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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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로스에 남아있는 페니키아 유적
파일:바트룬 2.jpg
바트룬에 남아있는 페니키아 시절 방파벽 유구
1. 개요[편집]
고대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에서 활동했던 민족 집단으로, 현재의 레바논 일대가 그 중심지였다.No doubt, in their commercial dealings, the Phoenicians spread valuable germs of civilization, but rather as a bird dropping grain than a husbandman sowing seed. they never civilized and assimilated to themselves the nations with which they came into contact.
의심할 여지 없이, 페니키아인들은 상업적 거래를 통해 문명의 세포를 퍼트렸으나, 그 모습은 씨앗을 뿌린 농부가 아닌 낱알을 떨어트리는 새의 모습이었다.[1]
그들은 접촉한 국가를 (강제적으로) 문명화를 시키거나, 동화시키지 않았다.[2]의 저서 《로마사》(Mommsen's History of Rome) Page 116.
비블로스라는 도시에서 발원했고, 인근에 시돈, 티레,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 등의 도시를 세운 해양 민족이었다. 중세 이후 대부분은 같은 셈족 계열인 아랍인에게 동화되었고 이탈리아인,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의 혈통에 관여하기도 했다.[4]
현대 레바논 민족의 직계 조상이다. 레바논인들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할 뿐만 아니라 유전적인 근거 역시 성립한다. 자세한 역사는 레바논/역사 문서로.
기록상으로 확실하게 3,000년이 넘는 고대 문명이면서도, 현대에 독립국가가 존재하여 그 민족 정체성을 지금까지 계승하고 있다.[5] 레바논인, 팔레스타인인 등이 페니키아인의 후손들이다.
위에서 언어별 명칭을 보면 알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민족이 이들이다. 고대 셈어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가나안이었다. 페니키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어가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변한 이름이 푸닉이다.
2. 설명[편집]
파일:페니키아.png
페니키아계 식민 도시들.
사실 페니키아라고 싸잡아 부르는 건 로마 제국때부터의 일이었고, 번성할 당시에는 각각의 도시국가 이름으로 불렸다. 《성경》에 나오는 두로와 시돈이 바로 지중해 인근의 페니키아인 항구 도시인 티루스(티레)와 시돈이었다.
학자들은 페니키아라는 단어가 '붉다', 또는 '자주색'을 뜻하는 셈어 카나안(Canaan)의 정확한 번역은 아닐 수 있어도 동일어라고 추론한다. 이 지역에서 유명했던 자주색 염료의 이름에 기원하는 동일한 뜻의 그리스어 단어가 지역 이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Dau 1984, 9; Salibi 2003, 172). 필립 히티(Philip Hitti)는 오늘날의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이름은 '카나안'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자주색 염료는 아카드어로 ‘kina‘ni’, 후리어로 ‘knaggi’, 페니키아어로 ‘kena’, 히브리어로 ‘ken‘an’, 그리스어로 ‘Phoinix’로 불렸다고 한다. 특히 그리스어 ‘Phoinix’는 신화에 등장하는, 스스로 화염에 싸여 스스로 재에서 다시 소생하는 불사조 '페닉스'(Phoenix)와도 어근을 공유한다(Hitti 1972, 82). 조인형은 그리스인들이 이들의 진한 피부색 때문에 '붉은 피부'라고 불렀다고 인용한다(조인형 1982, 121).
다우는 페니키아가 카나안의 번역어이므로 '페니키아'는 그리스 사람들이 부른 이름이고, '카나안'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Dau 1984, 18). 한편 코프만은 최소 1세기까지는 페니키아인들이 스스로를 '카나안인'(Canaanites)으로, 그 땅은 '카나안'(Canaan)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면서 《성경》 히브리어에서 '카나안인'(Can’ani)은 '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고대 레바논에서 가장 유명했던 직업인 상업에서 그 이름이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Kaufman 2000, 4). 반면 히티는 이들이 스스로 '카나안인'이라고 불렀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먼저 그들의 자주색 옷감과 자주색 염료 무역 거래인들을 '페니키아인'이라고 불렀으며, 나중에 BC 12세기에 이르러는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도 '페니키아인'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Hitti 1972, 83; 1965, 15).
