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루GE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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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히카루'와 'GENJI'라는 두 팀이 합체해 결성되었고, '롤러 스케이트 붐'과 함께 1987~1989년은 최고의 전성기와 함께 역대급 활약 속에 슈퍼 아이돌의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아이돌의 인기가 추락하던 1994년에 오오사와 미키오와 사토 히로유키가 탈퇴하여[2] , 光GENJI Super 5로 그룹명을 바꾸고 활동하였으며 1995년 9월 3일 해산하였다. 2022년 현재도 우치우미 코지, 사토 아츠히로 두 멤버는 쟈니스 사무소 소속의 솔로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3]
그룹명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에서 따왔다. 당시 일본 연호였던 쇼와 다음으로 정해질 연호에 히카루(光)가 들어갈 것이란 소문을 듣게 된 쟈니 키타가와는 새로운 그룹명에 히카루(光)를 넣고 싶어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에서 이름을 따와서 히카루겐지로 정하게 된다.[4]
이에 멤버들이 '그룹명이 너무 예스럽지 않은가' 하고 제기하자, 겐지(源氏)를 영어로 하면 된다고 해서 光GENJI라는 이름이 탄생. 멤버 한 명 한 명에게 이미지 컬러를 부여했으며 이는 후배 그룹인 SMAP에게도 이어졌다. 또한 연장자인 히카루(光)[5] 와 연소자인 겐지(GENJI)[6] 유닛으로 나누어 형님라인이 동생라인을 끌어주는 형태는 후일 V6에게 이어졌으며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컨셉은 Kis-My-Ft2와 주니어 유닛 HiHi Jets에게 이어져오고 있다.[7]
모로호시 카즈미는 자서전에서 원래 팀명은 라이트 앤 섀도우(Light & Shadow)였으며, 멤버는 4명으로 리더인 타시로 히데타카와 사토 아츠히로, 사토 히로유키가 결정되고 마지막 한자리는 멤버들의 추천으로 본인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타시로 히데타카가 나가고 야마모토 준이치와 아카사카 아키라가 들어오면서 그룹 이름이 GENJI로 바뀌었고, 여기에 '이글스'라는 유닛으로 CD 데뷔를 했던 우치우미 코지와 오오사와 미키오가 유닛 이름을 히카루(光)로 바꾸고 그룹에 합류하면서 히카루GENJI가 되었다.[8]
히카루
GENJI
1987년 8월 19일 데뷔 싱글 'STAR LIGHT'로 데뷔하자마자 바로 남성 아이돌 톱으로 군림하며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춤추며 노래하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며 활동시의 반 누드나 반바지 등 파격적인 컨셉으로 사회 현상이라고 불릴 만큼 큰 화제를 몰고 다녔다.
1989년 하반기부터 1990년에 접어들면서 아이돌 붐이 침체하였기 때문에[10] 위와 같은 화제를 낳은 히카루GENJI의 인기도 식어가는 듯 보였지만[11] 고정 팬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90년대 초반까지 안정적인 인기를 얻었다.[12] 93년부터 멤버들의 개인 활동이 증가하였고 인기 1위였던 모로호시 카즈미는 1994년 솔로 데뷔했다.
GENJI에서 모로호시 카즈미를 제외한 4명은 이름 첫 글자를 따 SAY'S라는 유닛을 결성하여 따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활동이 7년째에 접어들 때 오오사와 미키오는 모로호시 카즈미에게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13][14] 모로호시 카즈미 역시 팀 활동에 적극성이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하고 멤버들과 회의 후[15] 메리 키타가와의 집에 찾아가 해산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메리는 해산을 반대했고[16] , 멤버 한명한명 개인면담 후 제일 처음 해산의 뜻을 밝힌 오오사와 미키오와 7명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느낀 사토 히로유키의 탈퇴가 정해지고 1994년 8월에 '光GENJI SUPER 5'라고 그룹명을 개명 후 활동하다가 1995년 9월 3일자로 공식해산했다. 쟈니스 사무소에서는 이들을 해산이 아닌 졸업으로 표기하고 있다. 당초 모로호시 카즈미 역시 탈퇴의 뜻을 밝혔으나 당시 솔로 계약문제[17] 가 걸려 활동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룹 활동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던 모로호시 카즈미는 무대에 올라가기 바로 전까지도 술을 마시는 등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8월 데뷔 35주년을 기념해 쟈니스에 남아있던 우치우미 코지, 사토 아츠히로는 유닛 U&S를 결성했다.
