록적 혹사를 당했고, 그 외에도 신용운 등 여러 선수들이 서정환 감독 밑에서 혹사당하다 아작났다. 혹사 강도만 따지면 2015년 시즌의 김성근 감독과 비슷하다. 그나마 이쪽은 망가뜨린 선수가 김성근 감독보다 적은 편이기에 망정이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단기전인 KBO 포스트시즌의 성적도 김응용 감독의 수제자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좋지 못했다. 두 팀에서 총 세 차례[23] 나갔는데 모두 패했으며, 특히나 1999년 플레이오프는 다 이긴 시리즈를 투수 운용 미숙으로 놓치며 스스로 단명을 자초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감독으로서는 호평보다는 혹평이 우세한 인물이었다.

6.1.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편집]


요약하자면 최강의 리드오프가 될 수 있던 타자를 내쳤고 당시 리그 최고의 마무리무너질 때까지 신나게 굴렸다.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시절에는 성적은 괜찮았고[24] 흥행도 준수했지만 팬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다. 1997년 삼성 타선의 한 축이자 20-20까지 했던 최익성저니맨으로 만들어놓고[25], 임창용을 무지막지하게 부려먹은 결과 플레이오프 7차전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최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26][27] 우승에 대한 압박으로 선수층을 쥐어짜며 어떻게든 성적을 내려 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고, 팀만 어수선해졌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삼성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다만 삼성은 기반 자체가 탄탄했던 팀이었고 후임 김용희 감독이 뒷수습을 잘 해주었기 때문에 KIA와는 달리 선수 혹사로 인하여 암흑기로 굴러떨어지는 일은 없었다.[28]

의외로 이승엽과는 케미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2007년 KIA 감독 재임 당시 타격 폼이 엉망이던 김주형의 타격 폼 개선을 하고자 요미우리 소속이었던 이승엽을 추천했을 정도. 참고로 서정환과 이승엽은 고등학교 시절 직속 선후배 관계 이기도 하다.


6.2.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편집]


KIA 감독으로는 투수 혹사 이 하나만으로도 타이거즈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악명 높다. 2005 시즌 유남호가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에 경질이 되면서 감독 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치른 후, 정식 감독이 된 2006 시즌에 팀을 4강권으로 올려놓았지만, 그 이면에는 최악의 투수 혹사가 있었다. 신용운한기주는 이른바 신한카드 카드깡이라고 불리며 엄청나게 갈렸는데, 신용운은 토미 존 수술을 받은 선수가 1년도 안 쉬고는 8월 말에 복귀하더니 한 달 조금 넘는 기간에 18경기 37.2이닝으로 무지막지하게 혹사당했고, 한기주는 선발로 시즌을 시작했다가 적응을 영 못하자 불펜으로 전환했는데, 불펜 전환 후 호투를 이어가자 서정환은 이 선수를 두 달 남짓한 기간에 59.2이닝을 던지게 했다. 특히나 신용운은 팔꿈치에 칼을 대고 꽤 일찍 복귀한 선수고, 한기주는 혹사가 만연한 고교야구를 이제 막 끝낸 고졸 신인이었다. 두 선수 모두 조심스럽게 관리하며 써도 모자랄 판에 몸 상태가 정상인 선수도 견디기 어려운 수준의 혹사를 감내한 것이다. 이러한 혹사는 비단 신한카드 듀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진우는 어깨부상이 있었음에도 선발로 100이닝 넘게 소화했고, 윤석민장문석이 부진하자 후반기부터 마무리를 보는 등 불펜 전천후로 뛰면서 순수 구원으로 63경기 94.2이닝을 소화했고, 그 장문석이 부진에 빠진 이유도 29경기 53.2이닝이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마무리를 전혀 관리하지 않고 멀티이닝으로 무작정 굴린 여파가 후반기에 터져서 부진하게 된 것이었다. 차정민정원은 투구 이닝이나 경기 대비 이닝은 좀 덜하지만 단기간에 등판이 집중되었고, 이상화전병두는 고정 보직을 받지 못하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굴렀다.

결국 이러한 혹사의 여파는 2007 시즌에 제대로 터졌다. 선발로 완전히 고정된 윤석민과 마무리로 고정된 한기주만이 좋은 모습을 이어갔을 뿐, 신용운은 구위가 급전직하했고 김진우, 이상화, 정원은 완전히 망가졌다. 차정민과 전병두는 1군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장문석은 혹사 여파에 노쇠화와 본인의 자기관리 실패가 겹치며 1군에서 사라졌다. 지난해 팀의 4강을 이끈 투수진이 처참히 박살났으니 팀 성적이 급격히 추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런 와중에도 혹사 기질은 여전해서 한기주는 70이닝을 소화했고, 부상으로 빠진 투수진을 메우기 위해 올린 양현종, 진민호, 김희걸, 이범석, 손영민 등은 멀티이닝 소화가 기본이었다.

