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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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성장기
2.2. 병역
2.3. 배우 활동
2.4. 정치 입문
2.5. 대통령 재임기
2.6. 퇴임 이후


1. 개요[편집]


제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이다.


2. 생애[편집]



2.1. 성장기[편집]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 주 템피코 시에서 아버지 잭 레이건(1883~1941)과 어머니 넬 윌슨(1883~1962) 사이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나서 자랐다. 아버지 잭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구두 외판원이며 알코올 중독자였다. 미국인들은 잘 먹지 않는 내장을 개먹이용이라 둘러대고 정육점에서 얻어와 먹는 게 일상이었을 정도로 레이건은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외근을 갈 때면, 여관에서 잘 돈도 아까워서 차 안에서 떨면서 밤을 지샜다고. 그 때 몸이 상해서 늘그막에 잦은 심장발작에 시달렸을 정도였다.

십대 때부터 왕성한 사회 활동을 했는데, 강가에서 아르바이트로 안전 요원 일을 한 것부터 시작해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 회장, 학교연감 편집장, 수영부 주장, 미식축구팀 주전, 육상부 주전, 농구부 응원단 멤버를 동시에 맡았다. 또한 일리노이의 드넓은 평원에서 말 타기를 즐겼다.[1] 역시 일리노이의 유레카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미식축구팀 주전, 수영부 주전, 육상부 주전, 학생회 멤버 겸 학생회장, 연극부 멤버, 농구부 응원단장 등을 맡았다. 수영을 너무 잘해서 수영부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코치로 올라갔다.


2.2. 병역[편집]


1937년 아이오와 주방위군 육군 제332기병연대 예비역 이병으로 시작, 같은 해에 예비역 육군 기병소위가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육군 항공대로 전속되었는데, 복무 중 실제 전투에 참여하거나 파병된 적은 없고 주로 국방부 선전 영화를 만드는데 참여했다. 공보정훈장교들의 업무를 맡았으나, 병과는 항공이었다. 1945년 12월 9일에 전역했고 최종 계급은 육군 대위로, 미합중국 공군 창설 후 공군 예비역 장교로 전환됐다.


2.3. 배우 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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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시절 독일 국방군 육군 병사를 연기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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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작 It’s A Great Feeling에 출연한 모습.

유레카 대학교를 졸업한 후[2] 아이오와 주 디모인 지역방송국에서 라디오 아나운서로 스포츠 중계를 하다가 그의 잘생긴 외모를 눈여겨 본 워너 브라더스 사에 의해 배우로 데뷔하면서 1937년부터 1965년까지 《Kings Row》 등 수많은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배우 커리어 동안 비중이 적은 배역을 주로 맡던 2류 배우였지만[3] 레이건만한 미남은 할리우드에서도 흔치 않아서 정상급 스타가 아니었을 뿐 대중적 인지도는 있었고, 유명 여배우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4]

오히려 그 시절 레이건은 민주당에 입당하여 전미영화배우협회장을 지내는 등 정치활동에 집중했고 영화계 내 반공 운동의 선도주자를 달려 배우들의 사상을 FBI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의회에 증인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정도였다.[5] 성향도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원래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해리 S. 트루먼을 지지하는 등 민주당 성향이었으나 아내 낸시를 만난 후 점점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띄게 되어 아이젠하워닉슨을 지지하였다. 후에 그의 정치적 변화를 그는 "나는 민주당을 떠나지 않았다. 민주당이 날 떠났다"라고 여러 번 설명하기도 했다.[6] 또한 메디케어가 1961년에 시작되자 미국의 자유를 위협하는 법으로 사회주의에 가깝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베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데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전국의 관심을 받았다.[7] 이 연설 하나로 레이건의 연설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골드워터 진영이 받은 후원금이 백만 달러에 육박했을 정도였다. 비록 골드워터는 그의 강경한 성향과 이를 겨냥한 데이지 걸 광고 때문에 낙선했지만, 레이건은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IMDb에 의하면 로널드 레이건은 총 83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고 한다.

