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리 셰브첸코/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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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1. 클럽 경력[편집]



1.1. FC 디나모 키이우[편집]


셰브첸코는 1993년 디나모 키이우에 입단한다. 이후 그가 18살일 때 그의 팀은 디나모 키이우에서 K리그로 진출해서 쏠쏠한 이득을 보고 있었기에 그도 역시 K리그로 이적시킬려고 했으나 18살 유망주에 불과했던 그를 받아주는 팀은 없었고 그렇게 K 리그는 미래의 챔스 우승, 발롱도르 수상을 하는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1명을 영영 놓치게 된다. 만약 이때 셰브첸코가 K 리그 팀으로 이적했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밀란의 역사가 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2E1A568F00000578-3303606-image-m-16_1446651177085.jpg


셰브첸코는 자국 리그의 명문 구단인 디나모 키이우의 리그 5연패 및 1998-9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의 주역으로 유럽무대에 그 이름을 알렸다. 특히 컬쳐쇼크급 활약을 보여줬던 경기는 1997-98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바르셀로나 전으로 1997년 11월 5일 홈에서 3-0으로, 원정 캄 노우에서는 4-0으로 바르셀로나를 떡실신시켜버린 사건인데, 캄 노우 원정에서 전반전 해트트릭이라는 폭탄을 터트려 전 유럽을 경악케 만들었다.[1][2]

하지만, 8강전에서는 키이우가 홈에서 유벤투스에게 1:4로 참패하며 탈락했는데, 여기서 거꾸로 키이우 홈에서 유벤투스 소속이던 필리포 인자기가 해트트릭을 터뜨렸고 셰브첸코는 유벤투스 전에서 골을 넣지 못했다.

1998-99 시즌, 챔스 조별리그에서 만난 아스날을 상대로 프리킥 결승골을 터트려 팀을 8강에 올려놓았고 8강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는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기록하며 팀을 챔스 4강으로 이끌었다.

4강에서 만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2골을 기록했지만, 팀의 열세로 3-3 무승부로 1차전을 마쳐야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1-0으로 아쉬운 패배를 당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이 시즌 그는 챔피언스리그 득점왕(8골)을 차지했고 UEFA 올해의 공격수로 선정되었다.


1.2. AC 밀란[편집]


1999-00 시즌을 앞두고 셰브첸코는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3] 그리고 데뷔시즌 득점왕 이라는 엄청난 업적과 함께 성과를 이루어나간다.[4]


파일:ELpkgDbWkAAqSoX.jpeg.jpg

319경기 173골[5]

45도움


1999/00 시즌: 45경기 29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29
3
24
6
UEFA 챔피언스 리그
5
4
1
1
3
코파 이탈리아
4
4
-
3
1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
0
1
합계
45
33
12
29
11

2000/01 시즌: 51경기(선발 49경기) 34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4
33
1
24
4
챔피언스 리그
12
12
0
5
0
코파 이탈리아
3
2
1
1
1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4
0
합계
51
49
2
34
5

2001/02 시즌: 38경기(선발 36경기) 17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9
28
1
14
3
유로파 리그
6
6
0
3
2
코파 이탈리아
3
2
1
0
0
합계
38
36
2
17
5

부상과 이에 따른 컨디션 난조로 리그 5골에 그치며 극도로 부진했던 2002-03 시즌을 제외하면 매시즌 20골 언저리를 기록하며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우뚝선다. 그러나 이 부진했다는 2002-03 시즌 후반기 머리를 삭발하고온 그는 조별리그 1차전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뽑아 팀을 1위로 16강에 진출시키고, 8강 아약스를 상대로 천금같은 동점골, 4강에서 벌어진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에서도 2차전 골을 기록하여 원정다득점 원칙에 따라 팀을 결승에 올렸고, 결승에서는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PK를 성공시키는 등 팀의 6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적잖은 공헌을 하였다.

