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정씨(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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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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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 | 貴人 鄭氏

출생
1520년 8월
해양현 삼곡리
사망
1566년 3월 25일
(향년 47세)
한성부 서부 인달방 사저
재위기간
조선 양제
1533년 4월 8일 ~ 1544년 12월 14일
조선 숙의
1544년 12월 14일 ~ 1551년 7월 11일
조선 소의
1551년 7월 11일 ~ 1563년
조선 귀인
1563년 ~ 1566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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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연일 정씨
부모
부친 - 정유침(鄭惟沈)
모친 - 안팽수(安彭壽)의 딸
형제자매
4남 3녀 중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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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 - 정자(鄭滋)
작은오빠 - 정소(鄭沼)
남동생 - 정황(鄭滉)
남동생 - 정철(鄭澈)
여동생 - 최홍도(崔弘渡)의 처
여동생 - 오천군부인 정수정(烏川郡夫人 鄭守貞)

부군
인종
자녀
없음
봉작
양제(良娣) → 숙의(淑儀) → 소의(昭儀) → 귀인(貴人)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1. 개요[편집]


조선 인종의 후궁. 아버지는 정유침(鄭惟沈)[1]이며, 어머니는 대사간 안팽수의 딸이다. 또한, 남동생은 송강 정철이고, 여동생은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 이유(李瑠)[2]와 혼인하였다.


2. 생애[편집]


1533년(중종 28) 당시 세자였던 인종이 만 20세가 되도록 후사가 없었다. 이에 중종이 우려하여 후궁을 간택하면서, 정씨가 양제(良娣)[3]로 봉작되었다.[4] 누나가 궁중에 들어간 인연으로 막내동생인 정철은 경원대군과 절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5]

1544년(중종 39) 정씨의 나이 25세 때, 동궁에 불이 났는데 정씨만이 홀로 동궁으로 달려가 세자가 아끼는 서책들을 구한 적이 있었다. 또한, 궁궐 안에 요기(妖氣)가 있어 검은 기운이 지나가자 세자가 창문을 닫고 싶으나 시킬 이가 없었는데, 정씨만이 홀로 놀라지 않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당시 30세의 인종도 무서워하는 상황에서 그녀 혼자만이 당황하지 않고 나섰다고 하니 무척이나 멘탈이 강한 여자였을 듯.

인종이 즉위하자 내명부 종2품 숙의에 올랐다. 한편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간 덕분에 아버지와 형제들은 벼슬을 얻게되고[6], 막내 여동생은 계림군과 혼인한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 9개월만에 후사도 없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이에 정씨는 과부가 된 것도 모자라서 친정이 을사사화에 휘말려서 아버지를 비롯해 어린 정철까지 유배를 가고 계림군은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는다.[7] 심지어 정씨의 여종까지 조사를 받았다.[8] 그해 11월에 정씨는 자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9] 1551년(명종 6년) 명종이 순회세자를 낳은 것을 기념하여 그녀의 아버지 정유침, 형제인 정철과 정소를 유배지에서 풀어 주었고, 정씨의 품계도 정2품 소의로 올려주었다.[10]

1566년(명종 21) 47세의 나이로 인달방(仁達坊)[11]에 있는 사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관계[편집]


  • 친정(연일 정씨)
    • 부 : 정유침(鄭惟沈)
    • 모 : 죽산 안씨 - 효령대군의 차남 서원군 이친(瑞原君 李᨜)의 4대손
      • 오빠 : 정자(鄭滋)(1516 ~ 1547)
      • 오빠 : 정소(鄭沼)(1518 ~ 1572)
      • 남동생 : 정황(鄭滉)(1528 ~ ?)
      • 올케 : 한씨(韓氏)
      • 남동생 : 정철(鄭澈)
      • 여동생 : 최홍도(崔弘渡)의 처(1523 ~ ?)
      • 여동생 : 오천군부인 정수정(烏川郡夫人 鄭守貞)
      • 제부 :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桂林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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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나이 마흔이 되도록 벼슬이 없다가 맏딸이 후궁으로 간택된 덕분에 음보(蔭補)로 돈녕부 판관이 되었다. [2] 월산대군의 외아들 덕풍군 이이의 아들이며, 어머니가 인종의 모후 장경왕후의 언니이다. 성종의 서장자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지만, 다른 형제들보다 총명해서 주목을 받았고, 문정왕후와 척을 졌기 때문에 을사사화윤임이 축출되자 그도 거열형에 처해졌다. [3] 내명부 종2품 세자 후궁. [4]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 3월 4일 정미 7번째기사. # [5] 1536년(중종 31)에도 중종은 세자를 위해 양제를 간택하지만, 정씨는 물론이고 후궁 중 누구도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6]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 3월 11일 갑인 1번째기사. # [7] 반면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박씨는 본인 포함 친정이 모두 을사사화에서 무사했는데 이는 을사사화에 휘말리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인성왕후의 가문인 반남 박씨가 워낙 명문가인데다 명종 즉위 후 인성왕후 역시도 왕대비가 되었기 때문에 문정왕후도 굳이 공주조차 없고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는 인성왕후를 굳이 건드리는 것은 손해밖에 안되기 때문이다.[8]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 9월 6일. #, # [9]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 12월 29일 무오 2번째기사. # [10] 나중에 그녀의 친정은 조부의 묘소가 있는 전라남도 담양으로 이주한다. [11] 인달방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내자동·내수동·신문로1가·당주동·봉래동1가 각 일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