이러한 혹사의 여파는 팀의 미래를 송두리째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10년이 넘은 시점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기에, 기아 감독으로서 서정환에 대한 평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좋게 언급할 수가 없다. 신용운의 경우, 전임인 김성한, 유남호 감독 시절부터 혹사를 당했지만,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서정환이었고, KBO 최고 유망주 중 한명이었던 한기주의 조기은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29] 그 외에 자주 언급은 되지 않지만 이상화, 정원 등을 갈아마셨고 KIA의 간판 타자이던 장성호의 내구성에 결정타를 먹인 사람도 이 사람이다.[30] 선천적으로 내구성에 문제가 있는 윤석민을 2006년에 불펜으로 갈아마신 것 역시 서정환이었다. 야만없이겠지만, KIA 타이거즈에 최소한 신한카드 중 한 명만 남아있었고 장성호의 내구성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윤석민이 내구성이 양호했다면, 포스트시즌 단골손님으로 계속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정환이 저렇게 갈아넣은 투수들 가운데 신용운, 한기주같은 선수들이 혹사를 피하고 어느정도 건강을 유지했다면, 2010년대 KIA 타이거즈에 불펜진이 증발해버리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31][32] 또한 2007년 시즌 내내 모든 패배에 핑계를 대면서 도망다녔고, 언론에서 선수를 띄워줄때 항상 자신이 나서서 선수를 띄워주는 짓거리들을 해왔고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라인업들을 쓰고, 베테랑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다.

조범현 감독과 비교하자면, 조범현도 대구 출신에 해태 프랜차이즈가 아니었던데다가 2010년의 16연패와 2011년 후반기의 DTD로 많은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적어도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에 우승을 안겨주었고 무엇보다도 김선빈-안치홍으로 이어지는 젊은 키스톤 콤비와 윤석민, 양현종 등의 투수를 발굴하여 강팀의 기반을 닦아놓은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나마 비교하자면 선동열과의 유사성이 많은 편. 서정환과 선동열 모두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임에도 기대 이하의 모습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케이스. 차이점이라면 서정환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투수진을 갉아먹어서 미래를 망친 감독이라면, 선동열은 대졸 성애자답게 드래프트와 유망주 육성의 미비로 팀의 미래를 망쳤다는 것이 차이점.

KIA 감독 시절에 대해 총평을 하자면 그야말로 타이거즈라는 팀을 나락으로 빠뜨린 존재라고 볼수 있다. KIA는 2001년 현대기아차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이후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김성한 감독 하에서 꾸준히 플레이오프를 진출하는 등 성과를 냈고, 비록 유남호 감독 시기 부침은 있었지만 여전히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등과 경쟁하는 명가였다.[33] 그러나 서정환 감독이 2006년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팀의 를 다 갉아먹은 결과, 서정환 감독 이후 엘롯기로 한데 묶이는 약팀이 되었다. 투수진은 윤석민 외에 믿고 볼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했으며, 타선도 김기아, 기탈리아로 대표되는 식물타선이었다. 이 이후 이뤄진 KIA의 의 우승은 모두 부실한 투수진을 외부에서 수혈한 불빠따로 메운 것이며, KIA가 이를 극복하고 두터운 투수진을 구성하는 데까진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7. 감독 전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8
삼성 라이온즈
126
66
58
2
2위
3위[34]
1999
132
73
57
2
3위[35]
3위[36]
통산
258
139
115
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5[37]
KIA 타이거즈
42
15
27
0


