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경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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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 근정전 서편에 위치한 누각으로,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 행사에 사용하던 건물이다.[1] 연못 안에 석재 기단부, 정면 7칸, 측면 5칸의 목조 중루(重樓)와 팔작지붕을 갖춘 무출목 이익공계(二翼工系)의 구조이다. 기둥 상부 주두(柱枓) 아래 날개처럼 생긴 공포 두 개를 두고 그 위에 보가 얹히도록 한 양식이다.[2] 단일 건물로서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큰 전통 목조 건축물이기도 하다.
그 풍경은 경복궁 안에서도 백미로 꼽혀 만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으로 나오기도 한 상징적 건물이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해외 어느 일간지에서는 이 경회루가 물에 가라앉은 그림을 기사로 내면서 '한국 경제 침몰'이라는 글귀를 달기도 했다. #
경회루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하루 전날 인터넷을 통해 미리 예약을 해서 지정된 시간에 안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보통은 일주일 전부터 예약이 마감되므로 빨리 예약하는 게 좋다.
2. 역사[편집]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에 달하는 사각형 연못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당시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이 건설을 맡아 8개월 만에 경회루를 완공했다. 당시의 경회루는 현재의 경회루보다 크기는 더 작았으나 더 호화로웠으며, 3층 높이의 중층 지붕 전각이었다. 1474년(성종 5년) 3월과 8월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는데, 이때 경회루를 헐고 다시 지으면서 돌기둥에 아름답게 꽃과 용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지금 들으니, 경회루 돌기둥에 그리어 새긴 구름과 용과 화초들의 형상이 사치하고 화려함이 너무 심하다고 합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새기지 말게 하여 검소한 덕을 밝게 보이도록 하소서.
1521년(중종 16년) 경회루를 수리하고 청기와를 덮으려 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경회루는 바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 누를 본 중국 사람들은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게 여겼다. 그런데 전부터 청기와로 이지 않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근정전은 모두 청기와로 이었는데 만약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렇게 했다면, 함원전(含元殿)과 서현전(瑞賢殿)도 모두 청와로 이어야 한다. 어제 해당 관청[該曹]이 경회루를 수리하려 하였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데, 이제 청기와로 고쳐 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는 사치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나라 사신의 관람을 위해서인 것이다. (중략)
삼공이 아뢰었다. "경회루는 건립한 지가 이미 오랬습니다. 그 뒤 다시 중수할 적에도 청기와로 이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청기와를 굽는 공역이 매우 클 뿐더러 누각도 정전(正殿)에 견줄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금년처럼 흉년이 든 해에 또 청기와 굽는 역사를 시행한다면 그 폐단이 작지 않은데다가 이제 명나라 사신이 올 때를 당하였으니 더욱 거행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명나라 사신이 이를 본다면 더욱 우리 나라의 검소한 덕을 알게 될 이점도 있습니다. 이 누(樓)는 사면이 모두 공간이므로 철망을 친다 해도 잡새들이 깃드는 것을 막기가 어렵고, 또 그 공역도 작은 일이 아니니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상소에서 말한 바 경회루를 푸른 기와로 이려 했다는 일은, 감히 사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누(樓)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인데 유독 푸른 기와로 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수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게 물어본 결과 공역(公役)이 매우 커서 하기 어렵다고 하기에 정지시켰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되었다. 이후 약 300년 뒤인 고종 4년(1867) 때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세워졌다. 이 때 경회루는 단층 지붕으로 바뀌고 누각을 지탱하는 용 조각 돌기둥이 무늬 없는 것들로 바뀌어 세워졌으며, 크기 자체는 더 커지는 변화가 생겼다.
3. 건축[편집]
경회루의 구조는 전형적인 대량식 구조지만, 1층 기둥이 전부 화강암인 점이 특징이다. 2층은 외부와 통해 있는 외진과 내부 공간인 내진, 그리고 가장 중심에 있는 중궁 부분으로 구분된다. 각 공간 사이마다 문이 달려 있으며, 문을 전부 들어올려 한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외진과 내진 그리고 중궁은 바닥의 높이가 달라 단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자리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어 가장 안쪽으로 갈수록 지위가 높은 사람의 공간임을 나타낸다. 외진과 내진에는 궁궐 건축답게 천장을 개판(蓋板)으로 막고 있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은 네모나고 안쪽 돌기둥은 둥근데, 이는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圜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체 기둥은 총 48개로 바깥기둥이 24개 안쪽 기둥이 24개인데, 이는 24개절과 24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회루 주위에는 네모난 인공 연못과 둥근 모양의 섬 2개를 만들었는데, 이 또한 천원지방을 형상한 것이다. 거기다가 연못 주변에 담장을 둘러서 일반인들이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훼손했고 문화재청에서 2000년대에 북쪽과 동쪽 담장을 복원했으나 서쪽과 남쪽 담장은 관람객들의 관람 문제로 복원하지 않았다.
각 지붕 끝에는 잡상이 11개 올려져 있다. 이는 옆에 위치한 법전인 근정전에 올려진 잡상 7개보다 더 많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근정전에는 잡상 11개가 올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7개만 있다. 확인
3.1. 현존하는 전통 건축 중 최대의 크기[편집]
근정전의 크기는 정면 30 m에 측면 21 m, 높이 22.5 m(기단 제외)지만,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34.4 m, 측면 28.5 m, 높이 21.5 m로 현존하는 한국의 단일 목조 건축 중 부피가 가장 크다.[3][4] 칸 수 역시 근정전이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총 25칸인 데 반해 경회루는 정면 7칸에 측면 5칸, 총 35칸이다. 다만 한 칸의 길이는 건물에 따라 다 다른 만큼 칸 수만 가지고는 건물의 크기를 확실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경회루 근처의 수정전은 정면 10칸에 측면 4칸으로, 무려 40칸이나 되지만 실제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다.
경회루는 조선 말 목재 여건에서 지을 수 있는 한 가장 큰 건물이라는 추측의 근거가 된다. 소모되는 부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른 건물과 차별화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팔작지붕의 삼각형 수직 벽면인 박공의 비율상 크기가 굉장히 크다. 근정전과 비교해봐도 두 건물의 크기 차이 이상으로 박공 차이가 더 크다. 이는 박공의 크기를 늘려 그만큼 박공 아래에 있는 처마 지붕의 길이를 짧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가 들이치는 박공은 작을수록 좋은데, 통상의 비율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만들었음은 그만큼 처마에 쓸 긴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터이다. 삼림자원이 고갈된 조선 말에서는 충분히 큰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4. 기타[편집]
- 해질녘에 경회루 동쪽 측면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