2.4. 정치 입문[편집]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리에 도전하면서 두 가지 공약을 내세우는데, 첫 번째는 '복지 혜택을 받는 백수들을 다시 일하게 만들겠다'와 두 번째는 당시 반전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사태를 청소하겠다' 였다. 레이건은 당시 두 번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 정치인 팻 브라운을 꺾고 당선되었다.[8]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간접세 인상, 주 정부 규모 축소, 복지 개혁으로 재정흑자를 만들었고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반전운동을 주방위군을 불러서 맞서기도 하였다. 이때의 강경대응으로 사망자도 발생했고 레이건이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에 동조하는 교수대표단과 험악하게 비난을 주고받는 장면이 생중계로 전파를 탔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전통적인 미국을 지키는 투사'의 이미지였다. 항상 화나있고 상대방을 언변으로 압살하는 인상이었는데, 이런 결기서린 모습이 공화당 유권자들에게는 무너져가는 미국을 지킬 수 있는 보수의 아이콘으로 비쳐졌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히피 문화와 극단적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마오주의 또한 반기독교 마약남용 등 전통적인 미국에 반하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고, 그렇게 사회적 분열과 국력의 소모를 감내한 보람도 없이 월남의 공산화로 베트남전이 끝을 맺으면서 미국은 패배주의와 자국혐오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또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라는 역사에 남을 연방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어 낙태가 헌법적으로 허용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드는 등 미국은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워터게이트로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헌납한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에게 친근한 언어와 강단있는 어조로 전통적인 미국을 회복하자고 부르짖는 레이건은 당연히 보수층에서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한편 레이건의 주 지지층의 입장과는 달리 좌파진영에서는 레이건을 시대정신에 무관심한 상류층 셀럽 출신의 기득권자로 비난했으며 정치연예인라고 봤다. 보수층 중에도 레이건을 생각없이 말만 앞서는 위험한 인물로 경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정치 스펙트럼으로 보면 레이건은 정신나간 호전광이라고 욕들어먹으며 낙선한 배리 골드워터의 보수주의를 이어받은 강경파 계보에 속했고 당대의 미국은 그런 지도자를 맞을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이런 요인 때문에 레이건은 대선경선 재수생이었고, 비록 주목을 끌기 시작한 대권 잠룡이기는 했으나 혜성처럼 등장해서 대통령이 된 인물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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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과 함께 선거 유세를 벌이는 레이건. 맨 오른쪽이 당시 부통령 후보였던 조지 H. W. 부시.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 이후 당시 인기가 별로 없던 현역 대통령 제럴드 포드에게 도전하여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했다. 현역 대통령이 당 경선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9] 포드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공화당의 보수표를 결집시키며 남쪽과 서쪽에서 승을 거두며 온건 보수 성향을 띄는 포드를 거의 이길 뻔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그 후 포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그의 선거 유세를 도왔지만, 포드는 지미 카터에게 패배하게 된다. 4년후 그는 다시 대통령의 자리에 도전했으며 공화당 경선에서 조지 H. W. 부시를 쉽게 꺾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포드 - 카터로 이어지는 시기동안 미국이 대내외적으로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지자 레이건은 인기를 잃은 지미 카터를 쉽게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5. 대통령 재임기[편집]


대통령이 된 후 그가 펼친 정책은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들에 대한 강경한 대외 정책과 더불어 통화긴축과 감세를 통한 경제 안정화, 그리고 슈퍼무기 개발이 그 주요 골자이다. 레이건은 소련에 대해서 강경한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물이 바로 스타워즈라고도 불리는 우주에서의 전쟁과 지금도 미국이 러시아 등을 견제하는 주요 수단인 미사일 디펜스이다.