2002/03 시즌: 39경기(선발 30경기) 12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4
18
6
5
1
챔피언스 리그
10
10
0
4
1
코파 이탈리아
4
1
3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0
0
합계
39
30
9
12
2

계속해서 발롱도르 순위권에 들던 셰브첸코는 2004년 세리에 A 우승과 득점왕을 동시에 차지하며 마침내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다만 해당년도 셰브첸코의 수상에 대해서는 2001년의 마이클 오언의 수상과 함께 발롱도르 역사상 가장 논란이 컸던 사례 중 하나로 남아 있다.[6][7]

2003/04 시즌: 45경기(선발 43경기) 29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30
2
24
3
챔피언스 리그
9
9
0
4
1
코파 이탈리아
1
1
0
0
0
수페르코파
1
1
0
0
0
슈퍼컵
1
1
0
1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0
0
합계
45
43
2
29
4

다만 2004-05 시즌에는 팀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으로 올리는 활약을 했으나, 리버풀에게 이스탄불의 비극을 맛본다. 셰브첸코는 이 경기에서 크레스포의 골을 어시스트했지만 예지 두덱에게 수 차례 결정적인 슈팅이 막혔고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섰을 때도 실축하면서 리버풀에 우승을 내주게 된다.[8]

2004/05 시즌: 40경기(선발 38경기) 26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9
27
2
17
6
챔피언스 리그
10
10
0
6
2
수페르코파
1
1
0
3
0
합계
40
38
2
26
8

2005-06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5차전에서 페네르바흐체를 상대로 혼자 4골을 득점하였고 4강에서 만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차전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헤딩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골은 파울로 취소되었는데 이것은 카를레스 푸욜할리우드 액션으로 인한 오심이었다. 그는 첼시로 건너가기 전 챔스 득점왕(9골)에 올랐지만, 아쉬움을 남기며 4강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시절의 셰브첸코는 정확한 골 결정력과 동유럽호나우두[9]라고 불릴 정도로 빨랐던 스피드, 상대 수비수들을 초토화시키는 몸싸움, 준수한 테크닉, 윙 포지션도 소화할 수 있는 전술적 이해도[10]까지, 무결점 스트라이커란 칭송이 아깝지 않았다.

밀라노 더비 역대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이며 레전드 군나르 노르달에 이은 구단 역대 최다 득점 2위(173골)로 사실상 노르달의 기록을 깰 수 있으리라 기대를 모았었다.

2005/06 시즌: 40경기(선발 38경기) 28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8
27
1
19
7
챔피언스 리그
12
11
1
9
3
합계
40
38
2
28
10


1.3. 첼시 FC[편집]


첼시 구단주인 로만은 셰브첸코를 영입하는 것에 강한 욕심을 드러냈고, 약 500억 정도로 추산되는 거액의 이적료와 셰브첸코의 아내를 통한 설득을 통해 결국 영입에 성공하였다.

그의 아내는 모델이었는데 미국 출신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남편의 직장인 이탈리아에서 아내는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일상 생활을 한다. 그 와중에 영국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이 손을 뻗혀 왔으니 애 아빠가 어쩌겠는가? 물론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영어조차도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보다는 아내와 자녀들 입장에선 영국이 생활하기엔 수월할 것이다.


파일:nintchdbpict000004100.jpg

76경기 22골 10도움


이런 과정 뒤에 첼시로 와서 리버풀과 커뮤니티 실드 경기를 치렀다. 오자마자 첫 경기에서 골을 득점한 그는 역시 셰브첸코라는 말을 들었으나, 부상을 겪으며 컨디션이 떨어졌고, 같은 자리 경쟁자인 디디에 드록바가 정상급 퍼포먼스를 보이며 선전했다.[11]

드록바는 당연히 기대를 받으며 확고한 주전 자리를 지켜나갔고, 셰브첸코는 연거푸 부진과 부상을 오가며 벤치를 달궜다. (2006-07~2007-08 시즌: 리그 47경기 9골)

리그 보다 중요도가 낮은 FA컵에 등장해 골을 넣자 일부 팬들은 ‘컵첸코’라 놀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 ‘N첸코’가 붙기 시작한다.[12] 심지어 둥팡줘에 빗대어 ‘동팡첸코’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었다.

특히나 2007년 2월 존 테리에게 응급처치[13]를 취했는데 이것이 매우 적절한 행동이라 ‘메딕첸코’, ‘셰브란스’로도 불렸다. 이러한 조치로 존 테리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후일 사람들은 세브첸코의 가장 큰 업적으로 이것을 꼽기도 했다.[14]

여담으로 이 부진한 기간 동안에도 국대에서는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준수한 경기력과 더불어 우수한 득점력을 선보였다. 대표적으로 잉글랜드나 프랑스와의 유럽 지역 예선. 그래서 ‘애국첸코’라는 별명도 있었다.

