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정치인)/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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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긍정적 평가
1.2. 부정적 평가




1. 개요[편집]


박지현의 정치 관련 행보에 대한 평가 문서를 서술한 문서.


1.1. 긍정적 평가[편집]


  • 조선일보는 비대위원장 사퇴 직후 그녀의 정치활동을 '화제와 논란 잇따른 80일'이라고 평했다. 또한 '2030 여성들 정치 참여 불러온 촉매제'였다는 여성계의 평가도 함께 전했다. 해당 기사
  • 여성신문권인숙 의원의 대선 토론회를 인용해서 박지현이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왔다고 긍정적으로 평했다. 해당 기사

  • 더불어민주당에 1020대 여성의 입당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 즉 말하자면 기존의 4050대 위주의 더불어민주당에 1020대 여성이란 새로운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즉 어찌 보면 민주당의 젊은 피 수혈에 어느정도 도움을 줬다는 뜻.[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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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선전의 공신으로 꼽힌다.(출처 : 민주연구원 6.1 지방선거 평가)

정치혐오더불어민주당의 20대 대선 결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박원순 사망 사건오거돈 성추행 사건으로 치러지게 된 2021년 재보궐선거 이후 1020대 여성 내부에 무당층이 늘어났고대표적인 예시(2021.12), 이들이 박지현 영입 다음엔 결집한 것이다.[2]


1.2. 부정적 평가[편집]


  • 김종인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5월 31일 박지현을 "젊은 사람으로서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 상당히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 그러나 이후 김종인은 6월 8일 인터뷰에서 박지현이 비교적 초기에는 잘했으나 막판 586에 대한 발언으로 분란을 야기했다며 선거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 그 후 박지현이 당규 상 불가능한 당대표 출마권을 달라며 '길거리 출마'를 감행한 것에 대해 무모하다고 평가했다. #

  •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박지현이 내세웠던 방향과 취지를 응원한다고 밝히면서도, 86용퇴론을 꺼낸 시기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

  •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원래 정치인이 아닌데, 어떻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자다 일어나서 제1야당의 당대표가 된 거 아니겠느냐"고 평가했다.

  •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은 당의 불허 결정에도 당 대표 선거 출마를 강행하려는 박지현 전 위원장에 대해 "과할지 모르겠지만 어린 애가 떼쓰는 듯하다."라고 평가했다.

  •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박지현은 청년 정치인으로서 같은 갈치를 잡아먹는 '갈치 정치'를 하면 안 된다"라며 "동료를 향해 공격하거나 비판함으로써 자기의 어떤 자기가 생존력을 높여가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구태정치'"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서 "출마에 대한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박지현의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했다.


  •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는 "비대위원장이라는 힘이 주어졌을 때 못했던 사람에게 다음 기회는 없다." 고 평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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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현은 지방선거 후보까지 다 선출한 상황에서 '586세대 용퇴론을 주장하며 민주당 기성 정치인 전체를 청산 대상으로 두는 도발을 했다. 지방선거는 애초에 대선과 총선에 비해 중도층, 속칭 정치 저관여층들의 참여가 매우 저조한 선거라 콘크리트 지지층 결집이 매우 중요한데,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트롤링을 해버린 것이다.

발언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해당 주장이 나온 게 이미 후보가 다 결정된 지방선거 7일 전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여론조사상 586용퇴론 자체에 대해 (사실상) 박지현의 주장인 일괄 퇴진에 동의하는 사람이 34%, 선별적 퇴진에 동의하는 사람이 37%, 전면 반대가 15%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방선거 이후 등으로 발언 타이밍을 적절히 조절했다면 지지받았을 수도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지방선거 7일 전에 언급하니 당원들에게 "기껏 뽑은 후보들 다 사퇴라도 하란 말이냐"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큰 이유로 봐도 무방하다. 민주당 지지자 입장에선 다 된 밥에 잿밥을 뿌린 격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졌다.

또한 국제정세, 경제, 부동산 등 굵직한 의제에 대한 입장은 전무하고, 성범죄 및 페미니즘과 차별금지법 관련 얘기에서 열변을 토하는 박지현의 정치적 행보는 1020대 여성 진보층의 민심과는 가까울지는 몰라도, 더불어민주당의 콘크리트인 4050대의 민심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영입 인사는 특정 의제에만 집중해도 상관없긴 하나[3], 문제는 지방선거 전후 당시 박지현은 윤호중과 같이 공동 비대위원장을 하던 사람이였다는 것이다. 즉,정당의 대표로 당의 공천은 물론 선거전 여론전을 주도해야하는 인물이 의원들의 입장을 조율해 나가는 리더십을 보이기는커녕 본인 사상에 맞는 의제에만 선택적 관심을 보이고 당내분란만 초래한 것이다.