1. 개요[편집]
1987년부터 1995년까지 활동했던 쟈니스 사무소 소속의 일본의 남성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 당시 캐치프라이즈는 '초신성의 메세지'이다.최후의 슈퍼 아이돌
― 모로호시 카즈미[1]
1987년 '히카루'와 'GENJI'라는 두 팀이 합체해 결성되었고, '롤러 스케이트 붐'과 함께 1987~1989년은 최고의 전성기와 함께 역대급 활약 속에 슈퍼 아이돌의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아이돌의 인기가 추락하던 1994년에 오오사와 미키오와 사토 히로유키가 탈퇴하여[2] , 光GENJI Super 5로 그룹명을 바꾸고 활동하였으며 1995년 9월 3일 해산하였다. 2022년 현재도 우치우미 코지, 사토 아츠히로 두 멤버는 쟈니스 사무소 소속의 솔로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3]
그룹명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에서 따왔다. 당시 일본 연호였던 쇼와 다음으로 정해질 연호에 히카루(光)가 들어갈 것이란 소문을 듣게 된 쟈니 키타가와는 새로운 그룹명에 히카루(光)를 넣고 싶어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에서 이름을 따와서 히카루겐지로 정하게 된다.[4]
이에 멤버들이 '그룹명이 너무 예스럽지 않은가' 하고 제기하자, 겐지(源氏)를 영어로 하면 된다고 해서 光GENJI라는 이름이 탄생. 멤버 한 명 한 명에게 이미지 컬러를 부여했으며 이는 후배 그룹인 SMAP에게도 이어졌다. 또한 연장자인 히카루(光)[5] 와 연소자인 겐지(GENJI)[6] 유닛으로 나누어 형님라인이 동생라인을 끌어주는 형태는 후일 V6에게 이어졌으며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컨셉은 Kis-My-Ft2와 주니어 유닛 HiHi Jets에게 이어져오고 있다.[7]
모로호시 카즈미는 자서전에서 원래 팀명은 라이트 앤 섀도우(Light & Shadow)였으며, 멤버는 4명으로 리더인 타시로 히데타카와 사토 아츠히로, 사토 히로유키가 결정되고 마지막 한자리는 멤버들의 추천으로 본인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타시로 히데타카가 나가고 야마모토 준이치와 아카사카 아키라가 들어오면서 그룹 이름이 GENJI로 바뀌었고, 여기에 '이글스'라는 유닛으로 CD 데뷔를 했던 우치우미 코지와 오오사와 미키오가 유닛 이름을 히카루(光)로 바꾸고 그룹에 합류하면서 히카루GENJI가 되었다.[8]
2. 멤버[편집]
히카루
- 우치우미 코지(内海光司) (1968년 1월 11일생, 56세): 2대 리더
- 오오사와 미키오(大沢樹生) (1969년 4월 20일생, 55세): 초대 리더, 1994년 탈퇴
GENJI
- 모로호시 카즈미(諸星和己) (1970년 8월 12일생, 53세): 센터, 1994년 솔로 데뷔
- 사토 히로유키(佐藤寛之) (1970년 11월 2일생, 53세): SAY'S 멤버, 1994년 탈퇴
- 야마모토 준이치(山本淳一) (1972년 2월 28일생, 52세): SAY'S 멤버
- 아카사카 아키라(赤坂晃) (1973년 5월 8일생, 51세): SAY'S 멤버
- 사토 아츠히로(佐藤敦啓) (1973년 8월 30일생, 50세): SAY'S 멤버
3. 활동 이력[편집]
1987년 8월 19일 데뷔 싱글 'STAR LIGHT'로 데뷔하자마자 바로 남성 아이돌 톱으로 군림하며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춤추며 노래하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며 활동시의 반 누드나 반바지 등 파격적인 컨셉으로 사회 현상이라고 불릴 만큼 큰 화제를 몰고 다녔다.
