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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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월드컵의 경기 중, 1라운드(15강)을 정리하는 페이지.
이 대회는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모든 경기가 녹아웃 토너먼트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만일 경기에서 무승부가 나올 시에는 30분간의 연장전을 치렀으며 연장전 이후에도 승부가 안 날 시에는 재경기를 치렀다. 재경기는 9경기, 10경기 등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이 페이지에서의 경기의 순서는 시작 시간의 순서에 따랐고, 시작 시간이 같을 시에는 토너먼트의 최종 결과를 최대한 따를 수 있게 기술하였다.
5경기의 오스트리아를 제외[1] 하고 표의 왼쪽에 있는 국가대표팀은 시드 배정국이다.
1938 프랑스 월드컵의 개막전.
4월에 있었던 안슐루스로 독일은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선수들의 상당수를 스쿼드에 넣었다. 비록 오스트리아의 노장 마티아스 신델라가 스쿼드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당시 잘 나가던 분더팀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선수들 5명이 베스트 11에 들어간 터라 독일은 충분히 강력해보였다.[6] 겉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정치인들과 독일 축구 연맹은 독일의 선발 명단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비율을 6대5나 5대6으로 비슷하게 맞추길 원했는데 이유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외부적으로 화합한 것처럼 보여야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양국 선수들간의 플레이 스타일 차이도 컸고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독일에 감정이 좋았을 리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독일 선수들 역시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포용하려 들지도 않았으니 갈등의 수위도 상상이상이었다.[7]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리그도 진행[8] 되는 두세달남짓. 이걸 해야 하는 헤르베르거가 독일의 역대급 명장이라고 해도 그것은 16년 후의 월드컵도 우승하고 난 후대의 평가일 뿐 당시엔 대표팀에 재임한지 2년도 안된 신참 감독에 불과했다. 이런 일을 성공시키기는 당시 최고의 감독 비토리오 포초가 대신 독일을 맡았어도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관중들 역시 독일의 편이 아니었다. 독일 선수들이 입장할 때 관중들은 야유와 함께 유리병, 토마토, 계란 등을 던져주며 그들을 환영했다.
전반 29분, 독일의 공격수 요제프 가우헬이 선제골이자 대회 개막 골을 넣을 때까지 그래도 그들의 기대는 그대로 맞아 떨어질 것으로 보였다.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중앙으로 찔러주었고 가우헬이 쇄도해 들어오면서 강력한 슈팅으로 스위스의 골문을 뚫었다. 하지만 전반이 마무리 될 무렵, 스위스의 앙드레 아베글렁이 헤딩으로 동점골을 뽑아냈고, 그 이후의 경기 흐름은 치열한 공방전. 하지만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골키퍼 루돌프 라프틀의 잇단 선방으로 스위스는 아까운 기회들을 잇달아 놓쳤다. 격렬한 경기 속에서 양 팀은 연장까지 치렀지만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5일 후에 재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의 첫 상대는 지역예선에서 아일랜드 자유 주를 물리치고 올라온 노르웨이였다. 비록 노르웨이가 이번에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는 팀이라고 해도 2년 전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다크호스였다. 게다가 이 대회 4강전에서 노르웨이를 패배시켰던 팀이 바로 이탈리아였으므로 노르웨이는 이탈리아에 설욕을 다짐하고 있었다[11] . 비록 패하긴 했어도 4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승부를 끌고 갔던 팀이 노르웨이였던 터라 승부를 쉽게 예측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국제 대회의 경험 면에서 노르웨이보다 한 수 위였다. 전반 2분만에 인터 밀란 출신의 공격수 피에트로 페라리스가 첫 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조반니 페라리의 슈팅을 노르웨이의 골키퍼 헨뤼 요한센이 잡아내지 못했고 흘러나온 볼을 페라리스가 침착하게 골문으로 다시 차 넣어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와 노르웨이는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지속하였고 노르웨이 선수들은 동점골을 넣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이탈리아의 골키퍼 알도 올리비에리에게 계속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계속된 노력 끝에 후반 38분 노르웨이의 공격수 아르네 브루스타[12] 가 올리비에리의 방어를 결국 뚫어냈고 승부는 결국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연장에 돌입한지 4분 만에 선제골의 상황이 재현되고 말았다. 피에로 파시나티의 슛을 요한센 골키퍼가 막아냈지만 쇄도하던 실비오 피올라가 다시 슈팅을 쏘았고 결국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후는 노르웨이가 계속 이탈리아의 골문을 열기 위해 슈팅을 퍼부어댔지만 올리비에리의 방어를 결국 뚫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가 노르웨이를 2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꺾고 8강에 진출하였다.
