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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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에리트레아 국회의장과 집권여당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의장을 겸임하고 있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30년 동안 현직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다.
현 시점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을 만든 것과 독재자가 되기 전에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김일성,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비견된다.[1] 또한, 독재자가 된 영웅의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한물 간 줄 알았던 '아프리카의 김정은'의 놀라운 컴백 : 2023년 9월 28일 발행된 영국 언론인 미겔라 롱의 이사이아스 분석 기사로 80을 목전에 둔 그가 동아프리카의 위협적 변수로 부상하는 동시에 그의 생애 전체를 소개하고 있다.
2. 이름 표기[편집]
그의 이름을 표기하는 티그리냐어나 암하라어의 통일된 라틴 문자 정서법이 없기에 통용 표기인 Isaias Afwerki 만으로는 발음 유추가 어려워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아퍼워르키·아페웨르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티그리냐어 발음은 [isajas afwɐrkʼi](이사야스 아프와르키)에 가까우며, 국립국어원의 규정 용례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다.
이때 아페웨르키는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의 사례와 유사하게 성씨가 아닌 부칭(부계명)[2] 에 해당하므로 이사이아스를 누락하고 아페웨르키 단독으로 표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는 별도의 성씨를 사용하지 않고 본명과 부칭이 덧붙는 작명 방식을 사용한다.
3. 생애[편집]
1946년 2월 2일에 아스마라에서 태어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3][4] 1960년대 초부터 에리트레아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이후 아디스아바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다가 1년 만에 중퇴한 후 에리트리아 해방전선(ELF)에 합류했고, 1970년에 ELF에서 분리된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5] 의 지도자로 선출된 후 1977년에는 사무차장, 1987년에는 사무총장으로 승진하며 에리트레아 독립전쟁을 주도했다. 에티오피아 대기근 당시 구호물자가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문제와 암하라인 관리들의 구시대적 학정에 맞서 티그리냐인들과 티그레인들은 힘을 합쳐 1961년부로 무장항쟁에 들어갔으며, 결국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이끄는 에리트레아 측은 1993년 미국과 UN의 중재로 독립을 쟁취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김일성이라는 멸칭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로서는 위인이라는 평을 받는다. 독립 운동 당시 이사이아스는 적어도 김일성처럼 무능한데다가 거짓 전과를 선전해대던 똥별은 절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덕망이 높은 지도자로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명장이었다.[6]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독립 투쟁 당시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열악한 상황 하에서도 군인들의 처우 및 기강 확립에 신경을 쓰던 덕장이기도 했다는 것이다.[7] 일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내전 지역이나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들과 갱 조직, 미얀마의 소수민족 반군 등이 소년병을 납치해서 노예만도 못한 대우를 하는 것과 다르게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지휘하는 에리트레아 독립군은 독립 전쟁 당시에는 범죄도 적었고 사기와 전투 의지도 높았다. 병력 규모와 장비 면에서 더 강력했던 에티오피아군에 맞서서 선전했다.
1998년에는 국경 문제로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렀고 이 전쟁으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전시 상황 때 단결하던 무슬림과 기독교인 부족들이 에리트레아가 독립을 쟁취한 이후 다시 토지 소유권을 두고 서로 갈등하며 싸우기 시작했는데,[8]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비상사태 선포 후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이 제어되는 효과를 보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비상사태를 유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사이아스는 현재까지도 이 비상사태를 해제하지 않고 있다.
4. 철권 통치[편집]
자세한 내용은 에리트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철권 통치 때문에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의 북한이라는 말까지 붙을 정도의 21세기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에리트레아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과 언론자유지수 꼴등 경쟁을 벌이다시피 할 정도로 언론 자유가 말 그대로 바닥을 기고 있으며, 세계의 자유 지수는 2023년 기준으로도 총합 3점으로 북한과 함께 195개국 중 공동 192위를 차지했고[9] , 2022년 기준으로 취약국가지수는 19위를 기록해 위험군에 오른 파탄국가가 되었다.[10]
심지어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자기랑 함께하며 고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동료들조차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 같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기도 한다. EPLF 사령관이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제3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세밧 에프렘(Sebhat Ephrem, 1951~)도 2019년에 암살당할 뻔했고, EPLF의 창립 멤버에 에리트레아 독립전쟁 최대 전투인 아파벳 전투[11] 를 승리로 이끈 독립영웅에 제2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메스핀 하고스(Mesfin Hagos, 1947~) 역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게 반대하다가 2013년에 그와 뜻을 같이하던 그의 동료들이 숙청되자 독일로 망명했으며, 역시 EPLF 사령관으로 에리트레아의 독립에 중대한 공헌을 하며[12] 초대 국방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페트로스 솔로몬(Petros Solomon, 1951~)과 EPLF 간부 학교[13] 교장 출신에 제1재무장관, 외무부 장관, 통상산업부 장관을 역임한 하일레 볼덴세(Haile Woldense, 1946~) 역시 2001년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 반대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가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심지어 EPLF 회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솔로몬의 아내까지 2003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후 바로 구금되었다.[14]
5. 기타[편집]
- 한비야가 자신의 여행서에서 얼굴도 잘생기고 엘리트인데 덕망도 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에리트리아의 지도자가 바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다. 물론 한비야가 에리트레아 지역을 탐방한 시점은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와의 독립전쟁으로 죽어라 싸우고 있었던 1990년대 중반으로, 이 당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독재자가 아니라 독립전쟁을 이끄는 투사였기에 제대로 악명을 떨치기 전이라서 좋게 봤을지도 모른다.