이후 그는 AC 밀란으로 임대 복귀했으나 임대기간 1년 동안 리그, 컵 경기 모두 합쳐 26경기 2골 1도움이라는 초라한 성적. 결국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의 시간 때우기용 교체선수로 전락했다. 임대 만료 후 첼시로 복귀했지만 그에게 더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첼시에서의 실패 요인으로 많은 근거가 언급되는데, 일단 신체적 한계가 찾아온 것과 리그 템포 차이가 결정적으로 꼽힌다. 이미 2000년대 초반 부상으로 신체적인 힘이 크게 떨어진데다 그게 첼시로 이적할 당시 나이는 30세에 가까웠다. 지금이야 관리가 잘되고 하니 선수 수명이 길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0대에 들어선 선수들은 전부 내리막을 탔다.[15] 거기다 드록바가 그보다 1살밖에 더 어리지 않음에도 밀릴 정도로 피지컬이 급격히 내려오고 있었다. 거기에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VS 무리뉴 감독 간 갈등의 소용돌이도 한몫했다.

그리고 2023년 1월 우크라이나 대표팀의 후배인 미하일로 무드리크가 첼시에 입단하게 되면서 선배의 아쉬웠던 모습을 바꿀 수 있을지가 주목되었다.

2006/07 시즌: 51경기(선발 41경기) 14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0
22
8
4
6
챔피언스 리그
10
9
1
3
1
FA컵
6
5
1
3
2
EFL컵
4
4
0
3
0
커뮤니티 실드
1
1
0
1
0
합계
51
41
10
14
9

2007/08 시즌: 25경기(선발 12경기) 8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7
8
9
5
1
챔피언스 리그
5
2
3
1
0
FA컵
1
0
1
0
0
EFL컵
2
2
0
2
0
합계
25
12
13
8
1


1.4. 디나모 키이우 2기[편집]


2009년 8월 말 결국 자신이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디나모 키이우와 2년 계약을 맺고 이적하였고, 2010-11 시즌 종료 후 1년 계약을 연장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driy_Shevchenko_Dynamo.jpg


리그에서는 55경기 23골을 기록하며 고국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유럽 대항전에서는 2010-11 시즌 12경기 5골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특히 2011년 3월 맨시티와의 UEFA 유로파 리그 16강 1차전 홈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득점을 기록하자 부활이니 제2의 전성기라느니 등의 설레발이 있었다. 하지만 2011-12 시즌 5경기 무득점에 그쳐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게 했다. 결국 유로 2012가 끝나고 며칠 후 2012년 7월 29일 은퇴를 선언했다.


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5년 국가대표로 첫 발탁됐으며, 첫 득점은 1996년 5월 튀르키예와의 친선전에서 기록하였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는 조별 리그(9조)에서만 3골(PO 포함 4골)을 득점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크로아티아에 1차전 0:2, 2차전 1:1(셰브첸코 득점), 합계 1:3으로 패해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UEFA 유로 2000 예선에서는 프랑스에 승점 1점이 뒤져 플레이오프로 밀려났으며, 플레이오프에서 슬로베니아에 1차전 1:2(셰브첸코 득점), 2차전 1:1, 합계 2:3으로 패해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도 상황은 또다시 반복되었다. 조별 리그(5조)에서만 9골[16](PO 포함 10골)을 득점했으나 폴란드에 밀려 플레이오프로 밀려났으며,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는 독일에 1차전 1:1, 2차전 1:4(셰브첸코 득점), 합계 2:5로 패해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UEFA 유로 2004 예선에서도 총 3골을 기록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조별 리그(6조) 3위로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당시 조별리그 1위는 그리스, 2위는 스페인이었다.

이처럼 1995년부터 우크라이나 국가대표로 차출된 셰브첸코는 선수 생활 전성기였던 1998 FIFA 월드컵, UEFA 유로 2000, 2002 FIFA 월드컵, UEFA 유로 2004까지 국가대표팀에선 번번히 메이저 대회 본선 진출 실패라는 고배를 마셨다. 셰브첸코는 "무결점의 스트라이커"또는 "동유럽의 호나우두"라고 불릴 정도로 클럽에서는 최고로 성공한 선수지만, 국가대표와는 유독 인연이 없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결실을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맺었다. 2006 독일 월드컵 예선(5조)에서만 6골을 넣었고 드디어 우크라이나는 조 1위로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게 된다. 이는 1991년 소련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본선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는 팀의 0:4 대패를 막지 못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1골[17] 1도움, 튀니지를 상대로 1골[18]을 기록하며, 아나톨리 티모슈크, 세르히 레브로프, 안드레이 보로닌, 막심 칼리니첸코, 안드레이 루솔 등과 함께 팀의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스위스와의 16강전에서는 전, 후반 연장전 득점없이 맞이한 승부차기에서 첫 키커로 나서 실축했지만 나머지 3명의 키커들이 모두 PK를 성공시키고[19], 팀 동료 키퍼였던 올렉산드르 쇼우코우스키가 스위스 키커의 킥을 2번 선방하는 맹활약을 함으로써 3명이 연달아 실축[20]한 스위스를 제치고 월드컵 첫출전에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21] 그러나 8강전 상대는 이 대회 우승팀인 이탈리아였고 결국 3:0으로 패하면서 셰브첸코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은 8강에서 마무리되었다.[22]

