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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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유러피언컵 5연패와 UEFA 챔피언스 리그 3연패를 달성한 유일한 팀이다. 또한 UEFA 챔피언스 리그, 라리가라는 주요 대회(유럽대항전, 자국 1부 리그) 최다 우승을 자랑하는 유럽 최고의 명문 클럽이다.
다른 기록으로는 역대 라리가 누적 승점 1위, 라리가 한 시즌 역대 최다 승점[16] , 세계 최다 연속 홈 무패[17] 등이 있다.
1929년 라리가가 창설된 이후 단 한 번도 1부 리그에서 강등당하지 않았고,[18] 스페인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와 유이하게 무패 우승을 달성한 바 있다.
유럽의 220개 축구 클럽을 대변하는 유럽 클럽 협회의 창립 회원 열여섯 클럽 중 하나이며[19] , 구단의 규모와 인기에 따른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스포츠 구단 순위에서도 항상 순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2013~2015년에는 뉴욕 양키스, 댈러스 카우보이스, FC 바르셀로나 등 각 종목별 세계 최고의 팀들을 제치고 3년 연속 1위를 달성했고, 이후 2016년 2위, 2017년 5위, 2018년 3위, 2019년 3위, 2020년 6위에 오르며 가치가 높은 구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2. 평가 및 위상[편집]
우선 유럽 전역을 통틀어 리그 우승 30회를 넘긴 클럽은 극히 드문 가운데, 레알 마드리드는 무려 35회 우승을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 4대 리그라 부르는 라리가, 프리미어 리그, 세리에 A, 분데스리가에서 2007년에 가장 먼저 30회 우승을 돌파하였다. #[21][22]
라리가뿐만 아니라 UEFA 챔피언스 리그 14회 우승은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 기록이다. 2022년 현재 기준, 1992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개편 전후로 모두 최다 우승 팀이다. 개편 이전 유러피언 컵 시대에 6회, 개편 이후 UEFA 챔피언스 리그 시대에 8회 우승을 기록했다. 게다가 우승 횟수뿐 아니라 통산 출전 횟수, 경기 수, 승, 승률, 승점, 득실 차, 8강 진출 횟수, 4강 진출 횟수, 결승 진출 횟수까지 준우승을 제외한[23] 모든 부문에서 독보적인 1위에 올라 있다. 또한 챔피언스 리그 개편 후 유일무이한 연패 달성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유일하게 챔피언스 리그 우승 횟수 두 자리 수를 기록하고 있다.
자국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 양쪽에서 압도적인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른 4대 리그 최다 우승 팀들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유벤투스 FC, FC 바이에른 뮌헨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횟수를 모두 합해도[24]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 횟수보다 적다. 여기서 맨유를 빼고 리버풀 FC를 넣어야 그나마 동률이 된다.[25]
이러한 대단한 우승 기록들, 특히 세계에서 가장 권위 높은 클럽 대회인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쌓은 업적 덕분에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FIFA와 IFFHS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클럽으로 선정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선 투표 방식으로 선정한 FIFA의 순위에서는 2위를 포함한 다른 클럽들이 모두 한 자릿수 득표율을 넘기지 못한 가운데 혼자서만 42.35%를 쓸어 담았고, 좀 더 객관성을 고려하여 포인트 집계 방식을 채택한 IFFHS의 순위에서도 역시 2위 유벤투스를 97.5점이라는 큰 점수 차로 누르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또한 국제 축구 연맹의 창설 100주년이었던 2004년에는 'FIFA 100주년 공로 훈장'을 클럽 부문에서 셰필드 FC와 함께 받았다. 클럽 부문에서는 두 클럽만이 지목되어 이 훈장을 받았으며, 셰필드 FC가 1857년에 창단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클럽으로서 축구계에 기여하였다면, 레알 마드리드는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클럽으로서 축구계에 기여한 사실을 공인받은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곧바로 2001-02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는 등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었다. 이후 2004-05 시즌부터 2009-10 시즌까지 6년 연속 챔스 16강 탈락을 겪으며 '16강 마드리드'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얻었지만,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하여 이 징크스를 깬 뒤,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체제하에서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두 자릿수 우승에 도달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FC 샬케 04 원정 6-1, FC 바이에른 뮌헨 원정 4-0 대승을 거둬 10년 넘게 승리가 없었던 독일 원정 징크스까지 극복해 위상을 완전히 되찾고 매년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지네딘 지단 감독 체제에서는 개편 이후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3연패를 달성하면서 2위 그룹과의 격차를 더욱 벌렸고, 2022년에는 14회 우승을 달성하며 2위인 AC 밀란과의 격차는 2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직전 5시즌 성적을 바탕으로 매겨지는 UEFA 클럽 랭킹에서 1위를 가장 많이 차지한 팀이다. 랭킹 산정이 시작된 1979년부터 총 42시즌 중 15번 1위를 차지, 7번 1위에 오른 유벤투스 FC와 FC 바르셀로나를 상당히 큰 차이로 제치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 가지 흠이라면 그렇게 압도적인 리그, 챔스 우승 기록에도 불구하고 FC 바르셀로나, FC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맨체스터 시티 FC, 인터 밀란, AFC 아약스, 심지어 셀틱 FC, PSV 에인트호번조차 달성했던 트레블 기록이 없다. 그 수많은 챔스 우승 시즌 동안 트레블을 단 한 차례도 연을 맺지 못한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26][27][28]
상술한 근거들을 종합할 때, 세계 최고의 명문 축구 클럽을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레알 마드리드를 고르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2.1. UEFA 챔피언스 리그 내 위상[편집]
레알 마드리드의 14회 우승 기록은 우승 횟수 2위[30] 의 7회 우승과 3위[31] 의 6회 우승을 합친 것보다 많으며, 세리에 A[32] 와 분데스리가[33] 를 비롯한 대다수 '리그'의 전체 우승 횟수를 능가하는 기록이다. 오직 프리미어 리그만이 15회 우승으로[34] 레알 마드리드보다 많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가 13회 우승을 달성한 당시에는 프리미어 리그도 12회 우승을 기록 중이었기 때문에 1년 간은 우승 횟수 순위에서 모든 '리그'가 레알 마드리드 아래에 있는 진풍경도 나왔다.