이렇듯 박지현 비대위원장은 안그래도 대선 패배,윤석열 취임으로 사기가 떨어진 지지자들이 결집하는게 불가능할 수준의 내부총질을 했다. 그 사이 취임한지 한달도 채 안된 윤석열이랑 이준석 당대표의 국민의힘은 정말 일시적이였지만, 어찌 됐든 단일된 모습으로 허니문 정국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지지율도 폭등했다.

물론 이런 허니문 상황이 모두 박지현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검찰개혁법 강행과 윤석열 취임 여파로 국민의힘 지지율이 상승하고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은 하락하는 시점에서 박지현의 역할은 이를 최대한 수습하고 지지자들이 정신줄 부여잡고 투표장에 나올 수 있도록 당이 일치된 모습을 보여줬어야 됐다.

이게 가장 시급한 여론 관리였음에도 불과하고 박지현은 검찰개혁법 통과 전후에 계속해서 반대한다, 민생을 신경써야 한다면서 당론에 충돌하면서 어그로 끌고, 이미 후보가 다 결정난 단체장 후보들을 두고, 586 용퇴론 운운하며 당 코어 지지층 결집을 방해하고, 공천관리도 제대로 못해서 노영민을 공천해야 하네 마네, 이재명이 나오네 마네, 서울시장은 누굴 공천하네를 가지고 거의 한달을 허송세월 날려버렸다..

이때 선거패배는 사실상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거일 이틀 전 윤호중 등 다른 지도부와 합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사과를 하면서 윤호중이랑 갈등을 일으킨건 덤이다.

결국 지선 패배후 결말은 처참했다.비대위원장 사퇴 후 박지현은 당규 상 불가능한 당대표 출마 선언을 강행하며 사실상 당규에 예외를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는데, 이때 박지현을 도와주려는 의원이 현역 의원 169명 중 단 한 명도 없었다. # 지방선거 패배 원인이 이재명에게 있다며 이재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박지현을 옹호하던 민주당 내 비이재명 의원들도 박지현만큼은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여성운동가 출신 정치인인 정춘숙, 권인숙, 김상희, 남인순도 박지현의 발언에 옹호를 했을지언정 지지를 한 적도 없단 뜻이다.

사실 박지현은 이광재의 영입 및 이재명의 지지를 통해 정치에 입문했고, 대항마였던 이준석보다도 훨씬 좋은 위치에서 시작했으나[4] 위의 요소들 때문에 자신이 가진 이점들을[5] 모조리 까먹었다. 당대표 출마가 무산되자 현재는 본인이 이재명과 그 계파에게 배신당했다고 주장하며 비이재명으로 완전히 돌아섰다.[6] 물론 본인은 정치를 계속하겠다고 했으나, 정치 인생이 더욱 험난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된 것이다.

사실 냉정하게 보자면 박지현의 정치 입문 과정은 엄연히 낙하산이였다. 물론 당시 국민의힘 당대표였던 이준석도 박근혜 키즈로 시작한 정치인임을 감안하면 그 자체는 문제가 안되지만, 통상적인 정치 경로로 정치에 입문한 케이스보다 능력이 더 좋다는 걸 입증하는 것[7]과 기존 현역 의원들과 관계 유지가 필요한 건 정치의 불문율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교섭단체 당대표 같은 중책을 맡을 게 아니라 임정엽처럼 도의원부터 시작해 체급을 서서히 올려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낙하산 인사에서 보듯이 사회생활 자체에서 통하는 불문율이라 봐야 된다. 또한 비단 정당이 아니라도, 조직 개혁은 조직 구성원과 관계를 유지해가며 밀고 당겨가며 개혁해나가는 게 순리다. 설령 자신이 낙하산 인사가 아니여도 본인이 속한 조직에서 어느정도 탁월한 능력을 입증했다면 몰라도, 실력을 입증하지도 않고, 단지 십~수십 년 몸담은 구성원들을 싸잡아서 '시대가 바뀌었으니 너희는 물러나라'고 도발하기만 한다면 미움을 사거나 심지어 축출당할 가능성이 높다.

