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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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4대 왕.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사실상의 차남으로[1] 큰형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자 10세에 왕위에 올라 14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다.
2. 생애[편집]
프랑수아 2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앙리 2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억눌려 있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이때를 기점으로 권력 장악에 나섰다. 그녀는 바닥까지 떨어진 발루아 왕가의 왕권을 회복시킬 비책으로 종교를 선택했다.
2.1. 칙령 선포와 바시의 학살[편집]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이 되었는데, 경험 부족과 발루아-합스부르크 전쟁, 즉 이탈리아 전쟁의 부채로 인해 그녀는 강력한 사병을 거느린 대귀족들과 격렬히 대립하면서 이해관계를 조율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카트린은 경건한 가톨릭 교도였지만 강력한 기즈 가문을 통제하기 위해 위그노의 맹주였던 부르봉 가문을 우선시하여, 나바르 왕 앙투안 드 부르봉을 국왕 총대리관으로 삼고, 콩데 공 루이 드 부르봉에게 특사를 단행했다. 또한 카트린은 협조파의 대법관인 미셸 드 로비탈을 중용했다. 로비탈은 시민의 평화를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하여 신성회의에 의한 종교적 해결을 주장했다. 1561년 1월에 섭정인 카트린 왕태후는 <오를레앙 관용칙령>을 발표했는데, 이에 반발한 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이 안 드 몽모랑시, 자크 드 상탕드르와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반대운동을 펴 나갔다. 8월에 사교(司教)회의가 위그노와의 대화를 바라는 왕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생 제르망 앙레 삼부회 안에서 종교회담이 열렸는데, 위그노측은 테오도르 드 베즈를 의장으로 하는 12명의 목사와 20명의 평신도를 대표로 보냈다.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에 난항을 겪었지만 새로운 통일의 기초를 합의하는 데는 일치하는 의사가 나왔다. 테오도르 드 베즈와 기즈 가문의 로렌 추기경 샤를 간의 회담에서 예배형식에 관해 서로 협의한 것처럼 보였지만 10월 최종 회담에서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사상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1562년에 섭정정부는 궁정 내의 당파싸움에 편승한 지방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생 제르망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위그노에게 양보하여 성벽 바깥 및 집안에서의 예배를 용인했다. 그러나 3월 1일에 샹파뉴 지방의 바시에서 기즈 가문의 패거리들이 예배를 보던 칼뱅파 교도들을 습격해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위그노의 장 드 퐁테뉴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기즈 가문의 이 도발(바시의 학살)로 인해 가톨릭과 위그노는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기즈 공이 다가오기에 신교도들은 칙령에 따라 성벽 바깥에서 예배를 보았다. 몇 명의 종자들이 예배자들을 모욕하고, 싸움을 걸면서 우연하게 기즈 공은 자신의 이마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기즈 공의 피를 본 종자들은 격노하여 바시의 주민에 대해 살육을 벌였다."
2.2. 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편집]
카트린은 가톨릭의 대표 세력인 기즈 공작이 1562년 바시 대학살 이후 위그노 측과 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에 돌입한 정세를 이용해 배후에서 신교도와 구교도를 적절히 농단하며 10여 년 사이 왕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카트린은 무능하고 사치만 일삼는 아들들을 대신하여 대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불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였다.