개최국 프랑스는 첫 상대로 벨기에를 만났다. 수도 파리의 올랭피크 드콜롱브에서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뒤에 업은 프랑스는 그들의 성원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스트라이커 에밀 베낭트가 경기 시작 35초 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벨기에 골키퍼 아르놀 바주의 캐칭 미스를 틈탄 빠른 골이었다. 월드컵의 아버지 쥘 리메도 응원석에서 박수를 보냈다. 뒤이어 프랑스는 전반 16분 장 니콜라의 빠른 돌파에 이은 왼발 슈팅으로 추가골을 터뜨렸다. 경기는 그 이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니콜라는 후반 24분, 오른발 터닝 슈팅으로 추가골을 터뜨리면서 한 골을 만회한 벨기에를 가볍게 따돌리고 8강에 진출하였다.
3번 연속으로 월드컵에 나간 벨기에는 4전 전패에 3득점 12실점으로 참가에만 의미를 둬야 할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헝가리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시합에서의 예측은 너무나도 쉬워보였다. 헝가리는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리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끌어모은 명실상부한 강팀이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당시 피파가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고 타 대륙과 경쟁없이 일본의 기권으로 손쉽게 월드컵 16개국에 진출한 팀이었다.[15]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대표팀에는 네덜란드계와 중국계 선수들도 많았고 골키퍼 탄모행은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로 자신이 지키는 골대에 인형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의 기원이 무색하게도 시합의 결과는 너무도 뻔하게 흘러갔다. 13분 만에 첫 골을 뽑아낸 헝가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골문을 전반에만 4번이나 흔들었다. 후반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거의 저항을 하지 못했으며 헝가리는 6대0으로 손쉬운 승리를 챙겼다.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그 이후로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월드컵 본선에서 단 1경기를 치른 팀으로 남아있다.불명예스러운 기록이지만 당연히 역대 월드컵 참가팀 중 최소 본선 경기 횟수 기록을 보유중이다.
1.5. 5경기
프랑스 월드컵이 개최되기 3달 전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됨으로써 이 시합은 취소되었고 스웨덴이 8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로써 리옹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던 단 한 경기는 그대로 취소되었다.
북중미 대표로 월드컵에 출전한 쿠바의 상대는 루마니아였다. 제3세계의 축구였으니만큼 쿠바의 축구는 유럽인들에게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루마니아는 시드 배정국이 아님에도 쿠바를 얕보았다. 루마니아의 감독 서불레스쿠는 쿠바를 상대로 7골을 넣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을 정도였지만 쿠바 대표팀은 유럽 축구팬들의 기대를 채워주었다. 루마니아를 상대로 3대3의 흥미진진한 결과를 낸 것이다. 특히 후반 종료 2분을 남기고 루마니아의 율리우 바라트키가 만회골을 넣어 연장전을 치렀으며, 연장에서도 한 골씩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무승부를 일궈냄으로서 쿠바의 실력에 대한 의문 부호를 떼는데 성공했다.