인기의 절정을 찍었던 1988년에는 싱글 '파라다이스 은하(パラダイス銀河)'로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8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에서는 4개의 싱글 음반(パラダイス銀河、ガラスの十代、Diamondハリケーン、剣の舞)이 각각 연간 1, 2, 3, 7위를 기록했고, 오리콘 연간 앨범 랭킹에서는 2개의 앨범 음반(光GENJI, Hi!)이 각각 연간 1, 9위를 기록하면서 확실하게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1989년에는 전년도 만큼은 아니지만, 여름까지 발매한 싱글 및 앨범 음반들은 연간 랭킹 10위 안에 랭크되면서 여전히 기세를 이어갔다.[9]
1989년 하반기부터 1990년에 접어들면서 아이돌 붐이 침체하였기 때문에[10] 위와 같은 화제를 낳은 히카루GENJI의 인기도 식어가는 듯 보였지만[11] 고정 팬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90년대 초반까지 안정적인 인기를 얻었다.[12] 93년부터 멤버들의 개인 활동이 증가하였고 인기 1위였던 모로호시 카즈미는 1994년 솔로 데뷔했다.
GENJI에서 모로호시 카즈미를 제외한 4명은 이름 첫 글자를 따 SAY'S라는 유닛을 결성하여 따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활동이 7년째에 접어들 때 오오사와 미키오는 모로호시 카즈미에게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13][14] 모로호시 카즈미 역시 팀 활동에 적극성이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하고 멤버들과 회의 후[15] 메리 키타가와의 집에 찾아가 해산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메리는 해산을 반대했고[16] , 멤버 한명한명 개인면담 후 제일 처음 해산의 뜻을 밝힌 오오사와 미키오와 7명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느낀 사토 히로유키의 탈퇴가 정해지고 1994년 8월에 '光GENJI SUPER 5'라고 그룹명을 개명 후 활동하다가 1995년 9월 3일자로 공식해산했다. 쟈니스 사무소에서는 이들을 해산이 아닌 졸업으로 표기하고 있다. 당초 모로호시 카즈미 역시 탈퇴의 뜻을 밝혔으나 당시 솔로 계약문제[17] 가 걸려 활동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룹 활동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던 모로호시 카즈미는 무대에 올라가기 바로 전까지도 술을 마시는 등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8월 데뷔 35주년을 기념해 쟈니스에 남아있던 우치우미 코지, 사토 아츠히로는 유닛 U&S를 결성했다.
4. 기록[편집]
- 1988년 발매한 비디오 '太陽がいっぱい 光GENJI'가 약 30만 장을 판매. 당시 비디오 판매량으로써 최고 기록이었다.
- 88년 연간 오리콘 차트에서 'パラダイス銀河(파라다이스 은하)', 'ガラスの十代(유리의 십대)', 'Diamondハリケーン(다이아몬드 허리케인)'이 1, 2, 3위를 독점.
- 데뷔부터 90년까지 8곡 연속 오리콘차트 1위 달성.
- 데뷔부터 해산까지 CD와 비디오 총 판매량 1222.6만장.[18]
- 팬클럽 회원수는 약 50만 명.
- 아이돌 잡지 'Myojo'가 최고 부수를 찍었을 때가 바로 히카루GENJI가 활동하던 시절이다.[19] 히카루GENJI의 전성기가 지나고 SMAP이 인기를 얻을 때까지 Myojo는 수난의 시대를 겪었다.
- 뮤직 스테이션 최다 가창 아티스트 - 261곡 가창
5. 에피소드[편집]
- 전국의 초중학생들에게 롤러 스케이트를 유행시켰다. '光GENJI ローラーパニック(히카루GENJI 롤러 패닉)'이라는 패미컴 게임도 출시되었었다.