심지어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푸트 또는 카나안이라고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가나안이다. 다른 것은 종교뿐으로 페니키아의 주신은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그 바알이었다. 그러므로 가나안 사람 중에 해안가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다신교 지역이 페니키아이고, 내륙의 농업•목축 일신교 지역이 이스라엘이라고 봐도 좋을 수준이었다.[7] 이들은 여러 이유로 경쟁했지만, 교류도 많았는데 특히 궁정이나 신전 같은 건물을 지은 자들이 페니키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페니키아인들은 최초로 갤리선을 사용하여 해상 무역으로 번성한 민족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무역의 기반은 다른 민족들을 압도하는 탐험기술 덕분이었는데, 이는 하단에 후술한다. 《성경》에는 티레의 무시무시한 무역 규모를 기록하면서 상아로 배를 건조하고, 은으로 도로를 포장하며 황금으로 높은 누대를 쌓는다고 적어 놓았다.
무역을 하면서 지중해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와 100여 년 동안 혈전을 벌였던 포에니 전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카르트 하다쉬트) 역시 페니키아인들의 도시였다. 사실 카르트 하다쉬트 말고도 많았는데, 원체 여기저기 진출하다 보니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에도 도시가 있었으며 아프리카 횡단 과정에서 서아프리카 일대에 건설한 페니키아 도시들은 서기 5세기 경에도 존속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장기간 탐험과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상업으로 번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전의 문자와 달리 상인들이 사용할 법한 간편한 글자가 필요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수메르의 설형문자를 발전시켜 문자를 만들었는데, 그게 페니키아 문자였다.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 문자, 로마자(라틴 문자)에 영향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문자에서 파생된 아람 문자는 아랍 문자, 브라흐미 문자 등의 기원이 되었다.
유리를 최초로 개발한 자들이 시돈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모래에 있는 규석의 성분으로 유리를 만들었는데, 시돈 해안에는 모래가 많았기 때문에 유리개발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현대에도 유리의 주 재료가 모래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즈불룬 지파를 가리켜 언급한 "모래 속에 감추어진 보화"(신명기 33:19)가 유리를 가리킨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선 우라노스를 거세할 때 쓴 피묻은 낫을 묻었더니 생겨난 민족으로 등장한다. 에우로파가 이곳의 공주였다고 전해지며, 제우스가 이곳에서 에우로파를 납치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제우스가 에우로파를 데리고 돌아다녔던 지역들은 에우로파의 이름을 따 유럽이 되었다. 에우로파는 크레타 섬의 여왕이 되어 크레타 왕들의 기원이 되었고, 오라비 카드모스는 누이를 찾으러 나라를 벗어났다 그리스에서 테베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은 페니키아 문명이 유럽의 여러 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발원지는 이집트로부터 파피루스를 팔았다 해서 파피루스의 그리스어 비블로스로 불린 도시이며, 초기에는 대부분 가나안 신화의 원산이라 불리는 우가리트가 번영했다. 이 시대에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힘이 약해지자 독립한다. 우가리트는 전쟁과 재해로 멸망했고 이후 수르(티레)가 비블로스를 대신해 번성했는데, 수르는 식민도시 개척에 적극적이라 카르트 하다쉬트부터 시작해 제노바, 시라쿠사, 크레타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페니키아는 성경에 타르시스라 나오는 에스파냐 땅의 타르테소스와 교역했는데, 이들과의 교역을 위해 서유럽 최초의 도시인 가디르(𐤀𐤂𐤃𐤓; 현재 카디스)를 건설했다. 이 카디스는 콜럼버스 항해가 시작된 곳이며 근대까지 에스파냐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그 일대를 사판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라틴어 히스파니아로 변했고 그게 에스파냐가 되었다. 사판은 페니키아어로 '토끼가 많은 땅'으로, 지금도 그 일대에는 토끼, 다람쥐가 많으며 이때 진출 덕분에 현대 유전자 분석 결과 에스파냐 반도, 북아프리카, 몰타 지역에 페니키아인들의 유전자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레반트의 페니키아 도시가 몰락하자 카르타고가 서지중해권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마저 로마 제국에 멸망하면서 페니키아는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나머지 지역들이 서서히 로마에 동화되면서 페니키아 문명도 무너졌다.
