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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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부 허베이성의 지급시. 스자좡(석가장)에서 남쪽으로 150km, 정저우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평야에 위치해 있다. 허베이성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산시성(산서성), 동쪽으로는 산둥성 지난시, 바로 남쪽에는 안양시가 있다.
인구는 945만 명이지만 중국의 지급시는 하나의 도시권 개념이라, 도시 자체의 인구는 290만 명가량이다. 허베이 성의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이고, 상나라(은나라)의 고도인 안양은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이웃 도시이다. 서쪽으로 타이항 산맥을 넘어 조금만 가면 창즈(長治)가 나오고, 남쪽으로는 정주, 낙양 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관동과 관서를 잇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중심지이다. 시내 서남쪽 10km에 한단 공항이 있고 동북쪽 15km 에는 최근 중국 정부에서 AAA급 관광지로 선정한 광푸진(广府镇)이 위치해 있다. 옛 조나라의 수도이고 지금은 조그만 마을이지만 조조 관광지로 개발 중인 업성도 현재는 한단의 일부이다.
신화시대에 여와가 한단의 고중황산(古中皇山)에서 최초로 사람을 빚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역사에는 죽서기년에 처음 등장한다. 죽서기년에서는 제신이 한단에 별궁별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위나라(衛)의 수도로 시작하여 조나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시내 남서쪽 4km에 위치한 조왕성(趙王城)과 한나라 때의 번국인 조나라의 궁궐 유적이 남아있어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끈다. 시내에 가면 조나라의 중흥을 만든 조무령왕의 커다란 석상과 호복 도입을 기념하기 위한 호복을 착용한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조나라군을 장평대전에서 박살내고 한단성을 포위했으나, 한단성은 매우 견고했기 때문에 진나라도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단성은 전국시절 당시 여러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기원전 228년 왕전이 지휘한 진나라군에 함락되었고 조나라는 멸망한다.
한나라 건국 직후, 공신 진희(한나라)가 흉노와 연합해 모반한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고조가 이곳에 교두보를 건설했다. 이것이 고대에서 한단이 유의미한 역할을 한 거의 마지막 사건이며, 이후 전한~신 동안에는 전국 N대 도시 정도의 위치를 지키다가[1] , 후한 때 광무제가 여기를 초토화 시키면서 확 주저앉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에서는 전혀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언급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신 삼국지 기준으로는 한단보다는 그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던 업성이 떠올라서 후한말에서 남북조시대까지 400년간 한단시 주변, 즉 하북(기주) 남부 지역의 중심지는 업성이었다. 송나라 이후로는 대명부가 같은 역할을 했는데, 송대에는 만리장성은 말할 것도 없고 연운 16주를 북방 세력에 내주고서 시작했기 때문에 개봉 인근에 북방 저지선 역할을 할 거점 선정이 시급했고 그것이 바로 대명부로서 공식명칭은 북경대명부였다.[2]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가 세운 괴뢰국인 제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명-청대에는 이런 '경'급 도시에서는 내려왔지만 적어도 하북(북직예) 남부 일대의 소중심지 정도는 유지했다. 지금이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이 모두가 어쨌든 하나의 '도시'로 묶여있지만 원래는 한단-업성-대명부는 서로 다른 발전과정과 역사를 가진 별개의 도시들이다.
중흥의 계기는 석탄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80년대에 한단의 서쪽에 있는 태항산맥에서 거대한 석탄의 광맥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공업 도시로 발전하며 2천 년간 단역으로 머물렀던 도시가 지금 같이 천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다만 광업도시답게 공기가 매우 좋지 않다.
의외로, 중국의 여러 도시들 중 고대로부터 단 한 번도 이름이 변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이다. 좀 유명한 도시들은 황제의 기분대로 이름이 자주 고쳐졌는데, 한단은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기록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지명이 변경되지 않았다. 한단 이외에는 그나마 낙양이 선진(先秦) 시대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유명 역사도시이지만, 낙 자의 한자가 洛과 雒 사이에서 여러 번 바뀌었던데다가 '낙'자가 아예 빠지고 하남부 혹은 하남군으로 불렸던 적도 있었다.
광부진 성
조왕성 유적 지도
大名县
송 ~ 명나라 대의 큰 도시였던 대명부(大名府)가 한단 지급시 관할이고 시내에서 동남으로 60km 떨어져 있다. 대명부는 요나라(거란)의 위협에 대비하여 변경(카이펑)을 지키기 위한 군사 기지였다. 수호전의 조연인 노준의와 연청의 고향이다. 지금도 중세 성벽이 시내를 두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1. 개요[편집]
중국 중부 허베이성의 지급시. 스자좡(석가장)에서 남쪽으로 150km, 정저우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평야에 위치해 있다. 허베이성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산시성(산서성), 동쪽으로는 산둥성 지난시, 바로 남쪽에는 안양시가 있다.
인구는 945만 명이지만 중국의 지급시는 하나의 도시권 개념이라, 도시 자체의 인구는 290만 명가량이다. 허베이 성의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이고, 상나라(은나라)의 고도인 안양은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이웃 도시이다. 서쪽으로 타이항 산맥을 넘어 조금만 가면 창즈(長治)가 나오고, 남쪽으로는 정주, 낙양 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관동과 관서를 잇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중심지이다. 시내 서남쪽 10km에 한단 공항이 있고 동북쪽 15km 에는 최근 중국 정부에서 AAA급 관광지로 선정한 광푸진(广府镇)이 위치해 있다. 옛 조나라의 수도이고 지금은 조그만 마을이지만 조조 관광지로 개발 중인 업성도 현재는 한단의 일부이다.