2006
126
64
59
3
4위
4위[38]
2007
125[39]
51
73
1
8위
-
통산
293
130
159
4


총계
551
269
274
8


[1] 이순철과 비슷한 것이 수비코치로서는 정말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주루 및 작전 코치로 호평을 받아 감독에 오른 이순철과 거의 유사하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다른데, 이순철은 데뷔 초창기를 제외하고 외야수로 뛰었기 때문이다.[2] 신인이 큰 무대에서 흥분할까봐 김응용은 이종범에게 도루 자제를 지시하고 있었다.[3] 아이러니한 것은 그에게 밀려난 조창수 대행은 광주일고 감독 시절 대통령배 우승 감독이었고,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지라 단기전 우승 경험은 서정환 못지 않게 풍부했다는 것이다.[4] 다만 원년 첫 해만 삼성에서 뛰다가 이듬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뒤 거기서 은퇴했기 때문에 사실상 해태맨 이미지가 크다. 이후 류중일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최초의 삼성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이 된다.[5] 그런데 승률은 0.532로 그리 높지 않았다. 더군다나 1위 현대와 경기차는 무려 14경기. 이러한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1위 현대가 시즌 초반부터 치고 나가며 압도적으로 양민학살급 포스를 보였기 때문에(무려 111경기만에 정규리그 1위를 확정했고 승률은 0.643이었다) 엄청난 승률 디플레가 일어났기 때문. 3위 LG도 0.504로 시즌 준우승팀인데도 매우 낮았던 역대 최악의 승률 디플레 시즌이었다.[6] 선발 등판 없이 71경기 138 2/3 이닝을 소화하며 13승 4패 2.14를 기록했다.[7] 플레이오프에서 무리한 투수 운용에 구단측에서 극대노를 해 해임을 하게 되었다.[8] 원래 김응룡 감독이 부임하기로 했으나 해태팬들의 반대로 1년만 해태 감독을 더 하기로 해서 1년간 땜빵으로 있었던 터라 감독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결국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오자마자 자리에서 물러났다.[9] 양준혁을 내 주고 빈 좌타 거포 자리를 메꾸기 위해 데려왔다. 재정난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던 쌍방울이라 삼성 입장에서는 현금을 주고 별 무리 없이 쉽게 데려올 수 있었다.[10] 아이러니하게도 이 쪽은 원래 삼성 선수였는데 데뷔 초기에는 별 볼일 없던 유망주였으나 쌍방울로 트레이드된 뒤 맹활약하며 주가를 올렸다. 어찌 보면 삼성은 이 투수를 별볼일 없다며 쌍방울로 보냈으나 나중에는 현금 20억까지 얹어주며 다시 데려온 셈.[11] 당시 삼성은 비단 투수진 뿐 아니라 이만수를 이을 주전 포수도 마땅치 않았다. 현대 유니콘스박경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해 1998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던 모습을 본 삼성은 이를 귀감으로 삼아 당시 두산 베어스에서 홍성흔의 등장으로 입지가 흔들리던 진갑용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오게 된다.[12] 이승엽이 54홈런으로 홈런왕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홈런타자의 반열에 들기 시작했으며, 김한수3루수 KBO 골든글러브를 2번이나 타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다만 이 쪽은 백인천 감독의 공이라 보는 이들이 많다.[13] 연봉 1억 5천, 계약금 1억 5천에 3년 계약.[14] 남에게 생각이 모두 들키는 사람을 다룬 드라마 '사토라레'에서 따왔다.[15] 2007년 당시 야구 인기를 회복하고자 그해 7월 15일~8월 14일의 경기를 서머리그라 하고 우승팀에게는 2억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참고로 서머리그 우승팀은 삼성이었으며 괜히 여름에 강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16] 아예 무의미한 것은 아닌 것이 여기서라도 우승을 하면 4강권에 충분히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결과는 다 아는 대로.[17] 해태와 KIA를 포함해 유일하게 7이 들어가는 해에 우승을 못했다. 참고로 1987, 1997, 2017년에는 우승했다.[18] 정확히 서정환이 바닥에 추락한 2007년에는 이미 이순철은 잘리고 없었고, 김재박이 LG를 이끌며 그나마 어찌저찌 수습에 성공하고 팀을 5위까지 끌어올렸다. 물론 그 다음 해부터 김재박도 자신의 발언을 몸소 입증하며 날개없는 추락을 겪게 된다.[19] 절을 하게 된 비화는 서정환 감독의 부인이 연패 중인데도 더운 날씨에 나와서 응원하는 팬들이 안쓰럽다고 말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20] 이 때 이종범의 성적은 프로선수 생활 19년을 하면서 기록한 성적 중 커리어 로우였다.[21] 특히나 이 둘 모두 삼성 시절이 KIA 시절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감독으로써나 선수로써나 선동열의 평가가 더 높기에 종합적인 위상은 선동열이 몇 수는 더 위이다.[22] 말이 60이닝이지 불펜 전환 직전 선발 등판까지 합치면 거의 70이닝이다. 110구 던지고 이틀 쉬고 불펜으로 나오더니, 그 후 두 달간 60이닝 가까이 소화했다. 