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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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관료,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우봉(友峰).
제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대진은 그의 외숙부이다.
2대 부통령 김성수는 그의 처외조부다.
2. 생애[편집]
1930년 10월 22일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에서 아버지 김석원(金奭源)과 어머니 신 안동 김씨 김하규(金夏圭)의 장녀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주농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민주학생연맹을 결성하여 우익 청년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중앙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뒤,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60년 필리핀 국립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을 수학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 장교에 임관하여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주군-봉화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때 영주지방철도청 유치 등을 이루었다. 한편 같은 해 10.2 항명 파동 때 가담자로 몰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회의원직을 상실당하였다. 이듬해인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탈락당하였다. 그러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공천을 받아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주군-봉화군-영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박용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80년 5.17 내란을 겪었다. 게다가 그 해 11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 규제 대상자가 되었다. 1984년 5월 김영삼계 정치인들과 김대중계 정치인들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할 때 핵심요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인 1985년 정치규제에서 풀렸다. 그리고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김영삼이 신한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역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해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영주시-영풍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진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다시 복당한 뒤 통일민주당 정무위원을 맡았다.
1988년 12월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1990년 3월까지 재직하였으며, 한국에 고속철도 (지금의 KTX) 도입을 최종적으로 확정지었다.[1] 장관 임명 당시 야권 쪽 인물이라 화제가 되었으며, 비 5공인물임을 자처하였다. 또한, 이 때 노태우와 김영삼 간의 가교 역할을 하여 3당 합당 성사에 기여하였다.
1991년 8월 1일 미국 뉴욕주 옷세고 카운티(Otsego County) 워체스터(Worcester) 메디컬 센터(Medical Center)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MBC 공화국 시리즈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성환이 그를 연기하였다.
4.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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