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선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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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경복궁 선원전
景福宮 璿源殿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건축시기
1867년 (창건) / 1930년대 (철훼) / 1945년 (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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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경복궁 선원전
1. 개요
2. 이름
3. 역사



1. 개요[편집]


경복궁의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들의 어진[1]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었다. 쉽게 말해 종묘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었다.

경복궁 동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2. 이름[편집]


선원(璿源)이란 단어는 '왕실의 유구한 뿌리'란 뜻이다.《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2][4]


3. 역사[편집]


조선 초기에는 임금마다 별도로 사당을 지어 어진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세종이 통합하려 했고, 그래서 경복궁에 제사를 지내는 문소전(文昭殿)을, 그 뒤편에 어진을 보관하는 선원전을 지었다. 이때만 해도 선원전은 어진 뿐 아니라 왕실 족보인 《선원록》도 보관하는 왕실 유물 보관소였고 제사 공간은 아니었다.#

임진왜란경복궁소실되면서 문소전과 선원전도 모두 불탔고 한동안 다시 짓지 못했다. 100여 년 뒤인 숙종 시기에야 당시 사실상 법궁이던 창덕궁선원전을 새로 지었고, 그때부터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냈다.

경복궁 선원전을 다시 지은 때는 고종 때인 1868년(고종 5년)이었다. 이후 창덕궁 선원전어진을 경복궁으로 옮겼다. 선원전이 두 곳으로 늘어나면서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 땐 경복궁으로, 창덕궁에 머물 땐 창덕궁으로 어진도 함께 옮겼다.#

1896년(건양 원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경복궁을 떠나면서 경복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경운궁즉조당으로 옮겼고, 경복궁 선원전은 빈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아주 버린 것은 아니라서 1900년 경운궁 선원전태조 이성계의 모사[5]어진을 봉안할 때,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의 어진을 모실 칸을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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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사 쿠리가 된 경복궁 선원전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후 경복궁조선총독부소유하면서, 일제는 선원전 주변의 부속 건물과 행각들을 대부분 철거했다. 1931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장충단에 지으면서 선원전 본채를 옮겨다 쿠리(庫裡)[6]로 사용했다. 건물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23일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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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선원전 영역에 들어선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1966년 1월에 대한민국 정부국립중앙박물관[7]경복궁 선원전 영역에 세우기로 하였고 1972년에 완공하였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옛 중앙청으로 옮겨가고[8] 1993년 2월부터 현재까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문제는 이 일대에 그나마 남아있던 경안당, 대향당 등 9동 106칸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박물관을 지었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공사하면서 선원전의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박물관 디자인 자체도 여러 불교 사찰건물들을 섞어서 지었기 때문에[9] 유교 국가법궁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문화재청은 2031~42년에 걸쳐 진행할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 - 4단계 궁중의례권역 복원 계획〉으로 약 1304억 원을 들여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철거하고 선원전 및 혼전 영역의 건물 23동을 짓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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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御眞. 임금초상화.[2]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 족보 이름도 《선원록(璿源錄)》, 《선원계보(璿源系譜)》이다.[3] 여기서 말하는 왕실 역사의 시작은, 추존받아 엄연히 조선시대 당시 법적으로 임금이었던 목조 이안사부터를 말한다.[4] 또한 전주 이씨 가문에서 계통을 분류할 때 선원선계(왕실 역사 시작 이전[3]), 선원세계(왕통), 선원파계(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로 나눈다.[5] 摹寫. 베껴 그리다.[6] 절의 창고, 부엌, 숙소 등을 일컫는다.[7] 당시 계획엔 국립종합박물관으로 표기되었다.[8]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옛 중앙청을 철거한 뒤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 건물을 쓰다가 2005년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로 옮겼다.[9]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