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에 히데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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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히데마로
近衛秀麿|Hidemaro Konoe

본명
고노에 히데마로 (近衛秀麿(このえ ひでまろ)
출생
1898년 11월 18일
일본제국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現 도쿄도 치요다구)
사망
1973년 6월 2일 (향년 74세)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 노게 자택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직업
작곡가, 지휘자
수훈
욱일중수장
핀란드 백장미십자훈장 십자장
역임 직위
신교향악단[1] 상임지휘자
ABC 교향악단 단장
고노에 교향악단 단장
토호 교향악단 수석지휘자
일본예술원 회원
귀족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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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가쿠슈인 초등과(졸업)
가쿠슈인 중등과(졸업)
가쿠슈인 고등과(졸업)
도쿄제국대학[1] (문학부 / 중퇴)
활동 기간
1920년 – 1973년
장르
클래식
배우자
모리 야스코(毛利泰子)
나가이 카즈코(長井和子)
가족
아버지 고노에 아츠마로[2]
어머니 고노에 모토코(近衛貞子)
고노에 후미마로[3]
남동생 미야가와 타다마로
숙부 도쿠가와 이에사토
장남 고노에 히데토시[4]
장녀 고노에 유리코[5]
차녀 고노에 리코
차남 고노에 히데타케
3남 미야가와 타다토시[6]
3녀 고노에 아키코[7]



1. 개요
2. 생애
2.1. 성장기, 그리고 신교향악단의 창설
2.2. 본격적 해외활동과 활약
2.3. 패전 후, 말년
2.4. 사망
3. 주요 작품
3.1. 작곡
3.1.1. 대중가요 및 동요
3.1.2. 행진곡 및 교향곡
3.1.3. 교가 등
3.2. 편곡


1. 개요[편집]


야마다 코사쿠(山田耕筰), 고세키 유지(古関裕而)와 함께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 일본 제국 제34, 38, 39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이며, 자작 칭호를 부여받은 귀족(정3위, 전 귀족원 의원)이며, 고요제이 천황의 남계 12세손이다. 일본의 오케스트라 역사에 있어 선구자적 존재였으며, 오야카타(親方)[2]라는 애칭으로 자주 불렸다. 그에 대해 큰 평가가 없었던 시기도 있지만, 2006년에는 그의 일대기와 그가 쓴 곡들이 정리된 책이 출간되는 등, 재평가의 움직임도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전성기 때는 미국과 유럽 전역을 활보하며 대/소규모, 유명/아마추어 무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일본 귀국 후에도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욱일장을 수여받고 대형 무대 곳곳에 수석지휘자와 연주지도 역으로 초빙되었다. 한때 스승으로 모시며 악단도 함께 운영했던 동료 야마다 코사쿠와는 달리, 대중 가요나 동요 작곡 쪽에는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았다. 일본 국내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내건 관현악단을 설립하며 일본의 오케스트라 발전에 기여하려 애썼으나, 우연히 겹친 각종 악재와 단원들과 경영진간의 트러블로 인한 여러 사업의 실패 후 그의 인생에 전례없던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만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야마다가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나, 사고를 많이 쳤다"면, 고노에는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나, 사업 수완이 없었다"고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이 도전해 온 음악가로서의 일생은 과연 ‘오야카타’라는 별칭에 적격이었다.

2. 생애[편집]



2.1. 성장기, 그리고 신교향악단의 창설[편집]


