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빈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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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인종의 후궁. 아버지는 정온(鄭溫)이며, 어머니는 정주 목사 등을 지낸 양숙(梁淑)[4] 의 딸이다. 그녀의 고모는 성종과 숙용 심씨의 아들 영산군 이전의 부인 교성군부인(交城郡夫人)으로 이미 왕실과 인연이 있었다.
2. 생애[편집]
혜빈 정씨가 언제 어떻게 인종의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일찍이 정씨의 집안은 좋지 않은 일로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은 전적이 있다.
정온(鄭溫)의 처 양씨(梁氏), 정양(鄭良)의 처 이씨(李氏), 정의 누이들인 유용근(柳庸謹)의 처 정씨, 영산군(寧山君)의 부인 정씨(鄭氏) 등 4남매는 죽은 어미의 초상에 재물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다가 슬픔도 잊어버리고 서로 송사하고 구타까지 하였습니다.
《중종실록》 중종 29년 9월 5일
이때 정온의 아들 정충정(鄭忠貞)은 영산군의 첩 망종(亡終)을 살해하였다는 의혹을 받았고, 부인들은 서로 자신이 구타 당했다며 말싸움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영산군의 첩은 노비 귀년(龜年)이 정충정을 보호하려다 벌어진 일로 사형은 면하였다.[5] 하지만 1540년(중종 35) 혜빈 정씨의 숙부 정양(鄭良)이 탄핵당해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아 판결과 상관없이 집안의 평판이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시직(侍直)[6]
정양(鄭良)은 인물이 간사하고 형제간에도 패려스러운 일이 많았으니 동궁(東宮)의 시위(侍衛)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개정하소서.
《중종실록》 중종 35년 6월 24일
1595년(선조 28) 광주(廣州)에 있는 혜빈 정씨에게 식량을 지급하라는 명이 내려졌다.[7]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중에도 생존해 있었다.
3. 여담[편집]
- 혜빈 정씨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에 있었으나 1992년 파주 구획정리사업 시 파묘, 화장되어 문인석과 무인석 등의 유물만 석물만 남겨졌다. 현재 경주 정씨 문헌공파에서 관리 중이며, 이조판서 정효항(鄭孝恒) 묘역에서 찾을 수 있다.
- 현재 일본 시코쿠 북동부 카가와현에 있는 라이고지(來迎寺)에서 소장 중인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는 1582년(선조 15) 비구니 학명(學明)이 혜빈 정씨의 무재무장(無灾無障)과 장수를 기리며 제작한 불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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