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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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
Sophie Chotek von Chotkowa

파일:Sophie, Duchess of Hohenberg.jpg}}}
이름
조피 마리아 요제피네 알비나 초테크 폰 초트코바보그닌
(Sophie Maria Josephine Albina Chotek von Chotkowa und Wognin)
출생
1868년 3월 1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사망
1914년 6월 28일 (향년 46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사라예보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1900년 결혼)
자녀
조피,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아버지
보후슬라프 초테크 폰 초트코바보그닌 백작
어머니
빌헬미네 킨스키 폰 바히니츠테타우 여백작
형제
볼프강, 즈덴카, 마리, 카롤리네, 옥타비아, 마리아 안토니아, 헨리에테
1. 개요
2. 행적
3. 가족관계
3.1. 자녀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자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아내였다. 통칭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

합스부르크 왕조의 분가인 합스부르크테셴 가문의 시녀 출신[1]으로써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결혼한 비운의 로맨스 겸 사라예보 사건의 희생자로 유명하다.


2. 행적[편집]


조피가 결혼 전 황실 여성의 시녀였던 것, 귀천상혼[2]이어서 그런지 시가(媤家)와의 사이는 영 좋지 않았다. 귀천상혼으로 결혼하고 시가에서 냉대 받은 것 때문에 미천한 평민이나 부르주아 출신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조피는 백작 가문영애여서 엄연한 금수저 상류층이었다. 하지만 통치 왕가, 하다 못해 슈탄데스헤어 출신조차 아니기에 거의 듣보잡 취급을 받은 것.[3] 그야말로 현실판 신데렐라.

친정 가문은 백작이지만 혼맥, 역사, 지위 등으로 귀족 계급 사이에선 알아서 먹고 들어가는 최상류급이었다. 외가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쟁쟁한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손꼽히던 킨스키 가문이다. 조피의 자매들 또한 유력 귀족 가문 자제들과 혼인했고, 여동생은 슈탄데스헤어 가문 남성과 결혼했을 정도. 그러나 기본적으로 귀족은 아무리 높아도 황실 신하 정도의 급이었고, '한낱' 백작 가문의 딸이라 미래의 황후, '제위 계승자의 아내'로는 격이 맞지 않았다고 여겨졌다.[4] 더군다나 그 상대는 일반적인 왕가공가도 아닌 신성 로마 제국황제 가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하는 유럽의 몇 안되는 황제 가문이자 서양사의 손꼽히는 명문 중의 명문가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당연히 황실은 뒤집어졌고 차기 황후가 될 여자가 겨우(?) 귀족이었던데다가 귀천상혼이면 아무리 남편이 계승자이더라도 그녀 사이에 낳은 소생들은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작위 세습으로 후계를 이어받을 수 없었기에 굉장히 치명적인 문제였다. 때문에 황실 내외에서는 격렬히 반대했으며 조피가 더 높은 신분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의 외동딸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건 오스트리아 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당시 시대상 유럽 어느 나라의 왕실이라도 무조건 반대할 상황이었다.[5] 천신만고 끝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결혼하면서 호엔베르크 여후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여공작으로 승격시켜 줬다.

하지만 귀천상혼이라는 굴레는 벗어날 수 없어서 두고두고 푸대접에 시달렸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의 결혼식에는 의붓시어머니인 마리 테레제 대공비와 그녀의 친딸 둘을 제외한 모든 황족들이 불참했다. 공식석상에서도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먼 대공녀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서 남편을 마주할 수조차 없었고 합스부르크 황족들이 단체 시집살이까지 시켰는데 그 수준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실에 대해 이를 벅벅 갈았고, 아내의 위신을 세워주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6]

1914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남편과 함께 암살당하면서[7] 정확히 1개월 뒤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의 계기가 되었다.[8]