1898년 11월 18일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현재의 도쿄도 치요다구)에서 공작(公爵) 고노에 아츠마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노에가(家)는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를 시조로 하는, 일본 공가(公家) 중 최고봉인 고셋케(五摂家)에서도 제일가는 집안이었으며, 또한 일본 황실에서 아악을 총괄하는 집안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남동생 고노에 나오마로(近衛直麿, 1900-1932)는 일본 전통음악인 아악연구가가 되었고, 히데마로는 이복형 고노에 후미마로의 영향으로 음악 전반에 자연스레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황족학교였던 가쿠슈인 재학 시절엔 이누카이 타케루[3]를 비롯한 교우 몇 명과 친해지게 되었고, 1913년 무렵에는 함께 도쿄음악학교[4] 분교장과 우에노 본교에 자주 놀러갔었다고 한다. 한때 비행기에도 빠져있었다고 하나, 부모님은 이를 원치 않았는지, 얼마 뒤 다시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의 뜻을 굳히며, '비행기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는 조건으로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1915년부터는 우시야마 미츠루[5]의 소개로, 독일에 유학하고 막 일본으로 돌아온 야마다 코사쿠에게 작곡을 배우게 되었다. 한편, 도쿄음악학교에서 보유중이던 교향곡 악보를 닥치는 대로 베껴 그려가는 등,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이후 야마다와 협업을 같이 하게된 계기가 된다.

1920년, 세토구치 토키치(瀬戸口藤吉)가 주재하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세토쿠치의 대타로 지휘를 맡으며 지휘자로서 데뷔하게 되나, 처음부터 잘 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가쿠슈인 고등과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에도 입학하나, 중퇴한다. 이후 1923년, 히데마로는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 베를린에서는 에리히 클라이버로부터 지휘를 배우고, 막스 폰 시빌링, 게오르크 슈만 등에게서는 작곡을, 이후 프랑스 파리로 이동하여 뱅상 당디(Vincent d'Indy, 1851~1931)를 스승으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에 열중한다.

유럽에 체류중이던 1924년 1월, 한때 야마다가 그랬듯, 히데마로 역시 자기 돈으로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학단을 고용하여, 유럽에서의 지휘자 데뷔에 성공한다. 또한, 독일초인플레이션과 현저한 마르크 약세라는 이점도 있어, 어마어마한 양의 오케스트라용 악보를 매입하여 같은 해 9월 일본으로 귀국한다.

1925년부터는 야마다 코사쿠와 협업하여 일본교향악협회를 설립, 정기연주회와 하얼빈 주재의 악단과 함께하는 러일교환 교향관현악연주회의 개최에도 성공했다. '상설 오케스트라의 설립'이라는 야마다의 꿈을 직접적으로 이루어주게 한 히데마로였지만, 매니저였던 하라 젠이치로(原善一郎)가 용도 불명 경비라는 부정사태에 연루되며 규탄되었을 때, 하라의 편을 들고 만다. 또한 당시 야마다는 일시적으로 몸이 안 좋은 관계로 히데마로와 하라에게 회계를 맡기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때 당시 기준 5,400엔의 용도 불명의 자금이 발각되자, 하라는 해당 자산의 정체에 대해 야마다에게 물었지만, 야마다는 역으로 부정을 저질렀다며 하라를 규탄, 이후 해임할 것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후 관동군의 책사로서, 정보담당이 되기도 했던 하라가 금전을 미끼로 야마다를 낚았다는 설도 있으나, 야마다가 투자의 절반 이상을 독점하고 있엇던 데다, 그 절반을 단원 전원에서 반씩 나눠가지게 했던 점에 불만은 품은 히데마로와 하라가 고의적으로 분열을 조장했다는 설도 있어 진실은 현재까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단원 중 히데마로 지지파는 44명에 달했고, 히데마로는 이들을 아울러 '신교향악단'으로 명명하며, 스스로 상임지휘자를 맡는다. 이후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라디오 방송국 JOAK[6]와 계약을 맺는다. 이후, 그가 만든 신교향악단은 일본교향악단을 걸쳐, 패전 6년 후인 1951년, 지금의 NHK 교향악단이 된다.

1927년 2월 20일, 신교향악단은 히데마로의 지휘 아래, 첫 정기연주회를 개최했다. 이후 약 10년 가까이 히데마로는 신교향악단과 함께 일본에 교향악을 뿌리깊게 전파시키기에 주력한다. 연주회에서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등 유명 고전파 음악에 더해, 구스타프 말러 등 당시의 현대음악 등을 중심으로 연주를 이어나갔다.