- 롤러 스케이트로 질주하는 컨셉이 마신영웅전 와타루의 주인공 이쿠사베 와타루와 고속전대 터보레인저의 1호 로봇 터보 로보, 용자 엑스카이저에 등장하는 레이커 브라더스 등에 영향을 끼쳤다.
- 초기엔 격렬한 음악이 많았기 때문에 땀이 장난 아니게 흘러 하루 2번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 매년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트럭으로 수십대나 되는 초콜릿이 보내졌다. 소속사에 트럭이 도착하는 영상은 당시 방송들의 큰 볼거리였다. 그 수는 4톤 트럭 38대 분이라고 한다. 꽤 큰 농구경기장에 초콜릿을 쌓아놨더니 2층 관객석에서 손으로 집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 활동 당시 버블시대와 겹쳐서 멤버들이 팬들에게 받은 선물의 스케일이 아주 컸으며, 그 중에서 모로호시 카즈미는 자신의 팬에게 섬을 선물받은 일화가 가장 유명하다.
- 1995년 해산 콘서트 티켓가격이 100만 엔(한국원으로 1000만 원 이상) 정도의 가격으로 암표상에게 팔렸으며 실제 그 가격으로 티켓을 구입한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 해산 후에도 사생팬들이 지금의 EXO, 방탄소년단 못지 않게 심하게 극성을 부려 멤버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사생활 보호가 전혀 되지 않았다. 한 멤버는 자신의 집이 무단으로 투어 여행의 관광 루트가 되어버리자 "그런 짓은 그만둬달라"라며 괴로워했다.
- 1988년 인기 정상의 가도를 달리던 시기 최연소 멤버 2명(아카사카 아키라와 사토 아츠히로, 당시 15세) 교토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 곳까지 진을 치고있는 수백명의 팬들과 카메라맨들에 휩싸여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돌아오는 역인 도쿄에서도 엄청난 수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어 변장을 하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방법으로 그 자리를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 1993년 발매한 싱글 '용기 100%'가 애니메이션 닌자보이 란타로의 주제곡으로 1993년부터 2002년까지 쓰였다. 이후 쟈니스 사무소 후배 주니어 유닛 Ya-Ya-yah가 리메이크했다.
- 멤버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사람은 부동의 센터였던 모로호시 카즈미로, 당시 아이돌 잡지의 인기 투표에서는 팀의 전성 시절과 맞물려 1위를 도맡았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행동이나 표정 등이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 활력이 넘치는 팀의 이미지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 물론 '못생겼는데 왜 인기가 많냐?', '너무 깝치는 이미지' 등의 이유로 싫어하는 아이돌에서도 1위.
- 모로호시 카즈미 다음으로는 막내들, 사토 아츠히로(앞)와 아카사카 아키라(뒤)의 인기가 높았다.
- 80년대 초중반 쟈니스 선배 아이돌(콘도 마사히코, 타하라 토시히코, 노무라 요시오, 소년대 등)과 맞장을 떴고,[24] 실제로 인기와 음악적 성취도에서 우위였던 체커스의 리드 보컬 후지이 후미야는, 훗날 아카시야 산마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와서 "1987년에, 2달 정도 영국에서 음악 작업도 하고 우리 밴드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돌아왔는데, 공항에 오니 잡지 표지에 모르는 애들이 있더라. 근데, 얘들이 거의 모든 잡지의 표지를 차지하고 있고 방송국에 갔더니 이미 톱스타 취급을 받고 있더라. 누군지 알아 보니 히카루 겐지였는데... '세상이 2달 만에 이렇게도 바뀌는구나.'라는 실감을 했다"고 술회 한 바 있다.
- 훗날 시대를 풍미하게 되는 SMAP, TOKIO, KinKi Kids, V6[25] 등 쟈니즈 사무소의 주니어들이 당시 히카루겐지의 백댄서를 맡았다.
- 당시의 인기를 짐작케 하는 에피소드로, 공연을 위해 이동을 해야 하는데 시간에 못 맞출 것 같자 JR그룹에 연락해서 신칸센 발차를 정지시켜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설적인 아이돌로 통하는 H.O.T.의 콘서트로 인한 운행 시간 연장보다 한 수 위다. 그러니까 정시 출발해야 할 열차를 자기들 편하자고 우리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건데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할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것.