사실 레이건은 집권 2기에는 대소 유화 정책을 펼쳤다. 소련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가 말이 통하는 것 같으니 과감하게 대소 강경 정책에서 유화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강경하던 레이건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자 소련을 비난하여 자극하지 않고 유화 정책을 펼쳤다. 비록 레이건이 상호확증파괴를 극단적으로 싫어해 SDI에 집착해서 SDI 포기를 요구하는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은 SDI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겠다며 미국과 소련이 SDI를 공유하면 핵무기가 무력화되어 결국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게 될 거라는 이상론을 주장했다. 사실 집권 2기 레이건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모든 핵무기를 폐기해야 된다고 수시로 주장했고 화성인이 침공하면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야 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10]

비록 SDI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INF 협정을 체결했고 레이건은 소련을 방문해서 더 이상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베를린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명연설을 하기는 했지만 립서비스였고 레이건은 집권 2기에 냉전 승리를 위해 특별히 큰 공작을 하지는 않았다.

레이건의 이러한 성향은 리버테리안 경향이 강한 미국인들의 성격에 가장 걸맞는 대통령이었다. 베트남전 이후로 패배감에 사로잡혀있던 미국인들에게 미국에 대한 자신감과 그에 기반한 패권주의, 낙관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레이거노믹스로도 불리는 경제 정책의 경우 감세, 규제철폐, 작은 정부라는 3개의 핵심 가치를 내걸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큰 정부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자유주의자였다. 하지만 국방예산 증액으로 경기를 부양시켰다는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는 레이건을 '군사적' 케인지언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갈리는데, 국방예산 증액만 놓고보면 레이건은 케인지언이 맞다. 그러나 가령 폴 볼커의 정책만 보더라도 케인지언들이 싫어하는 통화주의에 기반한 개념이었다. 레이건이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주력한 것이나 그가 큰 비중을 둔 공급 중심의 정책도 엄밀히 말하면 케인지언적인 접근은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가 케인지언이건 아니건 간에 중요한 것은 당시 말라죽어가던 미국의 경제를 살렸다는 것. 오죽하면 좌파 진영에서도 '레이건이 실제로 정책적으로 기여한 것은 없지만 낙관주의와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레토릭 측면에서 큰 일을 했다'고 보는 이들이 있을 정도.

그나마 레이건이 60% 득표를 넘기지 못한 데에는 1982년에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 당시 레이건이 너무 노골적으로 영국편을 들자 이에 반발한 히스패닉 탓이 좀 있다. 먼데일은 미네소타에서 간신히 4천표 차(0.18%)로 이겼는데 히스패닉이 없었다면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레이건은 미국 50개 주에서 모두 이길 뻔 했다 당시엔 공화당을 파란색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레이건은 "수영장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었다.[11]

이런 그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1986년에는 레이건의 3선을 노리고 대통령 출마 3번 이상을 금한 미국 수정 헌법 22조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하원에 제출되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었고 레이건 본인도 개헌에는 찬성하지만 자신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레이건 집권기는 고위공직자들의 만연한 부패, 범죄가 판치는 길거리로 얼룩져있기도 하였으며, 심각한 재정적자와 양극화, 러스트 벨트의 형성이 시작되는 등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집권 2기에는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의회와 특별조사위원회 등 6개의 수사기구가 백악관을 정조준했으며 레이건의 치매 전조 증상으로 국정장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현직 부통령인 조지 H. W. 부시는 공화당 차기 대선주자 경선에서도 당내 타 후보들에 밀려 부진하다가 역전승으로 후보지명을 거머쥔 것이었으며, 대선 본선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매사추세츠의 젊은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초반에 12%의 지지율 우세를 허용하는 등 고생 끝에 대통령이 되었다.