우승 횟수뿐 아니라 통산 출전 횟수, 경기 수, 승, 승률, 승점, 득점, 득실 차, 8강 진출 횟수, 4강 진출 횟수, 결승 진출 횟수까지, 준우승만을 제외한 모든 누적 기록이 1위이다.# 이 중 승률을 제외한 나머지 기록은 가까운 시일 내에는 추월이 불가능한 압도적 1위이다. 1992년 개편 이후부터 산정한 기록조차도 모든 스탯이 1위이다.#
누적 기록 외에도 최다 연속 참가[35][36] , 최다 연속 우승과 최다 연속 결승 진출[37] , 최다 연속 16강 진출[38] , 최다 연속 4강 진출[39] , 결승전 최다 연승[40][41] , 개편 이후 유일한 3연패[42] 등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2021-22 시즌 종료 시점 기준으로 가장 많은 선수들이 우승을 경험한 팀이고[43] , 가장 많은 감독들이 우승을 경험한 팀이며[44] , 득점왕을 가장 많이 배출한 팀이다.[45]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영구히 소장할 수 있는 조건인 '5회 우승'과 '3연속 우승'을 둘 다, 그것도 개편 전후에 각각 한 번씩 달성한 유일한 팀이다. 개편 전에는 초창기 5연속 우승으로 단번에 두 조건을 달성하여, 현재 쓰이는 빅 이어 이전에 1965-66 시즌까지 쓰였던 구형 트로피를 영구히 소장한 유일한 팀이 되었다. 개편 후에는 2015-16 시즌부터 3연속 우승을 하면서 두 조건을 달성했다.[46]
참고로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넘버링을 하듯 '열 번째', '열한 번째' 같은 식으로 불린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가 9번째 우승에 성공해 사상 첫 두 자릿수 우승에 가까워지자, 스페인어로 '열 번째'를 뜻하는 '라 데시마'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다 실제로 10번째 우승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경우. 특정 팀이 우승할 때마다 그 우승에 순서가 이름으로 붙는 것 자체가 그 팀의 위상을 방증한다.
3. 역사[편집]
3.1. 개별 문서가 있는 시즌[편집]
- 레알 마드리드 CF/2011-12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2-13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3-14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4-15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5-16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6-17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7-18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8-19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19-20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20-21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21-22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22-23 시즌
- 레알 마드리드 CF/2023-24 시즌
3.2. 시즌별 일람[편집]
3.3. 역대 리그 순위[편집]
3.4. 유럽 대항전 통산 기록[편집]
3.5. 역대 엠블럼[편집]
3.6. 역대 유니폼[편집]
4. 주요 인물[편집]
5. 문화[편집]
5.1. 레알 마드리드 TV[편집]
5.2. 응원가: Hala Madrid y Nada Más[47][편집]
5.3. 응원하는 유명인사[편집]
- 김재원
- 김형준
- 꾸티뉴
- 남구
- 노윤하
- 라파엘 나달
- 란란
- 러셀 크로우
- 레이 미스테리오
- 루카 돈치치
- 망누스 칼센
- 미로
- 바다 하리
- 박유림
- 비고 모텐슨
- 서유리
- 세르히오 가르시아
- 알베르토 델 리오
- 압둘라 2세
- 야니스 아데토쿤보
- 야시엘 푸이그
- 에바 카네이로
- 잭 에프론
- 제니퍼 로페즈
- 조엘 엠비드
- 최현석
- 페넬로페 크루즈
- 페르난도 알론소
- 프란체스코 토티
- 플라시도 도밍고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 카를로스 사인츠
- 카를로스 사인츠 주니어
- 카를로스 알카라스
- 크러쉬
- 하빕 누르마고메도프
6. 선수단[편집]
7. 코치진[편집]
8. 보드진[편집]
9. 스폰서[편집]
9.1. 메인 스폰서[편집]
9.2. 글로벌 스폰서[편집]
9.3. 지역 스폰서[편집]
10. 라이벌리[편집]
10.1. 엘 클라시코[편집]
시작은 조안 감페르와 스페인을 쿠데타로 장악했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리베라가 딱히 레알을 지지한 것도 아니고, 감페르보다 리베라 정권이 빨리 무너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조안 감페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 또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것이고 리베라와는 관계없었다.
문제는 스페인 내전 시기이다.[51] 이 시기 축구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주젭 수뇰이다. 본래부터 카탈루냐 독립파이면서 강성 좌파였고, 태생적으로 정치가의 아들이면서 카탈루냐 좌익 정파였던 ERC의 당원이기도 했으며, 좌익 신문 라 람블랴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뇰이 1935년 카탈루냐 축구 협회장이자 바르셀로나 회장이 된다. FC 바르셀로나에 카탈루냐 민족성에 더해서 반 정부 성향이 강해진 것이 이 시기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터졌고, 수뇰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추종 세력으로 추정되는 세력에게 총살을 당해서 암매장되었다. 일단은 프랑코 세력이라고 추정하긴 하는데, 스페인 내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서 누가 죽였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일단은 프랑코 세력이라는 것이 정설이긴 하다. 참고로 수뇰의 시체가 발견되는 데는 50년 세월과 '수뇰의 친구들'이라는 카탈루냐 민족주의 단체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서 FC 바르셀로나와 수뇰은 카탈루냐 독립운동과 반프랑코 투쟁의 상징이 된다.[52] FC 바르셀로나의 강경한 분리주의와 반프랑코 성향이 본격화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이 이전의 FC 바르셀로나는 RCD 에스파뇰을 포함한 이 지역 축구 협회에 모두 관여하기도 하는 등 딱히 민족 분리나 독립 성향이 강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바르셀로나의 2대 회장이자 최초의 카탈루냐인 회장인 바르톨로메우 테라다스는 카탈루냐 축구 협회장도 겸임하면서 사재를 동원해서 RCD 에스파뇰의 창단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다만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는 좀 많이 골 때린다.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골 때리지만, 특히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 내전까지 겪으면서 난리를 쳤다. 때문에 이 시기를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발로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이다. 막상 이 시기 카탈루냐에서 대중정치를 주도한건 예나 지금이나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과 사이가 불편하고 반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아나키스트 거대노조 CNT였기 때문이다. 진짜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바스크 지역은 대놓고 왕따를 자처해서 남부와는 아무런 연대도 하지 않다가 각개격파되었다. 반면 바르셀로나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합집산의 극한을 보여줬다.