이건 JR이 잘못하지 않았나?
- 세타가야 '9'자 사건의 범인들의 가짜 협박장에서 목표대상이 된 적도 있다. 그만큼 유명했단 뜻도 되겠지만.
-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도 등장하는데 모든 걸 버리고 폐인이 된 마츠코가 TV나 보며 뒹굴거리다가 히카루겐지(그 중에서도 우치우미 코우지)를 보고 빠지게 된다. 영화만의 오리지널 설정이다.
- 최연소 멤버였던 아카사카 아키라는 2007년과 2010년, 2번이나 각성제 복용 혐의로 체포된 바 있다. 현재는 연예계 복귀 상태나 무대 중심으로 활약할 가능성이 크다. TV 출연은 쉽지 않을 듯.
- 오오사와 미키오는 팀 해산 후 주로 연기자로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모습은 백수전대 가오레인저 극장판의 레지스탕스 리더다.
- 오오사와 미키오는 1996년에 여배우 키타지마 마이와 혼전 임신으로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이혼했다. 오오사와 미키오는 최근 재혼할 때까지 혼자 아들을 키웠는데 아들이 선천성 감음성 난청, 지적장애, 망상증 등을 가지고 있어 상당히 고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13년 12월 이 아들이 DNA감정 결과 친아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014년 1월 6일 오오사와 미키오는 기자회견을 통해 보도가 사실임을 발표하였고 현재 변호사를 통해서 법률적으로 부자관계를 소멸하는 신청을 했다고 하는데, 일본법상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결혼 후 200일이 넘어서 출생한 경우에는 가정내의 관계를 고려하여 위해서 친자와 동등한 관계라고 인정해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26] 그 부분이 고려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정확하게 결혼 200일째에 출생한 바람에 해당법률의 적용 여지는 없어졌고, 2015년 11월 20일에 열린 재판결과 정식으로 친자관계 없음이 인정되었다.[27] 정리글
- 대한민국에서 백두산의 리더였던 유현상이 1989년에 제작하던 '야차'라는 그룹이 있었는데[28]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것도 모자라 의상까지 이 그룹을 표절하였다.
애애애~ 애타는 마음~♬[29] 그런데 어둠의 루트로 일본 연예계를 즐기던 청소년들이 있었기 때문에 표절그룹이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엄청난 흑역사.
- 2019년 9월 4일 도쿄돔에서 개최된 쟈니 키타가와의 고별식에 현재 쟈니스 소속인 우치우미 코지와 사토 아츠히로뿐 아니라 오오사와 미키오와 사토 히로유키가 쟈니스 OB로서 참석했다.
- 히카루겐지의 초창기 히트곡들을 만들어준 CHAGE and ASKA의 멤버 ASKA는 자신의 블로그에 2017년에 멤버 7명이 30주년 기념으로 1년 한정 재결합 하기로 하여 자신에게 곡을 의뢰했다고 한다. 몇개의 곡을 만들어주었으나 소속사 관련 문제 등으로 결국은 불발되었다.
- 2022년 오오사와 미키오가 2023년 도쿄도 키타구장 선거에 출마를 밝혔지만, 입후보 직전 현직인 하나카와 요소타 구장을 지지하면서 사퇴했다.