브라질은 당시 전통적으로 흰색 유니폼을 입었지만 폴란드와의 옷 색깔이 겹쳐서 하늘색 셔츠를 입고 나왔다.[17]
전반 18분, 레오니다스의 발끝에서 브라질의 선제골이 나왔다. 폴란드 수비진형의 허점을 정확히 파고든 후 자신의 장기인 왼발 강슛으로 폴란드의 골문 구석을 뚫었다. 하지만 5분 후 브라질 공격수 에르쿨리스가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에게 미식축구에서나 나올 법한 파울[18] 을 범해 페널티 킥을 허용했고, 프리데리크 셰르프케가 침착하게 성공시켜 점수는 동점이 되었다. 하지만 브라질은 2분 만에 호메우가, 그리고 전반 끝날 무렵에는 페라시우가 각각 골을 터뜨려 전반을 3대1로 마쳤다.
전반이 끝나고 비가 와서 상태가 엉망이 된 운동장을 보고 브라질의 주전 공격수 레오니다스는 맨발로 경기를 치르자고 심판에게 제의했다. 하지만 심판은 부상 등의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웃긴 것은 레오니다스는 전반에 골도 넣고 대활약을 펼쳤으나, 맨발로 뛸 것을 거절당하자 그것에 멘탈에 영향을 줬는지 후반 내내 삽을 펐다. 이 와중에 후반전에서 폴란드의 희망으로 떠오른 이는 21살의 젊은 공격수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였다.[19] 빌리모프스키는 후반 8분과 14분에 연속골을 넣어 순식간에 승부를 3대3 동점으로 만들어버렸다. 브라질은 페라시우가 후반 26분에 다시 한 골을 터뜨려 리드를 잡았고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가 싶었지만 빌리모프스키는 후반 44분에 천금같은 동점골을 넣은 동시에 해트 트릭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정규 시간을 모두 쓰고도 4대4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양 팀은 연장전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브라질에는 레오니다스가 있었다. 후반전이 끝나고, 레오니다스는 맨발로 뛰는 대신 양말을 벗고 축구화를 신었다. 그런데 그 결과, 연장전에서만 레오니다스는 두 골을 넣으며 승리를 거뒀다!! 이 두 골로 순식간에 승부의 추를 브라질로 기울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다. 월드컵 역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 경기를 치르는 양팀 모두에서 해트 트릭이 나온 것이다.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폴란드는 연장 후반 종료 직전에서야 빌리모프스키가 다시 한 골을 추가하여 추격의 불씨를 살렸지만 너무 늦었다.4골이나 넣고도 패한 빌리모프스키 지못미 빌리모프스키: 한 골만 좀 막으라고 수막 시발들아
이 경기는 2014년 홈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독일에게 7실점을 당하는 굴욕을 당하기 전까지 브라질의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 최다 실점 기록이 나온 경기였다.
항구 도시 르 아브르에서 만난 두 팀은 체코슬로바키아와 네덜란드였다. 지난 대회 준우승팀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당대 최고 골키퍼인 플라니치카, 지난 대회 득점왕 네예들리 등 주축 선수들이 그대로 나온 팀이라 네덜란드를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둘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네덜란드는 후반에 공격수 판데르베인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전력에도 차질이 빚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규시간동안 체코슬로바키아는 네덜란드의 골문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고 그대로 연장전에 접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연장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드디어 3골을 터뜨리며 결국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8강에 합류하였다.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득점 모두 네게 줄게
5일 전의 시합에서 무승부를 거둔 양 팀은 5일 후인 6월 9일에 다시 맞붙게 되었다. 스위스가 멤버 교체 없이 시합에 다시 임한 반면 독일은 원래 주장인 프리츠 스체판 등 6명의 선수를 바꾸어 경기에 나섰다. 그래도 그 말도 안되는 6대5의 원칙은 바꾸지 못했다.
