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흥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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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경복궁 흥례문
景福宮 興禮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건축시기
1395년 (창건) / 1867년 (중건) / 2001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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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례문[1]
1. 개요
2. 상세
3. 여담
4. 부속 건물
4.1. 유화문
4.2. 기별청


1. 개요[편집]


경복궁의 중문. 정문인 광화문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2. 상세[편집]


파일:경복궁 흥례문 헤르만 산더 1906~1907년 촬영(국립민속박물관).jpg}}}
1906 ~ 1907년에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흥례문[2]
1395년(태조 4년) 9월 경복궁의 오문(午門)으로 창건되었다.#[3]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興禮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4]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1912년 철거되었다가, 문민 정부에서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국민의 정부 시기인 2001년 10월 26일에 완공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강녕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2006년 12월까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 광화문은 철거되었고, 광복 65주년인 2010년 8월 15일에, 기울어졌던 3.75도를 바로잡고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판 글씨는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5]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3. 여담[편집]


  • 고려왕조의 만월대에도 한자도 동일한 흥례문이 있었다. 원 이름은 창덕문으로 정전 천덕전으로 가는 사문(四門)[6]이었다. 경복궁 흥례문과 비슷한 위치의 대문이었지만 정전이 회경전으로 바뀌면서 경복궁 흥례문보단 격이 떨어지는 문이 되었다.

  • 고려는 대문이 다섯 개[7]였기 때문에 중문은 없었다. 궁궐 정문 승평문과 정전 정문 회경문 사이엔 신봉문(神鳳門), 창합문이 있었는데, 두 문 중 신봉문이 집중 대우를 받았기에 만월대 신봉문이 경복궁 흥례문 급 대문이었다고 억지로 맞출 수 있다.

  • 고려의 별궁인 장락궁에도 흥례문이 있었다.



4. 부속 건물[편집]


원래 흥례문 주변의 행각에는 관청들이 있었으나 아래의 유화문기별청을 제외하고는 내,외부의 증거부족으로 빈 월랑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북궐도형에 의하면 동행각은 관청이 없고, 서행각은 유화문 남쪽부터 궐내의 의례나 잔치 등 행사에 필요한 차일을 담당하던 부서인 배설방(排設房), 궁궐 내에 위치한 병조의 지부로 궁궐의 군사사무를 담당하는 출장소 역할을 한 내병조(內兵曹)가 위치했고, 남행각은 서쪽부터 임명사령장인 고신과 매년 정월에 봉급증표인 녹패 수여, 장병의 휴가처리 등 행정업무를 담당한 정색(政色),왕의 수레나 가마, 행차시의 의장, 마굿간 등을 관리하였으며 관원이 지방으로 갈 때 역마를 제공하는 일도 담당한 마색(馬色),도성과 대궐문의 개폐의 보류를 담당하고 또 왕의 행차시 떠들지 못하게 하는일도 담당한 결속색(結束色)으로 구성되었다.

4.1. 유화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유화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기별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기별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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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사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3] "전문(殿門) 3간은 전(殿)(근정전)의 남쪽에 있고, 좌우 행랑 각각 11간과 동(東)·서각루(西角樓) 각각 2간과 오문(午門) 3간은 전문(殿門)의 남쪽에 있다. (중략)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4]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유한 문화 중 하나로 "피휘(避諱)"가 있는데, 군주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여 그와 의미나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바꿔쓰는 관습이다. 우리나라의 예로는 대표적으로 고려 혜종의 이름인 '왕무王武'를 피하여 '무장武將/무신武臣'들을 용맹한 의미의 '범 호(虎)'를 차용하여 '호장虎將/호신虎臣'으로 불렀다. 만약 옛 홍례문의 복원이 훗날의 대한제국 때 이루어졌다면 이 때는 청나라와의 군신관계가 끝났기 때문에 그대로 홍례문이라는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5] 경복궁 유화문, 창덕궁 진선문숙장문현판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6] 조선은 정전까지 가는 대문을 3개로 두었지만, 고려는 5개를 두었다.[7] 광화문(황성 정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