UEFA 유로 2008 예선에서는 조별 리그(B조)에서만 5골을 기록했지만 조 4위로 본선 진출 실패하였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에서는 조별 리그(6조)에서 6골을 넣었으나 잉글랜드에 밀려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으며, 플레이오프에선 2경기 모두 출전하고도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그리스에 1차전 0:0, 2차전 0:1, 합계 0:1로 패했다. 당시 본선 진출권을 그리스에게 내 주게 되자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축구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2010-11 시즌이 끝나자 2012년 자국에서 폴란드와의 공동 개최로 열리는 UEFA 유로 2012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로 2012 첫 경기인 스웨덴 전에 선발로 나서 0:1로 끌려가던 후반 10분과 17분에 잇따라 헤딩골을 기록하며 조국 우크라이나에 유로 대회 사상 첫 승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안방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연이어 패하면서 8강 진출에 실패했고 유로 대회 첫 승을 챙긴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대회 종료 직후 대표팀과 작별을 고했다.

2022년 3월 8일까지 아나톨리 티모시추크에 밀려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출전자 2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티모시추크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일으킨 러시아의 만행에 분노하지 않고 조국의 고통에 침묵하는 매국행보로 인해 우크라이나 축구계에서 제명되면서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대 최다출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23]


파일:external/l.yimg.com/a13d9389ff16887cbc11bdb556607b9a-getty-511817094.jpg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젊은 시절에는 탁월한 운동 능력을 활용한 폭발적인 돌파가 돋보였다. 다만 이 점이 잘못 전해져 투박하다고 표현되기도 하나, 투박하다고 하면 떠오를 '우당탕탕'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보폭이 크고 볼터치가 카카나 호나우지뉴처럼 섬세하진 않아 투박해 보이는 것이고, 자신의 신체를 믿고 스피드와 에너지를 앞세운 플레이를 펼쳤던 선수였을 뿐. 요즘으로 비교하자면 전성기의 루이스 수아레스처럼 테크닉도 훌륭하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극대화시키는 타입이었다.[24][25][26]

특히 그의 강점 중 하나는 바로 다재다능한 득점 도구들이다. 우선 슈팅에 있어서 왼발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골대 바로 앞부터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까지 득점 가능한 범위도 넓다. 그의 100골 비디오 클립을 보면 머리로만 정확히 25골을 득점하기도 한다. SS 라치오와 경기에선 머리, 오른발, 왼발의 퍼펙트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즉, 어느 부위로든 골로 넣을 수 있었고 동유럽의 호나우두라 불릴만큼 단독 돌파력도 뛰어났으며 여기에 준수한 프리킥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어서 중장거리 프리킥을 맡아 차기도 했다.[27]

이러한 다양한 무기들을 바탕으로 난전 상황에서 우당탕탕 골, 세트피스에서 헤딩, 중장거리슛, 주워먹기, 열린 공간에서 치달, 좁은 공간에서 밀집수비 깨기 등등 거의 모든 상황에서 온갖 방식으로 득점을 해냈고 때문에 무결점의 스트라이커라는 영광스런 칭호로 불리었다. 중앙 공격수 항목에서 컴플리트 포워드 부분을 보면 사실 컴플리트 포워드의 요소 중에 1~2개가 부족하거나, 육각형이긴 한데 월클 기준에서는 작은 육각형(...)인 이들이 많이 섞여 있는 걸 알 수 있다. 노골적으로 말해 나무위키 특성상 약간 개나소나 적혀있는 면이 있는데, 그러나 세브첸코는 컴플리트 포워드의 요소를 진정으로 충족시키는 몇 안되는 선수였다.