초반의 페이스는 독일이 가져갔다. 전반 8분 만에 선제골을 넣은데 이어 29분에는 골대에 맞고 나온 공이 스위스의 하프백 에르네스트 뢰르처의 몸에 다시 맞고 들어가는 불운까지 겹쳐 점수는 순식간에 2대0으로 벌어졌다. 게다가 스위스는 공격수 조르주 에비까지 부상을 입어 경기는 지고 있고 선수까지 다치는 겹치는 불운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전화위복. 5일 전에 동점골을 뽑아냈던 아베글렁의 어시스트를 받은 발라셰크가 추격의 불씨를 당겼고 후반 19분에는 프레디 비켈이 동점골을 넣었다. 독일의 골키퍼 라프틀이 펀칭한 공이 바로 비켈의 앞에 떨어졌고 비켈은 라프틀의 키를 넘기는 슈팅을 독일 골문에 꽂아넣었다. 이후 독일 골키퍼 라프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후반 30분과 33분에는 아베글렁이 연속골을 넣으면서 경기는 순식간에 스위스쪽으로 기울었다.[22] 독일의 이 패배는 7개 시드 배정국 중의 유일한 패배였고 독일의 실상을 모르고 보면 그만큼 예상외의 결과였다.
이 패배는 독일이 2018년 때 사상 최악의 치욕적인 기록을 쓰기 이전까지 월드컵 1라운드에서 탈락한 유일했던 사례였다.
독일과 스위스의 경기와 마찬가지로 쿠바와 루마니아도 무승부가 나온 관계로 재시합을 하게 되었다.
지난 경기에서 쿠바를 얕보다 의외의 일격을 맞은 루마니아는 슈테판 도바이, 요아킴 몰도베아누를 투입하면서 승리를 가져오려고 했고 그들의 기대대로 경기의 선제골은 루마니아의 주장 슈테판 도바이가 먼저 기록했다. 하지만 후반, 쿠바는 효율적인 반격으로 루마니아에게 2골을 뽑아내었고 루마니아의 공격은 쿠바의 수비진에 번번이 차단되었다. 결국 쿠바가 루마니아를 2대1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이탈리아 vs 프랑스 : 8강 1경기
브라질 vs 체코슬로바키아 : 8강 2경기
헝가리 vs 스위스 : 8강 3경기
스웨덴 vs 쿠바 : 8강 4경기
이후 정보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이후에서 기재.
1938년 월드컵의 경기 중, 1라운드(15강)을 정리하는 페이지.
이 대회는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모든 경기가 녹아웃 토너먼트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만일 경기에서 무승부가 나올 시에는 30분간의 연장전을 치렀으며 연장전 이후에도 승부가 안 날 시에는 재경기를 치렀다. 재경기는 9경기, 10경기 등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이 페이지에서의 경기의 순서는 시작 시간의 순서에 따랐고, 시작 시간이 같을 시에는 토너먼트의 최종 결과를 최대한 따를 수 있게 기술하였다.
5경기의 오스트리아를 제외[1] 하고 표의 왼쪽에 있는 국가대표팀은 시드 배정국이다.
1. 1라운드[편집]
1.1. 1경기 독일 1 vs 1 스위스[편집]
1938 프랑스 월드컵의 개막전.
4월에 있었던 안슐루스로 독일은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선수들의 상당수를 스쿼드에 넣었다. 비록 오스트리아의 노장 마티아스 신델라가 스쿼드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당시 잘 나가던 분더팀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선수들 5명이 베스트 11에 들어간 터라 독일은 충분히 강력해보였다.[6] 겉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정치인들과 독일 축구 연맹은 독일의 선발 명단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비율을 6대5나 5대6으로 비슷하게 맞추길 원했는데 이유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외부적으로 화합한 것처럼 보여야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양국 선수들간의 플레이 스타일 차이도 컸고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독일에 감정이 좋았을 리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독일 선수들 역시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포용하려 들지도 않았으니 갈등의 수위도 상상이상이었다.[7]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리그도 진행[8] 되는 두세달남짓. 이걸 해야 하는 헤르베르거가 독일의 역대급 명장이라고 해도 그것은 16년 후의 월드컵도 우승하고 난 후대의 평가일 뿐 당시엔 대표팀에 재임한지 2년도 안된 신참 감독에 불과했다. 이런 일을 성공시키기는 당시 최고의 감독 비토리오 포초가 대신 독일을 맡았어도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관중들 역시 독일의 편이 아니었다. 독일 선수들이 입장할 때 관중들은 야유와 함께 유리병, 토마토, 계란 등을 던져주며 그들을 환영했다.