파일:말러 4번 최초의 녹음 현장.jpg
일본 파를로폰에서 말러의 교향곡 4번을 녹음하는 고노에와 신교향악단.
사진 왼쪽에는 고준 황후의 오빠이자 쇼와 천황의 처남인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 1901~1959) 부부가 착석해 있다.


세계 최초의 말러 교향곡 4번 전곡 녹음

특히 고노에는 말러의 교향곡 4번세계 최초로 녹음한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1930년 5월 28~29일에 고노에 히데마로는 파를로폰 일본 지사에서 신교향악단을 이끌고 말러 4번 전곡을 SP 6장에다가 녹음했다. 참고로 4악장의 독창을 맡은 소프라노는 기타자와 에이코(北澤榮子, 1908~1956)[7]였다. 물론 시대적 한계상 음질과 연주는 모두 그리 좋은 편은 아니고, 심지어 3악장 중반부의 287~314마디는 SP 음반의 수록 시간 한계로 인해 잘려나갔지만, 당시에 말러는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가 아닌 후배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비슷하게 '작곡도 했던 위대한 지휘자'로 인식되었고, 녹음이 된 말러의 교향곡은 오스카 프리트(Oskar Fried, 1871~1941)가 1924년에 녹음한 교향곡 2번 전곡과 빌럼 멩엘베르흐(Willem Mengelberg, 1871~1951)[8]가 1926년에 녹음한 교향곡 5번아다지에토 악장밖에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녹음의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9]

1930년 가을 무렵부터 유럽에서 단독 연주여행을 떠난 히데마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브루노 발터, 에리히 클라이버[10] 등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등에서의 연주를 듣고, '일본의 음악 수준이 아직도 서양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고 한다.[11] 마침 일본 국내에서도 "신교향악단은 늘 수준이 비슷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귀국 후 히데마로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대규모 인원 쇄신에 착수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단원측과 '혁신실행위원회'를 조직하여, 어느 단원을 재조정할 것인지 검토하는 데에 난항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신속히 녹슨 부분을 불식시키기 위한 하라의 제안으로 처우 개선을 끈질기게 요구하거나 하라의 행동에 줄곧 불만을 제기해 온 단원을 재조정하기로 하며, 총 17명[12]을 해고하기에 이른다.

해고된 단원들은 하라를 한 차례 고소했으나, 음악평론가 호리우치 케이조(堀内敬三)가 이들의 고충을 들어주었고, 호리우치가 애용한 타자기의 이름을 '코로나 오케스트라'로 이름지었다. 이후 그들은 '도쿄방송관현악단'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몇 차례의 단원 개편을 거쳐, 현재까지도 NHK에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해고 소동을 '코로나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이후 히데마로의 신교향악단은 새 단원을 채용했는데, 그 때 히데마로의 제안으로 4명의 여성 단원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학교 부속 오케스트라 등을 제외한 일본 최초의 여성 오케스트라 단원이 탄생하게 된다.

'코로나 사건'을 겪고, 다시금 신교향악단의 활동도 순조로워질 터였으나, 1935년 7월 13일, 단원 일동이 하라의 비리 문제를 규탄하며, 동시에 신교향악단을 법률상의 조합조직으로 개조할 것을 선언했다. 단원 측은 선언문에 가차없이 히데마로의 이름을 넣었으나, 정작 히데마로 본인은 전혀 듣도보도 못한,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JOAK는 히데마로와 하라의 편에 서며, 평론가들의 여론은 단원측과 히데마로-하라 측의 양쪽으로 갈렸고, 음악 팬들은 단원측을 지지했다. 평론가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음악 잡지에 자신들의 주장을 펴냈고, 결국 해당 문제는 세간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히데마로는 며칠 뒤인 7월 18일, 신교향악단을 해산하고, 새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겠다고 선언하나, 이번에는 단원들이 따라오지 않았고, 결국 히데마로는 신교향악단을 탈퇴, 하라 역시 추방되었다. 한편, 신교향악단도 JOAK와의 계약을 일시적으로 취소당하자 8월 13일에는 히비야 공원의 야외음악당에서 무지휘자 연주회를 개최, 8월말에 다시 계약이 부활하지만, 히데마로의 퇴진으로 인한 상임지휘자의 부재로 정기연주회에 출연하는 지휘자는 줄곧 바뀌었다. 이러한 상태는 1936년 가을의 조셉 로슨스톡이 취임할 때까지 이어진다.