6. 음반[편집]
6.1. 싱글[편집]
6.2. 앨범[편집]
6.3. VH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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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의 아이돌은 '빛나는 모습'만을 대중에게 각인시켰으나 SMAP부터는 그 영역이 파괴되었기에, 아이돌로서는 자신들이 최후의 슈퍼 아이돌이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남겼다.[2] 1994년 7월 22일 뮤직 스테이션 출연 중 직접 탈퇴를 발표했으며 '94 SUMMER CONCERT FOREVER YOURS 콘서트를 끝으로 1994년 8월 31일 히카루GENJI에서 탈퇴했고, 동시에 쟈니스 사무소에서 퇴소했다.[3] 이 둘은 2022년 현재, TV, 라디오 등의 방송출연 보다는 부타이(舞台) 공연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2020년대 들어서는 TV, 라디오 등의 방송 출연이 이전에 비해서 증가했는데, 이는 쟈니스 사무소가 소위 공로자(과거 1980년대~1990년대 초반에 메인으로 활동했던 소속 탤런트. 연예인으로서의 활동은 적지만, 소속사에 공로가 있기 때문에, 많은 급료를 받고 있다.)들을 정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우치우미 코지, 사토 아츠히로 본인들도 언제든 정리될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르게 TV, 라디오 등의 방송출연에 적극적인 자세로 방향전환을 했을 거라 추정된다. 둘을 묶어서 U&S로도 활동 중이다.[4] 그 후 1989년 새롭게 정해진 연호는 헤이세이(平成)였고, 히카루겐지는 그 해 발매된 앨범에 Hey! Say!라는 타이틀을 붙였다.[5] 60년대생(68년생, 69년생)으로 이루어진 형님라인.[6] 70년대생(70년생, 72년생, 73년생)으로 이루어진 동생라인.[7] 한국에서도 이러한 퍼포먼스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오마주한 듯한 사례가 있다.[8] 5월 무렵에 7명 전원이 데뷔 싱글 'STAR LIGHT'를 레코딩했지만, 7명 모두 잡지와 미디어 매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6월 하순부터이고, 이전까지는 GENJI만 등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GENJI 멤버 5명만 쟈니스영야구대회에서 곡을 피로했고(야구장이라서 롤러스케이트를 신지는 않았다.), 7명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데뷔 싱글을 부른 건 7월 하순 '밤의 히트 스튜디오 DELUXE'라는 인기 음악방송이었다. 이전까진 인기가 불이 붙지는 않았지만, 밤의 히트 스튜디오 출연을 계기로 단숨에 인기가 불붙기 시작했다.#[9] 각종 지표 등을 보면, 데뷔년도인 1987년 여름부터 1989년 여름까지가 히카루GENJI의 전성기였고, 이후에도 아이돌로서 넘버원의 인기를 이어갔지만, 1989년 하반기 부터 밴드 가수들의 붐이 시작되면서 싱글 및 앨범 음반의 판매량은 전성기에 비해 절반 이상 줄어들게 되었다.[10] 이 시기에는 밴드 붐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PRINCESS PRINCESS라든가, X라든가, BUCK-TICK이라든가…[11] 1989년 가을 이후 싱글 및 앨범 판매량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1990년 11월에 발매한 싱글 '웃어봐(笑ってよ)'를 마지막으로 1991년 부터 1995년 그룹이 해체할 때까지 단 한번도 오리콘차트 주간 1위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더 베스트 텐, 밤의 히트 스튜디오, 우타노톱텐 같은 주요 음악프로 등이 대거 폐지되고 대중에게 히카루GENJI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는 활동의 터전이 줄어든 것도 요인 중 하나이다. 당시 히카루GENJI의 방송출연은 멤버 7명 전원이 출연하는 음악프로 위주였고, 음악프로 이외의 방송출연(특히 예능프로)은 어디까지나 아이돌로서 홍보를 위한 수단이었지, SMAP처럼 고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래서, 음악프로가 대거 폐지된 그 시점부터 히카루GENJI의 전성기가 막을 내리게 됐다.[12] 가수 전체로 봤을때는 밴드 가수들의 인기에 밀렸지만, 아이돌 분야에서 만큼은 SMAP, KinKi Kids가 떠오르기 전까지 여전히 넘버원이었다. 그리고, 당시 쟈니스 사무소 내부에서는 매출액 넘버원의 캐시카우였다.