전반 29분, 독일의 공격수 요제프 가우헬이 선제골이자 대회 개막 골을 넣을 때까지 그래도 그들의 기대는 그대로 맞아 떨어질 것으로 보였다.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중앙으로 찔러주었고 가우헬이 쇄도해 들어오면서 강력한 슈팅으로 스위스의 골문을 뚫었다. 하지만 전반이 마무리 될 무렵, 스위스의 앙드레 아베글렁이 헤딩으로 동점골을 뽑아냈고, 그 이후의 경기 흐름은 치열한 공방전. 하지만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골키퍼 루돌프 라프틀의 잇단 선방으로 스위스는 아까운 기회들을 잇달아 놓쳤다. 격렬한 경기 속에서 양 팀은 연장까지 치렀지만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5일 후에 재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1.2. 2경기 이탈리아 2 vs 1 노르웨이[편집]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의 첫 상대는 지역예선에서 아일랜드 자유 주를 물리치고 올라온 노르웨이였다. 비록 노르웨이가 이번에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는 팀이라고 해도 2년 전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다크호스였다. 게다가 이 대회 4강전에서 노르웨이를 패배시켰던 팀이 바로 이탈리아였으므로 노르웨이는 이탈리아에 설욕을 다짐하고 있었다[11] . 비록 패하긴 했어도 4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승부를 끌고 갔던 팀이 노르웨이였던 터라 승부를 쉽게 예측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국제 대회의 경험 면에서 노르웨이보다 한 수 위였다. 전반 2분만에 인터 밀란 출신의 공격수 피에트로 페라리스가 첫 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조반니 페라리의 슈팅을 노르웨이의 골키퍼 헨뤼 요한센이 잡아내지 못했고 흘러나온 볼을 페라리스가 침착하게 골문으로 다시 차 넣어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와 노르웨이는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지속하였고 노르웨이 선수들은 동점골을 넣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이탈리아의 골키퍼 알도 올리비에리에게 계속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계속된 노력 끝에 후반 38분 노르웨이의 공격수 아르네 브루스타[12] 가 올리비에리의 방어를 결국 뚫어냈고 승부는 결국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연장에 돌입한지 4분 만에 선제골의 상황이 재현되고 말았다. 피에로 파시나티의 슛을 요한센 골키퍼가 막아냈지만 쇄도하던 실비오 피올라가 다시 슈팅을 쏘았고 결국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후는 노르웨이가 계속 이탈리아의 골문을 열기 위해 슈팅을 퍼부어댔지만 올리비에리의 방어를 결국 뚫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가 노르웨이를 2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꺾고 8강에 진출하였다.
1.3. 3경기 프랑스 3 vs 1 벨기에[편집]
개최국 프랑스는 첫 상대로 벨기에를 만났다. 수도 파리의 올랭피크 드콜롱브에서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뒤에 업은 프랑스는 그들의 성원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스트라이커 에밀 베낭트가 경기 시작 35초 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벨기에 골키퍼 아르놀 바주의 캐칭 미스를 틈탄 빠른 골이었다. 월드컵의 아버지 쥘 리메도 응원석에서 박수를 보냈다. 뒤이어 프랑스는 전반 16분 장 니콜라의 빠른 돌파에 이은 왼발 슈팅으로 추가골을 터뜨렸다. 경기는 그 이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니콜라는 후반 24분, 오른발 터닝 슈팅으로 추가골을 터뜨리면서 한 골을 만회한 벨기에를 가볍게 따돌리고 8강에 진출하였다.