1562년에 일어난 바시의 학살은 두 종파간에 격렬한 내전을 불러 일으켰다. 부르봉 가의 콩데 공 루이는 악한 대신들로부터 왕과 섭정을 해방시킨다고 선언하며,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조직화하고, 루아르 강 연안의 마을들을 점령하며 군대를 주둔시켰다. 실제로 위그노들은 바시의 학살 이전부터 동원을 개시했지만 루이는 바시의 학살을 칙명이 깨진 증거로 여기고, 군사행동의 대의명분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전투가 일어나자 실제로 칙명은 기즈 가의 압력에 의해 사라졌다. 위그노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햄턴코트 조약을 맺고, 원조의 담보로 루앙블, 디에프, 루앙을 인도하는 약속을 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이 루앙블에 상륙했다. 주전장은 주로 루앙과 드루, 오를레앙에서 벌어졌다. 노르망디의 루앙 포위전(1562. 5~10)에서 국왕군이 마을을 탈환하자 나바르 왕 앙투안이 전사했다. 드뢰 전투(1562. 12)에선 콩데 공 루이가 기즈 가문의 포로가 되었지만 부르봉군도 적군의 사령관인 안 드 몽모랑시를 붙잡았다. 1563년 2월의 오를레앙 포위전에선 기즈 공 프랑수아가 위그노측 볼트로 드 멜레에 의한 총격을 당해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기즈 가문은 이 암살이 적대자였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조종으로 이뤄졌다고 믿었다. 기즈 공 프랑수아의 암살로 인해 일어난 폭동과 오를레앙이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트린이 평화협상에 나서 1563년 3월 19일 <앙부아즈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앙부아즈 칙령>은 모든 관계자에게 있어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는데, 특히 기즈 일파는 이단자와의 위험한 타협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루아 왕가는 양측간의 화합이 잉글랜드군에 점령당하고 있는 루앙블의 탈환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7월에 잉글랜드군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8월에 샤를 9세가 성인을 선언하고,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섭정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2.3. 무장 평화(1563~1567)와 제2차 위그노 전쟁(1567~1568) 및 제3차 위그노 전쟁(1568~1570)[편집]
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부르봉 가문의 콩데 공작[2] 루이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이들간의 불화는 겉잡을 수 없이 번졌고, 카트린은 두 세력의 중재자로 왕권을 어느 정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샤를 9세의 친정 선언 이후에도 카트린은 계속 정치의 주도권을 잡아 1564년부터 1566년에 걸쳐 아들의 국내 순행에 동행하여 국왕의 권위 재흥을 꾀했다. 순행이 한창이던 1565년 2월, 카트린은 스페인 국왕의 수석고문인 알바 공작과 바이욘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바이욘 회담의 내용은 불명이지만[3] 열렬한 가톨릭 교도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사자와의 회담은 위그노들에게 있어 경계의 대상이었다. 플랑드르에서 성상(聖像) 파괴 운동의 보고를 전해 들은 샤를 9세가 플랑드르의 가톨릭 교도에 대해 지원하자 위그노들은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스페인군이 플랑드르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프랑스령을 통과하여 군대를 증강시킨 것도 위그노들에겐 위협으로 여겨져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1567년 9월에 위그노군은 샤를 9세를 납치하여 자신들의 진영에 묶어놓으려 했지만 이 모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라 로쉘 등 몇 개의 도시가 위그노측에 가담한다고 선언했다. 님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성직자, 평민을 포함하여 학살되었는데 이 사건은 미체라드(Michelade)로 불리웠다. 이 학살 사건으로 제2차 위그노 전쟁이 일어났다. 주된 전장인 생 드니 전투에서, 1567년 11월 10일에 국왕군이 승리했으나 사령관이던 안 드 몽모랑시가 전사했다. 그러나 위그노는 오를레앙과 블루아를 공략하며 수도 파리를 압박했다. 1568년 3월에 롱쥬모 협약이 체결되면서 위그노에 대한 신앙의 자유와 권리가 주어졌다.
1568년 여름에 이 화평에 반항하는 가톨릭 교도들이 각지에서 위그노에 대해 박해를 가하자 위그노도 이에 보복하면서 가톨릭 교도를 살해했다.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화평파이던 대법관, 미쉘 드 로비탈을 파면했고, 정치는 더욱 더 가톨릭 우세의 경향으로 흘렀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콩데 공 루이와 콜리니 제독 등 위그노의 지도자들은 궁정을 탈출했지만 부하들 대부분은 잡혀 죽임을 당했다. 9월에 <생 모르 칙령>이 나오면서 위그노의 예배 자유권이 다시 박탈당했다. 11월에 네덜란드 반란군의 지도자인 오라녜 공 빌렘이 위그노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그의 군대는 충분한 급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금과 안전을 이유로 철수했다. 그렇지만 위그노는 콩데 공 루이를 사령관으로 하여 프랑스 남서부의 군대와 독일에서 온 프로테스탄트 민병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군대를 편성했다. 용병부대는 콩데 공 루이의 전사 이후에도 위그노에게 계속 고용되었기에, 위그노는 나바르 여왕인 잔 달브레의 왕관의 보석을 담보로 잉글랜드로부터 돈을 빌렸다. 위그노의 군자금 대부분이 잉글랜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제공되었기에 이것은 그녀의 수하인 프랜시스 월싱엄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가톨릭군은 왕의 동생인 앙주 공작 앙리[4] 가 사령관이 되어 스페인, 교황령, 토스카나 대공국의 원군을 빌렸다. 