이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플레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동료와 협업 플레이를 중시했던 그는 위치를 가리지 않고 뛰었으며 골 욕심이 크지도 않았다. 실제 1:1 찬스를 동료인 인자기에 넘기는 장면을 보이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인터뷰는 "인자기가 컨디션이 좋아서"였다.

운동능력 또한 사기었던 시절은 이 분야 최강자 중 하나인 다비즈조차도 셰브첸코 앞에서는 한수 접고 들어갔을 정도.[28]

무결점 스트라이커라 불리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멀티 포지션 능력과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다. 소련 축구계의 명장인 발레리 로바노브스키 감독에 의해 육성된 셰브첸코는 10대 시절부터 다양한 위치에서 포지션 소화하는 법을 배웠고, 그 결과 공격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플레이를 수준급으로 해낼 수 있는 선수로 성장했다.

원톱과 투톱 모두 능숙하게 뛸 수 있었고, 최전방에서 득점을 노리는 플레이와 보다 공격적인 파트너를 뒤에서 지원하는 처진 스트라이커 모두 가능했으며, 심지어 준수한 수비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고속 스피드를 이용한 선수들이 종종 당하는 무릎 부상은 그도 피해갈 수 없었다.

2001-02 시즌 리그 14골, 부상의 여파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2002-03 시즌 리그 5골은 많은 팬들의 우려를 낳는 결과였다.[29] 그러나 2002-03 시즌 챔스 4강에서 만난 밀라노 더비에서 과거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며 골을 성공시켰고, 다음 해인 2003-04 시즌 세리에 A 득점왕과 발롱도르를 수상해 팬들의 불안을 불식시켰다.

그는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를 통해 득점을 양산했는데, 이는 과거처럼 뛰어난 신체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1선과 2선을 오가며 패스를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아울러 이쯤 영입된 카카가 역습시 팀 스피드를 더해 과거보다 셰브첸코의 스피드 부담이 줄었다.

리그에서는 꾸준히 20골 언저리를 기록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특히 첼시로 건너가기 전 그는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의 기술적인 완성도와 반비례하는 피지컬 하락이다.

밀란은 멤버 서로가 서로의 특성을 잘 알아 손발이 맞고, 리그 적응도 필요 없다. 팀 내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는 만큼 주전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다.

그러나 첼시는 당장 성과를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주전 경쟁이 기본이었다. 젊었을 때라면 몰라도 부상을 당하고 나이를 먹으며 과거처럼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없게 된 셰브첸코에게 과격한 몸싸움이 난무하는 프리미어리그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더군다나 그는 당시에 영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동료들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부진과 부상, 적응 실패. 그리고 자신감 상실. 그의 이름과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그의 플레이가 수식되었고, 그는 잉글랜드에서 침몰했다.