3번 연속으로 월드컵에 나간 벨기에는 4전 전패에 3득점 12실점으로 참가에만 의미를 둬야 할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1.4. 4경기 헝가리 6 vs 0 네덜란드령 동인도[편집]
헝가리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시합에서의 예측은 너무나도 쉬워보였다. 헝가리는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리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끌어모은 명실상부한 강팀이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당시 피파가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고 타 대륙과 경쟁없이 일본의 기권으로 손쉽게 월드컵 16개국에 진출한 팀이었다.[15]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대표팀에는 네덜란드계와 중국계 선수들도 많았고 골키퍼 탄모행은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로 자신이 지키는 골대에 인형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의 기원이 무색하게도 시합의 결과는 너무도 뻔하게 흘러갔다. 13분 만에 첫 골을 뽑아낸 헝가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골문을 전반에만 4번이나 흔들었다. 후반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거의 저항을 하지 못했으며 헝가리는 6대0으로 손쉬운 승리를 챙겼다.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그 이후로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월드컵 본선에서 단 1경기를 치른 팀으로 남아있다.
1.5. 5경기 오스트리아 vs 스웨덴 (취소)[편집]
프랑스 월드컵이 개최되기 3달 전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됨으로써 이 시합은 취소되었고 스웨덴이 8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로써 리옹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던 단 한 경기는 그대로 취소되었다.
1.6. 6경기 쿠바 3 vs 3 루마니아[편집]
북중미 대표로 월드컵에 출전한 쿠바의 상대는 루마니아였다. 제3세계의 축구였으니만큼 쿠바의 축구는 유럽인들에게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루마니아는 시드 배정국이 아님에도 쿠바를 얕보았다. 루마니아의 감독 서불레스쿠는 쿠바를 상대로 7골을 넣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을 정도였지만 쿠바 대표팀은 유럽 축구팬들의 기대를 채워주었다. 루마니아를 상대로 3대3의 흥미진진한 결과를 낸 것이다. 특히 후반 종료 2분을 남기고 루마니아의 율리우 바라트키가 만회골을 넣어 연장전을 치렀으며, 연장에서도 한 골씩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무승부를 일궈냄으로서 쿠바의 실력에 대한 의문 부호를 떼는데 성공했다.
1.7. 7경기 브라질 6 vs 5 폴란드[편집]
브라질은 당시 전통적으로 흰색 유니폼을 입었지만 폴란드와의 옷 색깔이 겹쳐서 하늘색 셔츠를 입고 나왔다.[17]
전반 18분, 레오니다스의 발끝에서 브라질의 선제골이 나왔다. 폴란드 수비진형의 허점을 정확히 파고든 후 자신의 장기인 왼발 강슛으로 폴란드의 골문 구석을 뚫었다. 하지만 5분 후 브라질 공격수 에르쿨리스가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에게 미식축구에서나 나올 법한 파울[18] 을 범해 페널티 킥을 허용했고, 프리데리크 셰르프케가 침착하게 성공시켜 점수는 동점이 되었다. 하지만 브라질은 2분 만에 호메우가, 그리고 전반 끝날 무렵에는 페라시우가 각각 골을 터뜨려 전반을 3대1로 마쳤다.
전반이 끝나고 비가 와서 상태가 엉망이 된 운동장을 보고 브라질의 주전 공격수 레오니다스는 맨발로 경기를 치르자고 심판에게 제의했다. 하지만 심판은 부상 등의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웃긴 것은 레오니다스는 전반에 골도 넣고 대활약을 펼쳤으나, 맨발로 뛸 것을 거절당하자 그것에 멘탈에 영향을 줬는지 후반 내내 삽을 펐다. 이 와중에 후반전에서 폴란드의 희망으로 떠오른 이는 21살의 젊은 공격수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였다.[19] 빌리모프스키는 후반 8분과 14분에 연속골을 넣어 순식간에 승부를 3대3 동점으로 만들어버렸다. 브라질은 페라시우가 후반 26분에 다시 한 골을 터뜨려 리드를 잡았고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가 싶었지만 빌리모프스키는 후반 44분에 천금같은 동점골을 넣은 동시에 해트 트릭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정규 시간을 모두 쓰고도 4대4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양 팀은 연장전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브라질에는 레오니다스가 있었다. 후반전이 끝나고, 레오니다스는 맨발로 뛰는 대신 양말을 벗고 축구화를 신었다. 그런데 그 결과, 연장전에서만 레오니다스는 두 골을 넣으며 승리를 거뒀다!! 이 두 골로 순식간에 승부의 추를 브라질로 기울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다. 월드컵 역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 경기를 치르는 양팀 모두에서 해트 트릭이 나온 것이다.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폴란드는 연장 후반 종료 직전에서야 빌리모프스키가 다시 한 골을 추가하여 추격의 불씨를 살렸지만 너무 늦었다.