2.2. 본격적 해외활동과 활약[편집]


홀로 선 몸이 된 히데마로는 현재 도쿄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의 지휘를 단기간 맡은 이후, 1936년 그의 퇴진 후 서로 등을 돌렸던 신교향악단과 화해의 시간을 가진다. 일시적으로 상하이 교향악단 등에서 활동한 후 그는 히로타 고키[13] 수상에 의해 음악사절단에 임명되어, 다시금 해외로 떠난다. 이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로부터의 연주 요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미국이었으며, 이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를 비롯해, 유진 오르먼디(Eugene Ormandy, 1899~1985),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담화를 나눈다. 1936년 11월에는 유럽으로 넘어가 영국BBC 교향악단, 독일 드레스덴, 라트비아리가 등지의 가극장에서 공연을 맡는다.

1937년, 미국을 거쳐 잠시 일본으로 귀국. 이후 일본과 미국을 여러 번 오가다 유럽으로 이동했다. 1938년, 재차 일본에 귀국했을 무렵, 다시금 친선대사로 임명되며 미국과 유럽으로 떠났다. 미국 NBC 교향악단의 지휘진에도 들어갔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 현지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유럽으로 이동한다. 이후 도착한 유럽에서는 그야말로 유명무명을 가리지 않고 각국에서 엄청난 수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맡는다. 그가 공연을 맡은 국가 및 도시는 바로 아래에 후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도 친하게 지내던 유대인들을 고용한 바 있기에, 1943년 이후 나치 독일에 의해 독일에서의 활동이 제한되었으나, 타국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이어나갔다.

  • 1938-1939년: 독일(베를린, 뮌헨), 덴마크, 스웨덴
  • 1940년: 독일(뮌헨, 베를린), 오스트리아() 등
  • 1941년: 핀란드(헬싱키)[14], 독일(하노버) 등
  • 1942년: 독일(브레슬라우, 함부르크)
  • 1943년: 세르비아(베오그라드), 불가리아(소피아)
  • 1944년: 프랑스(파리), 벨기에
  • 1945년 4월: 독일의 패전에 의해 라이프치히에서 미군에게 억류되며, 미국을 통해 12월 무렵에 겨우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 직후, 히데마로의 이복형이자 전 총리인 후미마로가 자택에서 자살한다. 귀국 전인 1945년 11월 11일, 베드포드 스프링 호텔에서 일본인의 해방을 축하하는 연주회가 개최되었으나, 그 연주자 명단에 히데마로의 이름이 올라있다.

2.3. 패전 후, 말년[편집]


귀국한 히데마로는 40대 중반의 아직 젊은 나이였으나, 그의 해외에서의 업적이 보여주듯,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일본 지휘자계의 선구자이자 장로급이 되어있었다. 패전 1년 뒤인 1946년부터는 우에다 마사시(上田仁)와 함께 일본의 거대 영화, 연극회사 도호(東宝)의 주선으로 창설된 토호 교향악단(東宝交響楽団)의 상임지휘자를 맡는다. 이곳에서 우에다는 현대 음악을, 히데마로는 그의 전공답게 고전파낭만주의 음악의 작품을 지휘하도록 역할이 정해졌다.

1948년, 일본예술원 회원이 된 히데마로는 이듬해 1949년, 지인인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아, 학교에서의 음악교실을 중심으로 하는 '에어리언 클럽'을 결성한다. 1950년 토호가 토호 쟁의에 의해 토호 교향악단과 연을 끊자, 히데마로는 토호 교향악단을 거의 추방당하듯 떠나게 된다.