스페인 내전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면서 총통의 자리에 오른 프랑코는 스페인 국가주의를 주장했다. 모든 지역에서 지역색을 빼는 작업을 시작했고, 그중에서 가장 강한 타격의 대상이 된 것이 좌익이면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스페인 내전 시기 거의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카탈루냐 지역이었다.[53] 프랑코는 모든 축구팀의 명칭은 스페인어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영어식으로 'Football Club'의 약자인 'FC'를 사용하던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어 문법에 따른 명칭인 'Club de Futbol'의 약자인 'CF'로 바꾸어야 했다.[54] 그리고 스페인 외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상징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카탈루냐 기를 사용했던 바르셀로나의 엠블럼 역시 교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55] 또한 1940년 프랑코 지지자였던 엔리케 피녜이로가 바르셀로나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바르셀로나 경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의 취임이었는데, 오히려 나중에는 바르셀로나를 정치 압력에서 보호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단적으로 엔리케 피녜이로 회장 재임 시기인 1943년 6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노골적인 경기 조작이 있었다. 1차전 홈 경기에서 바르셀로나가 3 대 0으로 승리한 이후, 차마르틴 경기장에서 벌어진 레알 마드리드의 홈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1 대 1로 승리했던 것이다. 이 경기에서 보안부장이 전반전 시작하기 전에 바르셀로나에 대해 "너희들이 경기를 할 수 있는 건 위에서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협박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피녜이로는 이에 대해서 항의하고 사임했다. 이후 바르셀로나 회장직은 프랑코 체제 임명 시기를 짧게 거치다가 오히려 강경한 대응이 더 문제를 야기한다는 판단이 내려져서 카탈루냐 출신 임명을 거쳐서 자체 선임으로까지 변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스페인 축구 협회는 해당 경기를 무효로 처리했고, 이후에 레알 마드리드 회장으로 취임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56]
그러나 이후 1978년까지 이어진 프랑코 치세에서 바르셀로나는 라리가 우승 8번, 코파 델 레이 우승 10번을 차지했고, 오히려 레알 마드리드는 21년 간 무관 세월을 보내야 했다는 점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프랑코의 실질적인 지원이 있기는 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프랑코 정권의 비호를 전면 부인하는 것은 어려우나, 실제로 21년 무관까지 겪은 레알 마드리드가 잘나가기 시작한 것은 프랑코보다는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 발발 시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었던 라파엘 산체스 게라는 대표적인 공화주의자라서 프랑코의 정적이었고 내전 이후 감옥살이를 했다.[57] 부회장과 재무 담당자도 같이 죽었고, 후임인 후안 호세 바예호와 안토니오 오르테가 역시 레알 마드리드 역사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다. 특히 안토니오 오르테가는 공화군 소령으로서, 바르셀로나의 수뇰 같은 공화주의 좌파라서 내전 이후 군사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 프랑코 독재가 가장 심했던 초기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런던으로 도망쳐서 변호사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프랑코의 우파 국가주의와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민족주의&좌익 성향의 대립에, 앞서 언급된 레알 마드리드와 관련된 승부 조작 사건의 임팩트가 더해져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카탈루냐와 카스티야라는 해묵은 민족 간 대립이 오히려 격화되었다. 그런데 이게 진짜로 이 시기에도 심각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 것이, 이 시기를 대표한 바르셀로나 선수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골수 팬들 중에서 일부는 요한 크루이프보다도 사랑한다는 라슬로 쿠발라를 들어야 할 것인데, 쿠발라는 말년을 왕년의 라이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RCD 에스파뇰에서 보냈다. 그리고 쿠발라는 에스파뇰에서 선수 말년을 보낸 것과 별 상관없이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 레알과의 라이벌 의식이 진짜로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주의 의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바르셀로나가 이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권을 넘겨준 영향인지는 좀 심각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고려를 해야 할 것은, 바르셀로나와 에스파뇰의 관계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카탈루냐의 카스티야에 대한 감정은 역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쿠발라의 일화로만 이를 유추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여지가 있다. 반대의 예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경우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로 남았으나 그의 영입 과정에서부터 레알 마드리드와의 대립이 있었다. 바르셀로나가 먼저 접근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의 개입으로 공유(?)를 하게 되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바르셀로나 측이 이를 포기하면서 그는 레알 마드리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선수 이적은 불가능에 가까웠는데,[58] 드물게 있었던 두 팀 간 이적에서 루이스 피구 사건만큼 두 팀의 갈등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는 드물 것이다. 피구는 바르셀로나에서 부주장의 위치까지 오르며[59]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다. 피구 본인도 레알 마드리드를 신나게 디스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심장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2000년에 무시무시한 계약 파동 끝에 바르셀로나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피구와 에이전트가 주급 인상을 요구하며 레알과 바르셀로나 사이를 오가다가 바이아웃을 발동한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결국 시즌이 지나고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스포티파이 캄 노우에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가 열린 날, 10만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FUXX과 수전노 등 야유를 한몸에 받고 돼지머리 투척까지 당하면서 경기를 망쳤다.
이렇듯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간의 더비 매치, 즉 엘 클라시코는 그 명성답게 화려하면서도 두 지역 간의 엄청난 반감정 때문에 누구 하나 작살이 날 것 같은 무서운 분위기로 진행되곤 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주요 선수들로 이루어진 스페인 대표팀이 2008 유로, 2010 월드컵, 2012 유로에서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두고 두 팀 선수들 사이에 스페인 국가대표라는 유대감이 생기면서 꽤 훈훈한 분위기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2010년에 레알 마드리드가 대패했을 당시 세르히오 라모스가 돌아버려 리오넬 메시와 카를레스 푸욜, 차비 에르난데스를 차고 때렸던 것처럼 승부에서 지면 난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지역감정이나 팀 간의 적개심과는 별개로 레알 마드리드의 곤살로 이과인은 엘 클라시코가 벌어지면 맨 처음 하는 행동이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를 찾아가서 껴안고 뽀뽀하고 별 짓을 다하는 것이었다. 메시 역시 이렇게 행동하는 이과인을 흔쾌히 받아들였었다. 엘 클라시코이기 이전에 같은 국적의 동질감 때문에 메시와 이과인은 엘 클라시코 라이벌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분이 깊다.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출신들이 아닌 데다 같은 국대 선수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거니 팬들 역시 오히려 보기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10.2. 데르비 마드릴레뇨[편집]
10.3. 그 외[편집]
두 팀은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만 자그마치 12번 마주쳤다. 아직 결승에서 만난 적은 없으나 12번 중 무려 7번이 4강 대진이었으며, 역대 토너먼트 결과는 바이에른 2연승→마드리드 2연승→바이에른 1승→마드리드 2연승→바이에른 2연승→마드리드 3연승이다. 그리고 12번 중 7번이 합계 1점 차 내 승부였고, 2013-14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가 합계 5-0으로 승리하기 전까지는 합산 점수 3점차 이상 난 적이 없었으며, 한쪽이 무득점에 그친 적도 없었다. 상대 전적은 바이에른이 한동안 앞섰으나 2018년에 뒤집혔다. 유럽 무대를 대표하는 막상막하 라이벌이다.
2010년대에는 2011-12, 2013-14, 2016-17, 2017-18까지 4번이나 만나면서 지긋지긋한 악연을 이어갔다. 2016-17 시즌 8강 추첨 때는 각 팀의 대표로 나온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와 안드레아스 융의 썩은 표정이 잡히기도 했다.
이후에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3M, 즉 Madrid, Munich, Manchester로 묶여 서로 자주 만났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개편 후 2000년 8강, 2003년 8강에서 만났고 결과는 전부 레알이 4강에 진출했다. 10년 후, 2013년에 16강에서 만났지만 또 다시 레알이 승리했고, 4년 후 UEFA 슈퍼컵에서 만났지만 이번에도 레알이 승리했다.