이 경기는 2014년 홈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독일에게 7실점을 당하는 굴욕을 당하기 전까지 브라질의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 최다 실점 기록이 나온 경기였다.
1.8. 8경기 체코슬로바키아 3 vs 0 네덜란드[편집]
항구 도시 르 아브르에서 만난 두 팀은 체코슬로바키아와 네덜란드였다. 지난 대회 준우승팀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당대 최고 골키퍼인 플라니치카, 지난 대회 득점왕 네예들리 등 주축 선수들이 그대로 나온 팀이라 네덜란드를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둘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네덜란드는 후반에 공격수 판데르베인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전력에도 차질이 빚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규시간동안 체코슬로바키아는 네덜란드의 골문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고 그대로 연장전에 접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연장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드디어 3골을 터뜨리며 결국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8강에 합류하였다.
1.9. 9경기[20] 독일 2 vs 4 스위스[편집]
5일 전의 시합에서 무승부를 거둔 양 팀은 5일 후인 6월 9일에 다시 맞붙게 되었다. 스위스가 멤버 교체 없이 시합에 다시 임한 반면 독일은 원래 주장인 프리츠 스체판 등 6명의 선수를 바꾸어 경기에 나섰다. 그래도 그 말도 안되는 6대5의 원칙은 바꾸지 못했다.
초반의 페이스는 독일이 가져갔다. 전반 8분 만에 선제골을 넣은데 이어 29분에는 골대에 맞고 나온 공이 스위스의 하프백 에르네스트 뢰르처의 몸에 다시 맞고 들어가는 불운까지 겹쳐 점수는 순식간에 2대0으로 벌어졌다. 게다가 스위스는 공격수 조르주 에비까지 부상을 입어 경기는 지고 있고 선수까지 다치는 겹치는 불운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전화위복. 5일 전에 동점골을 뽑아냈던 아베글렁의 어시스트를 받은 발라셰크가 추격의 불씨를 당겼고 후반 19분에는 프레디 비켈이 동점골을 넣었다. 독일의 골키퍼 라프틀이 펀칭한 공이 바로 비켈의 앞에 떨어졌고 비켈은 라프틀의 키를 넘기는 슈팅을 독일 골문에 꽂아넣었다. 이후 독일 골키퍼 라프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후반 30분과 33분에는 아베글렁이 연속골을 넣으면서 경기는 순식간에 스위스쪽으로 기울었다.[22] 독일의 이 패배는 7개 시드 배정국 중의 유일한 패배였고 독일의 실상을 모르고 보면 그만큼 예상외의 결과였다.
이 패배는 독일이 2018년 때 사상 최악의 치욕적인 기록을 쓰기 이전까지 월드컵 1라운드에서 탈락한 유일했던 사례였다.
1.10. 10경기[23] 쿠바 2 vs 1 루마니아[편집]
독일과 스위스의 경기와 마찬가지로 쿠바와 루마니아도 무승부가 나온 관계로 재시합을 하게 되었다.