3. 탐험[편집]
페니키아인들은 갤리선으로 탐험도 많이 다녔으며,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을 받고 최초로 아프리카를 일주하며 희망봉을 돌아본 민족이기도 하다. 헤로도토스가 이 말을 기록하면서 "정오에 해가 북쪽에 떠 있었다니 거짓말인 거 같아서 믿기 힘들다"고 부연했는데 역설적으로 오늘날 이 기록은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한 명확한 증거가 되고 있다. 적도를 지나 남반구로 들어가면 정오에 해가 북쪽에 보이기 때문이다.[8]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항해 중에 밀을 심어서 수확하는 근성을 보이며 2년 만에 아프리카를 일주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항해 방향이 훗날 포르투갈의 인도 개척 방로와 반대방향이었다는 것. 이집트 파라오의 의뢰를 받고 홍해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아프리카를 돌았으며, 태양이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아에도 기록된 내용이다.[9]
당시 사람들은 새를 육지에 날리거나 섬에 있는 특이한 구름의 형태, 밤하늘의 별로 위치를 파악했다고 하는데 천문관측과 조수간만의 차이, 조류의 흐름에 대한 전문지식하에 항해술을 한층 더 발전시켜 원양항해와 야간항해를 최초로 성공시켰다. 천문항해술을 발전시켜 별의 위치에 대한 법칙을 발견해 장기간 항해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항해에 가장 중요한 세 요소인 조선술, 항해술, 천체술 3박자를 모두 갖춘 자들로 갤리선을 처음 만들었다는 점에서 조선술을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이들은 지중해를 돌아다니는 걸 넘어서 홍해, 인도양, 대서양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했다. 주석을 찾기 위해 브리튼 섬까지 오갔고,[10] 호박과 모피를 찾아 발트 해에 있는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오갔다고 한다. 발트 해의 파도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인간들이라고밖에 거기다 당대 지중해인들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항해하기를 꺼렸으나[11] 그리스인 曰, 금을 찾아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다른 도시국가들과 달리 상업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대 지중해에서 항해술이 알아주다 보니, 외국에서는 무언가 항해를 맡길 일이 있으면 페니키아인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또 티레의 최전성기를 이끈 기원전 950년 무렵 히람 1세는 솔로몬 왕과 경제동맹을 맺고 함께 동방진출을 시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홍해 항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인연 때문에 이후에도 티레와 이스라엘은 동방 진출에 한해서 함께했는데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 멀리는 중국까지(!) 갔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중해를 호수처럼 누비고 사방팔방 진출하며 번성했다.
믿긴 어렵겠지만 페니키아인들이 아메리카까지 진출했다는 설(!!!)도 있다. 탐험가 히밀코의 항해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 히밀코라는 사람은 아프리카 최남단 항해를 했던(희망봉까지 갔다)[12] 한노[13] 보다 앞선 시기 북대서양 항해를 했으며 주석 찾으러 북쪽에 갔다 브리튼 섬을 발견한 그 사람이다.