[1] 축구잡지 포포투의 인터뷰에 의하면 경기 전에 해트트릭을 하면 친구가 저녁을 사겠다는 약속을 했다는데, 정말로 악착같이 해트트릭을 하고 거하게 얻어먹었다고 한다. 시즌 중에 카니발에 놀러가고 싶어서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한 호마리우가 연상되는 일화.[2] 그 뒤 캄 노우에서 해트트릭을 넣은 선수는 한 동안 없었다가, 2021년 2월 17일, 2020-2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에서 킬리안 음바페가 23년 4개월만에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파리 생제르맹의 4:1 역전승을 이끌었다.[3] 자신의 우상인 마르코 반 바스텐이 뛰었던 클럽이라 밀란을 선택했다고 한다.[4] 세리에 A 역사상 데뷔시즌 외국인 득점왕은 과거 유벤투스미셸 플라티니UEFA 회장과 셰브첸코 뿐이다.[5] AC 밀란 역대 득점 2위[6] 2003-04 시즌 리그와 함께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포르투의 언더독 신화를 이끌면서 더블을 달성하고 유로 2004에서도 주전으로서 포르투갈의 첫 메이저 대회 준우승을 이끌고 UEFA 올해의 클럽 선수상, 올해의 미드필더상을 동시에 수상한 데쿠나 2003-04 시즌 PL로의 명칭 변경 이후 2021년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한 아스날무패 우승을 이끌고 리그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 PL 올해의 선수 등 PL 내에서 받을 수 있는 개인상은 모두 차지한 티에리 앙리가 더 적합했다는 의견이 컸었다. 실제로 셰브첸코는 이 시즌 주요 기록이 세리에 A 우승 하나와 리그 득점왕이 전부였고, 심지어 리그 득점수도 24골로 같은 시즌 30골을 넣은 앙리보다 적은 편이었다.(다만 이 당시 세리에 A는 34라운드 체제였다.) 거기에 셰브첸코는 챔스도 앙리와 똑같이 8강 탈락에, UEFA 유로 2004도 조국 우크라이나가 아예 예선에서 탈락한 상태였다.[7] 이에 대해 옹호를 해주자면 셰브첸코는 2004-05 시즌 전반기에 경기 당 1골에 가까운 기록을 남기고 월드컵 예선에서도 대활약하는 등 발롱도르 투표 시점에서 보여준 임팩트가 컸으며, 또한 당시까지는 세리에 A가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8] 셰브첸코는 선수 시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세 번 경험했는데, 세 번 모두 승부차기로 승패가 갈렸고, 직접 출전한 두 번 모두 승부차기의 마지막 키커를 맡았다. 2003년 유벤투스와의 대결에서는 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우승을 확정시켰지만, 2005년 리버풀과의 대결에서는 상술했듯 슈팅이 막히며 즉시 리버풀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또한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벤치에 머물렀던 2008년 결승전에서도 승부차기로 준우승에 그쳤다.[9] 하지만 셰바의 팬들은 이 별명을 싫어한다고 한다. 셰브첸코가 호나우두 못지않은 대단한 선수인데도 2인자로 전락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고.[10] 카를로 안첼로티는 연습 때 종종 선수들의 포지션을 변경해 테스트를 하곤 했는데, 솁첸코는 수비수의 위치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고 했다.[11] 사실 당시에는 그야말로 유럽을 호령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던 셰브첸코가 다이버 별명을 얻으며 뽀록바로 조롱받던 드록바보다 나은 활약을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12] 예를들어 칼링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4부 리그 위컴과의 준결승에서 골을 넣자 ‘칼링첸코’, ‘4부첸코’라는 별명이 붙었다.[13] 기절한 상태에서 혀가 말려 넘어가 기도를 막지 않게 혀를 잡아주는 방식[14] 이 사례가 위기탈출 넘버원에 방영됐었다.해당 회차[15] 반례도 있기는 하다. 30줄에 첼시로 왔지만 첼시 최고의 레전드가 된 지안프랑코 졸라가 대표적이다.[16] 에베 산(Ebbe Sand)과 더불어 월드컵 유럽예선 득점 공동 1위[17] 이골이 월드컵 데뷔골이다.[18] PK 결승골[19] 밀렙스키 레브로프 구스예프[20] 슈트렐러 선방, 바르네타 크로스바 때려 실패, 카바나스 선방.[21] 월드컵에 처녀출전해서 8강 이상 진출한 팀은 1990 카메룬, 1998 크로아티아, 2002 세네갈이 있다. 이중 크로아티아는 4강까지 올라가서 3위를 차지했다.[22] 0:4로 대패를 안긴 스페인(16강)을 제쳤다.[23] 이후 이 자리는 안드리 야르몰렌코가 셰브첸코의 대표팀 출전 기록을 깨면서 야르몰렌코에게 넘어갔다.[24]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셰브첸코가 수아레스보다 신체 능력에 더 많이 의존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아레스는 33세~34세 시즌에도 아틀레티코의 리그 우승을 이끌고 리그 MVP를 수상할만큼 상대적으로 기량 유지를 잘했지만 셰브첸코는 30세가 채 되기전에 첼시로 이적했는데도 그대로 몰락해버렸다.[25] 셰브첸코와 비슷하게 운동 능력을 활용한 테크니션이었으나 운동 능력을 잃고 기량이 급격히 하락하며 전성기 시절의 절륜한 테크닉조차 투박했던 것으로 절하되는 케이스가 밀란 시절 동료였던 카카다. 다만 테크닉 대 테크닉으로 비교하자면 카카가 훨씬 화려하고 정교하기는 했다.[26] 요약하자면 세브첸코의 단독 돌파 능력은 테크닉은 적당히 준수하되 21세기 탑티어 테크니션들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대신 엄청난 피지컬의 힘으로 동유럽의 호나우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돌파력을 보여줬다.[27] 단거리는 안드레아 피를로가 찼다.[28] 참고로 다비즈는 유벤투스 중원에서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원을 씹어먹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선 호나우두보다 늦게 출발했음에도 호나우두를 따라잡아 1:1 찬스를 커버하는 엄청난 운동능력을 보여준 선수였다.[29] 이 때 당시 그는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부상도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은사이자 정신적 지주인 발레리 로바노브스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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