지난 경기에서 쿠바를 얕보다 의외의 일격을 맞은 루마니아는 슈테판 도바이, 요아킴 몰도베아누를 투입하면서 승리를 가져오려고 했고 그들의 기대대로 경기의 선제골은 루마니아의 주장 슈테판 도바이가 먼저 기록했다. 하지만 후반, 쿠바는 효율적인 반격으로 루마니아에게 2골을 뽑아내었고 루마니아의 공격은 쿠바의 수비진에 번번이 차단되었다. 결국 쿠바가 루마니아를 2대1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2. 8강 대진표[편집]
이탈리아 vs 프랑스 : 8강 1경기
브라질 vs 체코슬로바키아 : 8강 2경기
헝가리 vs 스위스 : 8강 3경기
스웨덴 vs 쿠바 : 8강 4경기
이후 정보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이후에서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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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의 팀 전력으로 추측해보면 오스트리아가 시드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오스트리아를 왼쪽에 표기했다.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의 기권으로 이 경기에만 시드가 배정되지 않았다.[2] 1경기의 무승부로 인한 재경기[3] 6경기의 무승부로 인한 재경기[4] 독일의 선수 명단에서 *가 붙은 선수들은 원래 오스트리아 선수들이었다[5] 조르주 에비의 형.[6] 신델라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이 되기 1년 전인 1937년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는 생애 마지막 시합을 뛰었고 안슐루스 이후에도 나치 독일에 의해 국가대표 소집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7] 1974년 월드컵 때 네덜란드에도 이때의 독일보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감독 리뉘스 미헐스는 자신의 페르소나 요한 크라위프에 선택과 집중을 택했고 크라위프와 불편한 관계였던 빌리 판데르카윌런과 얀 판베베른을 대표팀에 부르지 않는 것으로 해결했다.[8] 1938년 독일 전국 챔피언십은 1938년 3월말부터 진행되었고 4강까지 진행되고 나서 월드컵 휴식기를 가졌다.[9] 괄호 안은 한국시간[10]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동명이인[11]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12] 브루스타는 2년 전의 올림픽 4강전에서도 동점골을 넣어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간 전력이 있다.[13] FIFA 보고서에는 프란스 멩이 주장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영상 자료에서는 양팀 주장으로 나위르가 샤로시와 악수하는 장면이 나온다.[14] 샤로시 죄르지의 동생.[15] 하지만 1934년에 있었던 일본과의 맞대결에서 일본을 7대1로 깬 적도 있었기에 아마 기권 없이 실제로 붙었어도 일본보다는 올라올 확률이 높았을 거라 추측된다. 참고로 이 당시에 아시아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하던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축구를 가장 잘한다니... 21세기 들어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16] 팀의 주전 공격수 리샤르드의 동생[17] 초창기 브라질 대표팀은 흰색 유니폼을 착용했었다. 12년 뒤의 흑역사까지는 말이다.[18] 폴란드 공격수의 뒤에서 허리를 끌어 안았다. 옛날 축구에서는 이런 식의 파울이 종종 나왔다.[19] 일부 이야기에서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가 축구장에서 고의로 패배하라는 나치 독일의 명령에 거역했다 총살당한 비극의 희생양으로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42년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우크라이나와 독일 노동자들 간의 축구 시합 이야기가 와전된 것. 참고로 이 시합 이야기를 잠깐하자면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디나모 키이우 출신 선수들 중 일부가 리그가 중단되는 바람에 빵 공장에 들어갔다. 이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고 로코모티프 키예프 출신 선수들이 또 추가되어 start라는 팀이 결성되었고 역시나 프로 축구 선수들답게 다른 팀들을 떡바르고 다녔다. 하지만 문제는 이 팀의 상대팀들 사이에 독일의 flakelf라는 팀이 껴있었는데 이들은 군인과 가까이 지내던 비행장 노동자들이었다. 게다가 2차전에서의 심판은 SS 친위대원이었고 그는 start팀 선수들에게 시합 전에 나치식 경례를 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요청을 씹었다. 게다가 그 시합까지 5대3으로 이겨버리니 화가 난 독일 측에서는 이 start팀의 18명중 11명을 체포했고-9명은 다음날에 바로 체포, 2명은 1년 후에 체포했다. 이 중 5명이 총살, 고문 등의 이유로 사망한 사건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FC start 문서를 참조.[20] 1경기의 무승부로 인한 재경기[21] 자책골[22] 그나마도 역전골은 공이 독일 수비수를 맞고 굴절되면서 라프틀의 키를 넘겨 들어가고 말았다.[23] 6경기의 무승부로 인한 재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