이 바다는 항해하는 데 무려 넉 달이나 걸렸다. 바다가 너무 넓어서 바람의 힘으로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없었고, 바닷물은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또한 여울 사이에 해초들이 튀어 나왔는데, 그 해초가 마치 덤불처럼 우거져서 배가 걸릴 지경이었다. 바닷물은 깊지 않아서 바닥에는 얼마 안되는 물이 간신히 차 있을 뿐이었다. 바다의 야생동물들이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출몰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배 사이로 바다괴물들이...(중략)
몇몇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 대목은 바하마 제도의 얕은 사구와 흡사하고, 항해에 넉 달이나 걸렸다고 하니,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라고 본다. 당대 헤라클레스 기둥이라 불린 카나리아 제도에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자리잡아 있었는데 카르트 하다쉬트인들과 카나리아 제도 사이에 살던 페니키아인들은 카나리아 제도 너머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카르타고 주화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묘사되었다고도 한다.# 다만,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서아프리카나 서유럽 지역으로 항해한 기록을 곡해한 결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으로 항해하는 중에 경유해 갈 수 있는 곳 중에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바다나 도버 해협, 지브롤터 해협,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과 바스크 지방의 앞바다, 카나리아 제도 및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 지역 등,[14] 기록에서 언급하는 지리적 특징을 만족하는 곳이 꽤 있기 때문이다. 인도양을 횡단하는 항해에 대한 기록이라는 설도 있는데, 서기 8세기경까지는 기후 및 항해 기술의 문제로 인도양을 직접 횡단하는 건 꿈도 못 꾸고 연안 항해밖에 하지 못했으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15]
이집트의 미라 중에는 담배, 코카인 반응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의 원산지가 아메리카 대륙이라서 페니키아가 아메리카와 교류했다는 주장이 잠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현재는 부정되고 있는데, 후속 연구에 의하면 미라에서 확인된 담배나 코카인은 실제로는 발굴에 동원되었던 이집트인 인부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일단 아메리카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전에도 대거 진출 기록이 있는데, 바이킹 사람들은 방해석 결정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그린란드와 캐나다를 드나들었고, 스페인 북서부의 바스크인 어부들도 캐나다에서 대구와 고래를 잡아왔다. 다만, 바스크족 포경업자들이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분명한 증거인 레드 베이 포경기지 때문에, 이들이 16세기 이전에 아메리카에 갔을 가능성은 오히려 부정되었다. 뉴펀들랜드에 있는 이 유적지를 방사능 연대측정을 통해 조사한 결과, 아무리 건설 시기를 오래 잡아도 1530년 이후에나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보다 훨씬 앞선 1497년에 제노바 공화국 출신 잉글랜드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영어식 이름은 존 캐벗)가 이 유적지가 있는 뉴펀들랜드에 도달한 바 있으므로, 바스크인의 아메리카 도달은 이들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시기에나 이뤄진 것이다. 즉, 페니키아인들에 비해 원양 항해 능력이 더 우월한 후대의 탐험가들도 11세기쯤에나 아메리카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조차도 한두 번 정도만 방문한 단발성 항해였으므로 16세기 이전까지는 지속적으로 교류하거나 탐험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페니키아가 아메리카와 교류했을 가능성은 전면 부정되는 것이다.
다만 페니키아인들의 교역은 현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교역은 아니었다고 한다. 항로를 알고 있는 극히 일부의 상인들만 특정 상품을 취급했는데 페니키아인들의 주 교역은 '침묵의 거래'였다. 원주민이 해안에 상품을 놓고 물러나면, 페니키아인들이 보고 그에 걸맞은 금이나 상품을 내려놓고 가져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히밀코에게 아프리카 대륙 일주 탐험을 의뢰한 파라오가 들은 소문에서 보듯이, 페니키아인들 이전에 누군가 아프리카 대륙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 발견을 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집트가 속해있던 북아프리카 지역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끼리는 베르베르인같은 북아프리카나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유목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교류가 이뤄져왔으므로, 이들의 목격담을 취합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입수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를 토대로 아프리카 대륙의 형태를 대강 유추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