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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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大韓帝國 皇室(皇族)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비와 직계비속들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2. 고종(대한제국)[편집]
2.1. 적출[편집]
2.2. 서출[편집]
3. 순종황제[편집]
순종은 아이를 갖지 못 했는데, 그냥 몸이 약해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도 하고, 김홍륙의 커피독살미수사건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면서 성불구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에 사망했고, 이후 1906년 두 번째 태자비로 순정효황후가 입궁하였다. 따로 후궁은 두지 않았다. 순종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왕실이 끊길 것을 우려한 명성황후는 고종과 귀인 장씨에게서 1877년 태어난 왕자 이강을 입궁시켜 의화군으로 봉하고, 간택을 통하여 연원군부인 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의화군 이강의 후견인이 된 명성황후는 의화군 이강(후에 의친왕)이 아들을 낳으면 순종의 양자로 봉하여 왕실의 적통을 잇고자 하였으나,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시해를 당하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4. 영친왕 계[편집]
순종황제의 다음 황실 직계적통은 바로 아래 동생인 의친왕이었으나, 당시 이미 성인이고 항일정신이 투철한 의친왕을 껄끄럽게 여긴 일본과 자신의 아들 영친왕이 황통을 잇길 바라던 엄귀비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영친왕은 형인 의친왕보다 20살 정도 어린 동생이지만, 순종이 황태자(皇太子)로 봉하였기에 일단 영친왕으로 황실 적통이 이어졌다. 그 후 영친왕은 일본인 이방자 여사와 강제 결혼을 하면서 침략자 일본인이 부인으로 들어오면서 대한황실의 적통이 흔들린다 하여 원칙대로 의친왕으로 황실의 법통이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흐지부지 되었다.
영친왕과 일본인 이방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 회은 황세손(사시) 이구는 자식을 갖지 못했고, 줄리아 멀록과는 1982년 이혼했다. 양녀로 이은숙(李恩淑, Eugenia Unsuk, 1959년 ~ )이, 사후 입적으로 황사손 이원(李源)이 있다.
2005년 이구가 타계하자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대한황실 후손들이 회의를 거쳐, 서열 상 가장 높았던 이준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 사동궁을 이어야 했기에 이준의 사촌동생 이원이 이구에게 입적되어 황사손에 봉무 중이다.
5. 의친왕 계[편집]
5.1. 적출[편집]
의친왕은 적자녀를 갖지 못하였고, 후궁과 첩을 통해 12남 9녀의 자녀를 가졌다. 이 중 일제 이왕직 사무소에서 이건과 이우만을 인정하여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자녀들은 의친왕가를 잇는 6남 이곤과 의친왕비 호적에 입적된 5녀 이해경을 제외하고 종친들에게 입적되었다.
5.2. 서출[8][편집]
6. 항렬[편집]
항렬자는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로 대표되는 오행상생법을 따르고 있다. 다만 원래 조선 왕실에서는 효종-현종-숙종 3대를 제외하면 작명에 오행상생법을 따르지 않았다.#[18] 당장 고종황제의 법적 아버지인 문조 익황제(효명세자)의 휘는 영(旲)인데, 그 부수인 日은 불 화(火)로 간주된다.
- 초대 황제 고종의 휘는 형(㷗)으로 불 화(火)변이다.
- 아들 순종의 휘는 척(坧), 의민황태자 즉 영친왕의 휘는 은(垠), 의친왕은 강(堈)으로, 흙 토(土) 변을 공유한다.
- 손자 이구(玖),
이건(鍵), 이우(鍝) 등은 구슬 옥(玉), 또는 쇠 금(金) 변을 공유한다. 의친왕의 자녀들 중 아들들은 쇠 금변, 딸들은 구슬 옥변을 썼다. - 증손자 이청(淸), 이종(淙), 이원(源), 이준(準) 등은 물 수(水)변을 공유한다.
- 고손자 항렬은 나무 목(木)변을 공유할 것이다.
