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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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17호
화성 당성
華城 唐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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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211\,595㎡
지정연도
1971년 4월 15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파일:당항성1.jpg

당항성 위치
1. 소개
2. 역사
2.1. 삼국의 쟁탈전
2.2. 통일 신라 이후
3. 외부 링크
4. 사적 제217호
5. 같이보기



1. 소개[편집]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구봉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당항성(黨項城) 또는 당성(黨城)으로 불리운다. 테뫼형(山頂式 : 산봉을 중심으로 산정 외곽부를 돌로 쌓은)과 포곡형(包谷形 : 봉우리와 계곡 주위를 둘러쌓은)을 결합한 복합식 산성이다. 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편집]



2.1. 삼국의 쟁탈전[편집]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교역로
울산항 · 당항성 · 영암 · 청해진



당항성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가기 위한 최적의 관문이었고[1] 그래서 삼국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이곳은 원래 마한 54개국 중 원양국(爰襄國)[2]에 속하였다가 마한의 소국에서 성장한 백제의 강역으로 편입되었고, 그 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펴 백제의 한강 유역을 쳐서 빼앗은 뒤 이곳에 당성군을 설치하였다.

백제아신왕 때 고구려의 남방 지역을 끊임없이 공격하였으며, 396년 군사를 끌고 온 광개토대왕에게 동생까지 볼모로 내주는 등 호되게 당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472년 개로왕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남북으로 협공하자고 제의하였지만 북위의 반응이 좋지 않아 실패하였다. 더구나 백제의 이 계획이 장수왕의 귀에도 들어가는 바람에 백제 침공에 좋은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파일:장수왕의 남진.jpg

장수왕의 남진
475년, 장수왕은 3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수도 한성을 비롯한 백제한강 유역을 빼앗고 개로왕을 살해하였다. 이때 백제는 남쪽으로 밀려나 수도까지 웅진성(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옮기게 되었고, 고구려는 이때 빼앗은 당성에 당성군을 설치하였다.


파일:나제동맹.관산성전투.jpg

한성 탈환과 관산성 전투
551년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 백제가 한강 하류 6군, 신라가 한강 상류 10군을 차지한다. 이때 잠시 백제가 당성군을 탈환했으나, 진흥왕이 동맹을 깨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방까지 몽땅 빼앗아 신라의 강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때 당성군도 속절없이 신라에게 넘어가고 만다.[3] 신라에게 배신당해 겨우 수복한 한강 유역을 모조리 빼앗긴 성왕은 554년 복수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해 전장 한복판에서 신라군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4]

이후 백제신라와 완전히 틀어져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치열하게 혈전을 치뤘다. 642년엔 의자왕이 직접 출정해서 미후성을 비롯한 40여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윤충을 시켜 대야성 전투를 벌여서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이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를 죽이고 대야성까지 빼앗았다. 643년 의자왕은 당항성을 공격해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신라가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당나라가 개입하면 골치 아파질 것을 우려한 의자왕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났다.

성왕 시절,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고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신라와 국운을 걸고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거기에 왜는 당연히 동참했고 고구려와 말갈도 가세해 신라를 괴롭혔다. 하지만 신라는 끝까지 한강 유역을 뺏기지 않았고 당성진도 계속 신라의 영토로 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삼국이 다투는 시기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가진 성이었지만, 정작 이 당시 성의 규모는 중대 규모 병력만 주둔할 정도로 코딱지만했다고 한다.#1#2 당시 이 성이 위치한 지역인 화성시 서신면 자체가 좁디좁은 육로로 연결된 섬이나 다름없는 반도였기 때문에 아무생각 없이 성의 규모만 키웠다간 주둔군 식량보급에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또한 위치 자체가 반도 정중앙 가까이 있어 방어가 용이해 굳이 무리해서 키울 필요도 없었다. 현재의 해안선은 천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퇴적작용 및 간척으로 삼국이 각축전을 벌이던 당시보다 후퇴한 상태이다.


2.2. 통일 신라 이후[편집]


삼국 통일 후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바꿨다가 829년(흥덕왕 4년)에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안 방어를 위해 군사 기지화 하였다. 이후 후삼국시대가 개막하고 900년(효공왕 4년)에 궁예 휘하의 장수 왕건에 의해 정복되어 태봉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고, 태봉의 영역을 그대로 계승한 고려에 이르러서도 별다른 분쟁 없이 쭉 고려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고려 초에 당성군으로 개칭하였고, 그 뒤 수주(水州 :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인주(仁州 : 지금의 인천광역시)에 속하였다가 1290년(충렬왕 16) 익주지사(益州知事)의 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다.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를 거쳐 1308년 익주목(益州牧), 1310년(충선왕 2년) 남양부가 되었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년) 남양도호부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양군으로 인천부 밑으로 예속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4년에 수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수원군이 화성군으로 개칭되고 2001년 화성시가 되었으며, 당성은 현재 남양읍 일대의 땅이다.


3. 외부 링크[편집]




4. 사적 제217호[편집]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내벽은 흙으로 쌓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하였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당성 → 화성 당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5. 같이보기[편집]


  • 당진시
  • 화성시: 구 설치를 추진하는 가운데 서남부지역을 관할하는 구(區) 명칭으로 '당성구'가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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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둥반도 동저우 항과 최단거리인 교역항이다.[2]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이라는 설 말고도 파주시, 연천군이라는 설이 있다.[3] 그러나 한강 하류 일대는 백제가 스스로 포기했고, 그 바람에 신라가 그 땅을 거저 먹었다는 견해도 있다. 성왕(백제) 문서 참조.[4] 성왕의 최후에 대해선 삼국사기 백제 본기, 신라 본기, 일본서기의 내용이 각기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