2.5.1. 암살 시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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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중에 암살 시도를 겪었다. 1981년 3월 30일 호텔에서 나서던 도중 존 힝클리 주니어가 레이건을 향해 독일제 22구경 RG-14 리볼버로 탄환을 6발 사격했다. 존 힝클리 주니어는 곧바로 시크릿 서비스 경호원들과 경찰관들에게 제압되고 [12] 레이건은 바로 차량에 옯겨졌는데, 직격하지는 않았지만 방탄차에 튕긴 총알에 맞았고 현장에 있던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와 시크릿 서비스 경호원 팀 매카시, 경찰관 토마스 델라한티 3명도 총상을 입었다.[13]

레이건의 부상이 확인되자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탄환 제거 수술을 받았다. 고령의 나이로 위험할 수 있던 상태였는데 탄환이 폐를 살짝 건드린 정도라 부상에서 회복해 테쿰세의 저주를 처음으로 깬 대통령이 되었다. 총격을 당한 다른 3명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제임스 브래디는 이마에 직격해 뇌가 파열되어 하반신 마비와 정신착란 증상으로 평생을 훨체어 신세로 살다가 2014년 8월 4일 74살 생일을 얼마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14] 회복 후 연설 도중에 총알이 빗나갔다며 농담을 할 정도로 담대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고령인 몸에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난 탓에 이 사건 이후에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한동안 산소통을 백악관에 상비할 정도였고 집무 중에 피를 토한 적도 있다. 고령에 마취를 동반한 수술이 치매 증세를 가속화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긴 암살미수를 일으킨 존 힝클리 주니어를 구속한 후 철저하게 조사했는데, 어이없게도 배후가 없는 건 물론이고 대통령을 살해하는 데 동기부여가 될만한 정치적 이유도 없었다. 단지 대통령을 저격하면 자신이 동경한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가 자기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15] 희대의 과대망상이자 관심종자. 조디 포스터가 미성년자 매춘부로 나온 영화 택시 드라이버[16]의 영향을 받은 듯. 원래라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었겠지만 중증 정신병자로 판명나서 처벌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완치 판정 시 석방이 가능한 무기한 치료감호를 선고했다.

2.6. 퇴임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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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공식석상에서 찍힌 마지막 사진
1996년 7월 당시 모습
2000년 2월 89세 생일 당시 아내 낸시와 함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으며, 퇴임 이후에는 각종 재단들을 세워 후원 활동을 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992년에는 연설 중에 반핵주의자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미 대통령 시절인 1985년에 대장암, 1987년에는 전립선암 수술을 각각 거뜬히 해냈으나, 1994년에 찾아온 알츠하이머 병은 그의 인격을 서서히 붕괴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미 1993년 들어 이를 짐작케 해 주는 전조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인의 82세 생일 파티에 참석한 마거릿 대처에게 똑같은 말을 하면서 계속 건배를 하거나, 같은 제스처를 계속 취하거나,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거나...[17]

친애하는 미국민 여러분!

나는 최근에 본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미국인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낸시와 나는 이 사실을 우리의 개인적인 비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예전에 낸시는 유방암을 앓은 적이 있었고 나는 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결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았기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암의 초기에 치료를 받았고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이 유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괜찮다고 느끼는 지금, 나는 신이 나에게 준 이 땅위에서의 나머지 인생을 지금까지 항상 해온 일들을 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나는 내 인생의 여정을 사랑하는 아내 낸시와 내 가족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나는 지지자들과 함께 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내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병이 점차 심해지면 가족들이 힘든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 낸시를 이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가 오면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굳게 맞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일할 수 있었던 큰 영광을 준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일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으로 나를 부를 때, 나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조국의 장래에 대한 영원한 희망을 가지고 떠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황혼기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앞날에는 항상 밝은 아침만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들, 신의 축복이 있길 기원합니다.