두 팀의 관계는 과거 뮌헨 비행기 참사 때 레알 마드리드가 도와주려 했던 것을 비롯해 우호적이었으나, 1990년대부터 은근한 신경전과 라이벌 의식이 생겨 구단 간 사이가 오묘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영입에 대한 신경전, 다비드 데헤아 팩스 사건, 폴 포그바의 이적 사가 등으로 인해 관계가 틀어졌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이후 라파엘 바란과 카세미루의 맨유 이적을 보면 다시 우호적인 관계가 된 것으로 보인다.
11. 관련 기록[편집]
11.1. 우승/준우승 기록[편집]
※ 굵게 표시되어 있는 것들은 최다 기록이다.
- 라리가
- 우승: 35회
- 준우승: 25회
- 코파 델 레이
- 우승: 20회
- 준우승: 20회
- 유러피언 컵/UEFA 챔피언스 리그
- 우승: 14회[62]
- 준우승: 3회
- UEFA컵
- 우승: 2회
- UEFA 컵위너스컵
- 준우승: 2회
- UEFA 슈퍼컵
- 우승: 5회
- 준우승: 3회
- 코파 데 라리가[63]
- 우승: 1회
- 준우승: 1회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우승: 12회
- 준우승: 5회
- 코파 에바 두아르테[64]
- 우승: 1회
- 준우승: 2회
- FIFA 클럽 월드컵
- 우승: 5회
11.2. 선수 출장/득점[편집]
- 통산 출장 기록
- 통산 득점 기록
- 통산 최다 득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450[72]
- 라리가 최다 득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311[73]
- 코파 델 레이 최다 득점: 산티야나(Santillana), 49[74]
-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득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105[75]
- 시즌 득점 기록
- 전 대회 최다 득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61[76]
- 라리가 최다 득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48[77]
- 코파 델 레이 최다 득점: 페렌츠 푸스카스(Ferenc Puskás), 12[78]
-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득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17[79]
11.2.1. 최다 출장 기록[편집]
11.2.2. 최다 득점 기록[편집]
11.3. 이적료[편집]
11.3.1. 최고 이적료 영입 기록[편집]
11.3.2. 최고 이적료 방출 기록[편집]
11.4. 상대 전적[편집]
12. 이야깃거리[편집]
12.1. 레알 마드리드에 관한 오해[편집]
12.2. 명장들의 무덤[편집]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은 전 세계의 명장들이 노리는 자리인데, 수뇌부의 인내심이 부족하여 부진이 찾아오면 얼마 안 돼서 해임당하기 때문에 '독이 든 성배'라고 불린다.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UEFA 챔피언스 리그 3개의 대회에서 한 시즌에 못해도 1개는 꼭 따야 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이 엄청나게 큰 자리이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을 오래 하려면 레알 수뇌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 하며, 팬들에게는 '재미있고 화끈한 축구 구사' 내지는 '리그 우승 전력'을 시즌 내내 유지하여야 한다.
문제는 그걸 떠나서도 보드진이 지나치게 감독을 자주 바꾼다는 것이다. 1960년대 통산 595경기를 지휘한 전설적인 미겔 무뇨스[80] 를 제외하면, 레알에서 두 번째로 긴 임기 동안 연임한 감독인 비센테 델 보스케가 레알을 지휘한 경기 수가 고작 233경기, 1999~2003 4시즌 연속에 불과하다. 델 보스케를 넘어 레알 마드리드 역대 2번째 최다 경기 지휘 기록을 경신한 지네딘 지단도 4시즌 연속 재임은 실패했다. 더불어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150승을 넘긴 감독도 357승의 무뇨스, 163승의 지단까지 겨우 둘뿐이다. 이렇게 국대 감독 갈아치우듯 감독이 잘려나가니 선수단의 일관성도 유지하기 힘들고 유스 운영에 힘을 주기는 더더욱 힘들어 돈지랄 구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 환경이다.
12.2.1. 라몬 멘도사 재임기[편집]
- 1990년: 스완지 시티와 레알 소시에다드를 맡으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아 1989년에 부임한 존 토샥 감독은 재임 첫 시즌에 라리가 우승 트로피를 높이 들었으나, 2시즌 째인 1990-91 시즌 초반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그가 경질된 데는 당시 팀의 주전이던 마놀로 산치스와의 갈등도 한몫했는데, 실제로 그가 1990년에 경질되고 나서 "산치스는 최악의 인간이다. 그를 만난 건 내 생애 최대의 불운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99년에 그가 감독으로 돌아왔을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 1991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두 번째로 감독직에 올랐지만, 1991년 1월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샤에게 지는 바람에 2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 1992년: 1989-90 시즌에 레알 사라고사를 5위까지 끌어올린 라도미르 안티치가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1991년 3월에 감독직을 맡았으나, 이사진이 레오 베인하커르 감독을 다시 영입하기 위해 경질했다.
- 1992년: 레오 베인하커르가 이사진의 지지로 2번째 감독직 수행을 시작하나, 6개월 만에 무관으로 경질되었다.
- 1994년: 알바세테 발롬피에를 2년 연속 승격시켜 지도력을 인정받은 베니토 플로로가 1993년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루었지만, 1994년 1월 8일에 바르샤를 상대로 호마리우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0-5로 지는 바람에 2개월 만에 경질되었고, 그 공백을 비센테 델보스케가 메꾸었다.
12.2.2. 로렌소 산스[81] 재임기[편집]
- 1995년: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 감독으로 시작하여 CD 테네리페 감독 시절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내고 UEFA 컵 진출권을 따낸 베테랑 지도자 호르헤 발다노가 1994-95 시즌에 라리가 우승을 이루어냈지만, 1995-96 시즌 초반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 1996년: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를 코파 델 레이 우승으로 이끈 아르세니오 이글레시아스 감독이 1995-96 시즌 도중에 부임했지만, 시즌 막판에 챔스 진출 실패와 그해 챔스 8강 탈락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그 공백을 또다시 델 보스케가 메꿨다.
- 1997년: AC 밀란 출신 명장 파비오 카펠로는 그 해에 라리가 우승을 이끌어냈으나, 경기 내용이 지루해서 경질되었다.
- 1998년: 32년 만에 챔스 우승을 이끈 유프 하인케스 감독 역시 시즌이 끝나고 경질되었다.
- 1999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아 4강까지 진출시킨 거스 히딩크 감독 역시 엘 클라시코에서 1무 1패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시즌 도중에 경질되었다.
- 1999년: 존 토샥이 레알 마드리드에 복귀하나, 그해 11월에 경질되었다.
12.2.3. 플로렌티노 페레스 재임 1기[편집]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이 2003년까지 4년간 감독직을 맡고 물러난 이후,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감독 경질 레이스가 다시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페레스 회장의 갈락티코스 정책은 감독보다 슈퍼스타 선수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2004년: 전 맨유 수석 코치인 카를로스 케이로스가 델 보스케의 후임으로 부임하나, 한 시즌 만에 경질되었다.