[13] 당시 두 사람의 불화설이 심심찮게 퍼졌지만 실제로는 둘이 놀러다니는 등 사이가 무척 좋았으며 최근까지도 함께 디너쇼를 개최했다.[14] 오오사와는 히카루겐지라는 이유만으로 드라마나 영화의 주연을 맡으면서 전문배우들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꼈고, 이미 정상을 차지한 그룹 안에서 더이상 성장할 수 없음을 느껴 탈퇴를 결심했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밝혔다.[15] 멤버 7명이 모여서 뭔가 이야기를 한 것이 이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로호시 카즈미는 굉장한 허탈감을 느꼈다고.[16] 인기가 하락세이긴 했으나 소속사 매출 넘버원이었다.[17] 모로호시 카즈미는 1994년 솔로 가수로서 앨범 1장, 싱글 2장 발매했다. 그리고, 그 해 3월~4월에는 솔로 콘서트까지 했다.[18] 뮤직스테이션 2013년 7월 29일 '일본 최강의 아이돌 TOP 30' 방송 참조[19] 해당 사진은 Myojo 1987년(쇼와 62년) 12월호이며, 히카루GENJI의 첫 Myojo 표지이다.[20] 1987년 8월 7일 첫 출연, 1995년 9월 1일 마지막 출연. 1988년 2월~1992년 10월 고정출연.[21] 우치우미 코지 - 1968년생, 오오사와 미키오 - 1969년생, 모로호시 카즈미 & 사토 히로유키 - 1970년생, 야마모토 준이치 - 1972년생, 아카사카 아키라 & 사토 아츠히로 - 1973년생[22] 1987년 ~ 1989년까지.[23] 1990년 ~ 1995년 해산 전까지.[24] 모로호시 카즈미는 소년대의 우에쿠사와 실제로 홍백 대기실에서 싸운적이 있다. 지금은 서로 잘 지낸다고 한다.[25] 팀의 연장자인 토니센 멤버들은 TOKIO와 함께 히카루겐지의 전속 백댄서 유닛이었던 '헤이케파' 소속이었다.[26] 이를 '친생자 추정'이라고 하며 한국 민법에서도 똑같은 조항이 있다. 혼인성립 후 200일 이후, 혼인 종료 후 300일 이내에 태어난 자녀는 그 부의 친생자로 추정되는 조항으로, 이 추정을 깨려면 친생부인의 소(친생자부존재의 소가 아니다)를 제기하여 승소해야 한다.[27] 이에 키타지마 마이 측은 보도가 나간 직후 왜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기사로 나가게 만드는지, 어린 아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생각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며 적반하장의 코멘트를 내보냈다. 키타지마 마이는 결혼 전부터 남자 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아마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키타지마 본인도 모를 것 같다는 의견이 많다. 참고로 아들 측은 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아버지가 DNA 검사 결과 99.9퍼센트 부자관계라고 적힌 서류를 봤다고 주장했는데, 오오사와 미키오의 말에 따르면 아들에게 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한 적이 없고 서류는 본인이 본 후에 회사 금고에 넣어두었기 때문에 아들이 볼 방법이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예전에도 친구집에서 물건을 망가뜨린 걸로 오오사와 미키오가 혼낸 걸 가지고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고 경찰에 신고까지 한 전력이 있어 아들의 주장은 순전히 본인의 망상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28] KBS '젊음의 행진'에서 기획하던 '통크나이'를 잇는 '통크나이 2'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후에 이 멤버 중에서 조진수가 ZAM 멤버로 활동하고 김병수가 '맨발의 청춘'으로 유명한 벅 멤버로 활동한다.[29] 그래도 이 노래만은 백두산의 오리지널이긴 하다. 원래 자기들 앨범에 수록했던 걸 리메이크했다.[30] 히카루GENJI의 최고의 히트곡.[31] 해당 싱글의 커플링곡인 時をこえたフェスティバル으로도 활동했다.[32] CHAGE and ASKA의 멤버인 ASKA가 히카루GENJI에게 제공한 마지막 곡.[33] 그룹으로서 마지막 오리콘 싱글 차트 1위.[34] 7인조 마지막 싱글.[35] 해당 싱글 부터 히카루GENJI SUPER5 명의로 발매[36] 공백란은 DVD가 발매 되지 않은 VHS[37] 히카루GENJI의 첫 콘서트.[38] 이 VHS는 비매품이기에 명확한 발매일을 알지 못 함[39] 히카루의 주연영화.[40] GENJI의 주연영화.[41] 7인조 마지막 콘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