에어리언 클럽에서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 히데마로는 1952년, 더욱 이들을 발전시키고자, 일본의 보험사이자 대주주였던 다이이치 생명보험(第一生命保険株式会社)의 후원을 받아 본인의 이름을 딴 고노에 관현악단으로 쇄신한다. 이곳에 기간제로 고용된 이와키 히로유키의 이야기에 따르면, 히데마로의 공연장은 무대에만 오케스트라가 몽땅 들어가고도 남았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다이이치 생명이나 당시 다이이치 생명의 주요 주주였던 라디오도쿄(現 일본 방송국 TBS의 전신)의 지원도 크게 작용했으나, 다이이치 생명이 당국의 지시에 의해 고노에의 스폰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후 히데마로는 당시 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전속 오케스트라화(化)를 계획하고 있던 분카 방송에 대해 고노에 관현악단의 연주회를 일본 필하모니의 중추를 담당하도록 요청했으나, 분카방송의 당시 사장이었던 미즈노 시게오의 간섭도 있어, 결국 히데마로만 남겨지는 결과로 끝났다.[15] 그러자 히데마로는 고노에 관현악단의 연주회를 CBC(중부일본방송)와 함께 지원해 온 ABC(아사히 방송)에 계약을 걸었고, 고노에 관현악단은 끝내 1956년, ABC교향악단으로 또 한 차례 개조된다.

그러나 ABC교향악단의 활동이 순조롭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처우 면에서 불만을 품은 볼프강 스타폰하겐(wolfgang stavonhagen) 외 몇 명의 단원이 급거 ABC교향악단을 나와 다른 오케스트라 <임페리얼 필하모니>를 결성하기도 하는 등, ABC교향악단의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60년 가을에는 ABC교향악단의 유럽 연주여행이 거행되며, 히데마로 역시 지휘자로서 유럽으로 향한다. 그 무렵에는, 한때 자신이 단장 자리를 맡았던 NHK 교향악단도 세계일주를 계획하고 있었고, 그 때 히데마로는, 신인들로만 구성된 그들을 경계하며, "그들이 일본 최고로 여겨지는 것은 곤란하다"와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여유를 보였으나, ABC 교향악단의 연주여행은 주최자가 도중에 잠적하는 바람에 한순간에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거나, 단원의 일부가 로마에서 억류되어 몇 달 뒤에나 귀국하는 등, 세계일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NHK 교향악단과는 정반대로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만다. 감상평 자체는 대단히 평가가 좋았고, 히데마로 역시 유럽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 했던 옛 친구들과 재회하는 등 좋은 일도 있었으나, 앞서 이야기한 일련의 소동들은 ABC교향악단의 목숨을 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ABC교향악단이라는 이름 자체는 다른 이에게 양도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발레 공연 등의 무대 이름에 사용되었다.

ABC교향악단의 소멸 후, 히데마로는 다시 프리랜서 지휘자가 되었고, 요미우리 일본교향악단이나 오사카 필하모니 교향악단, 또한 교토대학 교향악단 등 프로,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맡았다. 또한, 이 시기에 요미우리 일본교향악단에서 지휘한 베토벤, 슈베르트,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등의 작품을 녹음했으며, 현재 CD화되어 있다.

1967년에는 NHK교향악단의 제484, 485회 정기연주회에 출연, 이듬회인 1968년에는 NHK교향악단과 함께 <메이지 백년 기념식전(明治百年記念式典)>에 출석하는 등, 과거 적대시했던 이들과의 관계 역시 좁혀간다. 그 해 7월에는 민사당으로 참의원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나 2위로 낙선한다. 아들인 히데타케의 증언에 따르면, "저는 (아버지의 참의원 입후보에) 결사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선거 자금이 필요했던 거예요" 라고 이야기한다. 일본 오케스트라 역사의 선구자로서 전세계에서 활약하던 히데마로가 귀국 후 여러 실패를 거듭하며 말년에 얼마나 여유가 없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또한 이에 앞선 1966년에는 음악학교 설립에 관한 어음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금융업자로부터 어음을 뜯긴 데다, 교토지방재판소에 고소까지 당해 1966년 9월 30일 6,000만엔의 손해배상을 청구받게 되며, 이듬해 1967년에는 오사카 지방검찰 특수수사부로부터 1,000만엔의 어음 사기 혐의로 출두하며, 최종적으로는 800만엔의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도쿄 아카사카[16] 자택을 처분하기까지 하는 등 고난이 계속되었다. 이후 1970년에는 처음으로 스위스의 유명 오보에 연주자 하인츠 홀리거의 반주를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 최초의 다이루스 미요의 오보에 협주곡 공연을 개최하며 말년을 보낸다.