- 2004년: 전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팀의 원클럽맨 레전드인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는 단 6경기만 치르고 경질되었다.
- 2004년: 레알 마드리드 주전 선수 출신인 가르시아 레몬이 시즌 도중에 취임했으나 3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 2005년: 브라질 선수를 대거 영입한 전 브라질 국가대표팀 감독 반들레이 루솀부르구는 1시즌도 못 채우고 2005년 12월에 무관 상태로 경질되었다.
- 2006년: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감독으로 재임 중이던 후안 라몬 로페스 카로가 1군 감독으로 승진했으나, 5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12.2.4. 라몬 칼데론[82] 재임기[편집]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물러난 뒤 칼데론이 취임하여 효율적인 선수단 운영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감독에 대한 인내심은 커지지 않았다.
- 2007년: 파비오 카펠로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 복귀하여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따냈지만, 1996-97 시즌 때와 같은 이유로 경질되었다.
- 2008년: 전 헤타페 CF 감독 베른트 슈스터도 2007-08 시즌에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따냈지만, 2008-09 시즌 도중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83]
12.2.5. 플로렌티노 페레스 재임 2기[편집]
- 2009년: 전 세비야 FC, 토트넘 홋스퍼 감독 후안데 라모스가 27전 18승 1무 8패로 시즌을 마쳤으나 엘 클라시코 대패의 후유증으로 결국 2009년 여름 계약 연장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 2010년: 비야레알 CF를 챔스 8강에 진출시킨 명장 마누엘 페예그리니 역시 코파 델 레이 조기 탈락, 라리가 준우승, 챔스 16강 탈락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이후 주제 무리뉴가 2010년부터 3년간 연속으로 유임하고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역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며 2017년까지 계약 연장이 될까 싶었지만 2014-15 시즌 종료 후 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새로 감독 자리에 오르게 된 라파엘 베니테스도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 대패해 경질설이 올랐다가 결국 발렌시아 CF 원정에서 2-2 무승부로 결국 경질되었다. 그 후로 팀의 레전드 지네딘 지단이 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처음에는 감독 경력이 부족한 지단의 선임에 대한 의구심도 많았지만 첫 2시즌 동안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 라리가 우승 1회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는 반등에 성공한다. 2017-18 시즌에는 초반기에 역대급으로 부진했으나, 다행히 나중에 페이스를 회복하고 챔스 3회 연속 우승이라는 역대급 업적을 이루면서 모가지 걱정은 덜게 됐다. 그러나 이번엔 지단이 스스로 사임했고 후임으로 스페인 대표팀의 줄렌 로페테기 감독이 내정되었다. 로페테기 감독은 2018 월드컵까지만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물러나며 월드컵 직후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한다고 한다.[84][85] 그런데 로페테기는 첫 시즌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경질되었으며[86] , 카스티야 감독이던 산티아고 솔라리가 이를 대신해 감독 대행직을 수행하다가 성적이 좋아져서[87] 정식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나 솔라리 역시 같은 시즌에서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에서 AFC 아약스한테 1-4로 대패하고 합산 3-5로 탈락하자, 결국 경질되고 지네딘 지단이 돌아왔다. 즉, '2017-18 시즌 종료 이후 지단 사임→2018년 여름 로페테기 선임→2018년 10월 로페테기 경질→2018년 11월 솔라리 선임→2019년 3월 지단 복귀 및 솔라리 경질'이 되어서 한 시즌에만 무려 2번이나 감독을 교체하게 되었다.
12.3. 스페인 대표팀과의 관계[편집]
2000년대 후반 이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는 레알 마드리드의 찬란한 역사에 비하면 매우 초라했다. 스페인 국민들은 축구 국가 대항전에 열광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국제 경제 제재와 프랑코 독재 정권이었다. 스페인은 2차 대전 당시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를 오락가락한 행보 때문에 종전 후 준추축국 취급을 받아 서방으로부터 혹독한 경제 제재를 받았고, 유엔 활동을 극도로 제한당하는 등 수십 년간 국제 왕따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88] 스페인에 세계가 허용한 단 하나의 국제 행사가 바로 축구라서 당연히 월드컵 성적은 스페인 국민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각종 국제 대회에서, 20세기 세계 최고의 클럽 1위에 선정될 정도로 레알 마드리드의 성과는 뛰어났고, 이 선수들이 주축이 되는 국가대표팀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국제 대회의 왕관이라 볼 수 있는 FIFA 월드컵 우승은 스페인 국민들의 숙원이었다. 문제는 그 대단한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중심의 대표팀이 근 70여 년간 월드컵 우승 0회, 유로 우승 1회의 부진한 성적을 써버린 것이다.
경기 외적 요인으로 허무하게 탈락한 적도 있다.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에서 프랑코가 앙숙 관계인 소련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8강에서 소련 상대로 경기를 치르질 못해서 광탈해버렸다. 해당 대회 우승팀인 소련의 스카우터들이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대해 압도적인 선수단이라 평가를 내리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해 역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라는 평가를 내렸다는 면을 감안하면 사실상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이 스카우터들의 평을 들은 소련 축구 협회는 충격에 휩싸였다고 하는데, 스페인은 경기도 하지 않고 광탈을 해버렸다. 이 잘못은 유로라는 대회의 상징성을 무시한 프랑코의 실수였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립을 너무 신경쓴 결과 이런 처참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다음 스페인에서 개최하게 된 유로에서는 프랑코는 이 대회를 적극적으로 파시즘 홍보에 사용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결승전에서 귀빈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볼쇼비키를 상대한 부통령을 부른 것이다. 베르나베우 경기장의 120,000명의 관중이 프랑코를 연호한 것 역시 덤이었다. 결과는 76분 레알 사라고사의 마르셀리뇨의 결승골로 스페인이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바이에른 뮌헨이 앞장선 독일, 유벤투스와 밀란 형제가 이끈 이탈리아가 각각 4회나 월드컵 우승을 들어올리며 축포를 쏘는 광경을 스페인 국민들은 오랜 기간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만 봐야 했다. 당연히 스페인 내부에선 "우린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이라는 레알 마드리드와, 유수의 명문 클럽이라는 FC 바르셀로나까지 보유하고 있는데 왜 월드컵 성적은 이 모양 이 꼴이지?"란 질문이 끝없이 쏟아졌다. "두 클럽 사이의 지나친 라이벌리 때문에 하나의 팀이 안 되는 것이다.", "그냥 우린 마가 끼었다." 등 온갖 원인을 분석하는 칼럼도 쏟아졌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의 선수단이 전성기에 올라 처음으로 레알을 밀어내고 국대의 주축이 되었는데, 바로 메이저 대회 3연패의 역사를 써버렸다.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감독인 비센테 델 보스케조차도 바르셀로나 선수단과 점유율 축구 전술을 그대로 뜯어 국대에 이식하고는 국가 대항전에서 성과를 냈다. 이에 스페인에 밀려 우승을 놓친 네덜란드 언론들과 영국, 독일 언론들은 스페인 국가 대표팀을 향해 "스페인이 월드컵을 우승한 게 아냐. 카탈루냐가 스페인 국기 아래 우승한 거지"라고 질투심 가득한 비꼬는 기사를 잔뜩 실었다. 반스페인 감정이 거센 카탈루냐 언론들이 옳다구나 하고 월드컵 우승 후 바르셀로나에 줄줄이 내걸린 카탈루냐 독립 깃발과 함께 이런 해외 기사를 줄줄이 실어 스페인을 조롱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브라질 월드컵 바로 직전인 2013-14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챔스와 코파 델 레이 우승으로 더블을 달성했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리그를 우승해 FC 바르셀로나는 간만에 무관의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는데,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스페인이 예상을 깨고 가장 먼저 탈락하여 문제가 되었다. 월드컵 직전 시즌의 성적 때문에 브라질 월드컵 스페인 팀에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들이 전년도보다 높은 비중으로 들어갔는데,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많았던 이전 대회와 달리 성적이 나빴다는 것이다.