2. 역사[편집]
신화시대에 여와가 한단의 고중황산(古中皇山)에서 최초로 사람을 빚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역사에는 죽서기년에 처음 등장한다. 죽서기년에서는 제신이 한단에 별궁별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위나라(衛)의 수도로 시작하여 조나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시내 남서쪽 4km에 위치한 조왕성(趙王城)과 한나라 때의 번국인 조나라의 궁궐 유적이 남아있어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끈다. 시내에 가면 조나라의 중흥을 만든 조무령왕의 커다란 석상과 호복 도입을 기념하기 위한 호복을 착용한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조나라군을 장평대전에서 박살내고 한단성을 포위했으나, 한단성은 매우 견고했기 때문에 진나라도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단성은 전국시절 당시 여러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기원전 228년 왕전이 지휘한 진나라군에 함락되었고 조나라는 멸망한다.
한나라 건국 직후, 공신 진희(한나라)가 흉노와 연합해 모반한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고조가 이곳에 교두보를 건설했다. 이것이 고대에서 한단이 유의미한 역할을 한 거의 마지막 사건이며, 이후 전한~신 동안에는 전국 N대 도시 정도의 위치를 지키다가[1] , 후한 때 광무제가 여기를 초토화 시키면서 확 주저앉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에서는 전혀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언급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신 삼국지 기준으로는 한단보다는 그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던 업성이 떠올라서 후한말에서 남북조시대까지 400년간 한단시 주변, 즉 하북(기주) 남부 지역의 중심지는 업성이었다. 송나라 이후로는 대명부가 같은 역할을 했는데, 송대에는 만리장성은 말할 것도 없고 연운 16주를 북방 세력에 내주고서 시작했기 때문에 개봉 인근에 북방 저지선 역할을 할 거점 선정이 시급했고 그것이 바로 대명부로서 공식명칭은 북경대명부였다.[2]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가 세운 괴뢰국인 제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명-청대에는 이런 '경'급 도시에서는 내려왔지만 적어도 하북(북직예) 남부 일대의 소중심지 정도는 유지했다. 지금이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이 모두가 어쨌든 하나의 '도시'로 묶여있지만 원래는 한단-업성-대명부는 서로 다른 발전과정과 역사를 가진 별개의 도시들이다.
중흥의 계기는 석탄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80년대에 한단의 서쪽에 있는 태항산맥에서 거대한 석탄의 광맥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공업 도시로 발전하며 2천 년간 단역으로 머물렀던 도시가 지금 같이 천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다만 광업도시답게 공기가 매우 좋지 않다.
의외로, 중국의 여러 도시들 중 고대로부터 단 한 번도 이름이 변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이다. 좀 유명한 도시들은 황제의 기분대로 이름이 자주 고쳐졌는데, 한단은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기록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지명이 변경되지 않았다. 한단 이외에는 그나마 낙양이 선진(先秦) 시대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유명 역사도시이지만, 낙 자의 한자가 洛과 雒 사이에서 여러 번 바뀌었던데다가 '낙'자가 아예 빠지고 하남부 혹은 하남군으로 불렸던 적도 있었다.
광부진 성
조왕성 유적 지도
3. 다밍현 (대명부)[편집]
大名县
송 ~ 명나라 대의 큰 도시였던 대명부(大名府)가 한단 지급시 관할이고 시내에서 동남으로 60km 떨어져 있다. 대명부는 요나라(거란)의 위협에 대비하여 변경(카이펑)을 지키기 위한 군사 기지였다. 수호전의 조연인 노준의와 연청의 고향이다. 지금도 중세 성벽이 시내를 두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4. 자매 도시[편집]
5. 기타[편집]
- 중국의 도시 중에서 중국어 발음과 한국식 한자 발음이 같은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이다. 다른 유명한 예는 한단 바로 남쪽에 있는 안양시와 한중.
- 중국판 구운몽인 한단지몽(邯鄲之夢)의 배경이다.
- 고사성어 한단지보(邯鄲之步), 또는 한단학보(邯鄲學步)가 이 도시에서 생겼다. "무조건 남을 따라해선 안 된다"는 뜻.
- 여불위는 진나라가 조나라에게 보낸 인질이던 자초에게 자신의 첩을 바쳤는데, 그 첩이 이후 이곳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바로 훗날의 진시황이다.
- 이 도시의 특산물인 당나귀 소세지(驴肉香肠)가 별미로 유명하다.
- 특산주로서 종태주(丛台酒, 충타이주)가 유명하다. 참고로 도수가 50도가(...) 넘는다.[3]
- 이곳에서 가까운 태항산에서 1942년 중일전쟁 당시 중국공산당 소속 8로군에 편입된 조선인 의용대가 역시 홍사익이 여단장으로 참가하고 있던 일본군과 싸웠다. 윤세주 등은 이곳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 한국인이 자주 가는 관광지는 아니라서 이곳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다. 그로 인해 한국 사이트에서는 정보가 찾기 힘들지만 한단시 중 제일 가볼만한 곳으로는 펑펑쾅구가 있다.
6. 같이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8-04 07:39:37에 나무위키 한단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왕망이 본인다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는 가운데 그 시범 케이스로 전국 6대 도시를 꼽았는데, 거기에 한단이 들어간다.[2] 송나라의 경제(京制)는 본수도가 아닌 배도(陪都)들도 본수도인 개봉에서 다 가까운 편이기 때문에(더군다나 중국과 한국의 상대적인 거리개념을 생각하면 더더욱), 한국사로 따질 때 고려의 3경제는 경주와 평양이 개성에서 제법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고, 조선 중후기 경기도에 한양을 둘러싸는 형국으로 군사적인 차원에서 개성, 수원, 강화, 광주(남한산성) 등의 유수부를 설치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3] 중국으로 귀화한 쇼트트랙 선수인 임효준이 이 회사 팀의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