참고로 162경기를 진행하는 메이저리그에서 불펜투수가 한 시즌에 평균 70이닝 가량을 소화하는데, 한기주는 그걸 두 달만에 소화한 것.[23] 삼성 시절 1998년 VS LG : 1승 3패, 1999년 VS 롯데 : 3승 4패, KIA 시절 2006년 VS 한화 : 1승 2패[24] 1998년 2위, 1999년 매직리그 1위였다.[25] 최익성 본인에 의하면 2군 코치시절부터 서정환과의 궁합이 잘 안 맞았으며 사이가 엄청 안 좋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서정환은 최익성의 타격폼에 대놓고 디스를 하고 마찰을 빚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최익성은 스승인 백인천 감독이 전수 받은 타격폼으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자신의 은사인 백인천 감독이 떠나고 서정환 감독이 하라는대로 타격폼을 바꿨는데 그 타격폼이 생각보다 잘 안나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신인이었던 강동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출장기회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부터 최익성 본인의 야구인생이 꼬이면서 저니맨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최익성이 사사방과 자서전에서 서정환을 대놓고 강도 높게 깠을 정도였으니 자기 야구 인생에서 서정환을 최악의 인물로 꼽고 있다. 백인천 감독과 조창수 감독대행에게는 최익성의 야구열정에 대한 이해도를 열었지만 서정환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고, 성실한 선수와 비정한 지도자의 이면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자 삼성 시절 서정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26] 이 때문에 삼성 역사상 최악의 감독을 언급하려면 김성근, 선동열과 같이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27] 임창용 혹사는 해태시절 김응용 감독때 2년 동안 혹사당하고 삼성 이적 이후 서정환 감독에 이르러서야 절정에 달했다는 변론이라도 있지만 최익성은 서정환 감독이 2군 감독 시절에 최익성의 타격 폼을 보고 대놓고 태클을 먼저 걸었고 두 사람간의 마찰이 빚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한 서정환의 잘못이다. 실제로 최익성은 최고의 인물과 최악의 인물을 놓고 대답했을 때 최고의 감독은 백인천 감독을 꼽았고 가장 꼴사나운 최악의 인물로 서정환 감독을 꼽았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을 정도다. 최익성은 서정환 감독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이 원망하고 있다고 한다.[28] 사실 팀 타선을 리빌딩한 백인천 감독의 공이 컸다. 2000년대 초 삼성은 임창용, 배영수, 김현욱, 김진웅, 노장진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투수가 별로 없었지만 대신 이승엽을 위시한 강타선으로 성적을 냈던 팀이었다.[29] 물론 한기주의 혹사는 후임인 조범현 감독도 책임이 있지만, 그 단초를 제기한 사람은 엄연히 서정환 감독이다. 신용운의 팔이 아작나면서 수술대에 오르자 그 수술 자국이 들어간 사진을 보며 욕을 엄청나게 바가지로 먹은 건 덤.[30] 실제로 장성호는 2006년까지 3할은 기본에 전 경기 출장도 무난하게 달성하는 등 내구성이 좋은 편이었지만 2007년 시즌 가벼운 무릎 부상을 달고 있었는데, 이 상태에서 무리하게 경기에 출장시키는 바람에 부상이 더욱 악화되었고 부상 덕분에 신체 밸런스가 무너져버리면서 타격감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후 풀타임을 치르지 못하고 백업을 전전하는 등 저니맨 신세가 되어버린다.[31] 이 영향으로 2022년 기준으로 기아는 88년생인 양현종이 투수조 최고참이 될 정도로 30대 후반을 넘어가는 투수가 한 명도 없다. 있어봐야 타 팀에서 이적한 선수들이 대다수고 그나마도 얼마 안가서 이적하거나 은퇴했다.[32] 마무리로 시선을 돌려도 2년간 마무리로 활약한 한기주 이후 2021년부터 마무리로 활약하고 있는 정해영이 나오기 전까지 2년 이상 활약한 마무리 투수가 없었다. 덕분에 2010년대 기아의 불펜진은 매 시즌마다 마무리가 바뀐다거나 이로 인해 정립이 되지 않는 불펜진 체계로 인하여 방화범들로만 구성되기도...[33] 실제로 서정환 감독 취임 이전까지의 KIA는 승률이 5할 이상이다.[34] 플레이오프에서 LG에 패배[35] 매직리그 1위[36]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37] 시즌 중도 경질된 유남호 감독대행[38]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패배[39] 정규시즌 1경기를 남겨놓고 경질되었는데 KBO의 막장 운영 때문에 벌어진 일. KBO 슈퍼 한국시리즈 참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5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5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07:00:34에 나무위키 서정환/지도자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