자녀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사이에서 낳은 2남 1녀가 있다. 자녀들 모두 귀천상혼으로 태어났기에 제위 계승권을 갖지 못했고, 어머니 조피의 작위인 호엔베르크 공작위만 물려받았다. 더군다나 합스부르크 황실은 이 아이들이 황족이 아닌 호엔베르크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고아가 된 3남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사실 전에도 귀천상혼한 합스부르크 대공의 사후 거의 비슷했던 선례가 있어서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이들의 의붓할머니(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계모)이자 당시 황실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여성이었고 처음부터 이 결혼을 열린 마음으로 지지해 준 인물이었던 마리 테레제 대공비가 '황실에서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내 연금을 대신 주고 보호하겠다'고 강짜를 부려서 간신히 연금을 받게 됐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마지막 우려는 결코 괜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심지어 황실에서는 조피와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같이 매장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번에도 마리 테레제가 나서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혼자 묻히기보다 조피와 함께하기를 원할 것'이라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같은 무덤에 묻힐 수는 있었으나, 황실은 기어이 조피의 관을 남편보다 낮은 곳에 두고 그 관 위에 시녀상징인 장갑을 올려놓음으로써 죽어서도 조피를 황실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드러내려 했지만, 이번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저지함으로써 그런 수모는 당하지 않은 채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호엔베르크 여후작 조피
(Princess Sophie of Hohenberg)
1901년 7월 24일
1990년 10월 27일
프리드리히 폰 노스티츠리네크 백작
슬하 3남 1녀
1남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Maximilian, Duke of Hohenberg)
1902년 9월 29일
1962년 1월 8일
마리아 엘리자베트 보나 폰 발트부르크 추 볼페크 운트 발트제 여백작
슬하 6남
2남
호엔베르크 후작 에른스트
(Prince Ernst of Hohenberg)
1904년 5월 27일
1954년 3월 5일
마리테레즈 우드
슬하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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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평소 프리드리히 대공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기 때문에 이자벨라 대공비는 8명이나 되는 자신의 들 중 한명이 페르디난트의 아내맺어지리라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2] 왕족은 국내외 왕족들과 결혼해야 하는데 그보다 낮은 신분과 결혼하는 개념이 바로 귀천상혼이다.[3]통치 가문이라는 것이 귀천상혼을 판가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같은 백작 지위라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나 마이센 변경백 같은 독립된 영토를 통치하는 대영주 가문이면 황실의 제위 계승자와도 격이 충분히 맞다고 인정받는다.[4] 비교적 귀천상혼 개념이 약했고 실제로 백작 영애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왕비가 된 영국조차 백작이 영국 왕실에선 족장, 즉 대영주 직위였다는 점과 조지 6세가 당시 왕위 계승 서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둘째 아들이고 부모인 조지 5세메리 왕비 부부가 적극 찬성해서 가능한 혼인이었다. 실제로 영국에서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자들은 기본적으로 정략결혼은 물론 연애결혼조차 외국 왕족과 했다.[5] 참고로 비밀 연애가 들통났을 때 조피가 그대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달려간 것도 당시 사람들 눈에는 당돌함을 넘어서 제위 계승자에게 들러붙은 충격과 공포의 불여시 내지 철면피 쯤으로 보이는데 한몫했다.[6] 그래서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살아서 황제가 되었다면 황족들이 빡세게 재교육 받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7]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총에 맞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조페를(조피의 애칭)! 조페를! 죽으면 안 되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주시오!"(Sopherl! Sopherl! Stirb nicht! Bleib' am Leben für unsere Kinder!)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부부가 모두 죽으면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은 황실의 푸대접을 받을 것이 자명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염원도 헛되이 조피는 그보다도 먼저 절명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이내 뒤따라 사망했다.[8]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함께 암살하려 했던 목표는 애초에 조피가 아니었다. 프린치프의 또 다른 목표는 같이 동승했던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였는데 총알이 빗나가 조피에게 맞은 것이다(...). 이후 프린치프는 조피의 죽음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했다. 또한 프린치프와 같이 암살을 시도했던 일당 중 한 명이 나중에 밝힌 바로는 조피가 있어서 암살을 망설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