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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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63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소재지
강원도 철원군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파일:국보63호철원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jpg

1. 개요
2. 내용
3. 복원
4. 의의
5. 외부 링크
6. 국보 제63호


1. 개요[편집]


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서기 865년(통일신라 경문왕 5년) 제작되어 현 강원도 철원군 도피안사에 봉안된 철조 비로자나불상. 현재 철원 도피안사(강원도 철원군 도피동길 23)에 소재 중이며, 국보 제6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865년(신라 경문왕 5년)에 만든 철제 불상이다. 불상 뒷편에 이와 같은 명문이 있어 제작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등 뒤에 기록된 8행(行) 139자(字) 명문에 따르면 이 철불을 조성한 시기는 865년 을유 정월이고 장소는 신라국 한주 북계 철원군 도피안사이다. 철불을 조성한 향도조직의 대표자는 용악 견청이고 불상 조성에 참여한 거사는 총 1500명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도피안사비로자나불조상기(到彼岸寺毘盧遮那佛造像記)

이 불상은 철원 도피안사의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다.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된 도피안사 사적기에 아래와 같은 설화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도선국사가 (지금의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조불상을 철원 수정산의 안양사에 모시기 위해 승려들과 함께 이운하던 중이었다.
암소의 등 위에 불상을 싣고 안양사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철원읍 화지리 암소고개 마루에 이르렀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길을 찾지 못하고 승려들과 암소 역시 지친 탓에 잠시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는데, 희한하게도 암소 등에 실렸던 불상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국사를 비롯하여 승려들은 몹시 당황하여 철불을 찾아 헤맸으나 불상은 보이지 않았다. 도선국사는 낙담한 채로 일행들과 함께 길을 떠나 지금의 동송읍 관우리의 도피안사 터에 이르렀는데, 사라진 불상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에 도선국사는 이곳에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이 절을 8백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하나로 삼았다. 산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듯 유약한 형상이라 석탑과 철불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내실을 굳게 다지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코자 하였다.

도피안사는 1898년에 화재로 불탄 후 중건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 때 다시 한 번 폭격을 받아 불타고 절 자체가 폐허가 되면서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던 이 불상도 함께 폐허 속에 파묻혔었다. 그러다가 불상이 발견된 경위가 상당히 극적인데, 1959년 이명재(李明載) 당시 육군 15사단장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내가 지금 땅속에 묻혀 있어서 너무 답답합니다. 나 좀 꺼내 주시오."라고 하였다. 거기다 이 꿈을 꾸고 난 후 이튿날 이명재 장군이 전방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민가에 들렀는데, 집주인의 모습이 꿈 속에서 만난 불상과 너무나 흡사했다.

정말 놀란 이 장군이 장병들을 데리고 집주인과 함께 꿈 속에서 들은 대로 폐허가 된 절터로 찾아 갔는데, 놀랍게도 절터 바닥에는 불상의 육계가 땅 위에 솟아 있었다. 이에 이명재 장군이 데려온 여러 장병들이 불상을 끌어 올리려고 했으나 워낙 땅 속에 깊이 박혀있던지라 불상은 꿈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명재 장군이 바깥에 드러난 불상의 얼굴을 정갈하게 씻은 뒤 자신의 군복을 벗어 입혔더니 그제야 불상을 꺼낼 수 있었다고 한다.법보신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이런 인연 덕분에 철불을 다시 도피안사에 봉안하고, 이명재 장군이 절 재건을 지원했다고 한다. 지금도 도피안사 대적광전 안에는 이때 발견했던 철불과 함께 이명재 장군 그리고 당시 불상을 처음 발견했던 장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3. 복원[편집]


이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 소개되었는데, 유홍준은 저서에서 철불에 금을 덮어 씌움이 아쉽다고 평하였다.

그런데 다시 개금을 벗겨내고 보존처리했다고 한다. 유홍준의 책과는 상관없이 보존처리를 한듯하다.[1]

이후 상기 책의 저자인 유홍준문화재청장이 되자, 2007년부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개금을 벗겨내고 철불로 환원하는 보존사업이 진행되었다.


파일: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5.png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보존처리를 마친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전ㆍ후, 뉴시스 : 보존처리 전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한편 이 불상 복원 과정에서 본 철원 도피안사 철불의 불두(佛頭) 양쪽 귀 아래 부분이 떨어져 나가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기도 하였다. 뉴시스 : 철원 도피안사 철불 양쪽 귀 훼손 발견 금가루로 칠해진 개금층을 벗겨낸 결과 먼 과거에 귀 아래 부분이 떨어져나갔고 이를 누군가가 석고로 빚어 붙여놓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막 복원이 시작되던 2007년 당시에는 문화재 자문위원들의 정확한 조사를 통해, 그리고 철불을 소장한 도피안사 측의 의견도 최대한 반영해 떨어져 나간 부분을 덧붙이는 작업을 할지, 그대로 놔둘지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파일: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6.jpg
파일: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7.jpg
파일: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jpg
파일: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9.jpg
파일: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10.jpg

이후 문화재청의 보고서(홍종욱 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의 보존처리」, 『보존과학연구』30,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에 의하면 귀까지 모두 복원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4. 의의[편집]


본 철조 불상의 등에 양각된 백여 자 달하는 명문은 이 상을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리하여 한국 불교미술사에 있어 편년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인 865년에 1500여 명에 달하는 신도들의 열렬한 신앙심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조성이 왕족이나 중앙 귀족 가문이 아닌 순수한 지방 민중의 신도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지방 향도 조직 또한 과거와는 달리 1500명이나 될 만큼 대규모가 되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이 불상은 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드물게 대좌까지도 모조리 철로 만들었음이 특이하다. 이처럼 대좌까지 철로 제작한 사례는 도피안사 철불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원래 철이라는 재료는 동에 비해 다루기도 어렵고 또 섬세한 표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조각품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크기가 큰 철불은 주조상 생길 수밖에 없는 외형틀의 이음매를 없애기가 어려워 상의 이곳저곳에 보기 흉한 주조흔이 남는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은 8세기 중엽부터 신소재인 철을 사용하여 철불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왜 철불을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아직 정답은 모른다. 다만 도피안사상과 같은 철불의 조성지가 지방의 대찰들이었으므로,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서울아트가이드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칼럼 : 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36)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은 구리보다 구하기는 쉬운 반면 재료를 가공하기 힘들어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야 한다. 당시엔 용광로가 없어 쇠를 여러 개 도가니에 넣어 1200도 이상 온도로 녹인 뒤 동시다발로 부어 주조했다. 중간에 멈췄다 다시 부으면 불상이 깨지기 십상이었다. 이런 제약 탓에 철불은 중국에서도 후대인 12세기 송나라 때 주로 유행했고, 일본에서는 이보다도 훨씬 늦은 13세기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본 불상을 포함하여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 예천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등의 8~9세기 한국 철조 불상들은 12세기 송나라 때부터 철불이 등장하는 중국이나 13세기 가마쿠라 시대부터 철불을 만들기 시작한 일본보다 적어도 200년 이상은 앞선 것으로 당시 한국의 철 주조 기술이 동양 최고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향토문화전자대전 : 보원사지 출토 통일신라 철제여래좌상


5. 외부 링크[편집]




6. 국보 제63호[편집]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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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불상은 보존 및 미관상의 이유로 새로 도금을 한다. 참고로 이런 도금, 혹은 금칠을 하는 과정을 '개금 불사'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