7.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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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부터 언론 등에서 통칭 '황손'으로 불린다. 의친왕은 생전에 자녀들에게 아명, 호적명, 황실명을 지어줬는데, 황손들 각자의 입장, 경우에 따라 통용하는 이름이 제각각이므로 아래의 표 역시 성명이 정돈되어 있지 못하다. 통상적으로 외자 이름이 황실명, '이해○'으로 된 이름이 호적명(李海○, 명목상 덕흥 대원군파 17손 항렬)이며, 그외 2음절 이름이 사동궁에서 집안 사람들끼리만 쓰던 아명이다.[2] 항문이 막힌(쇄항증) 기형아로 태어났다.[3] 사단 법인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이 사적으로 '의민(懿愍)'이라는 시호를 올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종묘 정전에 배향이 되어 종묘에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 모셔져 있다.[4]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는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5] 이구와 이주아의 양녀.[6] 전주이씨대종약원으로부터 사후 양자로 지명되어 원래는 의친왕의 손자였으나 영친왕의 아들인 황세손 이구에게 사후 입적되어 상징적인 계승자(왕위 요구자)로서 법통을 잇게 되었다.[7] 의친왕의 여러 서자녀를 검증, 가계를 정리했다. 서자녀들로부터는 '사동궁 큰어머니'로 불렸다.[8] 이후부터 언론 등에서 통칭 '황손'으로 불린다. 의친왕은 생전에 자녀들에게 아명, 호적명, 황실명을 지어줬는데, 황손들 각자의 입장, 경우에 따라 통용하는 이름이 제각각이므로 아래의 표 역시 성명이 정돈되어 있지 못하다. 통상적으로 외자 이름이 황실명, '이해○'으로 된 이름이 호적명(李海○, 명목상 덕흥 대원군파 17손 항렬)이며, 그외 2음절 이름이 사동궁에서 집안 사람들끼리만 쓰던 아명이다.[9] 1930년 부친으로부터 공(公)의 직위를 받았다. 2차대전 후 재일 한국인으로 남은 작은 아버지 영친왕과는 달리 아예 일본으로 귀화하여 일본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10] 6살 때 당숙인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공(公)의 직위를 받았다. 일본군 복무 도중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으로 인해 병원에서 투병 중에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11] 운현궁을 법적으로 상속받은 흥선군의 직계이기도 하고(이우의 입적으로 인해), 이우의 공 작위도 짧게나마 물려받았던 사실상의 마지막 왕공족이다.[12] 의친왕 가문의 종주로 사동궁의 사손. 장자승계원칙상 황실 서열 1위이나, 본인은 의친왕가를 이어야 하기에 사촌동생 이원이 당숙인 이구 황세손이 후사가 없어 사후 양자로 출계하여 황사손에 봉무하게 하였다. 현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의친왕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13] 이 사람이 대한제국 황실 복원 문서에 나오는 여황(女皇)이다. 이해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4] 미국 대학 강연에서 "나는 프린세스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또 황실복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이해경 여사로 알려져 있다.[15] 이 사람은 황사손(皇嗣孫)으로 불리는 명목상 대한제국 황실 수장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대한황실문화원의 명예총재이다. 봉사손은 이원을 황사손으로 인정하지 않는 측이 사용하는 명칭. 본명은 이상협이다. 2005년 당시 이구의 사후 양자로 들어가서 화제가 됐었다. # 다만 1991. 1. 1. 부터 시행된 민법상 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은 2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16] 큰오빠인 이건과 무려 44세나 차이난다.의친왕이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막내딸이다.[17] 가수, 방송인으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 이해석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5년 회은황세손 이구가 타계할 때 자신과 상의없이 의친왕의 9남 이갑씨의 아들 이상협(이원)을 멋대로 사후양자로 입적했다고 노발대발하여 전주이씨대종종약원 사람들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러려니 해서 지금은 별다른 마찰은 없다.[18] 주자 가문이 오행상생법 작명을 따랐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성리학이 교조화되는 조선 후기가 되면 오행상생법 작명이 거의 스테레오타입 수준으로 일반화된다. 물론 그 전에도 오행상생법 작명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19]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 궁가들 중 황실과 가까운 집안은 왕공족이 되었다.[20]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 궁가들 중 황실과 먼 집안은 조선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