결국 레이건은 그 해 8월, 자신이 치매 진단을 받게 되었음을 자필 편지로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건의 말년은 여느 치매 환자와 같았고, 어찌 보면 더 심각한 증상까지 보였다. 워낙 고령에 정신적 문제를 수반하는 건강문제가 평소에도 있었던 탓에[18] 현대 미국 보수주의 진영과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임에도 생각보다 퇴임 후 활동은 적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치매 진단 직후 아내 낸시 레이건 여사는 남편의 지병을 보고 알츠하이머 연구 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 투병을 하며 가장 슬퍼했던 때는 더 이상 을 탈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을 때라고 한다. 생애 단락에서 나왔듯 그는 평소 승마가 취미여서 유년기를 일리노이 주의 드넓은 평원에서 말을 타면서 보냈고, 이후에도 틈틈이 말타기를 즐겼는데 더 이상 못 하게 되었으니...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19]

말년에 가서는 병세가 더 악화되어 거의 어린아이 수준의 인지능력으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본인미국 대통령이었던 것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 것은 물론 부인 낸시 여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아예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낸시 여사는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문안객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2001년 CNN <래리 킹 라이브>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내 남편은 사람들이 옛날의 레이건으로 기억해주길 바랄 것이다."고 할 정도면 상태가 꽤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3년에는 사망설이 나돈 적도 있었다.

2001년 1월 12일, 자택에서 골반뼈 골절로 물리치료를 받으며 90세 생일을 조용히 보냈는데, 전술한 래리 킹 라이브에서 낸시의 증언에 따르면 레이건은 90세답지 않게 머리카락과 피부만큼은 건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3년 12월 이후로는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깨어있는 때도 드문 상태일 정도로 병세도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나중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낸시 여사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2004년 여름 임종 직전에는 낸시와 눈을 마주치며 교감한 후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로널드 윌슨 레이건. 전직 유명 영화배우 출신으로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최고령의 나이로 올랐지만 옛 미국이 숭상했던 전통적인 가치에 뿌리를 둔 젊은 낙관주의로 가득찼던 인물. 그가 어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그의 집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 2004년 6월 6일,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한 뉴욕 타임스 기사.


이후 2004년 6월 5일, 자택에서 만 93세 4개월을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기준으로는 존 애덤스 2대 대통령을 제치고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였다.[20] 생전에는 장로회 신자였지만, 장례식은 미국 워싱턴 국립 성공회 성당에서 치뤄졌다.

그의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해 이제껏 낙태를 결사 반대해 온 레이건 측이 냉큼 태아를 연구재료로 이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마이클 무어가 이것을 비꼰 바 있다.[21] 다만,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조지 W. 부시 측은 이를 반대했는데, 이로 인해 낸시 레이건과 두고두고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는 비화가 있다. 그녀는 남편 레이건의 치매 간병을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손수 도맡은 것으로 유명했다.