위그노군이 라 로쉘 방위전을 위해 푸아투와 생통쥬 지방의 몇 개 도시를 포위하고 거기서 앙굴렘과 코냑를 침공했다. 1569년 3월 16일에 벌어진 자르냐크 전투에서 위그노의 사령관인 콩데 공 루이 드 부르봉이 전사하자 매우 기뻐한 앙주 공 앙리는 루이의 시체를 장대에 매달아 끌고 갔다. 위그노는 콩데 공의 15세 아들인 앙리 드 부르봉을 명목상의 사령관으로 하여 콜리니 제독이 집권하는 형국으로 싸웠는데, 국왕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 나바르 여왕인 잔 달브레의 16세 아들인 앙리 드 베아른을 지도자로 삼았다. 위그노는 라 로슈 - 라베이유 전투(1569. 6. 25)에서 승리했지만 푸아티에를 빼앗지는 못했고, 몽콩투르 전투(1569. 10. 30)에서 국왕군에게 대패했다. 콜리니와 그의 군대는 남서부로 후퇴하여 몽고메리 백작인 가브리엘 드 로르쥬와 합류해 재편을 단행하여 1570년 봄에 툴루즈를 약탈하고, 남서부로의 연락로를 차단한 이후 론 계곡을 따라 진군해 파리에서 약 200km 지점인 라 샤히떼-슈흐-르와흐에 도달했다. 거듭된 전쟁으로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부담이 급증하자 샤를 9세는 평화적 해결방법을 강구해 1570년 8월 8일 생 제르망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위그노에 대한 양보가 이루어졌다
2.4.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1572. 8)[편집]
카트린과 발루아-앙굴렘 왕조에게는 곧 큰 적이 나타났는데 바로 나바르의 여왕 잔 달브레였다. 독실한 신교도로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을 지원했던 잔은 부르봉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앙리 드 부르봉[5] 을 위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다.[6] 이처럼 처음에 카트린은 폭력적 수단을 배제하고 신교도들과 구교도들 간의 분쟁을 중재하여 발루아 왕가를 두 종파 간의 징검다리이자 종파를 초월한 정통 프랑스의 왕조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고, 프랑스 전역은 다시 종교전쟁에 휩싸였다. 거기에 여왕 잔 달브레가 발루아 왕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에 카트린의 온건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샤를 9세가 위그노의 지도자 중 한 명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에게 감화되어 위그노 신앙에 빠져들 기미가 보이자 당황한 카트린은 한때 적이었던 기즈 공작과 손잡고, 위그노 교도를 축출해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녀는 우선 나바르의 앙리 드 부르봉과 자신의 막내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결혼시킨 후에 결혼식 하객으로 온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고자 했다. 이마저도 무시무시한 계획이었지만 기즈 가문은 집안의 원수를 끝장냄과 동시에 신교도들을 아예 뿌리뽑고자 했다. 한 명을 암살하려던 계획이 결국은 신교도 하객 모두를 대학살하는 계획이 되고 만 것이다. 카트린은 부르봉 가문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기즈 가문의 학살 계획을 묵인하고 말았다. 기즈 가문은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 밤을 기해 수도 파리에서 일제히 위그노 사냥에 돌입했다. 이것이 곧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었다.
1572년 8월 18일,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그 외 위그노(칼뱅파)측 귀족들이 왕녀 마르그리트와 위그노의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8월 22일, 사거리에서 콜리니 제독을 저격하려 한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하자 위그노들에 의한 보복을 두려워한 3대 기즈 공작 앙리 1세 드 로렌과 그 일파는 행동에 나서 8월 24일 아침에 콜리니 제독의 숙소를 기습하여 그를 죽였다. 콜리니 제독의 시체는 창 밖으로 내던져진 후 파리 시민들에 의해 무수히 찢긴 후에 조각나버렸다. 나머지는 교수대에 걸린 후 불태워져 센 강에 던져졌다. 그리고 5일간에 걸쳐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어 위그노의 남녀노소는 아이까지 모두 살해되었고, 그들의 가옥은 약탈당했다. 이러한 만행은 샤를 9세의 허가도 없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5주간이나 계속되어 몇 개의 도시는 무질서에 휩싸였다. 결국 수도 파리 및 대도시에선 2,000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되었고, 지방에선 10,0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나바르 왕 앙리와 사촌동생인 콩데 공 앙리는 가톨릭 개종에 응하는 것으로써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와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결과에 만족을 표시했지만 유럽 전역의 신교도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다. 프랑스에선 위그노들이 공황상태가 되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자가 속출했고,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여 발루아-앙굴렘 왕가에 대항하는 위그노의 힘은 약해지고 말았다. 한편, 남겨진 프로테스탄트들은 보다 과격해져서 군주를 선택할 권리는 백성에게 있으며, 군주가 폭정을 행한다면 추방시킬 수 있다는 <폭군 추방론>을 제창했다. 또 법조계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가톨릭 교도들은 가톨릭 과격파의 폭주를 우려하여 국왕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융화에 의한 보다 강한 왕권 확립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폴리티크파'라 불리웠다.