박지현은 이러한 불문율을 노골적으로 어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추적단불꽃 등 여성인권 활동과 기자 활동이[8] 플러스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 플러스도 전술한 실책 때문에 전부 까먹은 것이다.[9]

아니면 하다못해 장경태[10]처럼 자신의 고향인 원주시[11]에서 기반을 다지는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였다면[12] 권리당원들의 반감은 커졌더라도 정치 생명이 끊어지진 않았을 것이다.[13]

하지만 박지현은 외부의 지지[14]만 믿고[15], 성과도 보여주지 않은 가운데[16] 기존 지도부와 권리당원들의 반감을 살 행보만을 반복했고, 이로 인해 민주당의 기존 지도부와 권리당원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사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도 박지현이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차기 총선에서의 비례대표 또는 전술한 원주시 갑의 재보궐 공천은 따둔 당상이었다고 평가한다. 공동비대위원장이라는 큰 감투를 씌워줬기도 하고, 별 문제가 없었는데 안 챙겨주면 기꺼이 민주당에 표를 던진 1020대 여성층을 토사구팽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박지현은 1020 여성을 어느 정도 결집시킨 점과 이준석의 대항마로 내세울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한 기대가 일부 있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기반도 다지지 않은 상태로 더불어민주당 현역 의원 전체를 청산 대상으로 두는 등의 무모한 행태를 보인 탓에 본인의 경솔한 행보로 인해 정치적 생명을 끊어먹고, 청년 정치의 어두운 면만 보여준 정치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전락한 것이다.

박지현이 그렇게 정치 인생을 끝냈음에도 1020 여성은 민주당에서 전혀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올 명분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17] 박지현으로 인해 새로 유입된[18] 1020대 여성들은 극소수 초강성 레디컬 성향의 박지현 콘크리트 지지층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박지현을 손절하고 이재명으로 결집했다(...). 한편 국민의힘의 경우는 이준석이 윤석열에 의해 손절당하자 새로 유입된 1020대 남성들이 윤석열이 아니라 무당층으로 빠지거나, 홍준표, 오세훈, 유승민 등 다른 비윤계 인물로 분산된 것과는 대비되는 상황이다.[19]