- 1997년 5월 4일에는 경제협력 등 한국과의 관계증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방한하기도 했는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시대와 내전을 겪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이적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을 향후 국가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어렵게 독립을 쟁취한 정신력으로 똘똘 뭉쳐 이제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충만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하지만 세월이 30년 가까이 지났어도 에리트레아는 콩고민주공화국, 북한보다 아주 약간 나은 수준에 불과한 세계 최빈곤 국가 중 하나이며, 오히려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보다 민주적이고 경제 상황도 1970, 80년대 당시 멩기스투 군부 정권 시절의 암담했던 상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다.
- 북한 이상으로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통치를 일삼는데다가 밑의 사람들이 매우 부패하기에 어마어마한 부정축재를 일삼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부정부패로 막대한 돈을 축적하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고 있다. 집무실은 어디 중소기업 사장 사무실만도 못하고, 옷차림은 대충 간단한 셔츠차림에 샌들을 신고 다녀 어디 동네 이장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를 여러 차례 인터뷰한 에리트레아 전문가 댄 코넬의 말에 따르면 그의 관심은 오직 "권력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그와 비교되는 김일성과 로버트 무가베가 부정축재와 사치에 몰두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15]
6. 둘러보기[편집]
[1] 물론 김일성은 북한에서 과대선전하는 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실제 무장투쟁에서의 성과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진짜 고국의 독립에 큰 역할을 했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와 무가베 역시 집권 후에는 북한과 비견되는 극악무도한 독재자로 평가받으며 세계적으로 비판을 받았다.[2]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부계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인명이다. 예시로는 윌리엄(William)의 아들을 의미하는 윌슨(Wilson), 스테판(Stefan)의 아들을 의미하는 스테파노비치(Stefanović) 등이 있다.[3]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운동가가 된 아들과는 정반대로 그의 아버지는 에리트레아의 에티오피아 국영 담배 회사에서 일한 것을 넘어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합병을 추진하는 정당 소속인, 한국으로 치면 일진회 회원이랑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4] 다만 매국노, 부역자의 자식들이 독립운동가가 되는 일은 은근히 흔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각 나라의 매국노는 자식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해주길 마련인데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 현실에 눈을 뜬 사람은 식민지 본국과 본래 민족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마침내는 자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 게 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만 해도 을사오적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 정미칠적 이재곤의 자식들인 이관용, 이순용 형제가 독립운동가였다.[5] 1994년 2월 16일에 민주정의인민전선으로 변경되었다.[6] 더욱이 무가베조차 독립영웅 시절에 독선적인 면모로 주위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면모가 더욱 돋보인다.[7] 아이러니하게도 현 시점의 에리트레아군은 조선인민군과 비견될 정도로 군인들의 처우가 열악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8] 기독교를 믿는 티그리냐인들은 주로 농경에 종사하고, 이슬람을 믿는 티그레인들은 주로 목축에 종사하였는데, 티그레인들이 키우는 가축들이 티그리냐인들의 밭을 망쳐놓거나 아니면 티그레인들이 방목하는 목초지를 티그리냐인들이 개간하면서 분쟁이 발생하였다.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의 흔한 갈등 레퍼토리이다.[9] 이들보다 세계의 자유 지수가 낮은 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2점), 시리아&남수단(1점) 3개국밖에 없다.[10] 참고로 그로부터 16년 전인 2006년 당시 에리트레아의 취약국가지수는 높은 경고군에 속하는 54위였다.[11] 1988년 3월 17 ~ 20일에 에리트리아 북부의 아파벳(Afabet)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전투다. 15,000명 규모에 외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게릴라에 가까웠던 에리트레아군은 4,000 ~ 5,000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2만명 규모였던, 에티오피아군 최고의 사단은 무려 8,000 ~ 9,000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5,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아프리카판 디엔비엔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전투다.[12] 솔로몬은 단독으로 EPLF의 정보 부서를 조직했고, 에티오피아군과의 전투를 여러 번 이끌었으며, 독립전쟁의 막바지이자 멩기스투가 축출된 직후인 1991년에 아스마라를 포위한 EPLF 군대를 지휘하고 아스마라를 수복하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오기 전까지 아스마라를 관리했다.[13] 한국으로 치면 신흥무관학교 포지션이다.[14] 그나마 그들의 자식 4명은 수용소에 가지는 않았지만, 모두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15] 아페웨르키처럼 북한과 가장 근접한 수준의 독재를 했다고 평가받는 엔베르 호자도 개인적으로는 사치스럽기는커녕 인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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