다만, 우선 이는 사실이 아니다. 폰치노바 쇼크라 불리는 네덜란드와의 조별 리그 첫 경기 선발 명단에서 레알 선수는 3명이었고, 아틀레티코 선수는 디에고 코스타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바르셀로나 선수는 무려 5명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참패는 이미 챔피언스 리그에서 여러 번 분석된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전술을 주입하고는 중원에만 노쇠화된 바르셀로나 주전을 쓴 비센테 델 보스케의 이도저도 아닌 전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스페인은 최전방에 디에고 코스타를 두고는 중원엔 2010년도의 노쇠화된 주전을 대거 배치했는데, 코스타는 아틀레티코와 첼시를 거치며 선수비 후역습 전술에 최적화된 스트라이커이지, 공간 창출에 능한 공격수나 폴스 나인은 아니다. 그리고 그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BBC라고 불리는 외국인 공격진이 이끄는 빠른 역습으로 빼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이지,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이후 후방 빌드업을 중요시한 레알 마드리드의 스타일이나 티키타카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이 당시의 선수단 대부분이 스페인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그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확실한 스페인인 주전은 이케르 카시야스, 세르히오 라모스, 다니 카르바할, 샤비 알론소 4명뿐이었다. 아틀레티코 역시 마찬가지로 티키타카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이 90분간 제대로 한 거라곤 티키타카에 익숙한 중원에서 볼을 돌리며 점유율을 높인 것뿐이었다. 네덜란드의 루이 판할 감독은 공을 뺏을 때마다 정확한 롱 볼로 빡빡한 스페인 중원을 제쳐버리고 전방의 발빠른 아르연 로번과 로빈 반 페르시에게 전달하여 스페인의 뒷공간을 털어먹을 것을 지시했고, 폼 떨어진 카시야스와 정신줄 놓은 수비진 때문에 이게 기가 막히게 먹혀들어가 5골이나 허용해버렸다.
따라서 대표팀의 부진한 성적이 온전히 레알 마드리드의 탓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상당히 문제가 있다. 스페인 국가대표의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압도적 행보는 바르셀로나가 2000년대 후반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도 분류될 수 있는 팀을 보유했기에 일어난 일이다. 거기에다가 그 팀의 중심은 역시 차비와 이니에스타로 대표되는 스페니시 코어였다. 세상에 그 어떤 감독이나 축구 협회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역대 최강의 팀이라 불리는 팀의 전술과 선수들을 택하지 않고 대항전에 나가겠는가? 그리고 당시 주장이었던 카시야스가 레알 마드리드 출신으로서 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 간의 케미스트리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카시야스는 역대 주장들과 비교했을 때 당시 바르셀로나 선수들과 유달리 잘 지내기로 유명했기 때문.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대항전 황금기는 3번 정도 있었다. 그 시기는 레알 마드리드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유러피언 컵 5연패 우승을 이루던 시절, 갈락티코스 1기 시절, 그리고 지네딘 지단 부임 시절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네딘 지단 부임 시절은 남아공, 브라질 월드컵 후라서 일단 제외를 하자. 유러피언 컵 5연패는 프란시스코 헨토와 같은 스페니시 선수들도 있었으나 엄연히 말해서 에이스는 스페인 출신이 아닌 아르헨티나 출신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89] 와 헝가리 출신인 페렌츠 푸스카스였다. 그리고 그 스페인으로 귀화한 디 스테파노는 1954 월드컵과 1958 월드컵, 그리고 1956 유로마저 귀화와 관련된 규칙 때문에 못 나가게 된다. 이들이 활약할 때 1958년부터 월드컵에서는 펠레라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등장하면서 월드컵을 싹쓸이한다. 그리고 갈락티코스 1기의 중심은 라울 곤살레스를 제외하면 엄연히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호베르투 카를로스 등 자국의 선수들이 아닌 외국인 선수들이다.
1950-60년대의 저승사자 군단보다 스페인 선수들의 비중 역시 적기에, 레알 마드리드의 성적이 그대로 월드컵까지 오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레알 마드리드의 성적에 비해서 스페인 국가대표가 저조한 성적을 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 중에서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FC 바르셀로나만큼의 성적을 낸 레알 마드리드 스쿼드는 있을지언정 이들과 같은 스페니시 중심의 스쿼드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예전의 스페인 국가대표팀이 항상 저조한 활약만을 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성기에 버금가는 성적을 기록하면서도 스페니시 중심의 팀이었던 Yé-yé 마드리드는 1964년 유로 우승을 일구어냈다. 디 스테파노 역시 귀화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메이저 우승의 맛을 보았다.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이 월드컵 우승과 함께 역사상 최고의 대표팀 반열에 오른 것을 감안하면 스페인의 성적 또한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레알 마드리드는 유럽 무대의 주도권을 완전히 AFC 아약스와 바이에른 뮌헨에게 넘기게 되면서 갈락티코스 때까지 지금의 명성과는 조금 먼 팀이 된다. 예를 들어서 Yé-yé 마드리드 다음으로 스페인 코어가 주축이 된 독수리 오형제는 클럽 성적이 위에 언급된 시대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결론은, 스페인 국가 대표팀의 2010년대 이전의 빈약한 트로피 갯수는 분명히 레알 마드리드라는 축구팀의 위상에 비해 빈약하다는 것이지만, 이는 레알 마드리드의 스페인 코어가 빈약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스페니시 코어의 전성기는 펠레의 등장과 겹쳤으며, 펠레의 월드컵 독주가 끝나자마자 아약스와 바이에른의 독주로 인해 네덜란드와 독일로 유럽의 패권과 월드컵이 바로 넘어가버렸다. 즉 전성기 시절 레알 마드리드 위주의 스페인 팀은 괜찮았으나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는 것이다. 갈락티코스의 주축이 외국인들이었다는 점 역시 이에 한몫한다.