이후 서대문 갑에 정치기반을 마련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곳의 터줏대감이던 후농 김상현의 배우자 정희원 여사가 격노했다는 후문이 돌고, 심지어는 유시민에게까지 저격을 당할 정도로 평판이 급락했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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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작 8회 지선 이후 박지현의 행보에 실망한 2030대 여성당원들은 박지현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2] 실제로 위에 언급된 민주연구원 결과보고서에서 윤석열 후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과 같이 2030대 여성의 결집요인으로 박지현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3] 21대 총선 때 비례대표로 당선된 양이원영이 바로 그 예시다.[4] 당시 이준석윤석열 등 당내 원로들과 사이가 벌어진 상황이었고, 단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여준 일정부분의 성과 때문에 본격적인 갈등의 서막이 오르지 않았을 뿐이다.[5] 이준석보다 더 유리한 상황, 추적단불꽃이란 업적 등.[6] 이 선택도 악수였는데, 대놓고 비명 행보를 한 결과 더 지지층의 비토를 사게 되었다. 그로 인해 최소한의 기반도 모두 사라졌는데 그제야 진짜 정치 인생이 끝났다는걸 깨달았는지 다시 친명 행세를 하기 위해 단식을 하고 있는 이재명에게 가서 투쟁의 동지라느니 회복식을 대접하느니 하며 눈물을 보여 빈축을 샀다.[7] 장경태정춘숙이 그 예시다. 둘 다 동대문구 을, 용인시 병에서 당선되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8] 실제로 민주당엔 여성운동을 하다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가 상당수 있는데, 이 중 정춘숙, 남인순의 경우 아예 지역구에 입성했고, 그 중 남인순송파구 병에서 재선을 했다. 또한 이를 제외하고도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는 케이스도 있다. 그리고 기자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도 영등포구 을에서 재선을 한 신경민이나 구로구 을에서 3선을 한 박영선 등 사례가 많다.[9] 이는 민주당 지지층이 많은 커뮤니티의 박지현에 대한 평가 변화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대선 직후론 트위터와 여성시대는 물론 클리앙에서도 "이준석과 다르게 훨씬 낫다 "란 말이 만장일치로 나올 정도로 매우 호의적이였지만, 지방선거 전후로는 클리앙 등 친민주당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영구제명을 바라는 수준이고, 심지어 박지현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여성시대조차도 박지현의 행보를 어느정도 비판한다는 걸 생각하면 된다. 심지어 트위터에서조차도 박지현에 대한 옹호와 비판이 매우 엇갈리는 정도다.[10] 장경태는 전남 순천 출신이고, 정계 입문을 선거운동원으로 시작했다. 동대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동대문구 을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2022년 8월 28일 최고위원에도 입성했다.[11] 자신의 고향이자 이광재 국회사무총장의 전 지역구인 원주시 갑이 포함된 곳으로, 박지현은 이광재와 친분이 있는데다 당시 원주시 갑 후보였던 원창묵이 3선 원주시장을 했음에도 시정 평가가 그다지 안 좋았기에 박지현은 해당 지역에 경선을 통해 들어갈 명분이 상당수 있었다. 따라서 박지현이 마음만 먹었으면 출마가 가능했을 것이다.[12] 실제로 박주선, 이용호 같은 경우 민주당에서 찍혔음에도 개인의 이름값으로
[[무소속|
무소속
]]
출마해 생환하거나 유의미한 득표를 얻었던 전적 때문에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둘은 20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는 결별했지만.
[13] 실제로 조경태가 바로 그 예시인데, 실제로 그도 박지현처럼 20대 중후반에 처음 정치에 입문해서 15대 총선 때 당시 TK급 사지였던 사하구 갑에서 15.5%를 받아서 파란을 일으키더니 지역구를 사하구 을로 옮긴 이후 치른 17대 총선에선 물론 민주당이 역대급 참패를 했던 18대 총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고, 19대 총선에선 새누리당 후보를 상대로 전 동네에서 이기면서 3당 합당 이후 영남에서 첫 3선을 한 민주당 소속 의원이란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가치관과 의견 차이로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친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적어도 앞에서 선술했듯이 3당 합당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 영남에서 3선을 한 민주당 국회의원이란 어마어마한 커리어랑 적어도 사하구 을에선 "사하 다이묘"라 불릴 정도로 지역구 관리를 했다는 점 때문에 적어도 더불어민주당 초반까진 버텼다. 비록 그는 친문과 사이가 벌어져서 새누리당으로 갔지만, 거기서도 20대 총선21대 총선에서 연달아 당선되어서 결국 5선이 되었고, 그 사이에 새누리당 기획재정위원장-자유한국당 최고위원 등 굵직굵직한 직위들을 거치면서 2022년 현재 국민의힘에서 당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중진급 정치인이 되었다.[14] 박지현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포함한 일부 1020대 여성들이다. 원래는 대다수의 1020대 여성의 지지는 물론 심지어 1020대 남성 중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경우엔 박지현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저 위에 언급한 트롤링을 한 바람에 대다수가 떠나갔다. 개딸과 냥아들 모두 박지현 퇴진 시위를 주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15] 하다못해 친윤과 사이가 벌어진 이준석조차도 당 내에도 의외로 정치적 기반이 있었다. 이는 이준석이 당대표가 되었던 전당대회의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이준석은 당원투표에서도 1위인 나경원과 불과 3%p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사실 이준석의 PPAT 등 일부 공천개혁안들이 성공적으로 반영된 이유엔 당 내의 정치적 기반도 꽤 있었다.[16] 비록 이준석도 친윤에 의해 토사구팽을 당했고 그전에도 친윤 원로들과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는 4.7 재보궐선거제20대 대통령 선거의 승장이란 성과라도 있었다. 사실 그렇기에 대선 승리 후 대선 막판의 트롤링 때문에 이준석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의 세대포위론을 지지하는 당내 정치인들도 많았던 것이기도 하고.[17] 이는 2023년 하반기 보궐선거에서 분명히 입증되었다.[18] 지금 보면 박지현 영입이 주된 원인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의 성별 갈라치기 전략과 윤석열 후보의 선거운동 행태에 대한 반발심리였다.[19] 이준석은 당에서 손절쳤기 때문에 1020대 남성 지지층이 국민의힘을 떠났던 상황이고, 박지현은 본인의 논란만으로 1020 여성 지지층이 더불어민주당으로 견고해졌다.물론 여러 논란을 자초했다 해서 박지현을 토사구팽 시키진 않았다.[20] 지방선거 패배 후 근신하거나 조용한 활동으로 지지층 결집을 해줬다면, 당선 유력권 비례대표 제안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차라리 원주에서 조용히 기반을 다지면서 적당히 정치활동을 했다면 지역위원장이나 당직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줬겠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원주 갑이 아닌 서대문구로 간다는 것 자체로도 재기의 가능성을 박살낸 상황이다.[21] 원주시8회 지선 강원도에서 이광재 후보가 승리한 몇 안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기반만 잘닦으면 원주시 갑 공천 기회를 받을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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