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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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사적 제48호.
2. 역사[편집]
성덕왕 21년,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삼국사기》 제8권 신라본기 제8 성덕왕 21년
개원(開元) 10년 임술(서기 722)에 비로소 보화군(毛火郡)에 관문(闕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하는데, 일본(日本)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요새였다. 둘레가 6,792보 5자였으며, 동원된 인부는 39,262명으로 감독자는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에 수도 서라벌 남쪽을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모벌군성(毛伐郡城)혹은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 불렸으며 각간 원진이 감독하에 건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대로 경주 외곽을 막는 관문 역할을 했던 성으로 꽤나 유명한 요새였는지 당나라 기록에도 관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관문성은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허물어졌다.
(중략)
임관군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 때에 모화군에 성을 쌓아 일본이 침략해 오는 길을 막았는데, 경덕왕이 임관이라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에 주에 예속시켰다. 석성의 남은 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성곽조(城郭條)와 고적조(古跡條).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점인 여기는 울산항으로 왜군이 상륙했을 때 지나쳐야 하는 좁은 협곡 지형으로 척 봐도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현 경주 외동읍까지 왕경 경주 범위로 간주되었던 것을 볼 때[3] 이 관문성이 왕경 경주와 지방인 울산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기능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그 나라의 산은 수십리씩 연결되어 있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 관문(關門)이라 한다. 신라는 이 곳에 항상 궁사 수천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관문성(關門城)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만리성(萬里城)이라 부른다.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했다.】
《동경잡기》. 1845년
3. 외부 링크[편집]
- 한국어 위키백과: 관문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문성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관문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관문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관문성
- 두산백과 : 관문성
4. 사적 제48호[편집]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