2018년 월드컵을 앞두고는 이스코가 스페인의 국가대표 에이스로 뛰면서 또다시 레알 마드리드가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될 기회가 왔다. 그러나 국가대표팀 감독 줄렌 로페테기가 국가대표팀 감독직 재계약 체결 20여 일 만에 레알 마드리드와 물밑 접촉을 했다가 들통이 나 월드컵 개막을 하루 앞두고 경질되는 막장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스페인 축구 협회가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감독을 잘라버리는 초강수를 둔 것은 국내 비난 여론이 당연히 레알 마드리드와 로페테기를 향할 것임을 뻔히 알고 한 일인데, 배신자 로페테기를 날려버림과 동시에 레알이 사고 친 이번 기회에 파워 게임을 벌여 앞으로 앞으로 레알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물론 겉으로는 "차후 스페인 감독으로 부임할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아픔을 감수하고 결단을 내렸다"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다.
사실 클럽에 소속된 선수를 빼내 부상 위험에 노출시키는 국가대표팀과 클럽 사이의 은근한 알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둘 사이의 파워 게임도 스페인만의 일은 아니지만, 물밑 작업을 하더라도 일단 안 들켰어야 했다. 스페인 국민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을 흔든 무책임한 감독 로페테기와 레알 마드리드에겐 당연히 범국민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성난 여론에 눌린 로페테기는 결국 해명 기자 회견을 열어 눈물을 쏟으며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밤"이라며 사과하는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 역시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라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었고,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스페인 국민들의 화만 잔뜩 돋우었다. 급작스레 선임된 페르난도 이에로 감독의 스페인은 16강에서 한 수 아래인 러시아에 패하며 탈락해버렸고, 이런 대형 사고를 치면서까지 기어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 부임한 로페테기는 14경기 만에 역사적인 엘 클라시코 1-5 대패를 기록하며 레알에서도 경질당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처음으로 소집되는 9월 A매치 기간에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가 가장 많이 뽑히면서 대표팀에서 점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이 네이션스 리그에 대해 클럽 감독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데, 대표적으로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도대체 뭘 위한 대회인지 모르겠다. 이런 건 선수들 부상 위험만 높일 뿐"이라며 소리 높여 비판하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국가대표팀 내 비중이 극도로 높아 피해가 그 어떤 클럽보다 막심하다. 또 현재 리그 성적이 좋지 못해 선수단의 피로도에도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의 국가대표팀 뒤통수 사건 때문에 당사자인 로페테기는 물론이고 천하의 페레스 회장조차 국가대표팀에 찍소리도 못하고 고분고분 선수들을 보내고 있다. 네이션스 리그로 지친 선수들이 돌아와 리그 성적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건 덤. 당연히 레알 마드리드의 클럽 수뇌부에선 스페인 축협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다. 러시아 월드컵 이후 스페인 대표팀의 신임 감독으로 루이스 엔리케가 부임을 했는데, 바르셀로나에서 세르지오 부스케츠 달랑 한 명만 선발하면서 안 그래도 과중한 레알의 국가 대표팀 부담이 더 커져버렸다. 이젠 빈말로라도 레알과 국대 사이가 좋다고 말하기엔 어색한 상황까지 와버렸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엔리케가 레알 선수들의 기용을 줄여버리면서 이 부담은 당분간 줄어들게 되었다.
12.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의 관계[편집]
인테리스타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구단은 다름 아닌 레알 마드리드였다. 일명 '믿고 쓰는 레알산(믿쓰레)', '우리 친구' 등의 별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2000년대 중반 유독 레알에서 부진했던 선수를 인테르가 영입하면 클럽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멋진 활약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트레블의 주역 베슬리 스네이더르, 왈테르 사무엘,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레알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인테르에서 부활한 선수들이다. 그래서인지 인테르 팬들 중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꽤 많았고, 레알 마드리드 팬덤에서도 인테르가 09/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바르셀로나를 꺾은 바 있기 때문에 인테르의 이미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2018년 여름, 루카 모드리치 이적설로 두 구단 사이는 틀어지게 됐다. 모드리치의 에이전트가 인테르에게 먼저 모드리치에게는 자유 계약으로 풀릴 수 있으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테르는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이었던 모드리치를 순순히 내줄 리가 없으니 일단 기다리면서 AS 모나코로부터 케이타 발데를 임대해 오는 것에 주력했다. 그리고 모드리치에게는 훈련에 무단 불참하면서 구단에 대들며 태업하게 유도하지도 않았다. 모드리치 본인도 일단 자신은 프로답게 전 팀과 좋게 이별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 임대, 후 이적으로 하려고 했던 건 보상금 명목이었다. 당시 인테르가 FFP 징계를 받고 있던 게 가장 컸다.
모드리치와 에이전트 사단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스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이에 레알 마드리드는 인테르를 불법적인 사전 접촉으로 고소할 예정이라고 한다. # 그리고 FIFA는 인테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지 않기로 하여 사건은 일단락됐다. #
그래도 이후 아슈라프 하키미를 비교적 싸게 인테르에 내주는 모습을 볼 때, 구단 간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모양이고, 그냥 단순 해프닝으로 끝난 듯하다.[90]
12.5. 징크스[편집]
-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대회 명칭이 바뀐 뒤로, 결승전에서 패배가 없다. 총 전적은 8전 7승 1무로[91] , 특히 유벤투스 FC는 3번이나 결승전에서 패하며 가장 많은 패배를 당했다.
-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만나면 90분 안에 경기가 안 끝난다. 결승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이는 레알 마드리드이지만, 데르비 마드릴레뇨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2번의 결승전은 유독 치열해 90분 안에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 물론 1번은 연장전 끝에 승리, 1번은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빅 이어를 놓친 적은 없다.
- 트레블을 달성한 적이 없다.[92] 챔피언스 리그에서 14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최다 우승 클럽이지만, 트레블을 완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험이 고작 1회인 셀틱 FC, PSV 에인트호번, 맨체스터 시티 FC도 트레블을 달성한 것을 보면 트레블과는 정말 인연이 없음을 알 수 있다.
12.6. 여담[편집]
- 전통적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은 왕실의 클럽, 명문 클럽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고결한 서포팅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다만 현 국왕 펠리페 6세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팬이라는 괴리가 존재하기도 한다. 실제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현지 팬들을 보면 관전 태도도 비교적 질서 있고 차분한 편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많이 보러 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도 있긴 하다. 팬들 중에는 보다 정열적인 응원 분위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2010-11 시즌 라리가 32라운드 엘 클라시코를 보면 북도 치고 응원가도 크게 부른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따지면 레알 팬들이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이는 이유는 하도 많이 이겨서 굳이 늘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승률은 좀 떨어져도 다른 축구팀처럼 가끔은 깽판도 쳐보고, 열정적으로 승패에 열광하는 분위기를 찾아 아틀레티코나 헤타페 쪽으로 갈아타는 팬들도 사실 꽤 있는 모양이다.