2.4. 사망[편집]


3년 뒤인 1973년 6월 2일, 바로 전날 이사온 세타가야구 노게[17]에 위치한 자택에서 급성 뇌출혈로 사망한다. 사망 당일 히데마로가 자택에서 울린 전화를 받자 돌연 야쿠자로부터 "병신새끼야(バカ野郎)"라는 말을 듣고 쇼크로 사망했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사실은 불명.[18] 향년 74세, 묘소는 도쿄도 네리마구 사쿠라다이(桜台)의 고토쿠지(広徳寺).

오케스트라 운영은 자기 돈으로 모든 인프라 정비에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실패의 연속이었으나, 죽기 직전까지 지휘활동과 후배들의 지도를 맡는 등, 말년의 불우한 사정들을 제외한다면, 과연 '오야카타'라는 애칭에 어울리는 대선배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히데마로의 사망 후 행해진 추도연주회는 그가 살아있을 때 분열되었던 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신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 2곳의 단원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입장을 넘어 처음으로 함께 연주할 수 있었던 기회였으며, 이것 역시 생전의 히데마로의 인자한 성격 덕에 가능했던 일로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3. 주요 작품[편집]


학창시절부터 습작을 비롯해, 상당한 수의 음악을 작곡했다. 전문 지휘가로 활동하게 된 이후 작곡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으나, 동요 <ちんちん千鳥>(키타하라 하쿠슈[19] 작사)나 대부분이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들이다. 또한 호세이대학 교가와 리츠메이칸대학 교가 등 몇몇 대학들의 교가 작곡에도 관여한 바 있다.


3.1. 작곡[편집]



3.1.1. 대중가요 및 동요[편집]


제목
비고
「ちんちん千鳥」
키타하라 하쿠슈 작사
「七つ坊主」
키타하라 하쿠슈 작사
「犬と雲」
사이조 야소(西條八十) 작사
「烏の手紙」
사이조 야소 작사
「舟唄」
미키 교후(三木御風) 작사
「ふるさとの」
미키 교후 작사


3.1.2. 행진곡 및 교향곡[편집]


제목
비고
「管弦楽のためのアンダンテ」

「序曲」
야마다 코사쿠 연주
「李太白による酒の歌3首」
독일어역
「行進曲《前進》」
일본 제국 해군 군악대 연주
「日本組曲《あけぼの匂ふ》」
야기 우메코(八木梅子) 작사
「国民精神の歌」

「銃後の女性」

「新興日本少女の歌」

「愛媛県民の歌」



3.1.3. 교가 등[편집]


제목
작사
리츠메이칸대학 교가
아케모토 교세이(明本京静) 작사[20]
호세이 대학 교가
사토 하루오(佐藤春夫) 작사
텐리 대학 교가
아케모토 교세이 작사

3.2. 편곡[편집]


히데마로가 더욱 몰두한 것은 작곡보다도 편곡 분야였다. 아악 「越天楽」의 오케스트라 편곡을 비롯해, 베토벤 교향곡 전곡,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슈만의 교향곡 제3번,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2번 등, 오케스트라 악곡의 교정이나 악기의 추가 및 변경 등을 진행했다. 1946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의 편곡은 자필 악보가 보관되어 있던 교토대학 교향악단 연습소의 화재로 소실되며, 현재는 도쿄의 고노에 음악연구소에 복사본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현재 NHK의 방송종료 후나, 올림픽 메달 수여식 등, 공식적 자리에서 사용되는 기미가요는 히데마로의 편곡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래는 그가 담당한 주요 편곡작품이다.

