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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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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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 | 淑嬪 尹氏


파일:숙빈윤씨_한글편지.jpg

숙빈 윤씨가 쓴 한글 편지
출생
미상
사망
1595년 6월 이후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양제
1537년 12월 20일 ~ 미상
조선 숙빈
미상 ~ 1595년 6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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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파평 윤씨
부모
부친 - 윤원량(尹元亮, 1495 ~ 1569)[1]
모친 - 순천 장씨 장일취(張日就)의 딸
형제자매
3남 1녀 중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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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 윤소(尹紹)
형제 - 윤찬(尹纘), 윤치(尹緻)

배우자
인종
봉작
양제(良娣) → 숙빈(淑嬪)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인종간택 후궁. 아버지는 돈녕도정을 지낸 척신 윤원량(尹元亮)이고, 어머니는 장일취(張日就)의 딸 순천 장씨이다.

윤원량은 중종의 장인 파산부원군 윤지임(尹之任)의 아들로,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의 형이자 문정왕후의 오빠이다. 그러므로 숙빈 윤씨는 문정왕후의 조카이며, 명종은 숙빈 윤씨의 고종사촌이면서 시동생이 된다.

2. 생애[편집]


1533년(중종 27) 정유침(鄭惟沈)의 딸이 양제(良娣)로 선발되어 후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양제 정씨는 물론이고, 세자빈 박씨에게서도 임신 소식이 없었다. 이때문에 1535년(중종 30) 중종은 양제를 다시 한 번 간택하고자 하였다.[1] 그러나 재차 시행된 양제 간택으로 인하여 장안에 소문이 돌았다.

"상소 중에 '진신(縉紳)들 가운데 더러는 양제(良娣)를 간선하여 들이는 일은, 대개 중국에서 아들이 있는 사람으로 적(嫡)을 삼는 예를 모방하려는 것이다라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처럼 사특한 말을 발설한 것은 지극히 예법에 관계가 된다. 앞서 대신과의 의논에서는 종묘 사직을 위하여 후사(後嗣)를 넓혀야 된다는 말뿐이었는데 이제 감히 사특한 말을 부르짖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니, 사대부(士大夫)로서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중종실록》 중종 30년 12월 8일


즉, 중국의 모이자귀(母以子貴: 어머니는 자식이 귀하게 됨에 따라 귀하게 됨)를 따라서 양제가 아들을 낳으면, 양제를 세자의 정궁(正宮)으로 세우려고 한다는 소문이었다. 조정 대신들의 반응은 간택을 신중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왕비들이 모두 적자를 낳았으므로 서자는 커녕 방계 왕족도 왕으로 즉위한 적이 없었고[2], 세자 내외가 20대의 젊은 나이여서 당시의 여론은 '측실(側室)에서는 아들이 난다 하여도 그 아들로는 후사를 삼을 수 없다는 쪽이었다.[3]

"신들의 의논도 양제를 더 간선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자께서 아직 나이가 젊으신데, 빈궁(嬪宮)이라고 어찌 끝내 원손을 탄생하지 못하겠습니까.······양제를 더 간선하더라도 거기에 존비(尊卑)의 차등을 두어 명분을 엄격하게 세운다면 어찌 나쁠 것이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중종 30년 12월 8일


중종도 이에 동의하여 적서의 구별을 분명히 하겠다고 밝히고 이듬해 1536년(중종 31) 윤원량의 딸이 양제로 뽑혔다. 하지만 사간 권기(權祺), 장령 임붕(林鵬) 등이 문정왕후가 세자를 친자식처럼 여기니 세자의 모후이며, 윤원량은 중궁(中宮)의 지친(至親)이기에 상피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뽑지 말자고 주장하였다.[4][5] 이때문에 윤개(尹漑)의 딸이 양제로 최종 간택되었다.[6] 하지만 윤원량의 딸이 간택에서 제외된 것은 모두 김안로가 자신의 외손녀를 세자의 후궁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획책한 일임이 드러났고, 윤은보(尹殷輔)[7]가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두 딸이 예종성종의 왕비(장순왕후, 공혜왕후)가 된 일을 예로 들면서 윤원량의 딸을 양제로 들이라고 권하면서 이듬해 11월 윤원량의 딸이 양제가 되어 후궁에 들어가게 되었다.[8]

한편, 1543년(중종 38) 동궁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이를 두고 윤씨의 친정에서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도 있었다.[9]

좌승지 이덕열(李德悅)에게 전교하였다.

"혜빈 정씨는 광주(廣州)에서, 숙빈 윤씨는 남양(南陽)에서, 숙의 이씨·신씨는 연안(延安)에서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여 줄 것을 감사에게 유지(有旨)를 내리도록 하라."

선조실록》 선조 28년 5월 26일


윤씨는 처음에 양제였다가, 인종의 사후에 숙빈(淑嬪)으로 봉작된 것으로 보인다.[10] 《선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숙빈 윤씨는 임진왜란 중에도 생존해 있었다.

3. 여담[편집]


파일:숙빈윤씨_한글편지.jpg
〈숙빈 윤씨 한글 편지〉
  • 2002년 파평 윤씨 종중의 선산에서 미라가 발굴되었다. 부장품 중에 한글 편지가 있었는데, 숙빈 윤씨가 쓴 것으로 밝혀졌다. 편지는 짧은 내용이지만, 겸양법 선어말어미를 6차례나 쓸 정도로 격식을 갖추고 있어 한국어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 현재 일본 교토의 지온인(知恩院)에서 소장 중인 《지장보살본원경변상도(地藏菩薩本願經變相圖)》은 숙빈 윤씨가 인순왕후의 명복과 선조의인왕후의 무병장수 등을 빌기 위해 비구니 지명(智明)과 함께 발원하여 자수궁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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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11월 16일 계유 3번째기사. # [2] 인종 전 까지 후사를 낳지 못한 왕비들이 있긴있었다. 하지만 적장자 계승은 아니더라도 왕비와 세자빈이 낳은 적자들이 왕위를 이어갔다.[3] 인종의 왕비 및 후궁이 임신·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약 문정왕후경원대군을 낳지 못했다면, 방계 왕족의 왕위 계승이 더 빨리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4] 중종실록 81권, 중종 31년 2월 6일 신묘 1번째기사. # [5] 원칙대로 한다면, 윤원량의 딸은 간택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중종의 모후 자순대비,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 문정왕후는 촌수를 떠나 한 집안 사람이었다. [6] 사실 윤개의 딸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았다. 윤개는 영춘군 이인(李仁)의 사위로, 영춘군은 세종신빈 김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 영해군의 자식이다. 또한 윤개의 누이는 남천군 이쟁(李崝)의 며느리로, 남천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맏손자다. 즉, 윤개의 집안은 이미 왕실과 혼맥이 형성되어 양제 간택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경빈 박씨 측에 붙어 종처럼 아첨하고 이득을 취하는 등 처신이 좋지 못한 까닭에 양제 간택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잇따르면서 윤개의 딸은 입궁을 못하게 된다. [7] 연산군의 후궁 숙의 윤씨의 오빠이다. [8] 중종실록 86권, 중종 32년 11월 9일 갑신 3번째기사. # [9] 명종실록 5권, 명종 2년 2월 19일 신축 3번째기사. # [10] 보통 삼년상이 끝난 뒤에 선왕과 현왕의 후궁들의 품계를 올려주는 등 일련의 조치가 있었다. 그러나 인종은 재위 기간이 일 년도 채 되지 않는 데다가 중종의 삼년상 중이었으므로 시동생인 명종이 봉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