- 상대 팀, 심지어는 라이벌 FC 바르셀로나 같은 팀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네 팀을 상대로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면 기립박수를 쳐주기도 한다. 미첼 살가도에 따르면 상대 선수를 대놓고 칭찬하여 자기네 선수들을 질책하는 의미인데 "야, 야, 레알 마드리드, 너네 병신같이 그렇게밖에 못하고 개털리고 있냐?"라고 비웃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기립박수를 받은 선수는 요한 크루이프,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지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프란체스코 토티가 있다. 다만 토티는 활약을 해서 박수를 받은 게 아니라, 후반전 막판에 교체 투입되면서 일종의 리스펙트를 받은 것이다. 해당 경기는 2015-16 시즌 챔피언스 리그 AS 로마전이었는데, 토티가 베르나베우를 방문하는 마지막 경기일 수 있다는 생각에 박수를 쳐준 듯하다.
- 공식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트로피를 들고 마드리드의 시벨레스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데,[93] 팀의 주장이 광장을 꽉 채운 선수들과 서포터들 앞에서 중심부 분수의 시벨레스 여신상에 키스를 하는 전통이 있다. 이런 관례로 스스로가 여신의 가호를 받는 클럽,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클럽이라는 자부심을 고취하는 듯하다. 이 때문에 우승을 많이 이끌었던 라울 곤살레스는 '여신의 남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9-20 시즌에는 라리가 우승을 하였으나 코로나19 확산 위험 때문에 구단 차원에서 광장에 모이지 말아달라고 성명을 냈고, 실제로 팬들이 자동차를 타고 광장을 도는 것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 수도인 마드리드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인 만큼, 스페인 왕족 중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 많았다. 레알 마드리드가 한창 잘나갔던 1950년대에는 라커룸에 왕세자가 아무 때나 출입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현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팬이다. 이외에도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94] , F1 선수 페르난도 알론소,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 페넬로페 크루스, 세계 3대 테너 중 한 사람인 플라시도 도밍고 역시 레알 마드리드 팬으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마찬가지로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는 바르셀로나의 팬이다. 사이가 안 좋아서 절교까지 했던 두 사람이지만, 백혈병 치료 과정에서 화해하고 우정을 쌓게 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 2015년, 일렉트로닉 아츠와 3년간 독점 계약을 체결하여 위닝일레븐 2016부터 2018까지는 레알 마드리드를 수록할 수 없게 되었다.
-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 선수들, 감독, 코치들과 모든 관련 직원들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모르면 스페인어를 의무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 2016년 한국타이어와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다. 경기 도중에 한국타이어를 홍보하는 배너를 볼 수 있으며 하프 타임에는 국내 TV에서 나오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이 모델로 나온 CF 영상이 그대로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에 나온다.
- 2023년 3월 10일에 Apple TV+를 통해 끝까지! 바모스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 Until The End)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공개될 예정이다. 내레이션은 데이비드 베컴이 맡았고, 2021-22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UCL 우승 여정 및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13.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14.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언사[편집]
레알 마드리드는 금세기 최고의 팀이다.
(세계 최고의 선수는 누구죠?)
레알 마드리드예요.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 되지 않는 것은 감독 경력에 공허함을 남기는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흰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팀의 가치를 대표한다.
한 아이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빛나는 9번이 되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시저스 킥을 할 거예요."[96]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이 되는 것은 거부하기 힘든 참으로 엄청난 유혹이다. 이미 한 번 해보았더라도 거절하기 어렵다.[97]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98]
세계에는 많은 최고의 클럽이 있지. 그중에서도 레알 마드리드는 정상에 있는 하늘 같은 팀이야.
레알 마드리드는 축구라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다.
크리스토퍼 클라리[99]
레알 마드리드야말로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코카콜라와 같은 존재다.
아우구스토 세사르 렌도이로[101]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훈장은 클럽 월드컵 훈장이 아니야. 레알 마드리드 휘장이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강팀에게 골을 넣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한 거죠. 레알 마드리드보다 강한 팀은 없으니까요.
레알 마드리드가 망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항상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
나는 2010년 전에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 30분을 뛰는 것이 다른 팀에서 90분을 뛰는 것보다 낫다.
1억 유로? 그걸로 나의 마드리드를 살 수 없어!
우린 레알 마드리드다. 어떤 팀이라도 상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역사상 최고의 팀이다.
트로피를 거머쥐는 것이 이 클럽의 DNA다.
레알 마드리드는 환상적인 클럽입니다. 그들이 저를 이기더라도, 항상 레알 마드리드를 사랑하고 팔로우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뛸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닌, 일부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타이틀은 매일 레알 마드리드에서 훈련한 것이다.
프리미어리그는 꿈이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는 판타지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는 곧 챔피언스 리그의 역사와 같다.
레알 마드리드의 소매에 괜히 숫자 13이 적혀있는 것이 아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항상 거기 있기 때문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신화적인 구단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이다. 스포츠에서 위대한 일을 성취하고 역사를 쓰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 최고의 빅클럽이다. 모드리치는 나에게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클럽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클럽이며 그런 팀과 연결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누가 알겠는가, 아마 언젠가 내가 그곳에서 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싶다.
모든 선수들은 절대적인 정상에 오르고 싶어하며, 레알 마드리드가 바로 절대적인 정상이다.
레알 마드리드. 그건 세계 최고의 팀.
레알 마드리드? 어떤 선수든 뛰고 싶어하는 곳이다.
축구 선수들에게는 꿈이 있다. 프리미어리그가 될 수 있고, 레알 마드리드가 될 수도 있다. 선수들은 저마다 꿈을 가지고 있고, 많은 축구 선수들에게 레알 마드리드는 꿈.
라파엘라 피멘타[103]
PL 오퍼 거절한 이유? 전에도 말했듯이,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클럽이야. 최고의 클럽, 최고의 선수들, 최고의 팀이자 내가 배울 것이 많은 최고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왜 바이에른 뮌헨으로 가지 않았냐고? 레알은 레알이다. 만약 레알에서 연락이 온다면 이적을 결정하는 건 쉬운 일이다.
AC 밀란이 아닌 다른 팀에서 뛸 기회가 있으면 어디서 뛰고 싶냐고요? 전 레알 마드리드를 선택할겁니다. AC 밀란의 전통과 역사에 근접한 팀은 레알 마드리드가 유일하거든요.
브라질에서 레알 마드리드? 세계에서 가장 큰 팀으로 여겨진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팀이자 축구의 정점이다.
15. 관련 문헌[편집]
- 축구의 신화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 - 루이스 미겔 페레이라 저/윤승진 역. 보누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