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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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탄(李坦),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소현세자 이왕의 증손으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이며,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 이혼의 장남이 밀풍군(密豊君)이다.
2. 생애[편집]
현종 때 경안군이 복권된 이후, 효종의 후손인 현종과 숙종, 경종은 물론 영조까지도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왕실에서 상당히 잘해주었다. 석견의 두 아들은 한때 역모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지만 풀려났고, 경종 실록에서 〈임창군 졸기〉에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향으로 석견의 장손인 밀풍군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며 옹정 원년 사은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오는등 꽃길만 걸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을 때, 반란의 주동 세력이 밀풍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이 밀풍군을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
사실 밀풍군의 위치가 정말 애매하긴 했다. 숙종은 소현세자의 자손들을 복권했으므로, 경종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족보상 같은 항렬이라곤 하지만 어쨌든 소현세자의 장손으로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던 밀풍군이 양자로 입적되거나, 직접 임금이 되지는 못해도 맏아들이 경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흥선대원군 두갑자 전에 살아생전 '밀풍대원군'이 될 수도 있었다. 밀풍군은 경종과는 열 살, 영조와는 네 살 차이였으며, 경종이 즉위한 1720년 당시 스물셋이었다. 그리고 결국 8년 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면서 "영조는 가짜고 밀풍군이 진정한 경종의 양자로 대를 이을 자손이다!"라는 주장이 터져나오는 것.
그러나 밀풍군은 반란군이 추대했다는 점 외에는 스스로 역모를 꾀할 의사도 없었기에, 사실상 본인도 이인좌의 난에 휘말린 거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영조 역시 밀풍군이 억울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 이후로 신하들이 밀풍군은 물론 그의 일가를 모조리 탈탈 털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댔지만, 영조는 목이 메어 하교를 못 할 정도로 슬피 울며 상소를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떠밀리듯이 밀풍군에게 자진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처(自處)하는 것으로 써 내도록 하라." 하고,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법(法)이란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법이고 나 한 사람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마는 옛날 제왕(帝王)이 이러한 곳에 대해 보전할 수 있는데도 잘 처리하지 못한 경우를 두루 보고서 마음속으로 늘 개탄해 왔다. 나의 덕(德)이 적은 것으로 인해 친족(親族)에게 돈목(敦睦)하는 교화가 나라에 행해지지 아니하여 흉적(凶賊)으로 하여금 구실로 삼게 만들었으니, 통한(痛恨)스런 나머지 목이 메어 능히 다 유시(諭示)할 수가 없다."
하고, 이탄(李坦)이 자진(自盡)할 때 독촉하지 말며 비록 검험(檢驗)하는 것이 구례(舊例)라 할지라도 단지 부관(部官)·의생(醫生)·부리(府吏)만 들어가 검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영조 5년 3월 28일 기사
밀풍군은 그렇게 서른 둘의 나이로 자살했고, 그의 막내동생 밀운군(密雲君)마저 나중에 또 다른 역모[5] 에 연루되면서 죽었다. 자세한 내용은 밀운군 문서 참조. 이 때가 소현세자계 후손들의 최대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 임창군이 6남 5녀를, 본인도 5남 4녀를 둔 자식부자였다는 점이다.
3. 복권[편집]
1864년(고종 1년 7월 11일 죄명 삭제, 18일 관작 회복)에 복권되었다.
4. 가족 관계[편집]
- 정부인 : 군부인 청풍 김씨(郡夫人 淸風 金氏)
- 계부인 : 군부인 임천조씨(郡夫人 林川 趙氏)
- 장남 : 이관석(李觀錫)
- 며느리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신사적(申思廸)의딸
- 손자 : 이복형(李復亨)
- 손자 : 이득형(李得亨)
- 손자 : 이덕형(李德亨)
- 차남 : 상원군 이공(商原君 李糿, 1715 ~ 1733) - 연령군에게 출계된 뒤 공(糿)이라는 이름을 받음. 사후 아버지와 형이 이인좌의 난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영조에 의해 파양됨
- 3남 : 이항석(李恒錫) - 밀원군 이용(密原君 李墉)에게 양자로 출계
- 4남 : 이겸석(李謙錫)
- 며느리 : 김해 허씨(金海 許氏) - 허지(許沚)의 딸
- 5남 : 이익석(李益錫)
- 며느리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지(沈址)의 딸
- 장녀 : 조기명(趙虁命)에게 출가
- 차녀 : 송유(宋瑜)에게 출가
- 3녀 : 임도원(林度遠)에게 출가
- 4녀 : 김상필(金商弼)에게 출가
4.1. 후손[편집]
밀풍군의 차남 이진석(李晉錫)은[6]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기 전 경종의 양자입적으로 거론됐다가[7] 최종적으로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상원군(商原君)에 봉해졌지만, 후손이 없었기에 파양당했다고 한다.[8][9]
삼남 이항석(李恒錫)은 밀풍군의 동생, 즉 숙부인 밀원정 이용(密原正 李墉)의 양자로 갔는데 이항석의 증손자 이명섭(李明燮)과 이명혁(李明赫)은 철종 시기 또 역모에 연관되어 다시 한 번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 했다. 이명섭, 이명혁의 동생인 이교응(李敎應)의 손자 이한용(李漢鎔)은 철종의 형 영평군의 손자로 입적되어 풍선군으로 봉해졌다.[10]
5. 대중매체[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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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호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유래했으며 초직은 밀풍정(密豊正)이었다가 도정을 거쳐 1710년에 군(君)으로 봉해졌다.[2] 1864년 죄명 삭제, 18일 관작 회복.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 후술.[3]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 세력에게 추대받았다.[4] 소현세자파 3대손.[5] 나주 괘서 사건으로 죽은 소론 준론 심정연(沈鼎衍)의 조카인 심내복(沈來復)이 연좌제로 유배되어 있던 중 역모를 꾀하였는데 이때 밀운군을 추대하기로 했었다. #[6] 이상대(李尙大)로도 알려져 있다.[7] 촌수를 따지면 경종과는 9촌 숙부 - 조카 사이다.[8] 간혹 아버지 밀풍군이 역모에 연루된 것 때문에 파양됐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데, 실제로 신하들이 그렇게 하자고 얘기를 했으나 영조가 따르지 않았다. # 결국 상원군이 죽은 1주일 후에야 후손을 다시 세우라는 얘기가 나온다. # 다만, 진짜 후손이 없어서 문제였다면, 상원군 밑으로 다른 양자를 들이면 되는 것을 굳이 파양한 것을 보면 밀풍군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기도 하다.[9] 1874년 판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을 보면, 상원군의 사후 양자로 덕흥대원군의 9대손인 이철존(李喆存)을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하지만 사후에도 군(君)이라는 작위를 추증받지 못함). 그렇지만 이철존에게도 아들이 없어서 의안대군(義安大君)의 17대손인 이기중(李杞重, 족보 명은 이하익(李夏翼))을 양손자로 들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10] 여담으로 풍선군은 친자식을 얻지 못해 덕흥대원군파 출신 청풍군을 양자를 삼고 청풍군은 친아들을 낳게 된다. 청풍군의 손자가 호텔 그랜트힐튼서울 회장 이우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