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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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샤를 9세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von Österreich


파일:Elizabeth of Austria.Queen of France.jpg

이름
독일어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von Österreich)
프랑스어
엘리자베트 도트리슈
(Élisabeth d'Autriche)
출생
1554년 7월 5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사망
1592년 1월 22일 (향년 37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배우자
샤를 9세 (1570년 결혼 / 1574년 사망)
자녀
마리 엘리자베트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형제
안나, 루돌프 2세, 에른스트, 마티아스, 막시밀리안 3세, 알브레히트 7세, 벤첼, 마르가레테
종교
가톨릭
1. 소개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결혼
2.3. 사별 이후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4. 여담



1. 소개[편집]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2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의 차녀이자 프랑스 왕국 샤를 9세의 왕비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랑스 왕비이기도 하다.[1]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오스트리아 대공국 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트는 언니인 안나, 남동생인 마티아스와 함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엘리자베트는 형제들과 함께 공부했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신실함을 길러 나갔다. 엘리자베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헝가리의 성녀 에르제베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녀를 롤모델로 삼았다.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딸들을 아끼던 인물로, 언니인 안나처럼 엘리자베트 역시 막시밀리안의 애정을 받고 자랐다. 엘리자베트는 아버지를 닮아 지적이고 매력적이었는데, 흠 잡을 데 없는 하얀 피부와 긴 금발 머리, 완벽한 체격으로 당대의 뛰어난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또한 보호받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정숙하고 경건하며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지만 순진하고 순수한 성격이었다.

2.2. 결혼[편집]


프랑스 왕국의 샤를과 혼담이 오가기 시작한 것은 아직 샤를이 오를레앙 공작이던 1559년부터였다. 엘리자베트의 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1세는 프랑스와의 혼담에 관심을 보였지만 확정되지는 않았으며, 덴마크 왕국프레데리크 3세, 포르투갈 왕국세바스티앙 1세와의 혼담이 결렬된 1569년이 되어서야 구체화되었다. 샤를의 어머니이자 프랑스 왕국의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엘리자베스의 언니인 안나를 며느리로 들이길 원했지만 안나는 펠리페 2세의 왕비가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엘리자베트와 샤를 9세가 결혼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1570년 10월 22일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삼촌인 외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와 대리 결혼을 했다. 이후 도착한 프랑스에서는 샤를의 남동생인 앙주 공작 앙리와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마중을 나왔다. 이때 샤를 9세는 미래의 왕비를 궁금해하여 변장을 하고 엘리자베트를 지켜보았는데 그녀의 모습에 기뻐한 것으로 알려졌다. 샤를 9세와 엘리자베스는 1570년 11월 26일 정식으로 결혼했고, 결혼식은 매우 화려하게 치러졌다.

남편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지만 샤를 9세에게는 이미 정부인 마리 투셰가 있었고, 샤를은 결혼 후에도 마리를 계속해서 만났다. 시어머니 카트린은 엘리자베트를 국정에서 배제했고, 엘리자베트 역시 독일어, 라틴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에는 능숙했지만 정작 프랑스어에 서툴었던 터라 궁정에서 겉돌았다. 이는 당대 기준으로 의도된 것으로, 통역을 맡는 자를 통해 정보를 캐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고'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시누이인 마르그리트 공주와는 친구 사이였지만 그녀의 방종함까지 따르지는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궁정에서 주로 자수와 독서, 특히 자선 활동과 종교 생활에 몰두했다.

엘리자베트의 몇 안 되는 정치적 행동은 위그노의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가 그녀의 손에 키스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렇듯 개신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엘리자베트였으나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에 대해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임신 중이던 엘리자베트는 외국인 신교도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곧 외동딸인 마리 엘리자베트를 낳았으나 그 무렵 샤를 9세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트는 샤를을 돕고 그의 회복을 기원했으나 결국 샤를은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2.3. 사별 이후[편집]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에 의해 샤를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앙리 3세와의 재혼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앙리와 엘리자베트 모두 거절했다. 애도 기간을 거친 후 엘리자베트는 아버지인 막시밀리안이 머무는 빈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트가 프랑스에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딸 마리 엘리자베트는 곧 요절했으며 언니인 스페인의 아나 왕비도 뒤이어 사망했다. 네 번째 부인도 떠나보낸 펠리페 2세는 처제인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했지만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의 왕비는 재혼하지 않는다'며 역시 거절했다.

이후 엘리자베트는 수녀원을 설립했고 그 곳에서 자선활동을 계속하며 살았다. 그 동안 엘리자베트는 시누이였던 마르그리트 공주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1592년 1월 22일 엘리자베트는 사망했으며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어머니 마리아는 크게 슬퍼하며 '우리들 중 최고가 죽었다'고 평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of Austria)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펠리페 1세
(Felipe I)
후아나 1세
(Juana I)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of Bohemia and Hungary)
울라슬로 2세
(Vladislas II)
푸아캉달의 안[2]
(Anne of Foix-Candale)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Maria of Austria)
카를 5세
(Karl V)
펠리페 1세
(Felipe I)
후아나 1세
(Juana I)
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 of Portugal)
마누엘 1세
(Manuel I)
아라곤의 마리아[3]
(Maria of Aragon)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1녀
프랑스의 마리 엘리자베트
(Marie Élisabeth of France)
1572년 10월 27일
1578년 4월 2일

4. 여담[편집]


  • 엘리자베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형제자매를 지닌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랑스 왕비이며, 37세에 사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악명이 따라다녔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 프랑스에서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짧은 재임 기간 때문에 정확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실권을 지닌 시어머니이자 또 다른 외국인 출신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존재감 때문인지 엘리자베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온화함, 친절함, 아름다움 등의 미덕을 지닌 왕비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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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된 인물은 여럿 있으나 오스트리아 태생은 엘리자베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이하다. 프랑수아 1세의 계비 엘레오노르는 저지대 출신이었고, 루이 13세의 왕비 아나루이 14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스페인 출신이었으며, 앙리 5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자는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나폴레옹 1세와 결혼한 마리아 루도비카는 오스트리아 출신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왕비가 아니라 프랑스 황후였다.[2] 레오노르 1세의 외손녀다.[3] 페란도 2세이사벨 1세의 3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