제목
비고
「君が代」(기미가요)
오케스트라판
「越天楽』
에텐라쿠(한자로는 '월천락'),
일본 전통음악인 아악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다. 류테키(龍笛), 히치리키(篳篥),
쇼(笙), 비와[21], 캇코(羯鼓), 쇼코(鉦鼓, 정고),
와다이고(和太鼓)[22]의 8중주로 연주되는 것이 정석이다.
교향곡 전곡
루트비히 반 베토벤
교향곡 제3번<라인>
로베르트 슈만
교향곡 제2번
장 시벨리우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프레데리크 쇼팽
대교향곡
프란츠 슈베르트, 현악 5중주 다장조 D.956
<전람회의 그림>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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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NHK 교향악단의 전신[2] 한 분야의 장인, 우두머리라는 의미다.[3] 犬養健(1896-1960), 일본 제국 제 29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누카이 츠요시의 아들이다.[4]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이다. 도쿄의 우에노에 본교가 있었으며, 미술계 학부가 합쳐져 현재의 도쿄예대가 된 이후에도 우에노 캠퍼스가 본 캠퍼스다.[5] 牛山充(1884-1963), 도쿄음악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음악, 무용 평론가이자 번역가다.[6] 1925년 3월 사단법인 도쿄방송국(社団法人東京放送局)이라는 이름으로 개국.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3개 지국이 있었으며, 이듬해인 1926년 이들을 통합하여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약칭 NHK)를 설립한다. 이것이 현재 NHK의 탄생 배경이다.[7] 서양인 혼혈로, 전후에도 간간이 공연했다고 하며, 유리창이 떨릴 정도로 성량이 풍부했다고 한다.[8] 24세였던 1895년부터 무려 50년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하며 콘서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세계구급 오케스트라로 만들었으나,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할 동안 나치 독일과 나치 독일의 점령국에서 연주회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종전 후인 1945년에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네덜란드에서 지휘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스위스로 망명을 가 그곳에서 1951년에 객사했다.[9] 참고로 이 녹음은 사상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기 녹음이기도 한데, 전술한 두 녹음은 어쿠스틱 녹음을 택했다. 참고로 전기 녹음은 1925년에 발명되었다.[10]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아버지로, 아버지도 생전에는 명망이 높은 지휘자였다.[11] 실제로 상술한 말러 4번 녹음만 들어도 90년도 훨씬 넘은 먼 옛날의 녹음이란 것을 감안하더라도 몇몇 부분은 거의 아마추어 악단(...) 수준으로 들릴 정도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이 조악한 것도 사실이고, 기타자와 에이코의 가창 역시 음정이 불안정하고 비브라토가 심한 감이 없지는 않다.[12] 23명이라는 설도 있다.[13] 일본 제국 32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한다.[14] 이때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와 친구가 된다. 또한, 핀란드 대통령으로부터 핀란드 백장미십자훈장 십자장(十字章)을 수여받는다.[15] 물론 말년에는 일본 필하모니와의 관계도 회복하여 1969년부터 1970년까지의 음원과 영상은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있으며 열람이 가능하다.[16] 도쿄 최대의 부촌중 하나이자, 현재도 일본 황실별장이 있고, 사이온지 긴모치화족(귀족)들의 거처가 즐비하던 곳이다.[17] 야마다 코사쿠의 자택과 같은 동네이다.[18] 大野芳 <近衛秀麿>(p.399)[19] 일본의 시인이자 작가. 야마다 코사쿠와도 오랜 기간 동업한 바 있다.[20] 히데마로의 제자였으며, 그가 단장으로 있던 신교향악단에서 테너 독창 역을 맡은 바 있다.[21] 일본의 비파다.[22] 일본의 태고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