2.5. 제4차 위그노 전쟁(1572~1573)[편집]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은 결국 군사행동을 불러 왔고, 가톨릭군은 둘로 나뉘어 앙리 드 몽모랑시의 군대가 소뮈에르를, 앙주 공 앙리의 군대가 생 시르와 라 로쉘을 포위했다. 1573년 5월에 앙주 공 앙리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폴란드 의회의 개입으로 라 로쉘의 포위망이 해제되었고, 7월에 <불로뉴 칙령>으로 전투가 종결되었다. <불로뉴 칙령>은 이전 위그노들에 부여된 권리를 축소하는 것으로, 모든 위그노들에게 과거 행동에 대한 사면과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지만 예배는 라 로쉘, 몽트방, 님의 세 도시에서만 허락되었고, 그것도 집안에서만 허용되었다. 상급재판권을 지닌 위그노 귀족들은 결혼식과 예배식을 올리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가족 이외의 참석은 10명으로 제한되었다. 앙주 공 앙리가 부재중인 사이, 샤를 9세와 막내동생인 알랑송 공 프랑수아가 다투게 되자 많은 위그노들이 보호와 지지를 구하면서 알랑송 공 프랑수아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1574년 2월에 생 제르망에서 쿠데타 미수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목적은 궁정에 억류된 나바르 왕 앙리('헨리케 3세')와 콩데 공 앙리의 구출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노르망디, 보르도 등지에서 위그노들이 봉기하면서 전쟁은 다시 재개되었다.
이렇게 앙리 2세의 비극적인 사고사 이후 조금씩 몰락하기 시작한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왕권은 샤를 9세의 치세에 이르러 크게 훼손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두 종파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카트린의 행동은 결국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원래 샤를 9세는 건장한 육체에 승마와 사냥을 즐겼으나, 외가인 메디시스(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비롯된 유전성 폐결핵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했고, 잇딴 사건으로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곧잘하여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폐결핵이 악화되어 동생 앙주 공 앙리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한지 3개월 후인 1574년 5월, 2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왕태후 카트린이 앙리가 귀국하기 전까지 섭정에 취임한다고 선언했다.
3. 가족 관계[편집]
3.1.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편집]
1544년 7월 5일 - 1592년 1월 22일 (48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16명의 자녀 중 다섯 째이자 차녀로, 당대 유럽에서 뛰어난 미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외숙부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였고, 동시에 형부이기도 했다.[7]
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1세의 재위 시절이던 1559년부터 프랑스의 왕자인 샤를과 혼담을 나누다가 결혼이 결정됐지만, 아무도 어린 공주인 엘리자베트에게 프랑스어를 열심히 가르치지는 않았다.[8] 이후 샤를 9세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마리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를 낳았지만, 마리 엘리자베트는 1578년에 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독일어, 스페인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유창했던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어만큼은 잘하지 못했고, 빼어난 성품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실에서 고립되어 외롭게 지냈다. 그나마 엘리자베트를 상대해 준 사람은 시누이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였다. 샤를 9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던 엘리자베트는 다시 친정인 합스부르크가로 돌아왔고, 4번째 왕비를 잃은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 그녀에게 제안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의 왕비는 다시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며 거절했다.[9]
3.2. 기타[편집]
샤를 9세의 정부(情婦)인 마리 투셰
마리 투셰와의 사이에서 앙굴렘 공작이 되는 아들 샤를을 낳았다. 하지만 사생아였기에 왕위를 계승할 수는 없었다.
4. 대중매체[편집]
영화 <여왕 마고>에서는 유약한 왕으로 나오는데 얼마나 왕권이 약했는지 멧돼지 사냥에서 위기에 처했는데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그 정도 수준으로 왕권이 추락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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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남으로 태어났으나, 차남 루이가 요절했기에 사실상 차남이었다.[2] 이지만 사실 대공에 해당하는 Prince du Sang (Prince of the Blood)였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 스페인이 프로테스탄트 예배 금지를 압박했다고 여겨진다.[4] 훗날의 앙리 3세[5] 훗날의 '대왕' 앙리 4세[6] 발루아 왕가의 구성원을 제외한다면 왕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었다.[7] 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나가 외당숙(5촌) 펠리페 2세의 4번째 왕비가 되어 펠리페 3세를 낳았다.[8] 이 당시에는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는데, 공주의 통역을 맡는 자에게 정보를 캐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9] 그러나 이때 결혼했어도 1592년에 사망한 엘리자베트가 1598년에 사망한 펠리페 2세보다 먼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펠리페 2세는 5번째 왕비도 먼저 보내고 6번째 왕비까지 들였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