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수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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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景福宮 修政殿
경복궁의 편전 중 하나이다.
경회루의 바로 남쪽, 근정전의 서쪽에 있으며 남향이다. 궁 내 관청인 궐내각사와 임금이 머무는 내전 사이에 있어 왕과 신하들이 만나기 편한 곳이었다.
2. 이름[편집]
'수정(修政)' 뜻은 '정사(政)를 잘 수행(修)한다'이다. 현판 글씨는 건립 당시 도승지였던 조석원(曺錫元, 1817~ ?)이 썼다.
3. 역사[편집]
조선 초기에는 없었고 수정전 언저리에 그 유명한 집현전이 있었다.[2] 수정전 자체는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지었으며 사정전과 함께 편전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이 곳에서 행사를 거행하고 어진을 잠시 모셔두기도 했다.# 이 때에는 주변에 200칸 가까운 행각들이 있었고 북행각과 수정전 본채가 복도로 연결되었으며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수많은 전각들이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까지 즐비해 있는 등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1894년(고종 31년) 1차 갑오개혁 때에는 국사책에도 나오는 그 군국기무처가 들어섰다가 이후 의정부에서 이름이 바뀐 내각의 청사로 기능하였다.# 이 때 수정전과 북행각을 연결하는 복도는 사라지고 대신 좌우에 복도가 새로 생겼으며 가운데와 바깥 행각의 규모를 확장하는 변화가 있었다.#
경술국치 이전에는 정문인 숭양문 주변 행각을 제외한 다른 행각들이 모두 헐렸고[3] ,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식민 통치 5년 째 되는 걸 기념한답시고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관으로 활용하면서 내부는 많이 훼손되었고, 부속 건물들은 전부 헐려 건물 하나만 남았다. 이후에도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었고, 해방 이후 1966년부터 1975년까지는 한국민속관[4] 으로 기능하였다.
2000년에 보수 공사와 함께 내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경복궁 1차 복원 공사 5단계(1997 ~ 2001)에 문화재청에서 수정전의 행각을 복원할 예정이었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2차 복원 때 포함시켰지만 2차 계획을 축소하면서 다시 무산시켰다. 계속해서 복원을 무산시킨 이유는 상술했듯이 〈북궐도형〉 작성 시 이미 건물이 철거되어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만 알 수 있을 뿐, 상세한 구조는 모르기 때문이다.
4. 정문[편집]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숭양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구조[편집]
- 정면 10칸, 측면 4칸의 1층[5] 이다. 장대석을 높게 쌓은 6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공포는 쇠서[6] 2개를 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놓은 뒤 그 위에 운공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6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으며, 단청은 모로단청[7] 으로 칠하여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을 뽐내게 하였다.
- 건물 남쪽 전면에 큰 월대를 두었다. 월대는 4단이고 월대 윗 부분은 박석으로 마감했다. 계단은 월대 정면에 3개, 측면에 2개, 총 5개가 놓여있고 그 중 임금이 다니는 정면의 가운데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다른 계단과 차별화시켰다. 가운데 계단과 그 왼편에 있는 계단 사이엔 무늬가 새겨진 댓돌이 있다.
- 기단 양 측면에 나무로 된 문이 보이는데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 불을 때면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할 굴뚝을 수정전 건물 바로 뒤에 두 개를 놓았는데, 별다른 무늬없이 그냥 벽돌을 길이쌓기하고 그 위에 한옥처럼 기와 지붕을 올린 뒤 흙으로 구워 만든 배출구를 올렸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