미국의 최고령 전직 영부인이었던 낸시 레이건도 장수하였다. 남편 사후에는 크게 언론에 노출되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다 2016년 3월 6일, 94세를 일기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숨졌다.
[1] 청년 시절 딕슨의 로웰 파크에서 인명구조대로 일하면서 6년간 총 77명의 사람을 구했는데,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도 자신이 당시 사람들을 구조한 기억은 자랑스럽게 회고했다고 한다.[2] 경제학, 사회학 복수전공이었는데 학점 평균이 C였다고 한다. 유레카 대학교는 레이건을 자교 홍보용으로 잘 써먹고 있다.[3] 유일한 예외라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B급 반공영화 《전쟁 포로》 정도이며, 레이건 DVD 박스셋이 미국에서 나온 적이 있는데 주연작이 한 두개 밖에 없었을 정도다.[4]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 대신 캐스팅 될 뻔도 했었다. 만약 캐스팅되었더라면 대통령 레이건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5] 배우 시절의 레이건을 단순히 삼류배우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 동료 영화인들을 휘어 잡을만한 정치력과 언변이 됐다는 소리다.[6] 민주당의 정치적 성향은 트루먼이 퇴임한 이후에 많이 좌경화되었다.[7] 연설문은 레이건 본인이 쓴 것이었다. 당시 레이건은 골드워터의 지지연설을 하는 유일한 조건으로 "연설문에 간섭하지 마시오"를 요구했다. 한마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다 하겠다고 한 것.[8] 팻 브라운의 아들인 제리 브라운은 로널드 레이건의 두 번의 주지사 임기가 끝난 뒤에 34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임했다. 그 후 다른 일을 하다가 2011년에 다시 49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임했다.[9] 현역 대통령에게 경선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다.[10] 그래서 극단적인 강경파도 아니었던 닉슨도 집권 2기의 레이건이 지나치게 소련에 유화적이라고 레이건을 비판하기도 했다.[11] 공화당이 적색, 민주당이 청색으로 정착된 건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부터다. 그전까지는 공화당을 청색, 민주당을 적색으로 표시했는데, 레이건 행정부 때부터 언론에서 공화당을 적색, 민주당을 청색으로 표시하기 시작했고 2000년 대선 때 미국의 언론사들이 어떠한 합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색상 표기를 일치시켰던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12] 당시에는 힝클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망상으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입막음용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둘러싸고 경계해야 했다.[13] 매카시 요원은 레이건 대통령이 방탄차 안으로 무사히 대피할 수 있도록 레이건을 몸으로 가렸는데, 이는 전세계에서도 몇 안되는 근접 경호사례로 남아있다. 영상에서 회색 정장을 입고 있다가 총맞고 그 충격으로 튕겨져나갔다가 바닥에 쓰러져 부들거리는 경호원으로 시크릿 서비스 경호요원들은 보통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존본능을 억제하고 경호대상을 지키도록 훈련받지만 아무리 숙달된 특수 요원들이라도 인간인 이상 총이 날아오는등의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몸을 웅크려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거나 피하기 마련이다. 총성이 울린 직후 힝클리가 레이건을 마음놓고 저격할 수 있을 만큼이나 전방의 경호 인력들이 다 비켜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런 상황에서도 생존본능을 억누르며 임무에 충실한 것은 초인이 아닌 이상 힘들다.[14]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총기 규제법안이 빌 클린턴 정권에서 통과되는데, 통칭 '브래디 법'이라고 부른다.[15] 훗날 2013년 조디 포스터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셈이 되버렸다.[16]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 니로 분)은 미성년자 매춘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 분)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편, 사회에 대한 분노와 상류층에 대한 열폭,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던 여인 베시가 자기를 차버린 것에 대한 원망 등의 이유로 베시가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을 저격하려다 실패한다. 보면 알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죽이려고 한 거랑 조디 포스터랑 딱히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이후 트래비스는 아이리스가 있는 매춘굴에 쳐들어가 갱단들을 죽이고 아이리스를 구출해 본의아니게 영웅이 되긴 하지만, 정작 아이리스는 매춘부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고 트래비스를 사랑한다는 암시는 영화 어디에도 없다.[17] 그러나 일부 의견에 따르면 재임 중이던 1987년에도 일관성 없는 말을 하거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1986년 ~ 1988년 쯤부터 알츠하이머가 시작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8] 그의 치매 촉진에는 가족력도 한몫했는데 모친 넬은 1962년 치매를 앓다 숨졌고, 형 닐(1908 ~ 1996)도 1993년 치매 진단을 받았다.[19] 사실 퇴임 후인 1989년에 멕시코의 친구 목장에서 말타기를 하다 낙마를 하여 머리를 다쳐 경막외 출혈로 응급 뇌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20] 이후 최장수는 간발의 차이로 2006년 겨울에 93세 5개월로 사망한 전전임자 제럴드 포드에게 넘어갔다가 후임자 아버지 부시가 2017년, 이 기록을 넘겼다(확실한 시기는 2018년 6월 12일로, 이 날은 아버지 부시의 생일. 이후 아버지 부시는 같은 해 11월 30일에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전임자 지미 카터가 2019년 생일(10월 1일)을 보내어 95세가 된 관계로 레이건은 4번째로 장수한 미국 대통령으로 밀려났다. 5번째는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참고로 90대 이상을 산 실제 2번째 미국 대통령은 후버.[21] 무어 曰 "태아고 나발이고가 문제냐? 기퍼(레이건의 별명)가 죽게 생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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